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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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寺

1 개요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조계종 소속이이며 고려시대석탑인 팔각구층석탑으로 유명하다. 근처에는 월정사의 말사이자 고양이석상으로 냥덕들에게 지지를 받는 상원사가 있다.

2 역사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자장이 중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문수보살을 만난 뒤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고자 정진하던 터라는 전설이 있다. 자장과 선덕 콤비는 황룡사 목탑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 뒤 고려 충렬왕 33년(1307) 화재로 절 전체가 타버린 것을 다시 재건했고, 조선 순조 33년(1833) 또 다시 다 타버린 것을 헌종 10년(1844)에 다시 중건했다.

2.1 6.25 전쟁

월정사는 6.25 전쟁 당시 우리 손으로 불태운 절이다. 1951년 1.4 후퇴 당시 국군이 월정사를 불태우고 내려갔던 것이다. 북한군이 이 에 머물 것을 우려했던 것인데, 청야전술이라고 말은 그럴싸하게 해도 결과적으로 효과도 없던 병크였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민가는 놔두고 절만 불태워서 뭘 어쩌잔건데 월정사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의 사찰들이 이렇게 사라졌는데, 그 파괴의 주역들은 거의 대다수가 화력이 좋은 미군빨치산을 색출하던 국군이었다.

하여간 불에 타거나 녹아내리는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동종까지도 녹아 없어졌으며, 남은 거라곤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과 기단, 석조보살좌상 하나 뿐이었다.

3 가람

가람 배치는 일반적인 신라 시대 양식과는 달리 탑을 둘러싸고 부속 건물이 세워져 있다. 분황사처럼 고구려 가람배치에 더 가깝다. 분황사와 다르게 탑을 바라보고 있는 월정사는 특히 더 그렇다. 가운데의 탑은 국보 제 48호인 다각다층탑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다.

팔각구층석탑은 고려시대석탑으로 송나라의 탑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1] 또한 정릉사청암리 사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구려계열의 석탑으로도 보는데 고구려계의 목탑과 같은 팔각형의 형태도 있다. 가람배치도 그렇고, 탑도 그렇고, 고구려계의 절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 남한에는 이와 같은 탑이 남양주 수종사의 팔각오층석탑만 있다.

지금의 건물은 한국 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어 1964년 이후로 새로 중창한 것이다. 원래 월정사의 대웅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적광전은 칠불보궁이란 이름이었다. 아마도 7개의 부처상이 있었지만, 화재로 인해 다 녹아서 이름을 바꾼 것으로 추측된다.

이 외에도 한국전쟁을 견디고 남았던 석조보살좌상(보물 제 139호)이 유명하다.

4 대장경 판본

월정사에는 유명한 책이 하나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팔만대장경판)을 가지고 찍어낸 대장경으로, 근처 상원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을 월정사로 옮긴 것이다. 단, 보통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은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판"이며, 이 것은 책이 아니라 인쇄를 위한 목판이다.

월정사에 있는 판본은 조선 고종 2년(1865)에 찍은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판본은 남아있는 것이 몇 개 전하지 않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54호.

5 기타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75호인 황해남도 안악군 구월산의 월정사와는 다른 절이다. 이쪽은 846년 창건하였다.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이 유명하다. 일주문에서 금강교까지 1km 남짓한 길이의 길로서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산문(山門) 역할을 한다. 이 길 주위로 1700여 그루의 전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 멋진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오대산사고에 부속사찰격이 되어 자못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왕사인 회암사도 불지르던 유생들의 반달을 막기 위해, 관에서 힘을 준 거라 카더라 그럼 뭐해 후손들이 퐈이야해 버렸는데

2004년 9월부터 월정사 단기출가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1달여 동안 삭발염의를 하고 스님이 되기 위한 예비과정인 행자생활을 완벽하게 체험해 볼 수 있다. (3시 기상 9시 취침) 삭발은 남성 필수, 여성은 선택이다. 1달동안 묵언(말을 하지 않는 것)이 기본 규칙이고, 외부와의 연결 또한 완전하게 단절되고, 식사 역시 불교식 채식만 가능하며, 김치에 젓갈이 들어가지 않아 적응이 힘들 수 있다.
  1. 북송 당시 카이펑(개봉)에 있었던 왕실 소유 사찰인 개보사(開寶寺)의 탑의 모형과 유사한 점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