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 전투


워털루 전투
날짜
1815년 6월 18일
장소
벨기에 워털루 인근
교전국교전국1교전국2
대영제국
프로이센
프랑스 제국
지휘관아서 웰즐리
게브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미셸 네
엠마누엘 그루시
니콜라 장드듀 술트
병력영국군 68,000명
프로이센군 45,000명
나폴레옹군 72,000명
그루시군 33,000명
피해 규모영국군 : 1만 5000명
프로이센군 8000명
총 피해 2만 3000명
2만 5000명 사상
9000명 포로
1만 5000명 실종
총 피해 4만 9000명
결과
대불연합군의 승리
기타
약 20년간 전 유럽을 쥐고 흔들었던 나폴레옹의 완벽한 몰락

영어 : Battle of Waterloo
프랑스어 : Bataille de Waterloo
독어 : Schlacht von Waterloo

1 개요

1815년 6월에 벨기에워털루에서 나폴레옹프랑스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의 대프랑스 연합군이 싸운 전투. 이 전투로 나폴레옹은 완전히 몰락하고,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다.

흔히 이 전쟁이 '워털루'에서 일어났다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워털루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9마일 떨어진 곳으로 영국군이 작전 본부를 설치한 곳이다. 실제적인 전투지는 플랑스누아 마을과 몽생장 마을 사이에서 남쪽으로 약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2 배경

엘바 섬에서 탈출한 뒤 강력한 카리스마로 군대와 정부, 그리고 민심을 장악하고 재집권한 나폴레옹은 일단 유럽 각국에 화평교섭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당시 네덜란드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손들이라는 강력한 자존심을 가졌으며 나폴레옹에게 지겹게 패배를 당해서 나폴레옹에 대한 악감정이 극도로 올라가있던 프로이센군이 가장 먼저 프랑스를 향해 출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나폴레옹은 대불동맹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할 생각으로 기존의 정예부대에 급조한 부대를 추가한 12만 8천명의 군대를 통솔하여 급히 벨기에로 전진했다.

3 시작

일단 나폴레옹이 이끄는 본대는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블뤼허 원수의 프로이센군을 확실하게 격파하는데 성공하지만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군을 너무 얕보고 추격 지시를 너무 늦게 내린 탓에 프로이센군 역시 퇴각에 성공하며 프로이센군은 완파되는것만은 간신히 모면하고, 같은 날 미셸 네 원수가 이끄는 부대는 카르트 브라에서 영국군을 기습하고도 큰 타격을 입히는데 실패한다.

프로이센군이 격퇴당했다는 것을 안 영국군 사령관 웰링턴 공작은 일단 부대를 워털루 인근으로 후퇴시키고, 위고몽과 라 에 상트 두곳의 대형 농장을 요새화 하여 프랑스군의 진격을 방해할 준비를 한다.

프로이센군을 격퇴시키기는 했지만, 섬멸에는 실패한 나폴레옹은 이들이 다시 연합군에 합류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엠마누엘 그루시 원수에게 병력 33,000명을 맡겨서 뒤늦게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게 하는데, 결국 잡으라는 프로이센군은 못 잡고 정찰을 소홀히 해서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소모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이 가용 가능한 전체 병력의 1/3이 엉뚱한 곳에서 시간낭비 했다. 거기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이 벌써 리니에서 사실상 완파되었으며 그랬어야 된다고 믿고서는 지나치게 프로이센군을 경멸하다 뒤늦게 웰링턴을 측면에서 기습할 기회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자 그제서야 그루시에게 33,000명의 기병위주로 구성된 병력을 보내 프로이센을 추격하게 한 것이다. 참고로 영국군에 대한 기습은 네 원수의 실책으로 실패했다.

사실 리니 전투 후에 곧바로 프로이센군을 여러차례 추격하여 섬멸해야 된다고 적극 권유한 지휘관은 그루시였다. 비록 워털루에서 큰 실책을 했고 융통성이 부족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루시도 실전경험 많고 많은 전공을 세웠던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었으며 바보는 분명히 아니었다. 단지 기병 지휘에 적합한 지휘관이었다는 점과 부적합한 자리에 배치된게 문제점이었다.

나폴레옹은 분할한 병력 33,000명이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는 사이에 나머지 병력 주력을 영국군에게 집중시켜 섬멸할 생각으로 6월 17일까지 영국군 진지 근처로 이동, 6월 18일 아침부터 공세를 개시하려 했다. 그러나 6월 17일 밤동안 많은 비가 내려 진창이 많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포병대 방열과 포격 효율을 위해[1] 땅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작전 개시 시간을 네시간 미룬다. 이것이 패인 중 한가지였지만 위의 설명대로 진창에서 곧바로 포병대를 운용했으면 포병들은 너무 일찍 지쳐서 프랑스군이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 되었기에 나폴레옹의 이 결정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어느 연구팀에서 12파운드 대포로 당시 워털루 진흙지대에서 실험한 결과 건장한 남자들이 했는데도 혈액에 피로물질인 젖산이 누적되면서 피로도가 너무 올라가 금방 완전히 지쳐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4 전개

11시 25분, 프랑스군은 데를롱의 제1군단을 시작으로 영국군에 대한 파상공세를 시작하지만, 위고몽과 라 에 상트의 요새화된 농가가 방해가 되었다. 이 두 농장은 연합군의 우익과 중앙을 노리는 프랑스군의 전진을 방해할 수 있는 요충지로서, 특히 위고몽은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우익을 공격하기 위해 우회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크기가 컸다. 이 두 거점의 전술적 중요성을 간파한 웰링턴은 위고몽에는 콜드스트림 근위연대, 라 에 상트에는 왕립 독일인 군단이라는 정예부대들을 수비대로 각각 배치해둔 상태였다. 게다가 급조한 부대의 전력이 낮았고 위고몽 공략을 맡은 제롬 보나파르트[2]의 영 좋지 못한 지휘까지 겹쳐 프랑스군은 영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한다.

