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14세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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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26인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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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마세나장 바티스트 베시에르에두아르 모르티에
루이 니콜라 다부니콜라 장드듀 술트미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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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엠마누엘 그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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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칼 14세 요한
(Karl XIV Johan)
본명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
(Jean-Baptiste Bernadotte)
생몰년도1763년 01월 26일 ~ 1844년 03월 08일 (81세)
재위기간1818년 02월 05일 ~ 1844년 03월 08일 (26년 38일)
대관식스웨덴1818년 05월 11일
노르웨이의 왕1818년 09월 07일

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최대 수혜자이며 역사상 가장 성공한 배신자 중 한 명. 어찌보면 프랑스인으로서 프랑스군과 싸웠으니 가장 성공한 매국노.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초대 퐁트 코르보 대공[1]

현존하는 스웨덴의 왕가 베르나도테 왕가의 창시자.

2 프랑스 장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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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원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퐁트 코르보 대공으로서의 문장

1763년 프랑스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17세에 왕립해군[2] 해병대에 졸병으로 입대했다. 코르시카 등지의 해외 프랑스령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에 투입되어 혁명 발발 이전에 상사로 진급하고, 비귀족 출신이었던 덕에 혁명정부에 의해 장교로 임관, 1792년에 대령, 1794년에는 31세의 나이에 중장으로 진급한다.

프랑스 혁명이 벌어지자 베르나도트는 자코뱅 파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일병에서 장군까지 오른 입지선적인 인물이었으며 군공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 시기 베르나도트의 인기는 나폴레옹의 정치적 라이벌로까지 여겨질 정도였다.

1796년 프랑스군라인강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대파되어 와해되었을 때, 군을 추스려 재편성, 오스트리아군을 막아내어 명성을 얻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서는 사실상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묵인하기는 했으나, 중립을 지키면서 나폴레옹과 거리를 두고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베르나도트는 자코뱅 파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독재적인 정치 성향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킨 후 반대파였음에도 그를 중용하였고, 1804년에 원수로 임명했다.

1805년 울름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포위하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워 퐁트 코브르 대공의 칭호를 얻는다.

그러나 이 무렵, 그의 아내와 나폴레옹이 불륜관계에 빠져 들었고, 전부터 나폴레옹의 쿠데타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점차 반항적이 되어갔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묘한 게, 그의 아내인 데지레 클라리는 원래 나폴레옹의 약혼녀였다.[3] 사실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에게 잘해준 이유 중 하나는 그녀와의 약혼을 파혼하고 조제핀과 결혼했기 때문에 전 약혼녀에게 미안해서라는 말도 있다. 그래서 이 무렵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퐁트 코르보 공의 작위를 내려줬다.

그 때문에, 1807년 아우어슈테트 전투, 예나 전투에서 아무런 활약도 못하여[4]프랑스군 원수 직위와 퐁트 코르보 대공의 지위를 잃게 될 위기에 빠지나,[5] 그의 아내 데지레 클라리의 베겟머리 송사 덕분에 지위유지에 성공하고, 프로이센의 명장 블뤼허 원수를 격퇴하고, 바그람 전투에서 활약하는 등 나폴레옹의 마음을 돌려, 나폴레옹이 그의 아들의 대부가 되어주는 등 일단은 나폴레옹과 화해하는 듯 했다.

사실 베르나도트는 바그람 전투 당시에도 삽질을 반복했다. 작센인 군단을 이끌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누구라도 관심만 보여준다면 그의 '결정적인 기동' 한 번으로 오스트리아군 진영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큰소리를 땅땅 쳐댔는데, 7월 6일의 전투에서 아더클라 시가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작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집중포격에 신나게 두들겨맞고 나폴레옹이 있는 곳까지 쫓겨오는 추태를 보였다. 나폴레옹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베르나도트에게 "자네가 말하던 결정적인 기동이란 건 이런 거였나?"라고 한 마디 던졌는데, 베르나도트에게는 뭐라 변명할 정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가까스로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 후 베르나도트는 황제만이 읽을 수 있는 승전 기념사를 자기가, 그것도 작센군의 전공이 제일이라는 내용으로 바꿔 읽는 핵폭탄급 불경죄를 터뜨린다!!! 베르나도트는 그 직후 보직해임을 당했지만, 무적의 데지레 쉴드(...)와 그 후 네덜란드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세운 전공 덕분에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었다.

