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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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박물관의 모형과 현재의 모습

檜巖寺(址)

1 개요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에 위치했었던 사찰. 숭유억불 정책을 가졌던 조선왕조에서도 왕과 왕후들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의 왕사"라고 불렸던 조선 최대의 절이었다. 행궁으로써의 역할도 있었으며, 궁궐 건축에 가까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로 가면서 폐사지가 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숭유억불 정책과 관련된 좋은 예시 중 하나다. 19세기에 이 절터 근처에 재건된 작은 회암사가 남아있다.

2 역사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명종 4년(1174)에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왔다 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전부터 존재했던 절임을 알 수 있다.

2.1 조선왕실의 원찰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관심이 대단해서, 승려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이 회암사에서 수도생활까지 했을 정도. 비록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었지만, 그 자신은 유학자 출신이 아니었으며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의 인물인지라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이후 나름대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세조 등의 왕이 재위한 조선 초기를 거치며 절은 계속 성장했고, 성종 3년(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이 절을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숭유억불 정책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많은 왕실 사람들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다. 또한 조선 초기는 신하들보다는 왕의 권력이 더 강했기에 신료들의 반대를 누르고 불교에 지원을 기울일 수 있었던 측면도 있다. 선대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절이란 것 때문에 회암사는 특별한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신하들,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력해지면서 회암사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이 거대한 과 조선의 왕사라는 타이틀은 유학자들에게는 어그로 그 자체였고, 여러 차례 유생들의 상소로 공격받게 된다. 결국 명종 때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지원을 받으며 회암사에 거처하던 승려 보우제주도귀양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맞아죽었고, 회암사 또한 16세기 후반에 원인 모를 화재로 인해 폐사가 되었다.[1]

우연한 화재일 수도 있지만, 너무나 적절한 시기와 정황상 유생들이 회암사로 레이드를 가서 저지른 조직적인 반달리즘테러였을 수도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지르려고 하는 것을 명종이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으며,[2][3] 회암사의 석불 유물 중 거의 대부분이 목이 잘린 훼불 상태였고, 사용하던 그릇들은 기단 아래에서 발굴되었는데 이는 대놓고 훼기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이 타버려도 재건하는 것이 일반적이건만, 회암사나 흥왕사처럼 큰 사찰이 조선시대에 재건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2.2 석물들의 수난과 새로운 회암사

이 절이 폐사가 된 이후로도 세월은 흘러 흘러 순조 21년(1821)에는 광주 사는 이응준이라는 유생이 회암사 삼화상(三和尙)[4]의 비석과 부도를 없애고, 그 자리에 선친의 묫자리를 쓰면 대길(大吉)할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지공의 부도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게다가 그는 지공선사비, 나옹의 부도, 무학의 비를 부수고는 부도 안에 있던 금은으로 된 사리 그릇도 훔쳤다. 무학의 부도는 그 전부터 도굴꾼들이 이미 깨버린 상태였다. 즉 회암사에 있던 유명한 석물 중 나옹의 비를 제외하면 다 깨져버린 것.[5]

이 사건을 보고받은 순조는 범인을 유배 보냈다. 숭유억불인데 왜 유배를 보내?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사건에 조선 왕실이 나선 이유는 무학대사의 비가 다름 아닌 태종의 명으로 건립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태종이 언급되는[6] 비석인데 이걸 박살냈으니 유배갈 만하다. 반달하기 전에 비문이라도 읽어보지 결국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와 부도가 세워지고 회암사지에서 700m 정도 떨어진 북쪽 골짜기에 다른 회암사가 새로 창건되었다. 당시 박살난 비석의 일부는 새로 세워진 비석 주변에 아직까지 남아있다.현재의 회암사

3 가람

원래의 회암사 터는 산 기슭에 있어 약간의 경사가 있지만 대체로 평탄한 지형이다. 북에서 남으로 퍼진 부채꼴 모양의 부지를 8단으로 나눠 각 단마다 건물을 배치하였다. 특이한 것은 돌을 쌓아 만든 수로가 있어서 절을 둘러 싸고 있다. 근처 계곡의 물을 끌어와 지상을 흐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절의 복원도를 보면 느껴지겠지만, 건물들의 배치는 경복궁과 같은 궁궐에 유사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남문과 중문을 지나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보광전(대웅전)과 그뒤로 몰려있는 주요 건물들의 배치 등에서 그러한 점이 나타난다. 거기다가 보광전 주위에는 궁궐이나 종묘 등에서나 보이는 박석[7]이 깔려있었고, 궁궐에서나 쓰이던 비싼 청기와도 출토되어 이성계가 집무하던 정청에는 청기와를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인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는 회암사 중창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당시 완성된 건물의 총 칸 수는 262칸이었다고 한다.[8] 또한 "사옥(寺屋)의 굉장미려(宏壯美麗)하기가 동국(東國)에서 제일이다"고 하였으며, "비록 중국이라도 이런 절은 많이 볼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4 발굴

