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共匪
1.1 정의
공산당(共産黨) 비적(匪敵)의 약자.
중국 국민당에서 공산당 게릴라를 비적이라 부른 것이 어원이라 한다. 그 뒤에 한국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 되었다. 중국의 분열 이후에 대만에서 대륙 정부를 깔 때 즐겨 사용하였으나 요즘은 사용 빈도가 줄어들긴 했다.
빨치산과는 달리 게릴라 부대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며 정규 부대나 간첩도 공비라고 부를 수 있다. 즉, 공산주의 게릴라 빨치산이나 공산 국가에서 보낸 간첩 또는 특수부대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적개심을 담은 표현이다.[1]
1.2 한국에서의 사용
한국에서의 의미는 1950년대 중반까지 지리산, 운문산 일대에 포진하였다가 섬멸된 빨치산 집단 및 북한에서 직접 파견해서 침투한 무장간첩단으로 한정되어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게릴라들의 성과를 교훈으로 해서 북한의 김일성은 196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무장 게릴라를 파견하여 지하당을 결성하고 남한 내 무장 세력의 본거지를 강원도 지역에 구축하고자 했다.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의 규모는 가히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군사도발인 셈. 그러나 남한은 남베트남과 달랐고 이승복 사건으로 대표되는 게릴라들의 잔학행위와[2] 남한 군경의 토벌로 북한 측의 기대와는 달리 전술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국군의 소탕작전 능력을 키워주는 동시에 북한에 대한 적개심만 늘리는 역효과를 내게 되었다.
게다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에서는 상어급 잠수함의 노획에 성공하면서 북한의 특수부대 장비 및 운용교리 연구에 진전이 있는 등, 방첩작전의 귀중한 정보원이 되기까지 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공비 남파는 북한의 돈지랄이었던 셈. 2000년대 이후 북한의 도발은 간첩단 파견보다는 북방한계선 무력화를 위한 해전, 심리전 등으로 대거 전환되었으나 유사시 대규모 무장간첩단을 파견할 가능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1.21사태 이후로 사살된 무장공비의 시신은 경기도 파주시 소재 적군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공식적으로 북한은 그들을 보내지 않았으니까 북에서 인수하지는 않았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이지만. 참고로 적군묘지에는 1960~70년대에 공사 중 발견되었거나 2000년 이후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 도중 발견한 조선인민군, 중국군 유해도 안장되어 있다. 다만 북한이 북한에서 훈련이나 근무 중 사망한 군인, 혹은 민간인들의 시체가 바다나 강을 통해서 남으로 떠내려 오는 경우는 인정하기 때문에 판문점을 통해서 운구되었다.
1.2.1 공비의 활동이력
북한의 대남 도발사를 참고.
남파무장간첩단 사건 위주로 연대순으로 정리한다.
- 진주 덕의마을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6. 5. 17)
- 강릉 고단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7. 5. 21)
- 1.21사태 (1968. 1. 21)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 11. 2)
- 추자도 무장공비 침투사건 (1974. 5. 20)
- 광천지구 무장간첩 침투사건 (1978. 11. 4)
- 필승교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1. 6. 29.)
- 저진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2. 5. 15.)
- 임월교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3. 6. 19.)
- 월성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3. 8. 4.)
- 다대포 침투 무장공비 매복 생포 작전 (1983. 12. 3.)
- 은하계곡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2. 5. 21.)
- 임진강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5. 10. 17.)
- 부여 간첩 사건 (1995. 10. 24.)
-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6. 9. 18)
- 속초 앞바다 무장공비 침투 기도사건 (1998. 6. 22)
- 동해 무장공비 사체 발견사건 (1998. 7. 12.)
1.3 중국에서의 사용
위에서 설명한 바대로 공비라는 말은 중국 국민당에서 공산당 게릴라를 비적이라 부른 것이 어원이라 한다. 특히 1949년, 중화민국으로 철수한 국민정부가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그리고 중국공산당을 깔 때 즐겨 사용하였다. 게다가 사람 이름, 단체 이름에까지 "匪"를 넣어서 경멸했다. 아래와 같은 예가 그렇다.[3]
- 共匪(공산당 "도적")
- 毛匪澤東(마오쩌둥 / 모택동 "도적")
- 鄧匪小平(덩샤오핑 / 등소평 "도적")
- 江匪澤民(장쩌민 / 강택민 "도적")
- 胡匪錦濤(후진타오 / 호금도 "도적")
- 習匪近平(시진핑 / 습근평 "도적")
물론 반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중공측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만 독립주의자들(이 경우는 리덩후이와 천수이볜 제외)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중화민국 정통론자들은 반대로 리덩후이와 천수이볜만). 물론 특정 정치인의 반대자가 사용하기도 한다.
