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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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Ⅱ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프란츠 2세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2]페르디난트 1세

1 개요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최초의 오스트리아의 황제. 또한 독일 연방의 초대 의장이자 헝가리의 왕, 보헤미아의 왕이며 백제 아신왕과 더불어 역사상 최고의 근성가이이다.[3]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로서는 프란츠 1세이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이유는 나폴레옹이 제위에 올라 자신과 동일한 지위에 오르자 경쟁 심리로(…) 황제 칭호를 한 개 더 추가하여 상대적 우위에 오르고자 하는 유치한 심리에서...만은 아니었고, 뒤에 설명되겠지만 나름의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덕분에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망한 뒤에도 황제 행세를 지속할 수 있었다. 칭호 백업 돋네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1804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 1806년까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를 겸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은 세계 역사상 유일한 이중 황제(독일어: Doppelkaiser, 영어: double emperor)였다.[4]

하지만 가장 유명한 이미지는 가장 증오스러운 원수를 사위로 둔 장인. 무솔리니도 그렇고 프란츠 2세도 그렇고 결국 사위는 장인을 이길 수 없는 듯?

1.1 심상치 않은 조짐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레오폴트 2세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백부 요제프 2세가 아들이 없기에 일찍부터 첫 아내인 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타[5]와 함께 10대 초반부터 빈으로 불려와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 1792년 아버지가 죽자 왕위를 계승해 프랑스 혁명 문제를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즉위한 해, 아버지 레오폴트 2세가 죽기 전까지 마리 앙투아네트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 정부와 석방 협상을 벌이고 있던 걸 프란츠 2세가 하지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당했다.

이에 다른 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반프랑스 정책을 펼쳐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지원했으나 희대의 먼치킨 나폴레옹에게 줘터지는 바람에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롬바르디아와 라인 강 왼쪽 땅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 영역을 가지고 나폴레옹이 라인 동맹을 만들었다. 그 이후로도 나폴레옹이 이집트 간사이에 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러시아의 수보로프와 함께 잠시 선전하기도 하지만 1799년 러시아가 이탈하고 나자 결국 굴복하고 1801년 뤼네빌 평화조약을 맺고 라인강 서안과 이탈리아 영유를 포기한다.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과 뤼네빌 평화조약(1801)의 대가로 기존 신성로마제국은 껍데기만 남게 되는데 라인 강 좌안의 기존 신성 로마 제국 영토는 모두 프랑스에 합병되고 기존의 제후들은 라인 강 우안에서 영토적 보상을 할 것이란 합의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자신이 승인한 것.

무슨 말이냐면 자신이 황제로 있는 제국의 서쪽 제후들 땅을 프랑스에 몽땅 조공으로 바치고, 니네끼리 알아서 보상을 해주든 말든 하라 이거였다... 황제 체면은 물론 땅에 떨어졌고 사실상 교회령, 제국 기사령 등 황제가 이제껏 영향력을 행사한 제국 내 영토들은 싹 사라지고 보상을 받은 제후들 마저 몽땅 프랑스 편으로 붙어 버렸다. 거기다가 황제 선거권이 있는 선제후들 중에 신성 로마 제국의 라인 강변 대가의 성직제후 마인츠, 트리어, 쾰른 선제후가 없어진 것... 거기다가 나폴레옹이 사실상 독일의 주인 행세를 하며 오스트리아 코 앞의 제국 도시 레겐스부르크에서 '독일제국대표자 회의'를 열어서 기존 없어진 선제후[6] 4개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꼬붕들(?)이자 위성국가들을 멋대로 선제후로 삼아버렸다.

구체적으로 오스트리아 몫은 합스부르크 가문 방계로 토스카나 대공국이 나폴레옹에 합병당하며 대토보상으로 꼴랑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을 대공국으로 보상받는데 그치고 나머지 5개 선제후들은 바덴[7]은 대공국으로 승격. 뷔르템베르크, 레겐스부르크, 헤센-카셀은 프랑스의 위성국... 바이에른과 작센[8]은 역시 프랑스에 줄을 섰기 때문에 선제후 자리중 과반수가 프랑스의 위성국이고 현직 황제는 꼴랑 보헤미아 국왕과 잘츠부르크 제후 달랑 2장밖에 없었기 때문에 유사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직 승계는 이미 물건너 갔다.

1.2 오스트리아 제국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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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한창 끗발 날리던 나폴레옹이 1804년에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자 프란츠의 합스부르크 가문 측에서는 대표 작위인 오스트리아가 기존 신성 로마 제국 내의 대공국으로 격하되어 유사시 듣보잡으로 여기던 독일 소국보다 낮아지고, 나폴레옹 또는 그의 하수인의 신하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기존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대체하여 합스부르크를 대표할 만한 직위인 '오스트리아 황제'를 칭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동군연합으로 통치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헝가리, 로도메리아-갈리치아 왕국, 테미쇼아라, 부코비나 공국 등을 합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웠다.

