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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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 전쟁의 네번째 국면. 나폴레옹 인생 최고의 순간
2 진행
1803년 5월, 영국은 아미앵의 화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그리고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해 프랑스 해상을 봉쇄하여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끼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아예 영국을 점령해 굴복시키자는 생각에서 볼로뉴 지역에 18만에 달하는 병력을 집결시켰고 이 병력은 여차하면 도버해협을 건너서 영국 본토로 침공할 기세였다. 이에 맞선 영국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나폴리, 스웨덴을 끌어들여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동맹에 참가하지 않고 상황을 관망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침공을 결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를 위해서는 도버해협의 제해권 장악이 필수적이었다. 영국에 비해 해군력이나 해군운용, 군함 등이 열세였던 프랑스는 에스파냐의 도움을 받아 다수의 군함과 수송선을 건조해 일단 구색은 갖추었다. 한편으로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의 전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빌뇌브 제독에게 명하여 영국령 서인도 제도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빌뇌브의 서인도 제도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어쩔 수 없이 귀환하던 빌뇌브의 함대를 로버트 칼더가 지휘하는 영국 해군이 습격하여 1805년 7월 22일, 피니스트레곶 해전이 일어났다. 빌뇌브는 여기에서도 패하여 간신히 에스파냐 카디스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8월이 되자 육상의 전투도 나폴레옹의 계획과는 어긋나게 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게된 나폴레옹은 결국 영국침공이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볼로뉴에 있던 병력을 라인강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사실상 영국침공을 포기한 셈이다. (흔히 트라팔가 해전의 결과로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을 포기했다는 것은 잘못된 통설이다. 트라팔가 해전 항목 참조.)
그러나 나폴레옹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영국 침공을 준비하면서 한 행동들은 이후의 오스트리아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 침공을 앞두고 나폴레옹은 원정군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행토록 하였고 이는 부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또한 레지옹 도네르 훈장을 제정하는 등 수훈 제도를 정비하고, 병사들과 만나서 그들의 고충과 무훈 등을 직접 언급해 주고 이를 해결해 주려는 모습을 보여서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1] 이는 원정군 병력이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활약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을 위해 병력을 볼로뉴에 집결시키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라인강 유역의 방비가 허술해졌다고 판단하고 레이베리히가 이끄는 7만의 병력과 러시아군이 바이에른으로, 칼 대공의 병력은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은 바이에른군을 격파하고 바이에른의 중심지인 뮌헨을 점령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나폴레옹은 볼로뉴의 병력을 라인강쪽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이때의 나폴레옹군은 그야말로 당대의 군사적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가 안될 정도로 빠른 행군속도로 600Km가 넘는 거리를 거의 한달여만에(8월 29일에 출발해 9월 말에는 전 병력이 라인강 방면에 집합했다) 주파했다.
이런 비상식적인 프랑스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레이베리히는 나폴레옹군의 동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슈트트가르트 교외의 울름에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울름전투). 결국 10월 20일, 레이베리히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했다.
레이베리히가 항복한 그 사이 해상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운명을 건 해전이 벌어졌다. 10월 19일, 프랑스 연합함대가 나폴리를 향해 출발하자 이를 알아낸 넬슨은 프랑스 해군을 추격해 10월 21일, 에스파냐의 트라팔가르곶에서 전투가 벌어졌다(트라팔가르 해전). 빌뇌브가 이끄는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는 호레이쇼 넬슨의 영국해군에게 처절하게 캐발렸다(…). 물론 넬슨이 전사하는 불행이 있긴 했지만. 이로서 영국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은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폭풍우 때문에 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어쨌든 나폴레옹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사실었다.
트라팔가르 해전 패배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군은 진격을 계속해 11월 14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입성했다(아이러니칼 하게도 이 당시 빈에서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초연되었다).
수도가 함락된 오스트리아군은 러시아군과 전열을 정비한후 결전을 감행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지 1년여가 돼가던 12월 2일, 모라비아의 아우스터리츠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간에 전투가 벌어졌다.(아우스터리츠 전투) 그래서 세명의 황제가 모인 전투라 하여 3제(帝)전투라 하기도 한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승리를 거두었고 트라팔가르 해전 패배로 인한 위기를 단숨에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에게 강화를 제의했고 12월 4일 양자는 휴전에 합의했다.
이후 강화협상이 이루어져 12월 26일, 프레스부르크(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에서 강화가 이루어졌다. 조약의 내용은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하며, 베네치아를 할양하고 프랑스에는 이스트리아 반도와 달마티아 지역을, 그리고 프랑스의 동맹국인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에 오스트리아령인 티롤, 콘스탄츠, 블레이슬라우를 할양하며 프랑스에 4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