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tle of Austerlitz.
"병사들이여, 짐은 그대들에게 만족하노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그대들은 짐이 기대했던 대담한 용맹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대들은 불멸의 영광으로 그대들의 독수리 훈장을 장식했다. 그대들은 오늘 단 하루에 러시아 제국 근위대의 군기를 포함한 40개의 깃발과 120문의 대포, 20명의 장군을 포함한 3만 명이 넘는 포로들이라는 영원히 빛날 전과를 올렸다."병사들이여, 짐의 민중들은 그대들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그대들이 '나는 아우스터리츠의 전장에 있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프랑스의 민중들은 '보라, 여기 진정한 용사가 있다.'라고 말하리라."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후의 훈시.
본격 나폴레옹 인생 최고의 순간 그리고 근성가이 인생 최악의 순간
1805년 12월 2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모라비아에 위치한 아우스터리츠[1]에서 벌어진 프랑스 제국과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간의 결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모두 참여해서 3제(三帝) 회전이라고도 한다.
오스트리아 전쟁을 종식시키고,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와해시킨 전투이며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 기간동안 나폴레옹이 보여준 최고수준의 전술적 재능이 빛난 전투였다. 나폴레옹 본인이나 프랑스 제국에게 있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으며 그의 적들에게 대체 어떻게 해야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냐는 절망과 좌절을 남겨준 전투.
1 배경
전체적인 배경은 오스트리아 전쟁과 울름 전역을 참조. 1805년 전역에서 나폴레옹의 원래 전략적 목표는 영국 상륙 후 런던을 정복하고 대프랑스 동맹의 맹주 역할을 하던 영국한테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으나, 빌뇌브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해군에 쫓겨 카디스 만에 고립되면서 나폴레옹의 영국 상륙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전쟁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가 시작도 못해보고 대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기민하게도 즉시 새로운 전략적 목표를 수립했다. 즉, 대프랑스 동맹의 맹주는 영국이지만 실제 대륙에서 대프랑스 동맹을 주도하는건 오스트리아이니 오스트리아를 두들겨패고 동맹에서 이탈시키면, 지상전에 제한이 큰 영국으로선 대프랑스 동맹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전격적인 오스트리아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은 단독으로 프랑스를 이기기 어렵다 판단하고, 동방의 강대국 러시아와 손잡고 프랑스와 그 동맹국을 공격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전격적인 기동으로 울름 전역에서 오스트리아군 주력 4만이 궤멸되고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겪는다.
이 시점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잔여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고, 결국 나폴레옹은 무혈로 수도 빈을 함락시켰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잔여 병력과 함께 도망쳐, 친정한 알렉산드로 1세의 러시아군과 합류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 주력과 오스트리아군 잔여 전력을 박살내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걸을 깨닫고, 러시아군 역시 나폴레옹만 박살내면 프랑스 제국이 무너질 것이라 판단했다.
2 전투 직전
사실 장거리 원정을 온 프랑스 입장에서는 단시간 내에 야전으로 대규모 결전을 벌여 승리하지 않으면 보급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전투시점이 11~12월로 초겨울이었다. 그런데 홈그라운드라는 오스트리아도 자국 주력이 궤멸당해서 전력 핵심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원정군인 러시아가 맡고 있었고, 아무리 오스트리아가 이들의 보급을 지원한다한들 한계에 있었다. 더군다나 수도 빈이 함락당했으니….
이런 이유와, 그동안 나폴레옹에게 신나게 두들겨터진 경험을 바탕으로 프란츠 2세와 오스트리아측 장군들은 요새에 들어가 농성하는 지연전을 제안했다. 문제는 오스트리아군이 거의 없어서 발언권이 없었다는 것. 더군다나 러시아군에 대한 보급지원도 순탄치 않았으니 러시아측은 단기결전을 원했고 결국 러시아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처음으로 부딪쳐서 나폴레옹의 전술적 천재성을 오스트리아의 허풍정도로 치부하고 있었고, 황제 알렉산드르 1세도 마찬가지였다. 총사령관 쿠투조프는 더 후퇴하여 곧 합세할 프로이센의 증원군을 기다릴 심산이었으나 전공이 고팠던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사실 쿠투조프의 말을 들었더라면 프로이센의 증원군에 길어진 보급선을 프랑스가 견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한 이후로 프랑스 내부 사정도 다소 어수선하기도 했고.
