부르고뉴 공국 Duché de Bourgogne | ||
국기 | 국장 | |
1032년 ~ 1477년 | ||
위치 | 네덜란드, 프랑스 동부 | |
수도 | 디종, 브뤼허, 헨트 | |
정치체제 | 봉건제 | |
국가원수 | 공작 | |
언어 | 프랑스어, 라틴어, 네덜란드어 | |
민족 | 프랑스인, 부르고뉴인 네덜란드인, 왈롱인 독일인 | |
종교 | 가톨릭 | |
주요사건 | 1032년 건국 1474 ~ 1477년 부르고뉴 전쟁 1477년 용담공 샤를의 죽음, 동년 공국 영토 분할 | |
통화 | XX | |
성립 이전 |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 | |
멸망 이후 |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군주국으로 분할 |
목차
1 개요
부르군디 공국, 프랑스식으론 부르고뉴, 영국식으로 버건디 공국이라고 한다. 부르군트족의 부르군트 왕국에서 유래되었다. 중세, 근세 시대에 프랑스 동부 지역에 위치했던 공국. 카페 왕조 초기부터 왕자령(appanage)으로서 프랑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중세 프랑스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발루아 왕조 성립[1] 이후에는 당시 유럽의 경제 중심지였던 플랑드르 일대를 상속받기도 했으며, 백년전쟁 도중 자치권을 확보한 뒤부터는 자국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으나 용담공 샤를(Charles the bold)의 전사를 끝으로 가문이 단절되면서 그 영토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게 합병된다.
2 역사
2.1 카페-부르고뉴 공국
이 부르고뉴 공국의 공위는 로베르 가문[2]에게 넘어갔다가 982년 외드 앙리 대공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외드 앙리의 양자였던 오토 빌헬름과 외드 앙리의 조카인 프랑스왕 로베르 2세 사이에서 계승분쟁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승리한 것은 로베르 왕이었고,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령으로 흡수되었다가 로베르의 뒤를 이은 앙리 1세가 자신의 동생 로베르에게 왕자령으로 수여함으로서 약 300년 간 존속하게되는 카페 왕조 부르고뉴 공국이 탄생한다.
이때 왕자령(appanage)은 중세시대 프랑스 왕이 부족한 행정력을 가지고 왕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고 봉건 봉신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왕자들에게 영지를 수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왕자령은 후계가 단절될 때는 다시 영지가 왕령지로 넘어가는 구조를 가졌으며 전반적으로 프랑스 왕의 통치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부르고뉴 공국 역시 카페 왕조 시기 대표적인 왕자령으로서 국왕의 통치에 협력했는데, 이는 부뱅 전투, 콜트레이크 전투 등 카페 왕조 시기 치러진 주요한 전투에 종군해 프랑스군의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확인이 된다.
이처럼 카페 왕조는 국왕에 협력하며 별 탈 없이 300년 넘게 부르고뉴의 공위를 지켰으나, 1361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15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면서 결국 단절된다. 한편 비슷한 시기 프랑스 왕실 본가의 카페 왕조도 샤를 4세의 요절을 끝으로 직계가 단절되면서 발루아 백작 필리프[3]가 필리프 6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발루아 왕조의 막이 오른다. 신생 발루아 왕조는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고 부르고뉴 공국의 계승분쟁에 개입, 모계 계승과 왕의 권위를 앞세워 상속권을 주장하면서 장 2세의 막내아들인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앉힌다. 바야흐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유럽사에 등장한 것이다.