당시 베르나도트는 덴마크 전쟁에서 스웨덴군 포로들을 잘 대해줘 스웨덴인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작은 사실이 엄청난 일로 번지게 되었으니…….

1810년, 칼 아우구스트 황태자가 사망하여 후사가 없었던 스웨덴 왕 칼 13세가 그를 양자로 들이고 후계자로 지명해버렸다! 물론 왕이 뜬금없이 엉뚱한 사람을 지명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스웨덴에서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이후 여러 왕조가 교체되었고 당시 국왕도 마찬가지로 계승권 다툼으로 왕위에 올랐는데다 후계자도 없어서 또 병림픽이 재현될 위기에 처한것.. 그런데 이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군대는 바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었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의 가족이나 친척 또는 원수중에 한명을 국가 원수로 맞을 용의가 있다고 프랑스에 요청하게 된것.. 베르나도트는 정치적 식견도 상당했고 때마침 스웨덴인들의 호감까지 사고 있었기 때문에 최적의 후보로 꼽히게 되었고, 스웨덴 왕도 이에 동조하여 베르나도트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 것이다.

스웨덴 의회는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의 국교루터파 개신교로 개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국왕의 결정에 동의하였고, 베르나도트는 평소 개신교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6] 나폴레옹은 방금 전까지 적국의 요청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고 별로 미덥지 않았지만 거듭 된 요청에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평소 재수 없어서 멀리 쫓아보내고 싶던 베르나도트에 제안한다. 베르나도트는 만약 스웨덴으로 가게되면 프랑스의 국익에 충성할 수 없게 된다며 양해(?) 구했고 혹 덩어리 빨리 빼고 싶던 나폴레옹은 승낙한다. 나중에 혹이 이 되어서 돌아오지만

또 나폴레옹은 자신이 버린 약혼녀 데지레에 대한 속죄의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약혼자인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 자신의 친언니 마리는 나폴리 왕후, 스페인 왕후가 되고 있었는데 그녀는 고작 퐁트 코르보 공비에 지나지 않았으니(…) 상당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7] 옛 애인에게 스웨덴 왕비 자리 하나 주려는 뜻이었을지도 모를 일.

스웨덴으로 옮겨간 베르나도트는 그 이전까지 스웨덴이 핀란드를 두고 러시아와 발리고 있었고, 알렉산드르 1세가 1810년 12월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하고 강화를 요청하자 러시아의 핀란드 점유를 승인하고 대신 덴마크령이던 노르웨이 점유를 요구했고 알렉산드르 1세도 승인했다. 한편 1812년 조국 프랑스에선 러시아가 적대적으로 변하자 1809년 핀란드 점유를 승인한것을 취소하고 스웨덴에게 다시 핀란드 돌려주고 동맹국으로 삼으려 했는데 역시 좋다고 수락하나 스톡홀름 주재 프랑스 대사가 본국에 분노하며 스웨덴의 이중적 행태와 비밀리에 영국과 무역하고 있음을 알려서 조국에 뒷통수 친게 까발려진다. 1812년 영국 -러시아와 동맹을맺었고 러시아 전역이 거의 마무리 된 시점에 밥숟가락 쑤셔 넣으러 2만 병력을 리가에 파견하여 프랑스 군대 터는데 약간의 일조를 했고 1813년 스웨덴 왕위계승자의 자격으로 스웨덴을 제 6차대프랑스 동맹에 참가시키고, 라이프찌히 전투에 스웨덴군을 이끌고 참가, 나폴레옹 몰락 후 스웨덴의 지위향상과 이권 획득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사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게 대치 상태에서 갑자기 전장에 지원온 스웨덴군이었다.[8] 한편 베르나도트는 전사자가 늘면 자국에서 인기가 떨어지고 너무 열심히 싸우면 자신이 노리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황제자리 얻는데 방해가 될거 같자 적당히(?) 싸워서 양 진영에서 얍쌉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후일담이 있다. 1814년 4월 퐁텐블로 조약으로 나폴레옹이 퇴위하고나자 프랑스 황제자리를 노렸으나 동맹국들에게 당연히(?) 거부당하고, 5월 30일 파리 조약 이후 빈 회의에서 뒷통수 대가로 받은 노르웨이점유를 인정 받았다.