그래도 한때 도끼로 위고몽 농장의 북쪽 대문을 때려부순 프랑스 보병들이 마당으로 난입하여 농장을 거의 함락시킬 뻔하였으나, 콜드스트림 근위연대의 맥도넬 대령과 4명의 연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농장 안쪽의 저택 문을 닫아 간신히 프랑스군을 막는 데 성공했다. 이들의 영웅적인 활약은 전투가 끝난 뒤 웰링턴에게 승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활약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 후 위고몽 농장의 저택은 프랑스군 곡사포대의 맹렬한 포격을 받고 불타버렸지만, 콜드스트림 근위연대는 강철 같은 군기와 증원병력에 힘입어 전투가 끝날 때까지 거점인 나머지 건물들을 사수해냈다. 결국 프랑스군은 영국군에 속해있던 네덜란드 부대를 괴멸시키고, 라 에 상트와 위고몽을 포위하는 정도의 성과만 거둔다.

영국군은 예비 전력인 토마스 픽튼의 제5사단이 출격, 라 에 상트를 포위하던 프랑스군을 쫓아내는데 성공하지만, 사단장인 토마스 픽튼이 전사한다. 영화 워털루에서 혼자 군복이 아닌 사복 정장을 입고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람(존 홉킨스 분)이 그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로, 급히 전투에 참여하느라 군복 등의 개인 물품을 챙기지 못해서 사복을 입고 싸운 것.

사단장의 전사와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5사단이 괴멸위기에 빠지자, 옥스브릿지 백작 휘하의 영국 기병 2개 여단 [3]이 프랑스군을 급습, 제5사단을 구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기세가 올라버린 영국 기병대는 그대로 프랑스군 주력을 향해 돌진하고 만다. 이 돌격으로 프랑스군 보병과 포병은 5,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군기 2개를 탈취당했고 일부 포대가 피해를 입었지만, 그러는 동안 프랑스군의 퀴레시어울란 폴란드 근위 창기병을 중심으로 한 기병대가 편성되어 반격, 연속된 돌진으로 지쳐있던 영국 기병대의 40%를 쓸어버린다. 이 손실로 영국 기병대는 이후 이날의 전투에서 더이상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 거기다 그 피해입은 40%는 영국군 중기병의 대부분이었다.

15:00가 되자, 몸이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약간의 휴식을 갖기로 하고 네 원수에게 지휘를 맡기고 막사로 들아간다. 최상의 컨디션에서도 승패를 가늠하기 힘든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동안 토막잠을 자며 폭식과 속식(빨리먹기)을 하고 거친 야전생활을 한 결과로 인해 몸이 망가져서 여러가지 잔병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나폴레옹은 치질을 앓고 있었는데, 으악 그 전날밤 고통이 심해지자 주치의는 아편을 처방했다고 전한다. 아편의 과다한 복용으로 그 날 나폴레옹은 반 혼수 상태가 되었고 그 결과... 역사를 바꾼 여러모로 무서운 치질! 일부에서는 고혈압이었다는 말도 있다.

네 원수는 라 에 상트에 공세를 가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라 에 상트에 주둔한 영국군은 습격한 프랑스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었지만 머스켓보다 훨씬 명중률이 높은 강선총(라이플)으로 무장한 소수 정예부대였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이 무렵 영국군이 프랑스군과의 전투로 피해가 큰 부대를 비교적 피해가 적은 부대와 교대하는 것을 "영국군이 흔들리는 것으로" 오판한 네는 보병포병을 기다리지 않고, 퀴레시어 2개 사단에 근위대 기마 샤쇠르들까지 더해 40개 대대에 달하는 거의 대부분의 프랑스군 기병대를 이끌고, 사각형의 대기병 방진을 완성하고 기다리던 대규모의 보병대 속으로 돌격해 들어간다. 보병 사각대형은 기병 돌격을 저지하기 위한 대형인대, 여기에 그냥 돌격해 들어가는 것은 당대 전투에서 하지 말아야할 미친 짓 중 하나였다.

고전시대 전투로치면 이러한 무모한 기병돌격은 비문명부족들이 로마군의 잘 짜여진 레기온 대형으로 돌격했다가 스크툼을 못 뚫고 개발살나는 것과 같은 꼴이다. 그나마 궁병과 보병이 분리되어있던 중세때에는 랜스차징을 계속 때려박는 것으로 대형을 흔들 수 있었지만, 총기에 총검까지 등장한 이후에는 돌격하다가 머스킷 세례를 받고, 충격을 가하다가 창검에 찔리는 막장사태가 벌어질 뿐(...)

사각밀집 대형을 깨기 위해서는 포병대를 동원하여 미리 진형을 깨놓아야한다. 굳이 돌격으로 진형을 무너뜨리고 싶다면 반드시 보병기병이 동시에 취약점인 모서리를 노려 돌격해 들어가야만 했다. 기병만 돌격해 들어갔다가는, 설령 모서리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더라도, 반대편쪽 보병들이 등을 돌려 총검으로 쿡쿡 쑤시는 결과만 나올 뿐이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복구되어있는 사각대형을 보게 될 것이다. (...)

