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다쓰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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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라 다쓰노리 (原辰徳)
생년월일1958년 7월 22일
국적일본
출신지후쿠오카 현 오무타 시
학력도카이대학
포지션3루수, 2루수, 1루수, 좌익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0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요미우리 자이언츠 (1981~1995)
지도자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야수종합코치 (1999)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00~2001)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02~2003)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06~2015)
198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신인왕
오카다 아키노부
(한신 타이거스)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츠다 츠네미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나카오 타카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
(1993~2001)
하라 타츠노리
(2002~2003)
호리우치 츠네오
(2004~2005)
하라 타츠노리
(2006~2015)
다카하시 요시노부
(2016~)

1 소개

일본프로야구요미우리 자이언츠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전 감독. 보살동님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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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현 오무타 시 출신으로 가나가와 현 아쓰기 시, 사가미하라 시에서 자랐으며 도카이 대학을 졸업, 198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1순위로 지명을 받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1981년 22개의 홈런과 67타점을 기록하여 신인왕을 수상했고, 1982년~1983년에는 2년 연속 최다 승리 타점을 기록, 1983년에는 103타점을 기록하여 타점왕에 오른 것과 동시에 센트럴 리그 MVP를 석권했다. 같은 4번 타자 3루수고 잘생긴 외모 덕분에 제2의 나가시마 시게오라 불릴 정도로 요미우리에서 인기가 많았던 선수.[1]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감독으로 부임한 뒤에도 티셔츠 등 굿즈 판매량은 꾸준히 많았다고 한다.

1986년 9월 2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 도중 타석에서 상대 투수였던 츠다 츠네미가 던진 공을 타격하던 와중에 왼쪽 손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면서 팀 전력에서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2]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개인 최저인 113경기 출장에 그쳤다. 그래도 그 후 부활에 성공하여 1987년과 1988년에 2년 연속 타율 3할과 30홈런을 기록하여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등 나카하타 키요시, 워렌 크로마티 등과 함께 요미우리의 중심타자로 굳건히 섰다. 1989년~1992년에는 일본프로야구 선수회 회장을 지냈다.

1995년 10월 8일에 도쿄 돔에서 열린 은퇴 경기(대 히로시마 27차전)에 출장, 타석에서 좌중간을 가르는 개인 통산 382호 홈런을 기록하며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3]

통산 성적은 1697경기 출장, 타율 2할 7푼 9리, 1675안타, 382홈런, 1093타점. 비록 카와카미 테츠하루,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 팀의 기라성 같은 레전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요미우리에서는 준 레전드 대접을 받고 있으며, 구단 측은 그의 등번호인 8번을 "준 영구결번"으로 제정했다.[4]

3 은퇴 이후

NHK 야구해설위원 등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고, 1999년~2001년에는 친정팀인 요미우리로 복귀하여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지휘하에 타격 코치를 지내며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3.1 요미우리 감독

2002년에 나가시마 감독의 후임으로 차기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부임 첫 해인 2002년에 86승 2무 52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세이부 라이온스와 맡붙은 일본시리즈에서도 4전 전승으로 세이부를 제압하고 일본프로야구 정상에 오른다. 시즌 종료 뒤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를 동시에 우승을 이끈 공로로 일본 야구계 최고 권위의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2003년에는 구단 수뇌부와의 갈등으로 2년만에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2005년 시즌 말미에 호리우치 츠네오가 팀 성적 부진으로 감독직을 사임하여 다시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5]

그러나 2006년에는 커리어 하이를 찍은 이승엽 정도를 빼면 주전 선수들의 성적 부진과 줄부상으로 악재가 겹치면서 65승 2무 79패라는 성적을 기록, 4위로 추락하여 팀이 2년 연속 B클래스(하위권을 지칭하는 일본 언론의 표현)로 기록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2007년에는 2위팀이었던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의 주니치 드래곤스와 반경기차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주니치에게 완패를 당해 일본시리즈 진출 티켓을 따내는 데는 실패했다,

2008년에는 한때 10경기 넘게 경기차가 나던 한신 타이거즈를 기록적인 막판 스퍼트 끝에 따라잡아 역전 우승을 이룬다. 이 우승은 1994년 거인의 역전우승을 일컫는 '메이크드라마'에 비견되어 '메이크레전드'라고도 칭해졌다.[6]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한신을 잡고 올라온 3위 팀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으며 일본시리즈 진출에도 성공했지만,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 맞대결에서 3승 4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일본 제일은 실패.