3 스웨덴 국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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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국왕 칼 14세 요한
(노르웨이 국왕으로는 칼 3세)
스웨덴, 노르웨이 국왕으로서의 문장

1818년 칼 13세가 사망하자,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칼 14세 요한의 이름으로 스웨덴의 왕좌에 앉았다. 동시에 당시 스웨덴 보호국이었던 노르웨이의 왕위도 차지해 동군연합을 결성했다.

그의 치세동안 스웨덴은 내정이 안정되었고, 외교적으로도 평온하여 이후 스웨덴이 북유럽의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닦았고, 죽는 날까지 스웨덴어나 노르웨이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인들은 베르나도트를 사랑했다. 이 문제는 스웨덴어를 잘하는 그의 아들의 통역으로 해결되었다.

1821년 나폴레옹이 사망하자 프랑스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워 프랑스의 황제가 되려고까지 시도했으나 프랑스 내부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844년 그의 사망후 나폴레옹의 대자였던 아들이 왕위를 계승, 지금도 스웨덴의 왕가는 베르나도트의 직계로 이어져 오고 있다.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의 시조. "그게 아니고 보나파르트 왕조가 아닙니까?" 라고 우스갯 농담을 하면 스웨덴에서 코로 수르스트뢰밍을 먹인다 카더라, 사실 예시로 든까지는 오버지만 저런식의 비유를 하면 스웨덴 인들은 상당히 불쾌해 한다. 조금 더 심하게 나폴레옹을 찬양하면서 저런식의 비유를 하면 싸움이 날수도 있을 정도로 험악해지니 하지 말것. 프랑스와 나폴레옹에게 있어서는 베르나도트가 배신자이자 매국노지만 스웨덴에게는 나폴레옹의 야욕에서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존경받는 국왕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입장과 견해 차이라고 할수있겠다.

더 재미있는 점은 나폴레옹과 스웨덴 왕실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 베르나도트의 아들인 오스카르 1세는 외젠 드 보아르네의 딸인 조제핀(Josefina av Leuchtenberg)과 결혼했는데, 이 외젠 드 보아르네는 바로 나폴레옹의 양아들이다.

4 평가

일개 사병에서 원수, 그리고 왕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며, 프랑스와 나폴레옹에게는 철천지 원수이자 배신자이며 폴란드에게 있어서는 우리를 독립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침략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스웨덴인들에게는 어려운 시대에 나라를 구하고 반석 위에 올려놓은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실 스웨덴의 관점에서 보면 나폴레옹을 배신한 것이야말로 스웨덴을 위해 최선의 길을 선택한 것이고, 나폴레옹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반대로 자신을 믿어준 스웨덴인들을 배신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 잘했다 잘못했다를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사실 베르나도트는 이전부터 나폴레옹과는 라이벌에 가까웠고, 사상적으로도 자코뱅 파였기 때문에 나폴레옹과는 맞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왕이 되었지만 쿠데타 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베르나도트는 그다지 나폴레옹에게 협력하거나 충성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를 중용한 것이 기이할 정도.[9]