프랑스군의 전력이 분산된 것도 러시아가 결전을 하게 만드는데 한 몫했다. 다부가 이끄는 3군단이 아직 전장에 합류하지 못한 상황은 하늘이 주신 기회처럼 보였고, 다부의 3군단이 전장에 합류하기 전에 프랑스군을 신속히 격파 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3군단의 합류는 전술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지만 애시당초 병력이 5천여 명에 지나지 않아, 다부의 군세가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한다는 계획은 큰 의미가 없었다.
실제 프랑스군도 전투 직전까지 휘하 장군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에게 전술적 불리함을 주장하며 철군할 것을 제안했다. 니콜라 장드듀 술트와 조아생 뮈라, 장 란 세 원수가 철수를 제안하기로 하고 대표로 장 란이 나폴레옹과 면담하여 철수를 제안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거부했다. 나폴레옹으로선 울름 전역의 대승이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로 빛이 바래고 있고 프로이센이 참전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결정적인 대승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다른 원수와 함께 철수를 제안하기로 한 술트는, 장 란의 뒤통수를 치며 우리 4군단은 폐하를 위해 목숨바쳐 싸우고 적을 쳐바를겁니다 황제폐하 만세해서 장 란의 분노를 사 결투 신청을 받기도 했다. 역시 줄서기의 달인 술트
이때 프랑스 군의 전력 및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 총지휘관 나폴레옹 1세
- - 총병력 72,200 명 / 중포 151 문
- 제국 근위대 : 지휘관 나폴레옹 1세, 실질지휘관 장 밥티스트 베시에르
- - 병력 5,500명 / 중포 24문
- 1군단 :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
- - 병력 13,000명 / 중포 24문
- 3군단 : 루이 니콜라 다부 - 전투 당일 오전에 합류했다.
- - 4,300명(이중 기병 830) / 중포 12문
- 4군단 : 니콜라 장드듀 술트
- - 23,600명 / 중포 35문
- 5군단 : 장 란
- - 12,700명 / 중포 20문
- 척탄병사단 : 니콜라 우디노
- - 5,700명
- 기병대 : 조아생 뮈라
- - 7,400명 / 중포 36문
한편 이에 맞서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의 의사결정권은 사실상 러시아군, 특히 알렉산드로 1세에게 넘어가 있었다. 쿠투조프는 일부 오스트리아군 지휘관들과 함께 결전 회피를 제안했으나 알렉산드로 1세에게 밟히고 숙소에 짱박혀 버렸다. 거기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결전의도를 숨기고자 사신을 보내 휴전을 제안하는 훼이크를 치고 있었다.
한편, 연합군 지휘관들은 주전장 아우스터리츠에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지인 프라첸 고지를 프랑스군이 선점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오스트리아 지휘관들은 아니 그 나폴레옹이 저런 결정적 실수를?,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ㅋㅋㅋ 것보셈 나폴레옹 명성 그거 다 허언임 이러면서 프랑스군이 범한 결정적 실수를 놓치지 않고 12월 1일 프라첸 고지를 선점했다.
전투 전날인 12월 1일 오후 6시의 전장 배치도. 연합군 주력이 중앙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다. (출처 : 위키피디아)
3 전투 경과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프라첸 고지를 점령한 뒤 신나게 밀고 내려와 프랑스군의 빈약한 우익을 찌를때, 곧바로 중앙을 공격해 적을 분단시킨 뒤 포위섬멸하려고 일부러 고지를 내버려둔 것이었다
문제는 연합군의 진격이 혼선을 빚으면서(...)[2]이 계획이 엎어질 뻔했다. 어쨌거나 연합군은 텔니츠와 조콜니츠 방면에서 프랑스군을 향해 진격했고, 반담과 생일레르 휘하의 프랑스 사단은 저지대에 드리워진 연무에 몸을 맡기고 잠복 중었다.
오전 8시경, 연합군의 첫번째 종대 병력이 텔니츠 마을을 공격했고, 이 지역을 방어하던 프랑스 3 보병연대를 수차례 반복 돌격끝에 기어이 밀어내고 3연대를 골드바흐 강쪽으로 쫓아냈다. 그러자 다부가 1개 여단을 이끌고 텔니츠의 연합군을 간단히 밀어냈고, 마을 반대편까지 뚫고 들어가다가 오스트리아 경기병에게 반격당하는 바람에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연합군은 다시금 텔니츠를 점령했지만, 프랑스 포병대의 사격이 마을 입구를 뒤덮는 바람에 진격이 멈췄다.