- 蔣匪中正(장중정 / 장중정 "도적")
- 蔣匪經國(장징궈 / 장경국 "도적")
- 李匪登輝(리덩후이 / 이등휘 "도적")
- 陳匪水扁(천수이볜 / 진수편 "도적")
- 馬匪英九(마잉주 / 마영구 "도적")
- 蔡匪英文(차이잉원 / 채영문 "도적")
장경국의 집권 후인 1983년경부터는 공비라는 표현 대신 '中共'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1994년 천도호(千島湖) 사건[4]이 일어났을 때, 당시 총통 이등휘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토비(土匪) 정권"이라는 표현을 썼다.
2000년대 이후에는 범록(泛綠: 대만의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측. 민주진보당 등) 진영에서 간혹 이 단어를 쓴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분리독립의식을 확고히 가지기 위해 저쪽을 가리키는 말로 더 잘 쓰는 말은 바로 중궈(中國). 자신들은 중국이 아니란 의미까지 같이 갖고 있다.
"장총통께 보고드립니다. 공비가 상륙했습니다!(...)"[5]
중국 대륙에서는 "공비"라는 단어는 코렁탕인터넷에서 방화벽에 막혀 검색이 안 되므로 GF라고 에둘러 쓰기도 한다. 그 외에 중국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을 가리키는 은어로는 「GCD」, 「TG」("공산당" "토공(土共)"의 약칭), 「Party」, 「土共」, 「土鱉」, 「偉光正」, 「天朝」 등이 있다.
1.4 관련 항목
1.4.1 인물
1.4.2 인물 이외의 제항목
2 公比
- 상위 항목 : 수열
- ↑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이 불쌍한 공비아저씨 잡히지 마세요라는 식의 대자보를 붙인 사례가 있었다. 공비라는 말이 반공의 입장인 사람이 섬멸의 대상으로서 북한의 무장간첩단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인 만큼, 친북을 표방하면서 공비라는 말을 쓰는 것은 나 무식하오라고 선언하는 병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물론 남의 나라 눈치 안 보고 별별 악행을 저지르는 북 정권을 괴뢰라고 부르는 것 역시 무식을 선언하는 병크다.당시 언론에서도 아주 제대로 까였고, 안그래도 그 해 여름의 한총련이 연세대에서 보인 점거농성 추태 때문에 NL이 스스로 무덤을 판 데에 더해 관뚜껑을 밀봉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 ↑ 유명세 때문에 이승복 사건만 기억하지만 사실상 당시 게릴라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상당히 많았다.
- ↑ 중국어에서 경칭이나 멸칭을 나타내는 표현들은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성과 이름 사이에 끼워넣는다. 대만의 현 총통 마잉주에 대한 경칭도 馬總統英九先生. 馬英九總統보다 격이 높은 표현. 마잉주도 취임사에서 다른 후보들을 언급할 때 蔡主席英文, 宋主席楚瑜라고 했다.
- ↑ 중국 절강성 천도호에서 대만 관광객 24명과 선원 8명을 태운 유람선이 화공(火攻)을 받아 전원 사망한 사건. 처음에 중국측은 단순한 화재라고 발표했지만, 대만과 홍콩 언론의 추적과 대만 당국의 對대륙 인적교류 중단 발표가 이어진 끝에 방화범으로 20대 청년 3명이 체포된 사건. 그러나 이 사건은 인민해방군과 공안의 소행이라는 설이 꾸준히 나돌고 있다고 한다.
- ↑ 2008년 진운림(陳雲林)이 이끄는 해협양안관계협회(海峽兩岸關係協會) 협상대표단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 이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일어났을 때의 모습.
- ↑ 자세한 사항은 [[무한도전 못·친·소 페스티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