2008년 10월 28일에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차기 감독으로 부임하여 "사무라이 재팬(侍JAPAN, サムライジャパン)"이라는 팀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2009년 3월 24일, 결승전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연장 10회의 접전 끝에 스즈키 이치로임창용에게 적시 2루타를 때려내며 5대 3으로 승리, 팀을 2회 연속 우승을 이끄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극적 우승 때문인지 이후에도 이 슬로건은 일본 야구 국대를 상징하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된다. 같은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맡은 팀을 모두 우승시키는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사실 감독이 된 것 자체가 요미우리의 철저한 성골주의 때문이지, 그나마 젊은 덕장 외엔 감독으로서 특징같은 것은 없다는 게 당시의 평가였다. 2010년대 중반 들어와서는 곧 60을 바라보는 나이라 이제는 젊지도 않다. 그냥 일본 야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그대로 답습하는 작전 구상에 상황판단력도 그냥 그래서 은근히 호구라고 많이 까이는 감독. 게다가 말투가 좀 질질 끄는 경향이 있어 2ch 등에서는 멍청해 보인다고 자주 까인다(...). 어찌보면 오치아이 히로미츠와는 스타일 상 정반대에 서있는 감독이다.[7]

대신에 야구 외적인 인간관리 부분에 있어서는 호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 자잘한 작전 구사나 기술적인 면보다는 선수단 관리능력과 거시적 운영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일본 내의 평가이다. 또 립 서비스가 좋아 인터뷰 등에서 자기 팀 선수뿐만 아니라 상대 팀 선수들에 대해서도 칭찬을 자주 하는데 이런 점 때문에 신사감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8]

2008년까지만 해도 이승엽에 대해 상당한 신뢰를 보였으며 이승엽을 많이 변호해주고 주전으로 썼는데, 이건 선수생활 시절에 하라가 이승엽과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였기 때문에 그의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라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 야구 4강전에서 벌어질 일을 예언한 것은 그야말로 신화. 당시 한국이 일을 낸다면 승짱이 일낸다고 예언했는데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같은해 정규리그에서 극도의 부진을 보인 이승엽을 어떻게든 기용해보려 했으며, 2008년 일본시리즈에서는 7경기동안 삼진만 12개를 먹으며 .111이라는 극악의 부진을 보였는데도 이승엽을 쓰지 말라는 언론과 요미우리 OB의 압박을 물리치면서 마지막 7차전까지 끝까지 믿고 선발 라인업에 기용했다. 나는 믿을거야 이승엽 믿을거야 그리고 팀은 졌다. [9]

물론 2009년에 이승엽을 내친것은[10]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말할것도 없이 이승엽 본인이 슬럼프에서 벗어날 기미가 안보이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기가 발굴한 신인 기용에 맛들려서 이승엽이 아오안이 되어버린것(...). 실제로 하라가 발굴한 가메이 요시유키, 마쓰모토 데쓰야, 야마구치 데쓰야 등이 A급 활약을 해왔고, 그러다보니 성적 안나오는 용병을 밀래야 밀수가 없었던것.(...)[11]