그곳으로부터 조금 위에 있는 조콜니츠에서는 연합군 두번째 종대가 첫번째 돌격을 감행했다가 프랑스군 26경보병연대, 코르시카 저격병연대와 이탈리아 저격병연대에게 학살을 당했다. 이에 돌아버린 랑제론 장군은 포병대로 마을에 직접포격을 가한뒤 3번째 종대를 전진시켜 마침내 경보병들을 도시에서 밀어냈다. 프랑스군은 후퇴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해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마을을 재점령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반격하여 다시 조콜니츠를 점령당한다. 그렇게 연합군은 조콜니츠를 확실하게 점령......하나 했더니 다른 프랑스군 부대가 반격해서 다시 조콜니츠를 점령했다(...) 이후 계속 조콜리츠에서 난전이 벌어졌지만, 프리앙의 공격 이후 프랑스군은 조콜니츠를 완벽히 사수했고, 연합군 예비대 대다수가 이곳에서 증발하면서 전황은 나폴레옹의 계획대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2일의 아침이 밝았다.
오전 8시 반에 술트를 부른 나폴레옹은 저 고지 꼭대기에 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냐 물었고, 술트는 그 유명한 20분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생일레르의 사단이 프라첸 고지로 진격했고, 쿠투조프는 연합군의 분단을 막으려 프라첸 고지를 향해 전력을 쏟아부었지만 기껏해야 한번에 3개 대대만 동원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 고지에서 프랑스군과 그 2배에 달하는 연합군이 박터지는 싸움을 벌인 끝에 연합군의 4번째 종대는 증발하면서 연합군은 꿈도 희망도 잃은 상태에서 체념하는 듯 했지만, 여기서 또다른 연합군 병력이 나타났으니...조콜니츠에 돌격을 감행했던 2번째 종대의 일부 병력이 병맛나는 행군명령때문에 낙오했다가 곧바로 돌격해서 난전을 벌인것이다. 그들은 지친 프랑스군을 밀어내는 듯 했지만 탄약을 소진한 프랑스군의 총검돌격앞에 여름철 이슬마냥 증발해버렸고, 프랑스군은 그렇게 연합군의 중앙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반담이 술트의 또 다른 사단을 이끌고 프라첸 고지 북쪽에 우둑 솟은 슈타레 비노흐라디를 향해 돌격했다. 연합군 첫번째 부대를 코앞에서 산탄을 날리는 방식으로 제압하고 5개 대대에 달하던 두번째 부대도 파괴적인 근거리 사격전끝에 물리치며 마침내 프라첸 고지의 양쪽을 점령하는대 성공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러시아군의 남은 예비대라고는 근위대뿐이었는데, 콘스탄틴 대공은 근위대 보병들을 이끌고 프라첸언덕을 기어올라 한개 대대를 밀어내다가 두번째 대대의 사격에 격퇴당했고, 다음 이어진 공격의 주축을 맡은 근위 중기병연대가 탈진한 보병진을 갈아엎으며 프랑스 4연대를 작살내고 독수리기를 탈취했다.
이를 확인한 나폴레옹이 곧바로 너만 근위대있냐? 나도 근위대있다!라는 심정으로 근위 기마샤셰르(엽기병)연대와 기마척탄병연대를 출격시킨다. 이에 맞서 콘스탄틴은 코사크 기병대와 근위기병대를 투입하였고, 나폴레옹이 자신의 경호대대까지 쏟아부었음에도 수적 우세를 굳건히 하며 혈투를 벌였다.
어쨌든 전투는 연합군쪽으로 기울고 수적 우세가 힘을 발휘하는듯 했지만, 장 밥티스트 드루에의 프랑스 2사단이 체커대형으로 러시아군의 옆구리를 찔러 러시아군의 반격을 꺾고 프랑스 기병대를 구원했다. 뒤이어 근위 기마포병대가 방열을 마치고 러시아 기병들을 향해 산탄을 퍼붓자 러시아 기병대는 말머리를 돌렸는데, 마침 프랑스 기병대가 역습을 하려던 시점에 근위대 보병들 사이로 도망치며 대형을 흩뜨려놓는 엄청난 병크를 저질렀다. 눈앞에서 벌어진 절호의 기회에 프랑스 기병들은 그 일대를 무아지경으로 내달리며 마음껏 러시아군을 도륙했다.
