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이 캐릭터를 좀 닮은 듯!?
요미우리 자이언츠 No.10 | |
아베 신노스케 (阿部慎之助) | |
생년월일 | 1979년 3월 20일 |
국적 | 일본 |
출신지 | 치바 현 |
포지션 | 포수, 1루수 |
투타 | 우투좌타[1] |
체격 | 180cm 97kg |
프로입단 | 2000년 드래프트 1위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1~) |
2012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 ||||||
아사오 다쿠야 (주니치 드래곤즈) | → |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블라디미르 발렌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
2009년 일본시리즈 MVP | ||||||
고쿠보 히로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 |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이마에 도시아키 (치바 롯데 마린즈) |
일본의 프로야구 선수.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슬러거 포수였으며, 타카하시 요시노부와 함께 하라 다쓰노리를 이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후보인 교진 순혈 슈퍼스타.즉 이 둘은 언젠가 감독자리놓고 외나무 다리 쇼부를 봐야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인지도는 아베는 아베 신조 신노스케는 노하라 신노스케에게 밀리고 있다. 성도 이름도 콩라인
1 아마시절
주오대학 시절부터 도쿄 6대학리그에서 타격으로 주목받았다. 대학시절에 이미 프로-아마 통합국가대표에 선발될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결국 2000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에 1순위로 지명됐다.
2 프로 입단 후
신인시절
옆에 있는 선수는 마쓰이 히데키.
데뷔시즌인 2001년, 야마쿠라 카즈히로 이후 사상 2번째로 신인포수로서 개막전 마스크를 쓰는 위업을 달성한다. 데뷔 첫해부터 10년 동안 주전포수로 활약한 무라타 신이치를 벤치 멤버로 보내버렸고, 무라타는 시즌 후 은퇴했다.흠좀무 2001시즌 성적은 0.225, 13홈런 44타점으로 뭔가 2% 아쉬운 모습이었지만, 2년차인 2002시즌에는 0.298 18홈런 73타점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고, 수비력도 한층 급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아베의 활약에 힘입은 요미우리는 센트럴리그 우승에 이어 일본시리즈에서도 세이부 라이온즈를 4:0으로 떡실신시켜버렸다.
2003 시즌에는 부상 때문에 93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이듬해인 2004년에는 33경기만에 시즌 20홈런을 기록[2]하는 등 타격에 완전히 눈을 뜬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후반기에 페이스가 급격히 저하되며 최종 성적은 0.301, 33홈런 78타점에 그쳤(?)지만 요미우리 역대 포수 중 최초로 30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된다. 2005시즌에도 26홈런을 때려내며 팀의 공격을 주도했지만, 2006시즌에는 10홈런에 그치며 데뷔시즌 이후 가장 저조한 타격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팀의 주장을 맡은 2007시즌에 33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부활했고, 2008시즌에는 24홈런, 2009시즌에는 32홈런을 기록하며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2009시즌에는 팀이 7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일본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2010년에는 무려 44홈런을 때려내면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노무라 카츠야, 타부치 코이치에 이어 단일시즌 40홈런을 기록한 역대 세 번째 포수가 된다.
2011 시즌에는 부상 때문에 시즌을 다소 늦게 시작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0.292, 20홈런, 61타점의 성적을 기록한다. 공인구의 변경으로 인한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투신타병투고타저 시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훌륭한 성적이었고, 5년 연속 베스트나인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2012 시즌에는 0.340, 27홈런 104타점이라는, 저반발 공인구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며 데뷔 이후 처음으로 타이틀(타격왕, 타점왕)을 거머쥐었고, 팀의 일본시리즈 정상을 이끌었다. 그리고 압도적인 득표로 센트럴리그 MVP를 수상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2013 WBC에서 일본 대표팀의 '주장, 4번타자, 주전 포수'로 낙점받았으나, 중압감 때문인지, 시즌 초라 아직 몸이 덜 풀렸던 탓인지, WBC 기간 동안에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시즌 들어가서는 135경기 0.296, 32홈런, 91타점으로 팀내 홈런 1위, 타점 1위를 차지하며 여전한 강타자의 면모를 과시했지만 정작 일본시리즈에서는 22타수 2안타 타율 0.091로 부진하며 라쿠텐에게 우승컵을 내줘야 했다.
시즌 이후 구단측에서 마쓰이 히데키의 6억 1천만엔을 넘는 연봉 6억 2천만엔을 제안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서 부진했다는 이유로 고사했다고 한다. 이후 6억엔에 합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4년 들어서 부진하면서 신인 포수 고바야시 세이지에게 밀리고 8월부터 1루수 출전을 시작하게 됐다. 1루수로 출전하면서 성적이 조금씩 반등하는 중. 사실 이동안에도 줄곧 4번 타순에 들어섰는데 2014년도 요미우리 타자진 상황이 영 좋지 않기 때문이다.[3]
결국 2014 시즌이 끝나고 하라 감독과 면담을 한 이후 1루수로 완전히 전향을 선언했다.