2.2 발루아-부르고뉴 공국
발루아-부르고뉴 왕조는 개창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바로 부르고뉴 공 필리프 2세 (용담공 필리프)가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 3세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인데, 이로서 용담공 필리프는 자신의 세력권을 저지대 지역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4] 당시 유럽의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저지대의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이후 부르고뉴 공국이 부흥하게 되는 가장 큰 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용담공의 치세에 분란의 씨앗도 함께 싹텄는데, 바로 그것은 당시 정신병자였던 프랑스 왕 샤를 6세 대신 프랑스를 통치하는 섭정자리를 둘러싼 다툼이었다.[5] 당시 용담공은 자신을 따르는 부르고뉴파(Burgundian Party)의 지지를 받으며 오를레앙 공 루이와 그를 따르는 아르마냑파(Armaganc Party)와 대립했는데, 이는 백년전쟁이 재개되고 용담공의 사후 그의 작위를 아들 용맹공 장이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그러던 중 오를레앙 공 루이가 부르고뉴파에게 암살되고, 용맹공은 또 아르마냑파의 지지를 받는 샤를 도팽(후일의 샤를 7세)에게 암살되면서 갈등은 점점 격화, 결국 부르고뉴파는 당시 전쟁중이었던 잉글랜드와 결탁해 프랑스 왕실을 배신하기에 이른다.
부르고뉴의 지지를 얻은 잉글랜드군은 파리까지 함락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샤를 6세로부터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는 트루아 조약[6]까지 조인받는다. 그러나 헨리 5세가 급사하고 그 유명한 잔 다르크의 등장과 함께 기세를 되찾은 프랑스군이 파타이 전투를 기점으로 전세를 역전시킨다. 이에 부르고뉴파는 잔 다르크를 영국에 넘겨 처형시키는 식으로 대응을 했으나 이미 사실상 결정된 전세를 뒤집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막 샤를 7세 역시 왕위에 오른 상태로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고, 이렇게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에 따라, 휴전 회담 도중 교묘하게 잉글랜드 측을 배제시킨 체로 부르고뉴-프랑스 양국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라스 조약에 따라,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는 대신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국에 대한 봉건 의무에서 해방되면서 사실상 독립국으로 거듭났고 볼로뉴, 베르망두아 등에서의 지배권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역시 잉글랜드에게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고 마침내 1453년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 세력을 축출함으로서 백년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이후 부르고뉴 공국은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기조로 삼았고, 이는 아라스 조약을 체결한 선량공 필리프(필리프 3세)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용담공 샤를 시기에도 유지되었다.
2.3 독립왕국으로써의 자립시도와 몰락
용담공은 행정기관과 법원을 개편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용병을 고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총병과 포병을 양성하는 군제개혁까지 이루었다. 용담공의 치세에 중세 후반기에서 근세의 시점에서 브루고뉴가 독립국으로서 거의 부활할 단계까지 갔었다. 로타르 왕국이 있던 지역을 중부 왕국[7]으로 부르는데, 이것은 발루아 왕가의 왕자로서 부르고뉴 공작(왕자령으로서 받았다)이었던 필리프 3세(선량공)과 샤를(용담공)의 노력으로서 백년전쟁 후반기에 필리프 3세와 프랑스왕 샤를 7세가 아라스에서 필리프의 영국지원을 중지시킨 대가로 샤를이 필리프에게 사실상의 독립을 허용한 일에서부터 이루어 지기 시작하여 저지대(현재의 베네룩스 3국)와 부르고뉴 백작령(현재의 프랑스 영토인 프랑쉬-콩테 지역)을 정복하면서 옛 중부 왕국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두 발루아 왕가 출신 부르고뉴 공작들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로렌과 알자스로, 샤를은 로렌의 정복에 대한 명분축적과 프랑스-정확히는 루이 11세의 간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목적으로 신성 로마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에게 "부르군디아(로타링기아)의 왕"이라는 칭호와 대관을 받으려고 시도하였고 거의 성사직전까지 갔었다.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부르군디아 왕국이 부활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태가 되는 것이었지만,황제가 샤를이 자신을 붙잡아 왕위를 겁박할까 두려워 도망치는 바람에 대관식에 나오지 않아서 자동적으로 파기되었다. 저지대와 부르고뉴를 연결하기 위해 시도한 로렌 공략 역시 실패하며 핀치에 몰렸다가 최종적으로 로렌 공작 르네와 맞붙은 낭시 전투에서 전사한다.