그렇게 연합군 중앙이 증발하는 동안, 북쪽에서는 리히텐슈타인의 러시아 기병대가 켈레르만의 경기병사단을 향해 돌격했다. 켈레르만은 압도적인 적을 맞아 선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뒤를 봐주던 아군 보병의 배후로 물러났다. 다만 러시아 기병대가 했던 것처럼 보병들의 진형을 가르며 그 사이로 도망치는 병크는 저지르지 않았다. 뒤이어 투입된 2개 흉갑기병사단이 남은 러시아 기병대를 쫓아내며 북쪽에서도 상황이 종료되었다.
한편 상황이 이 지경이 될때까지 아무런 명령도 받지 못하고 손가락이나 빨던 바그라티온은 마침내 프라첸 고지 북쪽에서 란의 전선을 감싸기로 하며 엽병연대에 측면 우회를 명령했지만, 프랑스 17경보병연대와 노획당한 오스트리아군 경포가 뱉어내는 가공할 화력앞에 괴멸하고 후방으로 패주했다. 이득을 본 란은 반격했지만 러시아 포병대에게 격퇴당했고, 군단 포병대를 동원해 대 포병전을 감행한 끝에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러시아 포병들을 물리쳤다. 곧바로 기병대와 함께 전장으로 달려든 란은 바그라티온을 쫓아내며 패주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하려 했지만, 뮈라의 명령때문에 추격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러시아군 핵심병력이 생존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동시에 남쪽에서는 죽어라 싸운끝에 조콜니츠 성곽에 겨우 발을 걸칠 수 있었던 러시아군이 서쪽과 북쪽에서 공격을 받은끝에 전멸했고, 남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돌격한 오라일리 기병연대가 프랑스 5개 용기병연대를 물리치며 선전했지만 프랑스군 포병의 가공할 화력에 무너져내리면서 전투는 종료되었다.
12월 2일 오전 9시의 전장배치도. 연합군 좌익의 공세는 저지되었고 전선 중앙의 프라첸 고지로 술트의 군대가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 와중에 프랑스군 우익 공세에 투입되었다 마지막 돌격을 당한 연합군 좌익은 퇴로가 막혀 남쪽의 얼어붙은 사츠칸 호수를 통해 도망쳤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바라보다가 포병대에게 적병이 아닌 호수표면을 향해 포격할 것을 지시했다. 그 결과 얼어붙은 얼음이 포격으로 깨지면서 도망치던 연합군 다수가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3]
12월 2일 오후 2시, 전투종결시점의 전장배치도. 전열을 유지한 연합군 부대는 전무하며 프랑스군의 거센 추격이 이어지고 있다.
4 결과
프랑스군은 총투입병력 72,000명 중 1,305명이 전사하고 6,940명이 부상을 당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은 반면, 연합군은 총투입병력 85,000명 중 최소 15,000명 이상이 전사 내지 부상을 입었고 약 12,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보유하고 있던 120여 문의 중포를 모조리 노획당했다. 당장 가장 중요한 전리품으로 취급받는 군기만 해도 프랑스군은 1기를 잃었지만 대신 50기에 달하는 연합군 군기를 노획했다.
이런 수치상 결과 외에도 연합군은 잔존 병력을 거의 수습하지 못하여, 남은 병력으로 다시 한 번 싸워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설령 병력을 수습했다 하더라도 중포를 모조리 빼앗기고 기병대가 궤멸당해서 사실상 보병만으로 싸워야 하는데 그랬다간 백전백패인지라….
이는 연합군 지도부의 전쟁수행의지를 날려먹기에 충분했다. 프란츠 1세는 수도 빈과 주력부대까지 날려먹은 상태에서 러시아 군까지 패퇴하자 멘붕에 빠져버렸고소문엔 차르께서 도주후 질질 짜셨다고, 나폴레옹을 과소평가하던 러시아군은 처음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대육군(그랑드아르메)을 상대하며 쓴맛을 보고 이후의 대 프랑스 군사전략을 수정하게 된다.