물론, 죽어라고 포격을 가하는 것도, 보병을 돌격 시키는 것도 사각밀집 대형을 억지로 깨기엔 영 좋지 않은 선택이다. 밀집대형의 대표주자 테르시오가 몰락하면서도 단 한번도 진형이 깨지는 사태는 일으킨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결국 프랑스 제국군은 단 몇시간 전 영국군이 그랬던 것처럼 기병대의 상당수를 잃는다.

영화 워털루에서 재현한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

일반적으로 프랑스 제국군의 성급한 기병 돌격은 네 원수의 역사를 바꾼 실책로 평가하는 일이 많지만 여기에도 반론이 있다.

프랑스 역사가들이 선호하는 음모론이 아니라 실수 이론에 근거를 둔 스미스의 설명에 따르면, 핵심 인물은 2근위기마창병연대의 대위 프르튀네 드 브라크다. 경기병 연대에서는 비교적 말단에 속했던 브라크는 폰슨비의 유니언 여단을 분쇄하는 데 참여했다. 전투가 끝나고 20년이 지난 후, 브라크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네가 너무 이르게 돌격하여 재앙을 불러온 데는 자신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고백했다. 유니언 여단에 맞서 성공을 거둔 데 과도하게 흥분한 브라크는 영국 동맹군 전선의 움직임을 퇴각으로 오인하고 큰 목소리로 공격을 요구했다. 그러자 브라크 주변의 장교들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 앞서 나왔다. 브라크의 말을 빌리자면, 그 결과 “우리 연대의 우측 대열이 장교들의 뒤를 따랐다.” 연대 전체가 자동적으로 이 이동을 따라했는데 이는 단순히 “대열을 맞추기”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접 연대인 근위대의 기마추격병연대도 똑같이 이동하고 나니, “오른쪽에서 겨우 몇 걸음” 더 나갔을 뿐이었으나 말의 정렬선 아래로 더 내려가 전진은 “더욱 명확해졌다.” 그래서 네 원수가 돌격 명령을 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용기병 연대와 근위기마척탄병연대까지 이를 따라할 즈음이면, 이들은 실제로 그 명령이 내려졌다고 믿었다. 브라크가 설명했듯이, “그들은 출발했고, 우리는 뒤따랐다.”

[4]

이 설에 따르면 영국군이 후퇴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확인하기 위해 장교들이 열을 맞추어 걸어가던 것을 인접한 연대가 같이 움직인 것을 전진 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착각하고 적군인 영국군에 대한 큰 적대심과 전공을 빨리 세우고 싶어 흥분한 상태로 돌격 명령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기병대가 이때다 하고 멋대로 닥돌해버린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겠지만 통신기 같은 게 없던 전근대의 전쟁에서는 명령을 전달하는 수단이 매우 열악했고 그 때문에 명령이 잘못 전달되어 일이 망하는 경우가 흔했다[5]. 사실이라면 역사를 바꾼 삽질이 아니라 역사를 바꾼 착각(혹은 실수)이라 해야 할 듯. 거기에 사람의 심리란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것이라 기병대의 자존심과 적군인 영국군에 대한 강력한 적대심과 전공에 대한 욕심 등이 복합적으로 겹쳐서 일이 복잡하게 되어 망친 것이다.

오스프리에서 발간한 워털루에서는 네 원수가 기병 1개 여단만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라고 했는데 무슨 일인지 기병대 전체가 극도로 흥분하며 나머지 기병대까지 명령이 없는데도 돌격했다고 적혀있다. 위에서 말한 통신의 부재와 심리가 겹쳐 일이 완전히 망가진 사례라고 하겠다.

어쨌든 프랑스 기병들은 고지 점령 자체는 성공했다. 하지만 후속 보병부대가 없으니 영국군 대포를 쓰지도 못하고, 못을 박아서 고장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금속덩어리인 대포를 완전히 파괴할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경우는 그야말로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를 박는 부분에 머리 없는 나무못이나 구리못을 박아넣어서 대포를 일시적으로 못 쓰게 만들 수 있는데 전장에서 당장 이걸 수리할 수도 없으니 포병대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기병대의 일부 인원이 머리없는 나무못이나 구리못과 망치를 가지고 다녔는데 하필이면 이 사람들이 전부 전사했다! 결국 대포를 멀쩡하게 놔두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을 피해 블랙와치연대와 브라운슈바이크보병연대 등이 짠 방진 속으로 피신했던 영국 포병들은 다시 방진에서 나와 프랑스 기병대에게 맹렬히 산탄 사격을 퍼부었다.[6] 결국 프랑스 기병은 영국군의 반격을 받아서 대부분 박살이 나버렸다. 물론 의무실에서 전선으로 돌아오다가 이걸 본 나폴레옹은 너무나 기가 막혀서 정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기병이 보병과 포병의 지원도 없이 단독으로 공격하면 어떡하며 나폴레옹 자신이 모든일을 직접 전부 처리해야 하냐며 네 원수를 크게 질책했다.

이 무렵, 격파되었던 부대를 수습한 블뤼허는 와브르에 견제할 부대를 놔두고 워털루 방면으로 진격, 17:00경에 전초부대가 프랑스군의 우익 후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군 전초부대는 프랑스의 급조부대인 청년근위대와 교전 했는데, 급조된 부대이지만 사기는 높았던 이들은 프로이센군의 선두부대는 격파했으나 프로이센군이 계속 증원되자 밀렸으며 프로이센군은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프랑스의 전략 예비대였던 프랑스 제국 근위대가 급파되었고, 이들 단 두개 대대에게[7] 프로이센군은 14개 대대가 완전히 박살이 나면서 후퇴했다. 하지만 재차 이은 공격으로 블뤼허의 1군이 전장에 도착할 길을 여는데 성공했다.