이때까지 용담공은 후계자이자 외동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 외에는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고, 딸의 결혼 문제도 확정짓지 못한 상황이었다. 용담공이 허무하게 전사하자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즉각 부르고뉴 침공을 지시했으며, 저지대의 네덜란드인들은 루이 11세에게 매수되어 폭동을 일으켰다. 폭도들에 의해 그녀가 거주하고 있던 겐트 성에 유폐된 마리는 이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의 외아들인 막시밀리안 대공에게 심복들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17세였던 막시밀리안은 그녀의 편지를 받고 크게 감명받아 사비를 털고 대출까지 받아 1,200명의 기사들을 동원하여 1477년 8월 18일 부르고뉴령 겐트에 입성했다.
이후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 1세는 막시밀리안 대공과 결혼하여 상속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전혀 동의할 리가 없는 프랑스가 명목상의 주군으로서의 종주권을 주장하여 부르고뉴를 침공했다. 이후 벌어진 전쟁 끝에 1479년 쥐느가트 전투에서 막시밀리안 대공이 승리하면서 저지대 지역 일대를 마리 드 부르고뉴에게, 부르고뉴 지방은 프랑스에게 넘어가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여공작은 자신의 영지를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었으나, 1482년 3월 27일 임신한 상태로 사냥하던 중 낙마 사고로 4살의 필리프와 2살의 마가레트만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그녀의 저지대 영지는 아들 필리프에게 상속되었고, 궁극적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필리프의 아들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와의 캉브레 조약으로 프랑스가 밀라노와 나폴리를 포기하는 대신 합스부르크의 부르고뉴 탈환 시도도 포기되고 부르고뉴가 완전히 프랑스 왕국에 통합됨으로써 독립국으로서의 부르고뉴 공국은 이 때부터 완전히 역사에서 지워지고 프랑스령 부르고뉴 및 오스트리아령 저지대(네덜란드, 벨기에)의 역사로 갈리어 이어지게 된다.
2.4 부활 시도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가 프랑수아 1세를 패배시켜 포로로 잡고 밀라노, 나폴리 및 전 이탈리아의 영유권과 더불어 부르군디를 반환할 것을 조약으로 내세웠다. 다만 프랑수아가 보석금만 내고 먹튀해서 실패(...)
1814년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 전역에서 오스트리아 프란츠 2세의 아우 카를대공을 수반으로 이전 합스부르크령인 알자스 부르군드등을 묶어서 프랑스에 떼내 새로운 군주국을 만들려고 시도하려고 했으나 프로이센과 러시아등이 가볍게 무시했다.
1차 대전 전야 독일제국의 빌헬름 1세가 벨기에에게 동맹국편에 참전한다면 부르고뉴 왕국을 부활시켜 준다고 꼬셨지만 역시 상콤히 거절어째 죄다 떡밥용이다
3 문화
부르고뉴의 통치자들은 당시 유럽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던 저지대를 통치하면서 예술에 막대한 후원을 해주었고 부르고뉴의 궁정들은 항상 음악가와 미술가, 조각가, 자수가로 붐볐다. 휴고 반 데어 고스(Hugo van der Goes)는 부르고뉴 공작들의 후원을 받으며 활약한 대표적인 화가이고, 이외에도 아낌없는 후원은 후일 렘브란트 같은 거장들이 활약하던 유럽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네덜란드 회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외에도 부르고뉴의 귀족들은 진귀한 서적들을 읽고 모으기를 즐겼다. 망명생활 도중 플랑드르 지역의 귀족 로데베이크 반 그뤼튀서의 장서관을 방문한 에드워드 4세는 큰 감명을 받고, 영국으로 돌아간 뒤 이를 모방해 후일 영국 왕립도서관이 되는 개인 장서관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상황이 이러니, 부르고뉴가 출판업과 인쇄술의 중심지까지 겸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4 기타
문화와 예술을 가장 많이 후원한 선량공 필리프는 무예가 뛰어난 귀족들 24명을 모아 황금양모 기사단(Golden Fleece Order)라는 기사단을 창시하기도 했다. 이들의 대장은 특히 신분이 높은 귀족이어야만 했으며, 초대 단장은 선량공 본인이었다. 단원들 역시 귀족이어야 했으며, 이들은 모두 범죄나 이단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에도 그리스 신화에나 나올법한 황금양털이란 이교스러운 이름 탓에 빈축을 사기도 했으니, 할 일 없는 높으신 분의 코스프레라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러나 의외로 명망이 높았는지 기사단장직의 계승 문제에 교황이 관여한 적도 있고 기사단장직은 역대 부르고뉴 공작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 스페인의 왕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단절되자 자신이 정통 기사단장이라고 부르봉 왕조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Paradox Interactive의 게임 Crusader Kings 2과 Europa Universalis 4에서 구현되어있다. 크킹에서는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 나오는데, 1066년 시나리오로 시작시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 설정되어있으며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가 왕위를 찬탈하고 내전이 펑펑 터져 게임 진행이 역사와 달라지게 하는 제일 큰 원흉이다. 유로파4에서는 독립 국가로서 실제 역사대로 프랑스와 서로 대립하는데, 후사 없이 통치자가 사망하면 나라가 자동으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황제국에게 상속되는 부르고뉴 상속 이벤트도 구현되어있다.