회암사터라는 것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사실이지만,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큰 절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사적 128호로 지정되면서 조사가 몇 차례 있었으나 충분하지 못했고, 1997년 경기도 박물관의 시범적인 조사를 통해로 회암사의 규모와 가람배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98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벌어졌고 좀 넓은게 아니다. 발굴해서 드러난 것보다 더 넓을 것이다. 옆에 군부대가 있으니까 2013년까지도 진행 중이다.

이 무렵이 용의 눈물이 인기리에 방영된 시기와도 겹친 영향인지, 이 시점 이후의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선 회암사 복원이 양주시에서 공약으로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회암사의 규모가 규모인만큼 양주시 재정으로는 어림없고, 경기도와 중앙정부의 지원이 필수지만 아직 구체화된 계획은 없다. [9]

2012년 7월 발굴한 유물 및 경기도 박물관 등지에 있던 유물들을 모아 유물전시관을 개장했다.

  1. 16세기에 망했다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1595년인 선조 28년 6월 4일에 군기시가 아뢰었다. "각종 화포를 주조할 일을 이미 계하 하셨습니다... 중략(中略)... 회암사(檜菴寺)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또한 불에 탔으나 전체는 건재하며 그 무게는 이 종보다 갑절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져다 쓰면 별로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훈련도감도 조총을 주조하는데 주철이 부족하니, 그 군인들과 힘을 합해 실어다가 화포에 소용될 것을 제외하고 수를 헤아려 도감에 나누어 쓰면 참으로 편리하겠습니다. ...하략(下略).." 이라는 기록이 있다. 회암사는 1595년 전에 망한 것이다.
  2. 1566년 명종 21년 4월 20일 "...중략(中略)..다만 금년 봄에 송도(松都)의 유생이 음사(淫祠)를 태워버린 뒤로 사방에서 그것을 본받아 유림(儒林)들이 한갓 혈기의 용맹을 부려 방자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소문을 들으니 여항(閭巷)에서 떠들썩하게 전파되기를, 혹은 회암사(檜巖寺)를 태우려고 한다하며...중략... "대사성으로 하여금 관학 유생에게 알아 듣도록 타이르게 하라."
  3. 심지어는 이 명종실록의 기록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의 의견인 사신왈(史臣曰)이 붙어있는데, 왜 밖에서 그런 소문이 왕한테까지 들어가서 일을 못하게 되었냐는 식이다. 한마디로 회암사를 불태웠어야 한다는 것. 이쯤되면 무섭다. "사신은 논한다. 제왕은 안팎의 분별을 엄격하게 하여 말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옛날의 제도이다. 외간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구중 궁궐 깊은 곳에 날아들어 임금의 귀를 놀라게 하고 미혹되게 하기를 이와 같이 쉽사리 하였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은가. 간사한 말이 임금의 마음을 의혹시킴으로써 마침내는 왕의 말에 욕됨을 남겼으니 또한 애석한 일이다."
  4. 여말선초 시기의 고승인 지공(指空), 나옹혜근(懶翁慧勤), 무학자초(無學自超)의 세 명을 가리킨다.
  5. 이 때 무사했던 나옹화상비는 1970년대에 비석 주변에 불이 나면서 완전히 깨져버렸다. 이후 탁본과 사진자료를 근거로 그 자리에 앞에 모사해서 세워놓았다. 돌이 새거 티나는거 빼면 원본과 같다. 깨진 원본은 경기도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6. 북한산에 있는 원증국사탑비에 태조의 휘가 쓰여 있다는 이유로 영조가 비각을 세우게 했을 정도다.
  7. 정전 근처에 넓게 깔아놓은 바닥돌
  8. "집은 모두 262칸이고, 높이가 15척이나 되는 부처가 7개이고 10척의 관음상이 있었다."
  9. 기실 복원한 다음도 문제다. 그 넓은 대지에 그 큰 건물을 재건한 다음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사람 손이 안닿으면 목조건물은 순식간에 퇴락한다. 재건한 사찰을 불교 종단에 맡겨 실제로 기능하는 사찰로서 유지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