2015년 4월 3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홈 경기에서 오래간만에 포수 포지션으로써 경기에 출전했다. 이유는 올해 FA로 영입한 대형 포수 아이카와 료지[4]가 지난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오른쪽 다리 근육 부상을 입어 주전 포수 자리가 부재중인 상태라는 비상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날 경기가 중요했던 것이 팀의 3연패라는 좋지 못한 흐름을 끊어야 되는 경기라는 부분도 있지만 자타공인이 인정하는 요미우리의 최고 라이벌 팀 한신을 상대로 상대전적 1000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경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승리를 잡아내야만 했던 것이었다. 때문에 결국 믿고 맡길 수 있는 아베에게 포수 역할을 부탁한 것. 그리고 아베는 감독의 기대에 보답이라도 하듯 포수 마스크를 썼을 땐 1회 말 니시오카 츠요시의 도루를 저지해냈고 타격 쪽에선 4타수 2안타(그 중 하나는 2루타)라는 맹활약을 펼쳤지만 아쉽게도 팀은 패해 버렸다. "연패를 어떻게든 막고 싶었지만 팀이 져버려서 아쉬웠다"라는 것이 경기 후 코멘트. 여담으로 아베는 혹시 몰라 포수 장비를 집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날 경기에서 예전 포수 장비를 갖추고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뒤로도 1루수보다는 포수로 출전한 빈도가 훨씬 높았고, 이를 두고 네이버에 일본야구 칼럼 리포트 쓰는 키무라가 칼럼 한 편을 통째로 써서 까기도 했었다. 그러나 교류전 도중 목 부상이 재발, 결국 다시 2군으로 내려가야 했다.
2015년 시즌의 성적(타율 .242 15홈런 47타점)이 썩 좋지 못했는지 연봉이 무려 36%나 까였다. 이는 NPB 사상 4번째 최대 감소폭.
3 플레이 스타일
매 시즌 20~30홈런은 꾸준히 기록할 수 있는 파워를 지녔으며, 타율은 3할대 몇 차례와 3할에 가까이할 기록했을 정도로 정교함도 갖추었다. 그 덕분에 현재 일본 최고의 공격형 포수 1순위로 꼽히고 있으며, 그 진가는 2009년 일본시리즈나 2009 한일 클럽 챔피언십 등에서 제대로 보여줬다.
2012 시즌 종료 기준으로 통산 295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는데, 포수라는 포지션 특성상 더 많은 홈런을 바라기는 힘들지만 일본에서 나름대로 슬러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산 300홈런은 가볍게 넘을 것으로 보이며, 은퇴 시점에서 통산 400홈런을 기대할 수도 있는 수치다.[5]
다만 투수 리드, 도루 저지율 등 수비력은 다소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방망이에 가려져있어서 그렇지 수비력이 바닥인 선수는 아니고 2002시즌과 2008시즌에는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4년 이후로 1루수로 전향할 예정이라 위의 이야기는 사실상 사어가 되나.... 했지만 요미우리 포수진 상황이 워낙 좋지 못하여 결국 포수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지만 코바야시 세이지의 활약[6]으로 1루수를 전담으로 맡게 되었다.
4 기타
- 연봉은 4억엔으로 일본 내의 포수 중에서 가장 많이 받는다. 2013년 기준으로 5.7억엔으로 2013년 시즌 NPB 연봉킹으로 올랐고 연봉 명예의 전당에서 탑 10 안에 들기도 했다. 시즌 이후 6억엔에 합의였다. 참고로 아베는 구로다 히로키처럼 동기부여를 위해 다년계약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한다.
- 국내에는 이승엽의 절친으로도 유명했다. 이승엽과 아베는 서로 히어로 인터뷰에 나가게 되면 각각 서로의 언어로 말하기로 했는데, 둘 다 약속을 지켰다. 실제로 이승엽과 친해지기 위해 직접 한국어 공부를 하고 한국어 편지도 이승엽에게 썼을 정도의 절친이었다. 이승엽 항목 상단에 보면 아베가 쓴 편지가 적혀 있다.
-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과의 경기에서 수많은 찬스 무산, 도루 저지 실책 등으로 한국에 많은 도움을 줘, 역시 승짱의 친구!라는 각인을 남겼다. 허구연 해설위원은 이를 '고마워요 아베' 라고 표현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시드니 올림픽과 베이징 올림픽 당시 4차례의 한일전에서 1경기(베이징 올림픽 예선전)를 제외한 나머지 3경기에서 경기를 마무리짓는
허용타자였다(...). 참고로 이 3경기 모두 대타로 나왔으며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두번 모두 내야땅볼(예선전때는 병살타, 3-4위전때는 2루땅볼로 1루주자 아웃되며 경기 종료), 베이징 올림픽 4강전에서는 우익수 플라이를 치며 경기 종료.[7]
- 시드니 올림픽 예선전 박스스코어(일본어)
- 시드니 올림픽 3-4위전 박스스코어(일본어)
-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 박스스코어(일본어)
- 위 3개의 링크에서 9회 打 阿部를 찾으면 된다(...).[8]
- ↑ 원래는 오른손잡이지만 한신 타이거스의 레전드인 카케후 마사유키를 동경해 카케후를 모방하여 타격할 땐 왼손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카케후도 아베와 마찬가지로 치바현 출신.
- ↑ 이는 시즌 20홈런 최단경기 세계기록이다(!).
- ↑ 3할, 50타점을 넘긴 선수가 단 한명도 없다. 그래서 그나마 예전에 해준게 있는 아베가 4번 타자로 나서는것.
- ↑ 남동생은 배우 주리
- ↑ 참고로 일본프로야구 포수 통산 홈런 1위는 노무라 카츠야의 657개다. 수비형 포수를 선호하는 일본에서 저 정도의 누적스탯은 대단하다.
워낙에 먼치킨스런 성적이니 논외로 하자. - ↑ 2016시즌 양 리그 포수 중 유일하게 규정타석 진입
- ↑ 시드니 올림픽의 예선전 형식이었던 1999년 아시아 야구대회 결승전에서도 대타로 나와 마지막 타자로 삼진을 기록했다(...). 1999년 아시아 야구대회 결승전 박스스코어(일본어)
- ↑ 단 시드니 올림픽 예선전은 연장 10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