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x 신라의 역대 국왕 | ||||||
41대 헌덕왕 김언승 | ← | 42대 흥덕왕 김경휘 | → | 43대 희강왕 김제륭 |
시호 | 흥덕왕(興德王) | |
성 | 김(金) | |
휘 | 수종(秀宗) / 경휘(景徽)[1] | |
생몰년도 | 음력 | 777년 ~ 836년 12월 (60세) |
재위기간 | 음력 | 826년 ~ 836년 12월 (11년) |
1 개요
신라의 제42대 왕이다.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삼남으로 소성왕과 헌덕왕의 아우이며, 애장왕의 숙부다. 생년이 명확한 국왕인데, 흥덕왕릉의 비석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지만 다행히 수명을 기록한 부분이 남아 있다. 여기에 왕이 죽었을 때 60세였다는 기록이 존재하므로 역산하면 그의 생년은 777년. 잭팟 서기력의 최대 수혜자
2 치세
804년에 시중에 임명되어 언승(헌덕왕)과 함께 애장왕대의 왕권 강화정책을 이끌었다.[2] 819년에는 상대등에 임명되었으며, 822년에는 부군이 되어서 왕위계승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애장왕-헌덕왕으로 이어지는 왕권 강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으며 828년에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여 당시 복잡했던 국제 정세에 대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왕족 측근 중용을 통한 권력의 집중과 신흥 계급의 수용을 통한 왕권 강화라는 원성왕계의 전통적인 전략을 이은 것이다. 역시 같은 이치로 아우 김충공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숙부인 예영의 아들인 김헌정과 김균정을 중용하였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이 왕권 강화를 위한 왕족 우대 전략은 힘을 가진 왕족들의 왕위 갈등을 불러오게 되는데, 그가 자식이 없이 죽자 충공의 아들인 김명과 이찬 헌정의 아들인 제륭이 한편이 되고 숙부뻘인 균정이 한편이 되어 왕위 다툼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균정은 죽고 제륭이 오르니 이것이 희강왕이다.
다만 흥덕왕 대에도 전왕 대부터 이어진 천재지변의 연속으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그나마 형보다 나았던 점은 흥덕왕은 음식 수를 줄이고 죄수를 사면하는 등 고난을 백성과 함께 하는 모습(그것이 진심이었든 아니었던든간에)이라도 보여주었다는 점. 또한 남쪽 지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직접 구휼 활동에 나서는 등 민생을 살폈다.
그런데 이 무렵에 의식주나 생활용품을 골품제에 따라 규제하겠다는 법령도 내렸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신라 사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던 골품제를 고착화시켜 버렸다. 흥덕왕으로서는 골품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면 기강도 잡히고 신라의 혼란도 가라앉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신라 사회 모순의 근본적 원인이 바로 골품제에 있었던만큼 시대를 읽는 눈은 비교적 떨어졌던 모양. 물론 자신이 골품제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니 넓은 시야를 갖는 것은 힘든 일이었겠지만[3]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
즉위 3년에 우리나라에서 차가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전부터 차가 재배되었을 수도 있으나, 기록상으로 남아있는 것은 최초이다. 다만, 차를 마신 것은 선덕여왕 때 이미 기록에 있다.
흥덕왕 시기에도 불교는 여전히 성행했음을 알 수 있는데, 즉위 2년엔 승려 구덕[4]이 당에서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즉위 5년엔 도승 150명을 궁궐로 불러들여 왕의 쾌유를 비는 불공을 드리도록 했다.