당연하지만 프란츠가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를 보고 자존심이 상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운 건 전혀 아니다. 이미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지배자들은 18세기부터 통치가 힘든[9] 신성 로마 제국 영내보다는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관리가 더 쉬운 동방 영토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10] 따라서 프란츠가 이들 동방 영토를 더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이라는 틀을 마련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는 신성 로마 제국 안과 밖에 모두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워진 뒤 신성 로마 제국에도 속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모두 속하는 지역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본거지격인 오스트리아 대공국도 오스트리아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모두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어차피 두 제국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양쪽에 속해도 문제는 없었다.

참고로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국'은 독일어로 다르게 표기했다. 전자는 Reich(라이히)라고 하는 데 반해 후자는 Kaiserthum(카이저툼, 현재의 철자법으로는 Kaisertum)이라고 했다. 오스트리아(Oesterreich, 현대 철자 Österreich. 외스터라이히)라는 단어에 이미 'Reich'가 들어 있기 때문에 동어 반복을 피하면서 신성로마제국과도 구분하려고 Kaisert(h)um이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명목상으로는 선제후에 의해 선출되는(elected) 황제지만, 오스트리아 황제는 세습되는(hereditary) 황제였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둘 다 세습이었지만...

즉위 당시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의 황제 칭호의 상대적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유럽의 다른 나라 왕들한테도 황제로 즉위하라고 권유했으나 권유를 받은 왕들은 그게 예산만 들어가고 별 실효성이 없는 유치한 대응법이라면서 무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바람. 참고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인 18세기 말 영국에서 조지 3세에게 황제 칭호를 쓰라는 권유를 했는데 조지 3세 본인은 거절한 바 있다.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1.3 이어지는 좌절

프랑스가 영국 간의 아미앵 조약이 깨지고 영국이 동맹을 제의하자 러시아와 같이 편을 먹고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가입한다. 역시나 기세는 좋았지만, 울름 전투에서 주력을 허무하게 잡혀먹고 오스트리아에서도 발리고 결정적으로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해체되었다. 1806년에는 나폴레옹이 6월 달쯤 프랑스 황제이자 라인 동맹의 보호자 자격으로 프란츠에게 7월 달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선전포고한다는 최후 통첩을 받고 쫄아서 자진해서 제국 해체를 결의하게 된다. 제국을 해체한 시점에는 이미 라인 동맹은 전부 신성 로마 제국을 탈퇴해서 회원국이라곤 18세기부터 오스트리아에 기어올라 땅이나 뺏어가는 프로이센과 친척 잘츠부르크 공국[11]밖에 안 남았다. 회원수 3명짜리 동호회 회장 부회장 총무끝. 제국 돋네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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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인생 최악의 순간.jpg[12]

영국의 비밀 지원과 대놓고 자금 지원으로 순식간에 군비를 재건하고 아우 카를 대공이 군대를 맡아 오스트리아의 1807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맞서 싸우지만, 역시 털렸고 1809년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5차 대불 동맹에서는 초기에는 나폴레옹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털고 2인자 장 란을 전사시키는 등 나름 성공이 있었으나, 결국은 바그람 전투에서 열심히 털리고 관광당한 뒤 물자와 장비를 나폴레옹에게 통째로 털리기까지 해서 오스트리아 군대 자체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쯤되면 포기하고 싶을텐데

설상가상으로 1810년에는 정신적 충격이 컸던 탓인지 나폴레옹의 갈굼으로 인하여 자신의 딸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에게 시집 보냈다. 딸내미 도둑질한 천하의 원쑤 참고로 메테르니히가 매우 기뻐했다. 당분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고 국력을 키울 수 있겠다며. 이후 프랑스와 동등한 인정을 받으며[13] 사위의 동맹국이 되었고 1812년 러시아 원정 때도 프랑스 원정군의 우익을 담당하여 슈바르첸베르크를 뽑아 1개군단을 파견하였으나 알렉산드르 1세와 이심전심(?)으로 통하여 별다른 충돌 없이 벨로루시에서 산책만 하고[14] 프랑스가 털리는 걸 보자 귀환한다.

1.4 회심의 복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거하게 털리고 돌아오자 초기에 관망했는데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적은병력으로 용감하게 나폴레옹에게 상처를 입히고 영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자[15] 1813년 다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에 가입한다.트라헨베르크 계획을 세워서 프랑스로 돌아오는 나폴레옹을 라이프치히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독일땅에 완전히 몰아내고 프랑스전역서도 관광 태우며 한풀이에 성공. 1815년 빈 회의 이후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를 지지했다.