5 절정

그루쉬! 그루쉬는 어딨는가!!

18:00 무렵, 기병대만으로 들이밀었다가 실패했던 네 원수는 뒤늦게 보병-기병-포병을 제대로 조합한 전력으로 영국군 본대를 압박했고, 라 에 상트 농장을 지키던 영국군 400명 중 40명만이 살아남았을 정도로 처절한 육박전 끝에 드디어 라 에 상트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8] 이번 프랑스군의 공격은 효과적이어서 영국군은 중앙에서 효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막아주던 요새를 잃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군의 포격에 피해가 누적되어 위기상황이었다.[9]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기병대가 대파된 후에 프랑스군은 제대로 공격도 못하다 프로이센군이 오면서 패한 것으로 알지만 사실 영국군도 피해가 매우 커서 프로이센군이 지원 오지 않으면 프랑스군에게 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 원수도 다혈질에 성질 급한 성격이라 실책은 많이 했지만 바보짓만 한 것은 아니었다.

참고로 이 시점에서 그루시는 여전히 프로이센 본대를 찾아 해매고 있었다.(...)[10] 게다가 휘하 장교들이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을 듣고 한참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황제를 도우러 가자고 애청하고 있었으나, 그루시는 처음 받은 명령이 프로이센군 추격이었으니 계속 가자라고 하여 가망없는 추격을 지속한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뒤늦게 그루시에게 당장 돌아오라는 전령을 이미 보냈다. 문제는 전령을 한 명만 보냈고 이 사람이 중간에 실종돼서 연락이 안갔다. 원인은 전령을 보낸 참모총장 술트...나중에 "베르티에라면 20명은 보냈을 거라고!" 라며 질책했다지만 '야전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출중해도 참모총장으로서의 능력은 절대 기대할 수 없었던' 술트를 참모총장에 임명한 게 바로 나폴레옹 자신이다. 뭐 그루시도 마찬가지이지만.

참고로 실제로는 나폴레옹이 그루시 원수에게 보낸 최종 명령서에는 본대와 합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최종적으로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 거기에 시점으로 볼때도 현실적으로 합류하러 가기는 늦은 상태였다.

만약 그루시가 병력을 돌려 본대에 최소한 프로이센군과 비슷한 시간대에라도 합류했으면 프로이센군의 합류에 상관없이 워털루 전투는 프랑스군이 승리했을 확률이 높았다.

네 원수는 라에 상트 점령후에 궁지에 몰린 영국군을 확실히 제압하려고 나폴레옹에게 보병의 추가지원을 요청하지만 네 원수의 앞선 실책으로 단단히 화가 나있고 측면에서 프로이센군의 견제를 위해 제국 근위대를 배치해야 했던 나폴레옹은 결정타를 날리려는 네의 병력 지원요청에 "보병을 더 지원해 달라고? 대체 어디에서 보병을 데려오라는 말이냐? 너는 내가 보병을 만들어내는 줄 아느냐?"며 거부했다고 한다. 거기다 이미 프로이센군이 가까이 접근하고 있어서 그 부분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던것이 사실이었다.

한편, 프랑스군 역시 거의 전 병력이 영국군과 싸우고 있었던 데다가, 프로이센군이 계속 증강되어 되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아껴 두었던 최후의 예비대인 근위대로 영국군의 중앙을 돌파하기로 하고, 부대의 사기 유지를 위해 접근해 오는 프로이센군을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러 갔던 그루시의 부대가 돌아오는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트리게 했다.

그래도 뒤늦게 근위대 6개대대를 중심으로 삼은 돌파부대가 영국군의 중앙을 돌파하기 위해 전진했지만, 공격 준비까지 시간이 걸려 구멍투성이였던 영국군 중앙은 어렵게나마 거의 메꾸어져 있는 상태였다. 결국 나폴레옹 황제의 프랑스 제국 근위대는 예상외로 강력한 영국군의 저항을 받으며 전진했고, 결국 영국군 근위 보병대와 52경보병연대의 맹공에 전진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영국군도 거의 전면붕괴 직전까지 몰렸고 결국 전세가 나폴레옹에게 유리해져갔다. 영국군 사령관 웰링턴은 블뤼허가 당장 오지 않는다면 모두 저세상에서 만날거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렇지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연사속도를 자랑하는 영국군의 사격에 프랑스군의 피해가 누적되어 갔으며, 예비대가 없어서 반토막난 19보병연대까지 투입했으나 그대로 소모되어버릴 정도로 프랑스군도 타격을 입었다.

6 결과

이로써 나폴레옹이 가진 모든 카드가 바닥나고, 모든 전선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은 막혀버렸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일진일퇴를 하며 영국군과 싸웠으며 조금씩 영국군을 밀어붙였으나 때맞춰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 나폴레옹의 거짓말이 들통나, 전 프랑스군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특히 프로이센군을 그루시 부대로 속인 탓에 "그루시가 배신했다"는 소문이 퍼져 프랑스군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이 때 프로이센군도 블뤼허의 본군인 1군단이 전선에 도착하여, 프랑스군은 앞뒤로 포위당한 상태로 패배했다. 피에르 캉브론이 지휘하는 나폴레옹 근위대의 잔여 병력들은 나폴레옹과 주요지휘관/참모들의 퇴각로를 열기 위해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괴멸되었다.이 당시의 야사로 다음의 이야기가 있다. 완전히 포위된 근위대 부대에게 영국군이 항복을 권유했는데, 캉브론은 이를 거절하고 결국 집중사격에 괴멸했다. 그 와중에도 정작 캉브론 본인은 살아남았다. 캉브론이 항복을 거절할 때 한 대답은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그나마 점잖게 "근위대는 죽어도 항복하지는 않는다! (La garde meurt et ne se rend pas!)"라고 대답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대놓고 "Merde!"(직역하면 ''. 의역하면 '좆까', '엿먹어라' 정도의 욕설)라고 외쳤다는 설이다. 빅토르 위고는 작품인 레 미제라블에서 워털루 전투를 묘사하면서, 캉브론이 후자의 'merde'를 외쳤다고 보고 이에 대해 '프랑스인이 한 말 중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말'(...)이라고 평가를 내렸다.