3 애처가
개인적인 면모를 이야기하면 이 왕도 애처가였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5]인 장화부인(시호는 정목왕후)인데 흥덕왕이 즉위한 지 2개월 후에 죽어 왕을 크게 상심시켰다. 주위에서 신하들이 새 왕비를 들일 것을 권했지만 왕은 "외짝 새도 제 짝을 잃은 슬픔을 가지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무정하게도 금방 다시 장가를 든다는 말인가?"라고 말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박씨 성의 후궁이 있기는 했는데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고 궁중의 여성들을 건드리는 일도 없었으며 왕의 주변에는 단지 내시들만 있었다고 한다. 결국 왕은 죽은 후 먼저 떠나보낸 아내 정목왕후의 능에 합장되었다. 뒷날의 공민왕과 비슷한 면모. 흥덕왕 부부의 합장릉 흥덕왕릉은 신라 왕릉 중 다른 설 없이 능 주인이 본인들임이 확실한 몇 안 되는 능 중 하나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정목왕후는 소성왕의 딸이므로 애장왕의 누이다. 흥덕왕이 형 헌덕왕의 정변에 가담했던 것을 상기하면 정목왕후 입장에서 남편 흥덕왕은 친동생의 원수이기도 한 셈. 흥덕왕이 아내에 대해 이런 정을 보였던 것은 아무래도 아내에 대한 나름대로의 속죄였을 가능성도 있겠다. 그러나 끝내 후궁을 두지 않아 후사를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어찌 보면 신라 하대 왕위 쟁탈전의 직접적 원인을 촉발시킨 왕. 근본적 원인은 할아버지에게 있다 하겠지만
《삼국유사》에는 앵무새와 관련한 일화가 전해내려온다. 당나라에 갔다 온 사신이 왕에게 한 쌍의 앵무새를 바쳤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었다. 혼자 남은 수컷이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자 흥덕왕은 거울을 수컷 앵무새 곁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러자 수컷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기 짝인 줄 알고 거울을 계속 쪼다가 그림자임을 알아채고 슬피 울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다. 흥덕왕은 이를 보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지만 이는 전해내려오지 않는다고 한다. 짝을 잃은 앵무새에 대해 동질감을 느꼈던 듯하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의 '외짝새 이야기'는 이 앵무새를 가리키는 듯하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月 흥덕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二月 왕비가 죽자 신하들이 재취를 청하나 왕이 거절하다
二年春一月 친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一月 당 문종이 헌덕왕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고 흥덕왕을 책봉하다
二年春三月 고구려 승려 구덕이 오다
二年夏五月 서리가 내리다
二年秋八月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
二年秋八月 서울에 큰 가뭄이 들다
二年秋八月 시중 영공이 물러나다
三年春一月 김우징이 시중이 되다
三年春二月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三年春三月 눈이 3척이나 내리다
三年夏四月 장보고가 청해진을 세우다
三年夏四月 요사스러운 인물이 군중을 현혹하여 먼 섬에 귀양보내다
三年冬十二月 사신을 당에 보냈는데, 돌아오는 사신이 차의 씨앗을 가져와 차가 성행하게 되다
四年春二月 당은군을 당성진으로 바꾸고 극진을 파견하다
五年夏四月 왕이 편찮아 기도하고 승려 150명에게 도첩을 허락하다
五年冬十二月 사신을 당에 보내다
六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春一月 우징이 시중에서 물러나 윤분이 시중이 되다
六年春二月 김능유와 승려 9명을 보내 당에 조공하다
六年秋七月 당에 파견된 사신 능유와 그 일행이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빠지다
六年冬十一月 사신을 당에 보내다
七年 가뭄이 들어 왕이 정전을 피하고 감선하였으며 옥수를 사면하니 7월에 비가 왔다
七年秋八月 기근으로 도처에서 도적이 일어나다
七年冬十月 사자에게 명하여 백성을 안무하다
八年 큰 기근이 들다
八年夏四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八年冬十月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다시 꽃이 피다
八年冬十月 역병으로 많은 백성이 죽다
八年冬十一月 윤분이 시중에서 물러나다
九年春一月 우징을 시중으로 삼다
九年秋九月 왕이 열병하고 활쏘기를 관람하다
九年冬十月 왕이 남쪽 주군을 순행하여 환과고독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十年春二月 김균정을 상대등으로 삼고, 김명을 시중으로 삼다
十一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一年春一月 왕자 김의종을 보내 당에 사은하고 숙위케 하다
十一年夏六月 혜성이 동쪽에서 보이다
十一年秋七月 태백이 달을 범하다
十一年冬十二月 왕이 붕어하다
5 기타
- 해상왕 장보고에서는 신라 종족의 강력한 영웅이다.
괜히 신라의 왕이라고 해서.원거리 공격도 가능한 자체가 강한 어중간한 영웅이며. 스킬도 해상왕 장보고 게임에서 가장 좋은편에 속하다. 스토리상으로는 역적노무새퀴인 김홍괴에게 왕권을 빼앗긴다. 근데 김홍괴는 어떤 인물을 뜻 하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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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에 의하면 처음 이름은 수종이었으나 후에 경휘로 바꾸었다고 한다.(諱秀宗 後改爲景徽).
과연, 왕의 이름 - ↑ 이후 김제옹이 김수종의 다른 이름으로, 애장왕을 시해하고 헌덕왕을 옹립하는 공을 세웠다고 보기도 한다. 확실한 건 헌덕왕의 찬탈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 단 골품제는 혜공왕 시절부터 당나라 사람들에게 이상한 제도로 비춰지고 있었다. 이미 7세기에 골품제의 모순을 논하며 당으로 건너간 설계두의 사례처럼 골품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신라인들도 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 ↑ 고구려 승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고구려 지역 출신인 것으로 추정된다.
- ↑ 소성왕은 흥덕왕의 형이므로 조카와 결혼한 셈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 시대에는 왕가에서 있었던 사례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