그런데 2012년. 불륜 추문 및 협박 사건이 매스컴에 폭로되면서 하라 보살이라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다.# 일단 20일 사죄문을 발표했지만 야쿠자에게 협박당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미지를 중시하는 요미우리 측에서 이후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이후 유야무야 됐는지 조용한 상태다. 사실 OB측에서 이 사람을 당장 자른다고 해도 문제인게 당장 감독직을 수행할 사람이 없다. 다카하시 요시노부마쓰이 히데키가 유력한 감독 후보지만 다카하시는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팬들이 별로 지지하지 않았고 마쓰이는 막 은퇴한 후 코치로 발을 들이기 시작했지만 하라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벤치코치 등으로 최소 3년 이상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2012년에는 3년만의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했고, 2013년에는 리그 2연패를 달성한다. 일본시리즈에서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의 조력자가 되고 말았지만 결코 실패한 시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2014년 들어와서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 계기는 2014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2014년까지 우승하면서 리그 3연패까지 성공했으나 스가노 도모유키 등 주축 선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최상의 전력이 아닌 가운데 숙적 한신 타이거스를 맞게 되었다. 그래도 워낙 전력이 전력인지라 설마 어드밴티지 1승까지 먹고도 지겠냐는 분위기가 대세였으나, 상대팀의 용병 맷 머튼마우로 고메즈 등에게 두들겨맞고 마무리 오승환의 역투에 눌리면서 힘한번 못 써보고 허무하게 4연패로 어드밴티지 1승이 무색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예상도 못했던 참패로 그동안 하라 감독에 우호적이었던 구단의 분위기가 돌변하여 부정적으로 바뀌면서 지도력에 관한 말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계약 만료를 맞는 2015년 시즌은 하라 감독의 연임 여부를 결정하는 시험대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본인에게는 감독인생의 커다란 고비가 될 2015년 시즌에 하필이면 타선이 집단으로 물빠따화 하면서 투수력으로 근근히 버티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교류전에서 11위를 하는 참패에 이어 리그에 소속된 모든 팀이 승률 5할을 밑도는 막장 상황이 연출되는 가운데 구단은 시즌이 끝나가도록 재계약에 대해서 함구한 채로 있었다. 이는 구단이 하라 감독의 재계약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9월이 다 되어가도록 1위와는 닿을듯 말듯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2~3위를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후임 감독 후보에 관한 설왕설래가 언론에 보도되는 등 하라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9월 들어와서 바짝 기세를 올린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당해내지 못하고 1973년 이후의 리그 4연패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후반전 내내 안정되게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리그 2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하여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는 성공했다.

다만 이 팀은 언제나 그래왔지만 목표가 '우승으로 리그 4연패 달성'이었기 때문에 CS 진출 정도에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감독 재임기간이 10년을 넘어가면서 장기집권에 의한 피로감이 서서히 드러나는 가운데 구단 내외부로부터 현재의 성적과 물빠따로 전락한 팀 전력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12] 리그 우승은 이미 실패했고 이제 가능성이라고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의 역전으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여 우승하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일본시리즈 우승을 놓치면 경질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는 가운데 항상 자이언츠 사랑을 강조해온 하라 감독과 구단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그런 상황에서 한신 타이거스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를 2승 1패로 통과하면서 작년의 수모를 되갚아줬다. 그리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예상을 뒤엎고 1차전을 잡아내며 1승1패로 동률을 이뤘으나 이변도 거기까지. 2차전부터 내리 3연패로 파이널 스테이지 4차전에서 패배하여 탈락했다. 25이닝 연속 무득점을 이뤄낸 물타선의 활약이 압권. 결국 파이널 스테이지 탈락 직후에 구단에 사퇴 의사를 밝히고 10년에 걸친 감독 생활을 마무리 했다.# 후임 감독은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맡게 되었다.

