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 페르쯔

אחשורוש (히브리어)
Ahasverus, Ahasuerus

1 아하스베루스, 또는 아하수에로

사실 아하스베루스(Ahasverus)는 라틴어에서 온 단어로, 페르시아어의 인명 Xšayāršā(흐샤야르샤)의 히브리어 음역 ʼĂḥašwērôš(아하슈웨로시)가 다시 불가타 성서(4세기 라틴어 번역 성경)에서 Assuerus(아슈에루스)로 번역됐고, 이것을 다시 영역 성경으로 옮기면서 Ahasverus 또는 Ahasuerus로 바뀐 것이다. Xšayāršā의 변형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스어식 음역인 Xerxes(크세르크세스)다(분명 똑같은 페르시아어의 변형인데 결과물이 딴판이다).

이 단어에 방황하는 유태인이라는 뜻 같은 것은 없다. 또한 띄어쓰기 없는 것에도 주의하라. 아하스 베루스가 아니라 아하스베루스다. 개신교쪽 성경에서는 아하수에로(Ahasuerus)라고 표기한다(u와 v가 서로 바뀌어서 표기되는 일은 흔하다). 영어쪽에서는 아하스베루스보다는 아하수에로 쪽에 더 보편적인 표기. 뭐, 영어식 발음으로 하면 어헤주에러스 정도 되지만...

아하수에로라는 이름(혹은 호칭)은 성경과 경외 성경 상에 몇 차례 등장하는데, 에스테르서, 에즈라서, 다니엘서 등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통은 에스테르서에서 나온 에스테르의 남편 크세르크세스 1세를 가리킨다. 나는 관대하다의 그분 맞다.

즉 아하스베루스라는 이름 자체는 성경에서 방황하는 유대인이라고 직접 나온 적이 없다.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에서 방황하는 유대인의 이름 중 하나로 아하스베루스가 지목되었던 것. 고로, 크세르크세스 1세가 방황하는 유대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2 방황하는 유대인

한편, "방황하는 유대인(Wandering Jew)" 전설은 사실 기록상으로 살펴볼때 13세기 쯤 유럽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등장한다.
물론 그 이 전에도 방황하는 유대인 전설과 유사한 형태(저주받아 영원히 떠돈다)는 존재했는데, 일단 카인 전설이 그렇고, 마태복음 16장 28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라든지, 호세아서 9장 17절 '그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나의 하느님께서 그들을 배척하시리라. 그리하여 그들은 민족들 사이에서 떠돌이가 되리라.'라는 부분이 영원히 떠돌거나 약속한 그때까지 안식하지 못함을 나타내는 부분이라고 해석되곤 한다. 요한 복음서에도 예수를 때린 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자 역시 방황하는 유대인 전설의 원형 중 하나라고 보인다.[1]

저런 모티브적인 것이 아닌, 방황하는 유대인 전설이 제대로 쓰여진 최초의 기록은 웬도버의 로저가 쓴 것을 기초로 하는 《역사의 꽃(Flores Historiarum)》이라는 서적인데, 이야기의 배경은 1228년경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1228년 영국을 방문한 아르메니아의 대주교가 세인트 올반스 수도원에서 한 이야기인데, 카르타필루스라는 유태인 구두장이가 십자가를 끌고가는 예수에게 '얼른 꺼져라, 왜 여기서 쉬고 있냐?'고 폭언을 퍼부었고, 예수님이 '나는 이렇게 서서 쉬지만, 너는 최후의 날까지 계속 가야 하리라(쉬지 못하리라)'고 저주하는 바람에 죽지 못하고 영원히 떠돌게 되었다고 한다. 카르타필루스는 이후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계를 떠돌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게 된다.

1228년이라는 기록을 시작으로, 같은 이야기가 13세기에 유럽 여기저기에서 대주교가 방문해서 전했다는 식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다시 변형되어 여기저기서 통용된다. 하지만 큰 줄거리는 비슷하다.

  1. 유대인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예수를 직접 만났다가 그를 모욕했다(예: "내 가게 앞에 앉아있지 마라!" 등).
2. 예수가 그에게 영원히 방황하라는 저주를 내린다.
3.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떠돌다가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된다.
4. 각지에서 예수의 실존을 증명한다.
5. 화자와 만나 이야기를 기록한다.

대충 이런 포맷이다. 구두장이가 아니라 상인이라거나 본디오 빌라도의 문지기였다거나 하는 식으로 변형이 있지만, 어느 이야기건 예수의 예언에 따라 그는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 오는 날. 즉,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때까지 죽지 못한다는 것은 동일.
…그런데 최후의 심판의 내용은 불신자는 전부 떨어지고, 신자는 모두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다…(결국 영생이라는 거네…).

사실 중세 기준으로 이 이야기의 포인트는 유대인이 개종한다는 부분이며, 고향을 떠나 떠도는 유태인들의 운명을 비유한 전설이었다. 하지만 후대의 이야기꾼들에게는 불멸의 죄인이라는 소재의 매력 때문에 불멸성에 중점을 두고 문학과 전설속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변형되는 와중에 방황하는 유태인/불멸의 유태인에게 말고(말쿠스), 마타티아스, 부타데우스, 파울 마란, 이자크 라퀘뎀 등등 다양한 이름이 붙여졌는데, 17세기 기록에서 아하스베루스를 변형한 Ahasver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면서 아하스베루스 또한 방황하는 유태인의 한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3 아하스 페르쯔?

앞서 볼 수 있듯이, 방황하는 유태인의 이름은 아하스 페르쯔라고 읽힐 구석은 전혀 없다! 설령 아하스베루스의 발음을 어떻게 꼬아 읽더라도, 중간에 띄어쓰기가 들어갈 이유도 없다.

사실 아하스 페르쯔라는 형태로 한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은 이문열사람의 아들이다. 이것을 퇴마록에서 차용해서 아하스 페르쯔라고 쓰면서 서브컬쳐계에서 아하스 페르쯔라는 정체불명의 표기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이 인물을 주제로 1917년에 방황하는 유대인(さまよえる猶太人)이라는 단편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여기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는 예수를 모든 유대인들이 마구 비웃고 욕하며 조롱하는 와중에 예수가 잠시 십자가를 내려 놓은 곳이 이 사람의 집이었고 예수에게 욕하면서 우리 집 앞에 이런 걸 두지 말고 치우라고 욕하자 "가지 말라고 해도 안 갈 것도 아닌데, 대신 너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 세상에 영영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저주했다는 부분에서 십자가(인간의 죄의 상징)를 진 고통 속에 허덕이던 예수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고 예수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거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깨달아버린 인간이었기에[2] 그에 대한 속죄로써 죽지 않고 다시 올 예수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떠돌며 기다리고 있다는 것으로 묘사했다.

4 이를 모티브로 하는 것

동양에서 비교할수 있는 대상은 동방삭 정도?

근대 유럽의 핫 이슈가 된 생 제르맹 백작이 이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DC 코믹스팬텀 스트레인저정체는 다르지만, 방황하는 유태인의 모티브가 어느 정도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만화 프랑켄 프랑 24화에서 이를 모티브로 한 노스페라투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모든 기독교인이 부활하면 이후 영생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의외로 나자로일 가능성도 있다. 그 경우엔… 왠지 안습.

4.1 퇴마록에 등장하는 인간

  1. 이름이 말고(Malchus)인데, 사실 말고는 18장 10절에 나오는 인물이고 예수를 때린 자는 18장 22절에 나오는 다른 인물이지만 어째선지 말고가 저주받은 인물의 이름으로 지목돼버렸다. 말고로서는 조금 억울한 일...
  2. 누가복음 23장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