22:00에 웰링턴과 블뤼허가 만나, 이후 추격은 지친 영국군 대신 별로 안 싸워서 체력이 충분한 프로이센군이 맡기로 합의를 하는 것으로 워털루 전투는 영국과 프로이센이 간발의 차로 간신히 승리를 따내며 막을 내렸다. 간발의 차로 라는걸 강조하는 이유는 상황을 보듯이 나폴레옹의 의지와는 다르게 난장판인 전투가 되어가는데 불구 웰링턴은 블뤼허가 오지 않으면 죽음뿐이라고 초조해 하고 있었고 실제로 상황이 영국군에게 불리했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그루시보다 블뤼허가 도착 전투는 끝났다. 만약 그루시 원수의 33000명의 프랑스군이 최소한 프로이센군과 비슷하게라도 워털루에 도착했다면 워털루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합류에 관계없이 정말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이겼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전투였다.

그동안 그루시는 와브르에서 프로이센의 유인부대를 섬멸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파리로 달아나는데는 성공한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 국민들의 사기는 곤두박질 쳤고, 나폴레옹의 정예부대는 영국군에 의해 거의 소멸되었으며, 측근의 배신과 왕당파의 재등장으로 나폴레옹은 사면초가에 빠져버렸다. 이 상황에 이르자 나폴레옹은 정적들을 피해 영국에 망명하는 길을 택했고, 자신은 영국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기를 희망했지만, 영국 정부는 그를 남대서양의 오지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보냈고, 나폴레옹은 거기서 사망했다.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에서 나폴레옹은 워털루에 대해 이런 구술을 남겼다. "패자의 명예도 타격받지 않았고, 승자의 명예도 드높아지지 않은 이상한 승리였다. 패자는 그 파괴를 뛰어넘어 기억될 것이고, 승자는 어쩌면 잊힐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은 부분적으로 사실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세계사의 중요한 인물로 꼽히고 있고, 블뤼허는 그에 비하면 상당히 이름이 덜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말한 것과 다르게 아서 웰즐리는 전혀 잊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웰링턴 공작은 여전히 당대 최고의 명장 중 하나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워털루를 언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과 웰링턴. 수많은 소설, 만화, 영화에서 역시 나폴레옹을 물리친 라이벌로 나온다. 게임 같은 걸 봐도 나폴레옹에게 뒤지지 않는 능력치를 보유하며 심지어 미국의 최대 금융기업인 뱅가드 그룹 및 그룹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평가받는 웰링턴매니지먼트조차 웰링턴의 이름을 딴 것이다. 물론 명장으로써 평가하면 나폴레옹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11]

7 평가

팔씨름에 비유하자면 나폴레옹의 맹공을 손목꺾기로 버티던 웰링턴이 블뤼허의 지원으로 승리했다
영국군은 애초에 웰링턴의 심각한 오판으로 카르트 브라에서 기습을 당했지만, 프랑스군 역시 의도한 기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력의 손실이 비교적 적은 상태로 계획했던 전장인 워털루 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맞아 싸울 수 있었으며, 이전의 전쟁에서 비교적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패배가 적어 정예부대가 많이 유지되었으나 영국군 역시 반도전쟁에서 싸웠던 수준의 정예부대는 아니었다. 나폴레옹이 엘바로 유폐된 직후 많은 부대가 해체 되고, 일부 부대는 북아메리카로 파견되어 영국과 미국전쟁에 투입되어 있었으며, 고참 정예병들은 제대하거나 예비역이 되었다. 워털루 전투에는 이런 예비역들이 다 복귀 하지 않아서 상당수의 부대들이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는 신병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위고몽과 라 에 상트의 두 요새가 엄청나게 잘 버텨준 덕에 프로이센군이 올 때까지 프랑스군을 막아낼 수 있었다.

프로이센군은 이래저래 나폴레옹에게 계속 털려왔기 때문에 정예부대라고 할만한 부대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고, 리니에서 작전상의 우를 범해 리니 전투에서 대패하며 전멸 직전까지 몰렸지만, 프로이센군을 너무 경멸하며 끝까지 추격하여 전멸시키지 않았던 나폴레옹 황제의 자만심과 블뤼허의 나폴레옹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뛰어난 상황판단과 결단으로 워털루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의 인사 기용에서 부터 문제를 보였다. 후방에서 일어난 배신과 반란으로 이전 전쟁에서 졌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뮈라 원수 등 배신 경력이 있는 지휘관들은 부르지도 않았고, 최고의 야전 지휘관인 루이 니콜라 다부 나 베르티에가 없는 상황에서 최고의 참모장이라고 할수 있으며 참모장 경험이 많고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루이 가브리엘 쉬셰 등의 유능한 장군들을 너무 많이 후방에 배치한데다가, 참모 경험이 없는 [[니콜라 장드듀 술트|]] 원수를 참모장으로 기용하는 이상한 인선을 저질렀다. 사실 술트 원수는 스페인에서 웰링턴을 여러번 상대한 경험이 있어 웰링턴의 성격과 전술을 잘 알고 있으며 전술적 능력이 탁월하여 웰링턴을 막는데 배치해야 했고 나폴레옹 황제 자신의 대리 지휘관을 맡길 것이면 네 대신 다부 원수에게 맡겨야 했었다. 다부는 냉정 침착하고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한명이어서 최소한 일을 망치지는 않을 인물이었다. 사실 나폴레옹이 다부에게 프랑스를 맡긴 이유는 그전에 파리가 함락될당시 지키라고 했더니 싸우지도않고 수비하라고 맡겨둿더니 항복한 나폴레옹의 무능한 형 때문에 가장 믿을수 있는 부하들 중 한명인 유능한 다부에게 맡긴거였다.