이등병부터 시작해 최후엔 한나라 국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지만 애정관계에 있어서는 불우했다. 그의 아내인 데지레는 나폴레옹과 연인관계였지만 나폴레옹이 애 딸린 유부녀 조제핀에게 빠진 동안 베르나도트와 결혼했다. 후에 나폴레옹은 자신이 전선에 나가있는 동안 조제핀의 불륜으로 조제핀과 멀어지자 다시 옛 여인인 데지레에게 접근했는데 데지레는 그를 다시 받아들였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과 불륜을 저지르던 데지레를 끝까지 사랑했다. 스웨덴의 섭정으로 있을때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그를 마음에 들어해 러시아의 대공녀와 결혼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베르나도트는 아내가 있다면서 정중하게 그의 제안를 거절했다. 더구나 그 당시엔, 아내 데지레가 북방의 스웨덴의 추운 기후와 풍토,문화에 익숙해지지 않아 파리에 남아서 부부가 긴 별거생활을 했을 때였다. 그 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베르나도트는 왕이 된 후 자신의 아내를 스웨덴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데지레는 마지막 유언에 그의 남편이 아닌 나폴레옹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의 침실 안 베개 밑에는 예전에 나폴레옹 앞으로 보냈던 수많은 연애편지들이 남아 있었다.

여담으로 베르나도트는 젊은 시절에는 왕정에 격렬히 반대하는 자코뱅파였는데, 야사에 의하면 베르나도트가 죽은 후에 몸을 검시해보니 "왕에게 죽음을!" 이라는 문신이 있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왕이 되는걸 생각해보면 아이러니.언제 죽으라고 하진 않았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자코뱅이었던 것이 스웨덴을 왕으로서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상하관계가 엄격하기로는 수위를 달리는 곳이고, 스웨덴은 그 반대라는 점에서 상당한 문화적 차이가 있다. 실제로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할 때 스웨덴어가 서툰 탓에 단어를 잘못 말하자 스웨덴인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었고, 프랑스에서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베르나도트는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무사히 극복하고 스웨덴을 잘 다스릴 수 있었는데, 그 이유를 베르나도트가 자코뱅파의 평등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1. 정식 명칭은 Karl XIV Johan.1st Sovereign Prince de Ponte Corvo
  2. 당시 각국의 해군은 왕립 해군의 자격 이었다. 영국 군함 이름 앞에 붙는 HMS는 His/Her Majesty's Ship(국왕 폐하의 함선)을 줄인 말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3. 실제로 데지레 클라리 가문과 나폴레옹의 가문은 친분이 매우 깊어 서로 사돈맺기로 약속하고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는 데지레 클라리의 언니와 결혼했다.
  4. 원래 아우어슈테르전투에 참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예나 방면으로 가는 바람에 다부의 부대 혼자서 두 배에 달하는 프로이센군을 막아 악전고투 끝에 승리했다. 그런데다가 예나전투는 나폴레옹의 압승으로 빨리 끝나버리는 바람에 베르나도트가 도착했을때는 이미...
  5. 베르나도트가 예나쪽으로 가버린 원인은, 다부와 사이가 나쁜 탓도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오판에 베르나도트 본인의 오판도 있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자기 오판은 쏙 빼놓고 베르나도트의 실책만 추궁했고, 반대로 다부는 엄청 띄워주었다. 다부야 그럴 만 하기는 했는데...
  6. 베르나도트는 열렬한 종교주의자도 아니었고 사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자코뱅파 계열이었던 만큼 개종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기사 종교만 바꾸면 왕 시켜준다는데 독실한 신도가 아니고서야 누가 안하겠냐만은...
  7.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정치나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다가, 스웨덴에서의 삶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추워서...
  8. 이 사건 때문에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으로부터 하사받은 퐁트 코르보 공작의 작위는 정말로 박탈된다. 그리고 이 작위는 조아생 뮈라의 아들에게 하사되었다.
  9. 여기에는 나폴레옹이 버렸던 옛 애인중 하나인 데지레 클라리의 배갯머리 송사가 상당부분 작용하기도 했다. 나중에 베르나도트와 결혼해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던 그녀가 죽고 난뒤 침실에서 그 옛날 나폴레옹과 주고받았던 연애편지가 나왔다고...또한 나폴레옹이 자코뱅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차원에서 자코뱅 출신이면서 그나마 인척관계에 있는 베르나도트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