5 역대 부르고뉴의 지배자
5.1 부르고뉴 가문 이전
이름 | 재위 | 비고 |
"정의공" 리샤르 | 880-921 | 보소 가문, 부르고뉴 공국 탄생 |
라울 | 921-923 | 후일 프랑스 왕이 된다. |
"흑색공" 위그 | 923-952 | 흑색공 |
질베르 | 952-956 | 마지막 보소 가문 출신 공작 |
오통 | 956-965 | 로베르 가문 |
"대공" 앙리 | 965-1002 | |
오토 빌헬름 | 1002-1004 | 마지막 로베르 가문 출신 공작 |
"현명왕" 로베르 2세 | 1004-1016 | 카페 왕조 통치, 프랑스 왕, 국왕령으로 편입 |
앙리 1세 | 1016-1032 | 프랑스의 왕 |
5.2 부르고뉴 가문
이름 | 재위 | 비고 |
"노인공" 로베르 1세 | 1032-1076 | 앙리 1세의 동생 왕자령으로 분봉받았다. |
위그 1세 | 1076-1079 | |
"적색공" 외드 1세 | 1079-1103 | |
위그 2세 | 1103-1143 | |
외드 2세 | 1143-1162 | |
위그 3세 | 1162-1192 | |
외드 3세 | 1192-1218 | |
위그 4세 | 1218-1271 | |
로베르 2세 | 1271-1306 | |
위그 5세 | 1306-1315 | |
외드 4세 | 1315-1350 | |
필리프 1세 | 1350-1361 |
5.3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이름 | 재위 | 비고 |
"호담공" 필리프 2세 | 1364-1404 | |
"용맹공" 장 | 1404-1419 | |
"선량공" 필리프 3세 | 1419-1467 | |
"용담공" 샤를 | 1467-1477 |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낭시 전투에서 전사 |
"부유공" 마리 | 1477-1482 | 용담공 샤를의 딸로 부친의 남성 후계가 없어 계승, 오스트리아 대공인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한다. |
6 합스부르크 가문
이름 | 재위 | 비고 |
막시밀리안 1세 | ||
"미남공" 필리프 4세 | ||
카를 5세 |
- ↑ 프랑스, 부르고뉴 둘 모두에게 해당된다.
- ↑ 에스베의 로베르를 시조로 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위그 카페 역시 로베르 가문의 일원이며, 편의상 보통 위그 카페 이전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한 파리의 오도, 로베르 1세를 로베르 왕조로, 위그 카페 이후를 카페 왕조로 정의하는 편. 딱히 로베르 왕조가 갈라진 건 아니기 때문에, 로베르 왕조를 그냥 카페 왕조로 통칭하는 경우도 있다.
- ↑ 발루아 백국 역시 왕자령으로, 필리프 6세는 샤를 4세와 사촌지간이다.
- ↑ 공식적으로 플랑드르, 아르투아가 영지가 된 건 필리프와 마르그리트의 아들인 용맹공 장 시기이다.
- ↑ 최근 연구에서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대립이 섭정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일 뿐만 아니라 도시민, 부르주아와 봉건 영주 사이의 대립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 이때 샤를 도팽은 샤를 6세의 사생아로 몰렸다.
- ↑ 중앙 왕국, 중간 왕국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