전선 지휘관도 실전경험이 많고 용맹하나 전략적인 안목이 부족하고 쉽게 흥분하는 성격의 미셸 네와,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었지만 지나치게 신중한데다가 사실은 내부에 암약하던 스파이였고 너무 융통성이 부족한 엠마누엘 그루시를 뽑는 실수를 범했다. 정확히 말하면 인원 배치를 잘못했다. 전술적 능력이 탁월한 술트, 뛰어난 기병대 지휘관 그루시, 저돌적이고 헌신적인 네. 이 셋 모두 유능한 인재였지만 이들의 장점은 전혀 살리지 못하고 약점만 드러나는 직위에 배치했으니 제대로 일할 리가 없던 거다. 오스프리 출간도서인 워털루에서는 유럽최강의 기병 지휘관인 뮈라가 없는 상황에서 그루시는 차라리 예비 기병대 지휘관을 맡겨야 했다고 하며 네 와 그루시를 두고 배치를 바꿔서 충동적이고 다혈질인 네가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게 하고 신중하고 정밀한 전술을 구사하는 그루시가 영국군을 상대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확신은 못해도 나름대로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결국 네는 영국군을 공략하는데 번번히 실수를 저질러 타이밍을 계속 놓쳤고, 그루시는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서도 최초의 명령인 프로이센군 추격에만 매달렸다. 참모 경험이 거의 없었던 술트는 뭘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여기에 나폴레옹은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군과 싸워본 적이 없었음에도 예전 웰링턴이 지휘하기 전의 영국군을 격파했었던 기억만으로 얕보고 작전을 세웠던 것도 문제였다. 영국군에게 패한 적이 있었던 장군들의 말에 조금만 더 귀기울였더라면 네에게 지휘를 전담하거나, 그루시에게 과도한 추격부대를 주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면 나폴레옹 자신이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추격하여 철저하게 전멸시켰거나 네 원수를 잘 통제하고 제대로 군대를 지휘했다면 이렇게까지는 결코 일을 망치치 않았겠지만 알다시피 질병과 폭우가 그것을 방해했다.

그리고 블뤼허의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심을 그까짓 것으로 너무 경멸하고 무시했던 것은 또 다른 화근이 되었다. 실제로 영국군 혐오증이 있던 부관 그나이제나우는 리니 전투에서 패한 후 후퇴하려 했으나 블뤼허가 뒤늦게 돌아오며 돌아가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공격하자고 했다. 그럴만한 능력을 가진 나폴레옹과 프랑스 군이었으나 나폴레옹 황제의 자만심이 자신들에게 악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결국 워털루의 패배의 원인은 나폴레옹 자신의 책임과 부하들의 실책, 그리고 웰링턴의 영국군을 너무 얕잡아 본 것과 블뤼허의 나폴레옹에 대한 엄청난 악감정을 무시한 것, 그리고 질병과 폭우가 복합적으로 겹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웰링턴의 승리는 그저 블뤼허의 지원빨이라며 폄하하는 의견이 간혹 보이는데, 물론 블뤼허가 오기 전까지 웰링턴 스스로가 후퇴 타이밍을 재고 있을 정도로 수세에 몰린 것은 사실이나 프랑스군도 만만치않게 피해가 누적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전투의 승패여부는 목표의 달성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에겐 그저 웰링턴을 꺾는 것이 아니라 제한시간 안에 웰링턴을 꺾는 승리조건이 주어졌고 비록 최후의 순간엔 승리를 목전에 두기도 하였으나(그러나 피로스의 승리였을 것이다) 결국 엄연히 주어진 승리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에게 옆구리를 허용하게 되었고, 그리고 패배했다. 블뤼허가 오더라도 만약 그루쉬도 함께 왔다면 만만치않게 피해를 입었어도 몰아붙이는상황에서 기세를 탄 프랑스군이 유리했겠지만, 그루쉬는 천금같은 병력을 데리고 삽질을 푸고 있었으며, 그뤼시의 삽질에 모든 책임을 떠맡기기엔 그 그루쉬를 기용한 총사령관 나폴레옹 본인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다.(보직선정도 엄연한 총사령관의 자질이다)

물론 인재난이 심각했던것도 고려해야 하지만...

8 만약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나폴레옹군은 상당히 선전했지만, 러시아 원정 이후로 잃어버린 것이 너무 컸기에 결국 워털루 전투에서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 연합군이 간신히 이겼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삽질을 많이 했음에도 말이다.[12]

일부 학자들은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더라면 저지국가들(베네룩스 3국)을 확보함으로써 자원과 새로운 군사 징발을 통해 힘을 강화할수 있었으며, 영국은 웰링턴의 패배와 함께 국채 및 주식시장이 폭락해 재정적자에 깊이 빠져 전쟁에서 손을 뗄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대륙은 다시 한번 프랑스의 주도권하에 질서를 맞이할수 있었을것이다라는 의견.