결국 러시아는 일시적으로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했고,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화약을 맺어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모든 영토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베네치아를 프랑스의 괴뢰국 이탈리아에 할양하며 4,000만 프랑을 배상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 돈으로 아우스터리츠 참전자들에게 인당 200프랑을 포상으로 뿌리고 유족과 부상자들에게도 연금과 위로금을 지급했다.
이로서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로 촉발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유럽의 전통적 강대국으로 프랑스와 자웅을 겨루던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았고, 러시아는 잔뜩 움츠러들었으며, 참전을 고려하던 프로이센은 즉시 군사를 거두고 침묵했다. 그리고 대프랑스 동맹을 주도한 영국은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가 빛이 바래면서 내각이 교체되었다. 특히 떡갈나무 전함과 황금으로 나폴레옹을 무너뜨리려 무던히 힘을 썼던 영국 수상 소 윌리엄 피트는 "앞으로 10년정도는 지도 따윈 필요 없을 것"(Roll up that map; it will not be wanted these ten years)이라는 말을 남기고 저승으로 호적을 이전했다.[4]
5 의의
후대 전사가들은 나폴레옹이 치른 수많은 전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전투로 아우스터리츠를 가장 많이 고른다. 그만큼 전술적으로 완벽하기 그지 없는 전투인데, 전장지형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의도를 숨기며 적이 패배의 길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게 유도하는데 성공하고, 보병, 포병, 기병 3개의 군종을 적절하게 운용하여 최고의 효율성을 보여주고, 휘하 원수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적재적소로 투입시키고, 완벽한 타이밍의 공격으로 말 그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완벽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만약 1815년의 나폴레옹이 이때와 똑같았다면 워털루 전투쯤은 껌도 아닐 거라는 소리도 있다.(…)
진짜 흠잡을 곳이 없는 전투인데, 때문에 일부 전사가들은 오히려 여기서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된다는 의견도 제시한다. 아우스터리츠에서 너무 완벽하게 이겨서, 나폴레옹이 ㅋㅋㅋ 나 절라 짱 세네? 씨바 아무도 나를 막을 순 없으셈 ㅋㅋ 하는 생각에 빠져들어서 이후의 대외정책에서 외교보다는 군사적 해결책에만 매달리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케다 리요코의 에로이카에서는 부하 장군들이 이대로 러시아군을 멀쩡히 보내주면 나중에 철저하게 준비해서 쳐들어올 것이니 끝까지 쫓아가서 박살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나폴레옹은 껄껄 웃으며 무시하는데.. 러시아 원정후에 결국 진짜 그렇게 되어버린다.
파리 오스테를리츠 역은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만들어진 역이다.
6 미디어
1960년작 영화 아우스터리츠가 바로 이 전투를 그리고 있다. 정확히는 영화의 전반부는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뒤이은 정치적 환경을, 후반부가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보여주는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다루는 유일한 영화로 남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을 다루는 영화 중 워털루가 신나게 쪽박을 차면서 이후로 나폴레옹 전쟁의 영화화는 거의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역작 '전쟁과 평화'에서도 중요한 에피소드로 다뤄지는데, 이 소설을 영화화한 1967년작 소련 영화에서도 수만 명에 달하는 엑스트라가 동원되어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묘사했다. 다만, 이쪽은 전쟁영화가 아니라 그냥 소설을 영화화한 케이스.
일본의 하세가와 테츠야가 연재한 만화 진정남 나폴레옹에선 1권의 핵심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 현재 체코 남모라바 주 브르노 동쪽에 위치한 슬라브코프우브르나
- ↑ 랑제론 백작의 군대가 리이텐슈타인의 기병대를 통과하기위해 멈춰섰다.
- ↑ 얼음에 포격을 해서 연합군 다수를 차가운 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것은 도시전설에 불과하단 말도 있다. 프랑스 군의 포격이 아니라, 얼음 위로 대포같은 무거운 짐을 옮기다 얼음이 깨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물에 빠진 연합군 수천 명도 곧 프랑스 군에게 구조된다. 실제로 전투가 끝나고 며칠 후 나폴레옹이 명령하여 물을 다 빼고 보니 사람의 시체는 2구 정도만 나왔고 오히려 말의 시체가 150구 정도 나왔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나폴레옹 블로거 Nasica의 글 아우스테를리츠의 태양을 참조할 것
- ↑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지도로 국경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미. 그의 말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는데 아우스터리츠 전투 후 10년이 지나서 워털루 전투가 펼쳐지고 나폴레옹의 전설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