2 여담

보수주의적 정치 체계를 펼쳤고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약화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키우는 데 힘쓰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다. 신기술도 적극 도입해 도나우 강에 증기선을 띄우고 철도를 건설하고 했다. 이후 그의 일생과 업적을 담은 V. 비볼의 <프란츠 황제>가 1938년에 출간되었다.

여담으로 상당히 가정적인 성격이었다. 그의 외손자가 나폴레옹 2세이다. 원수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딸의 아들이기도 하기에 나폴레옹 2세를 끔찍히 아꼈다고 한다. 사실 친아들들이 터무니없이 변변찮은 것도 한 몫했다. 거기다 손자가 총명한데다 외모까지 수려하니 더더욱 끔찍이 아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처럼 아끼던 손자는 1832년, 20살을 갓넘긴 나이로 요절하였고, 프란츠 2세도 3년후인 1835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젊었을 때 고모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하려 하지 않고 내버려둔 죄책감 때문인지 그녀의 딸이자 자신의 고종사촌인 마리 테레즈 샬로트에게는 매우 잘 대해주었고, 자신의 동생 카를 대공과 결혼시키려 하였으나 마리 테레즈는 어머니의 죽음을 방관한 외가보다는 부르봉 가로 돌아가길 택했고, 결국 사촌 앙굴렘 공작과 결혼했다.
  1.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으로는 1792년 3월 1일에 즉위.
  2. 오스트리아 황제로서는 프란츠 1세이다.
  3. 차이가 있다면 아신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대한 복수에 실패했지만 프란츠 2세는 결국 나폴레옹을 발랐다는 점(...) 진정한 근성남 어딘가의 말로만 근성 근성 거리다가 처참히 깨졌던 누구와는 다르다.
  4.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나중에 만주국 황제도 했으니 이중 황제 아니냐고 볼지 모르겠지만 해당되지 않는다. 푸이가 청나라와 만주국의 황제 칭호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이중 황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 다수의 국가들이 만주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푸이의 만주국 황제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문제도 있고...
  5. 일찍 사망해서 황후는 되지 못했다. 이후 장가를 세 번이나 더 간다.
  6. 프로이센은 1795년 바젤 평화조약으로 일찍 굴복 해줬기 때문에 영국과 동군연합 하노버를 점유를 허가 받았고 하노버선제후령도 사실상 없어진다.
  7. 라인 강변 서안 영토를 조공으로 바치고 종이 호랑이 신세가 된 옛 주인 오스트리아령 역외 영토들을 포함하여 라인강 우안 8배의 대토보상을 받아서 가장 출세했다.
  8. 뷔르템베르크 작센 바이에른은 역시 나폴레옹에 줄선 대가로 나폴레옹의 강요를 받아 프란츠 2세가 왕국으로 승격하는데 동의한다. 프로이센처럼 제국에 왕국령을 여럿 승인한 것은 사실상 제국은 끝났다는 이야기
  9. 당장 30년 전쟁으로 인해 영방국가로 분리되었으며 4명의 세속제후(팔츠, 보헤미아, 작센, 브란덴부르크)와 갈등이 이어지고 이들은 독자적 세력을 구성했다. 특히 브란덴부르크.......프리드리히 대왕치하에 1740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을 열나게 후드려패고 1772년에는 완전한 독립국이 되니 뭐.
  10. 이전까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한데 합친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여러 영지/나라들의 군주를 겸하고 있었을 뿐이다(동군연합). 비공식적으로 합스부르크의 세력권을 오스트리아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정확한 용법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성립 이전에는 오스트리아가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 대공국(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영역과 대동소이)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11. 허울뿐인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자 그냥 오스트리아에 흡수시킨다. 역시 현재 오스트리아령이다.
  12. 보면 알겠지만 노골적으로 프란츠는 '빛', 나폴레옹은 '어둠'에 속하는 구도를 잡아 '악(어둠)의 화신'에게 대항하는 '선(빛)의 군주' 구도를 확립하고 있다. 이런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허용될 정도로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가 극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3. 프로이센은 작센, 바이에른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다.
  14.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본대로 차출된 포병대는 프랑스 본대와 함께 동귀어진하고 마크도날의 10군단에 배속된 병력은 탈영에 성공한다.
  15. 나폴레옹의 적대감은 꾸준했지만 어디까지나 재정적 부담과 러시아 프로이센이 털리고 나서 가입해야 입지가 높아졌기 때문 영국이 자금지원을 약속하면서 군비 걱정을 덜었다. 지속된 전쟁으로 인력 국력 자금은 고갈이 났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