하지만 일반적인 견해는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나폴레옹은 결국은 제 2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망하였을 것이다라는게 중론이다. 웰링턴의 영국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을 간신히 이겼지만 워털루에서 이겨봤자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그 몇배의 군대가 추가로 대기중이었던 걸 고려하면 프랑스는 뒤이어 러시아랑 오스트리아 및 유럽의 피지배 국가들까지 전부 홀로 맞아 싸워야만 했으며 이들을 또 쳐부수더라도 재기한 영국 프로이센과 다시 맞싸우고 이들을 이겨도 또 대불 동맹국가들과 전투(...) 고마해 이 미친놈들아 결국 프랑스의 패배는 필연적이라는 것 역시 물량은 진리다

9 여담

프랑스 역사상 나폴레옹 제 1 제정의 종결이라는 큰 의미를 가지는 전투라서 그런지 빅토르 위고레 미제라블의 한 챕터를 동원하여 워털루 전투를 장황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세부 내용은 많이 틀려 있다. 특히 네 원수가 기병대를 돌격시킨 중대한 오판을 나폴레옹이 길잡이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저지른 오판[13]으로 잘못 기술하고 있다.

1972년 소련, 영국, 이탈리아, 미국 4개국 합작으로 영화화되었다. 엄청난 엑스트라를 동원한 대작이지만 흥행은 실패. 자세한 내용은 영화 워털루 항목 참조.

1800년대 초반 프랑스가 유럽 각국과 벌인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이라 부를 만큼 영향력이 컸던 인물의 몰락이기에 그 파급도 컸고 이 후로 meet one's waterloo (대패를 당하다) 라는 숙어도 생겨났다.

아이스드 어스의 전쟁을 컨셉으로 한 컨셉 앨범 The glorious burden에도 이 전투를 소재로 한 곡이 실려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영국, 프로이센, 질병, 폭우 그리고 자기 부하들 연합군과 싸웠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폭우와 질병 그리고 나폴레옹 자신이랑 부하들의 병크들이 웰링턴 공작과 블뤼허 공작을 크게 도와준게 되었기 때문이다.


워털루 전쟁을 묘사한 앤더슨 작곡의 짧은 피아노 소품곡이 유명하다. 피아노 명곡집에도 꼭 실려있는 인기 높은 곡으로 간결하고 연주하기 쉬운 멜로디로, 김태희, 김준현의 LG 디오스 김치톡톡 냉장고 CM송으로도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그런데 참혹한 전쟁을 묘사한 제목치고는 너무나 밝고 쾌활한 멜로디로 듣는 사람은 위화감을 느낀다.(...)

워털루 전투의 결과에 대해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패밀리 네트워크를 통해 정부 전령보다도 빠르게 영국군의 승리 소식을 입수하여 시장에서 이득을 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로스차일드가 국채를 팔기 시작하자 영국군이 패배한 것으로 오인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싸게 국채를 내놓았고, 로스차일드는 그것을 몰래 사들여 거대한 이득을 얻었다는 것. 화폐전쟁이나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책에서도 마치 진실인 양 써 놓았지만, 이 일화는 반유대주의가 한창일 당시 만들어진 루머라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이다. 1846년 파리에서 발행된 반유태주의 팸플릿에 처음 등장한 이야기이기 때문.

로스차일드에 연구했던 하버드의 교수 니얼 퍼거슨 같은 저명한 학자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 원래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이 내려진 사이 영국의 금을 프랑스로 밀수출하는 일을 해서 이득을 취했고,(프랑스로써도 영국의 금이 빠져나가면 이득이라 생각해서 막지 않은 모양) 나폴레옹 전쟁이 터진 이후로는 패밀리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금을 영국군의 군자금으로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이후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 잘못 예상하였다. 그리고 금을 대량으로 매입하였는데, 워털루 전투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나버리자 금값 폭락을 통해 손해를 크게 볼 위기에 처했던 것. 이 때 네이선은 이를 매꾸기 위해서 승부수를 띄웠고, 엄청난 자금을 들여 국채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정부 차입이 감소하고, 국채 가격이 오른다고 예상했던 것. 그리고 결국 채권 가격이 40% 상승한 고점에서 네이선은 채권을 매각했다. 로스차일드는 현재 가치로 6억 파운드 넘게 벌었다. 결국 음모 같은 것은 없었고, 예측 가능한 경제적 흐름을 절묘하게 이용하였을 뿐이다.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에서는 실제 역사와는 달리 프랑스가 영국을 이겼다고 언급. 이후 프랑스가 런던을 점령하여 영국 황실이 신대륙으로 피난가서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건국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http://i.dailymail.co.uk/i/pix/2015/06/18/article-urn:publicid:ap.org:89faeee053994d72bddb91c321f461cc-6ZNhmRqy4-HSK1-833_634x422.jpg
http://i.dailymail.co.uk/i/pix/2015/06/18/article-urn:publicid:ap.org:89faeee053994d72bddb91c321f461cc-6ZNhlusni-HSK1-110_634x395.jpg
20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 200주년을 맞아 당시 전쟁터였던 벨기에 워털루 사자의 언덕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주요 참석자로는 사진 위의 왼쪽부터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촌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 네덜란드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 아서 웰즐리의 후손인 도루 후작 아서 웰즐리[14] 미남인 건 가문 내력인듯?, 블뤼허 원수의 후손인 니콜라우스 블뤼허 폰 발슈타트 참석자 중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건 2백년 전과 마찬가지, 보나파르트 가문의 당주 장 크리스토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조상님보다는 키가 확실히 커 보인다, 벨기에 필립 국왕, 그리고 룩셈부르크 앙리 대공 등이 참석했다.