감독 자리에 있을 때는 멍청하다, 선수 덕이다, 사람만 좋다 등등 여러가지로 비판을 받았지만, 막상 감독자리에서 사퇴하고 나자 감독으로서의 업적이 새삼 재평가를 받는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감독 재임 12년동안 센트럴리그 우승 7번, 일본시리즈 우승 3번[13]에 4위 이하는 단 1번. 통산 승률은 5할7푼2리로 구단에서 엄청난 버프를 줬던 나가시마 시게오보다도 높으며 V9 시대 이후 재임감독 중 일본시리즈 우승, 리그 우승 경력이 가장 많다. 아무리 선수가 좋은 팀을 지휘했다고 해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휘를 하면서 이정도 성적을 내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구단 측에서 후임 감독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탓에 감독 선임까지 상당한 혼란이 예상이 되고, 호리우치 츠네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준비도 없이 갑자기 감독이 된 사람이 팀을 제대로 꾸려나가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지라 자칫하면 그 분 시절을 방불케하는 암흑기의 도래도 각오를 해야 될 상황. 누가 후임 감독이 됐든 웬만큼 수완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에는 팀 분위기가 수습이 되고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분위기가 형성이 되면서 점점 평가가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퇴임후 OB 키요하라 카즈히로마약 스캔들, 요미우리 투수들이 연루된 불법 도박 사건 등 구단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터져나오는 상황이라 만약 재계약에 성공해서 감독자리에 계속 있었으면 각종 문제들에 대한 선수단 관리의 책임을 독박 쓸 상황이었는데 여러모로 험한 꼴 안보고 물러난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 어쩌면 이미 팀 분위기 돌아가는 꼴을 내부에서 미리 보고서 재계약에 크게 미련을 안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라 감독 재임 시절의 곪은 문제가 지금 터져나온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현재는 구단도 본인에게 선수단 관리의 책임을 묻고 있지는 않는 상황이며 본인도 문제의 사건들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1. 드래프트 1순위 지명당시에 "처음부터 자이언츠를 꿈꿨고 당연히 이렇게 될꺼라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3루를 맡고 싶고, 나가시마 전 감독을 목표로 하겠다"라고 했을 정도로 대놓고 나가시마의 후계자는 자신이라고 얘기했다.
  2. 츠다는 직구로만 승부하는 남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였는데, 하필 배트에 공이 정확히 맞지 않는 바람에 골절상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런 류의 부상은 생각 외로 많은데, LG 트윈스오지환도 공을 치다가 손등의 뼛조각이 떨어지는 부상을 당한 적이 있다. 물론 하라에 비한다면 경미한 수준인데, 하라의 경우 팔뼈가 세조각났다. 부상회복 후에 결국 타격폼까지 수정해야 했다.
  3. 그리고 하라의 외조카 스가노 도모유키는 이를 보고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스가노는 2013년에 교진에 입단하며 외삼촌과 재회하게 된다.
  4. 그런데 은퇴하자마라 바로 다음 해에 등번호 8번을 신인인 니시 도시히사에게 줬다. 게다가 니시에게 8번을 준 이유는 드래프트 1순위 지명의 유망주이기도 했지만 이름이 니(2)와 시(4)라서 2·4=8 이라는 이유에서(...)
  5. 그렇게 당하고도 감독 자리를 다시 맡냐는 말들에 대해, "자이언츠에 대한 제 사랑에 비하면 그런 문제는 사소한 것입니다."라는 대인배적인 발언을 남겼다. 오오 보살...
  6. 그리고 이 기록적인 DTD를 겪은 한신은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을 경질한다. "우승이야!"라는 전설의 설레발을 남겨 33-4에 버금가는 웃음거리를 남긴 건 덤이다.
  7. 하지만 둘 다 연상녀와 결혼했다.(...)
  8. 실제로 2009 WBC 결승전 직후 인터뷰에서 한국 팀에 대한 인상을 묻는 질문에 "그야말로 세계적인 수준의 팀"이라는 극찬에 가까운 표현을 했다. 물론 이겨서 기분 좋은 것도 있고 결승전까지 두번이나 패했으며 결승전에서도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접전을 펼친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개석상에서 상대 팀에게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하라의 성향이 드러난 인터뷰라고 할 수 있다.
  9. 괜히 우스갯소리로 '하라 보살' 내지는 '세계 6대 성인'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다.(참고로 세계 6대 성인은 스포츠팬들이 농반진반으로 만든 용어로 공자, 석가모니, 예수, 소크라테스에 하라와 사우스게이트를 추가해 6대 성인이라 일컫는다.)
  10. 편집전엔 '매몰차게'라는 표현이 있었으나 삭제했다. 당시 플래툰으로 이승엽을 돌려 기용한 것을 가지고 국내 언론에서 잘하는 선수를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지바 롯데 마린즈 시절처럼 플래툰으로 망치고 있다는 식으로 언플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아예 라인업에도 못 들어갈 성적의 외국인 선수를 현지에서 하라 감독도 한국계 아니냐는 소리 들어가며 플래툰으로라도 기용해주고 있다는게 당시 많은 야구팬 및 관계자들의 의견이었다. (2009년에 이승엽은 35타석 연속 무안타, 이후 24타석 연속 무안타 등 극악의 부진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이승엽을 쓰려 했다!) 괜히 '하라 보살' 별명이 나오는게 아니다. 2011년에 터진 '이승엽, 하라에게 인사하기 싫었다.'기사 사건도 국내 찌라시 기레기반일감정을 이용해서 거의 소설을 쓴 것이라는게 밝혀졌을 때도 게시판 반응은 "그럼 그렇지. 하라 감독이랑 이승엽이 그럴리가..." 라는 반응이었으니...
  11. 거기에 외야쪽에 특급신인 쵸노 히사요시까지 첫해 주전을 맡으며 맹활약한 탓에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1루로 내려오고 이승엽의 출전시간은 더더욱 줄수밖에 없었다.
  12. 그러나 2015년의 물빠따 전락은 감독보다는 선수와 코칭스탭을 잘못 구성한 프런트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이다. 2003년에도 그러더니 또 하라에게 뒤집어 씌우냐?
  13. 2번은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패배, 2번은 일본시리즈에서 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