사진에 보이는 사자의 언덕 (Butte du Lion)은 1820년 네덜란드의 빌럼 I세의 명으로, 전투 당시 영국의 동맹군으로 참전한 네덜란드군을 이끌고 있었던 왕세자 (오렌지공, 후일 빌럼 II세)가 부상당한 자리에 조성하기 시작해서 1826년에 완성되었다. 원뿔 모양의 흙언덕 위에 사자 상이 세워져 있다. 이 흙은 주위의 흙을 긁어 모은 것인데 덕분에 프랑스 기병의 실패 요인으로 논란이 되는 패인 지형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자상은 프랑스군의 대포를 녹여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런거 없고 무쇠로 만든 것이다. 입장료를 내면(16유로)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는데 올라가 보면 전장이 한 눈에 보인다. 하지만 언덕이 조성된 뒤 방문한 아서 웰즐리는 빌어먹을 네덜란드 놈들이 내 전장을 다 망쳐 놓았다며 짜증을 냈다고 한다. 후에 벨기에가 독립해버려서 더이상 네덜란드 땅이 아닌곳이 되어버렸고, 관광 수입은 고스란히 벨기에가 가져가고 있다.
  1. 당시의 대포는 주퇴 복좌 장치가 없어 한번 쏘면 반동으로 원래의 포격 위치에서 한참을 이동하고, 그걸 인력으로 제자리에 돌려 놔야 한다. 그걸 진창에서 한다면 포병들은 몇 발 쏘기도 전에 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당시의 포탄은 구형의 금속 덩어리일 뿐이어서 파편을 만들지 못하며 볼링공으로 볼링핀을 때리는 식으로 적병을 때려 눕혔다. 만일 사람을 맞추지 못하고 땅에 떨어질 경우 마른 땅이면 튕겨 나오면서 다시 적병을 쓰러뜨리겠지만 진창일 경우 대부분 그냥 땅에 박히고 끝이었다.
  2. 나폴레옹의 셋째동생. 베스트팔렌의 왕으로서 러시아 원정 당시 원정군의 5개 군 중 1개 군을 지휘하는 중임을 맡았지만, 신통찮은 군재를 보여주며 나폴레옹을 번번히 실망시키기만 했다.
  3. 서머셋 소장 휘하 제 1 근위 기병 여단, 포손비 소장 휘하 제 2 혼성 여단. 2 혼성 여단은 제 1 근위 용기병 연대, 제 2 용기병 연대 "스카츠 그레이", 제 6 용기병 연대 "이니스킬링스"로 구성되었다.
  4. 나폴레옹의 마지막 도박, 앤드루 로버츠 저 p77
  5.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크림 전쟁 당시 벌어진 발라클라바 전투. 심지어 이는 전근대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잘 싸웠다는 소리를 들은 동부전선에서도 한 소대가 부득이하게 철수하는 것을 전면적인 철수명령으로 착각해 인근의 다른 부대들까지 덩달아 철수하다가 전선이 밀려버린 사례가 있다(...) 그것이 바로 현리 전투.
  6. 출처는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KODEF 세계 전쟁사 나폴레옹 전쟁
  7. 이들은 청년 근위대로 추정된다
  8. 이때 라 에 상트 주둔군의 탄약이 바닥났다. 보급은 프랑스군 때문에 불가능했었다.
  9. 포격을 받으면서도 방진을 유지한 것은 포격에 대비하는 틈을 타서 보병과 기병이 공격해올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0. 다만 허송세월을 보내고있었던 것은 아니고 워털루에서의 전투가 한창 절정에 달할 즈음에 블뤼허의 4개 군단 중 1개 군단과 교전을 벌이기는 했다. 문제는 블뤼허가 후위부대로 남겨둔 군단인데도 이들과 교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
  11. 오히려 워털루전투의 최대 수혜자가 웰링턴이다. 웰링턴의 주 활동 무대는 이베리아 반도 전역인데 나폴레옹 전쟁에서 분명히 나폴레옹의 몰락에 러시아 전역에 버금가게 기여한 부분이지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전역이기 때문에, 실제는 엄청난 활약을 했음에도 워털루 전투가 아니었다면 그냥 당대의 명장 중에 한명으로 불릴 정도의 인지도밖에 안됐을 거다. 특히 웰링턴이 나폴레옹과 싸운 건 워털루 전투 한번뿐임에도 라이벌로 불리는 게 그렇다. 나폴레옹 전쟁 전체에서 나폴레옹의 라이벌이라고 볼만한 대표적인 인물로, 가장 많이 싸운 오스트리아의 최강 지휘관이자 실제 여러 차례 싸워서 절대 나폴레옹에게 밀리지 않은 카를 루트비히나, 러시아전역의 러시아측 주역 쿠투조프 같은 인물이 있음에도 말이다.
  12. 워털루 전투에서는 양측 모두가 삽질을 했고, 그르쉬가 삽질을 하지 않았다면 블뤼허의 독일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웰링턴은 관광당하고 이어서 블뤼허도 라인강 고깃밥이 됐을 것이다.
  13. 진격로에 기병에게 위험한 패인 지형이 있어서 가면 안된다고 몸짓을 하는데 나폴레옹은 문제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돌격을 명하고 여기서 대형 압사사고가 발생하여 프랑스 기병대의 기세가 약해져 영국군 방진들을 분쇄할 기회를 상실하는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위의 기병대 돌격 관련 부분과 비교해 보자.
  14. 현 웰링턴 공작의 장남이며 계승 1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