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샴의 법칙

1 개요

영국경제학토마스 그레샴(1519-1579)이 주장한 이론. 일반적으로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로 알려져있다.

'구축하다'라는 말은 영어의 'Drives out'이라는 표현을 번역한 것이다. 좀더 자연스럽게 번역하면 '내쫓다', '몰아내다' 정도이다. 주로 경제학에서 많이 사용한다.

한자로는 '惡貨가 良貨를 驅逐한다'라고 쓰며, 여기서의 '구축'은 몰 구(驅), 쫓을 축(逐)을 쓴다. 즉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눌러앉는다는 얘기. 밀덕을 포함해서 덕후들이 구축의 의미를 잘 이해한다카더라

비슷한 사례로 해충 구제(驅除)라는 말이 있다. 그냥 들으면 해충을 구해낸다(...)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 없애버린다 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쓰기로는 '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 이고 정확하게는 'Bad money drives out good if their exchange rate is set by law.'(법으로 정한 교환비(액면가)에 따라서 정해진 경우에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이다.

재물 貨를 그림 畫로 오해하거나, 몰아내는 驅逐을 건설하는 構築으로 오역하지 말것. 미천한 여러 시도들이 큰 역사를 이루어낸다라며 전혀 엉뚱한 인용을 할 위험이 크다. 실제 그런 사례도 많고(...). 좀 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서 쓰면 '나쁜 화폐가 좋은 화폐를 몰아낸다' 정도로 쓸 수 있다. 실제로 중 고등학교 숙제나 대학 과제 혹은 대학교 저학년 대상으로 하는 발표 및 토론 강의등에서 이러한 실수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어리니깐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과제를 채점하는 교수 입장에서는 그냥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유식한 척 인용하는 것 마냥 보일 수도 있다.

2 정의

서로 대등한 액면가치를 갖는 재화 A와 B가 있다고 하자. A는 순수 금화이고 B는 합금으로 된 저질 주화라고 한다면, B의 소재 가치는 A보다 훨씬 낮고, 당연히 B의 생산 원가도 A보다도 훨씬 싸다. 그러면 사람들은 남에게 지불할 때는 B를 이용하고 소장가치가 높은 A는 자기가 보관하려고 할 것이므로, 실제 유통 과정에서 양화인 A는 사라져 가고 악화인 B만 통용된다.

이것은 주화의 가치에서 액면가와 그것을 구성하는 금속의 시장가격(실제가치)에 차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액면가가 실제 가치보다 높은 주화가 있고, 액면가가 실제 가치보다 낮은 주화가 동시에 유통되고 있다면, 사람들은 실제 가치가 높은 주화는 땅에 묻든지 장롱에 쌓아두든지 해서 계속 저축하거나 심하면 이걸 주조해 악화로 만드는 등, 실제 가치가 낮은 주화만 교환을 하는데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에는 실제 가치가 낮은 주화만 유통되게 되며, 가치가 낮은 주화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된다.

이 법칙이 성립하려면 가치의 보존과 유통 기능을 모두 가진 두 종류의 재화 사이에 법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교환비가 있어야 한다.

3 사례

이런 현상의 실제 예로 고대 로마를 들 수 있다. 네로 황제 전까지의 데나리우스 은화는 순 100%였는데, 네로부터 오현제 시대까지는 92%, 콤모두스 황제 때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에는 70%로 떨어지더니만 카라칼라 황제부터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까지는 50%, 그리고 발레리아누스 황제 이후로는 5%였다. 쉽게 말해서 은화가 은도금된 동화로 바뀐 셈.

실제로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10원짜리를 잘 안 쓰게될 정도로 물가 상승이 지속된 9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 중반 디자인과 재질이 바뀌기 전엔 10원짜리 동전 원가가 34원(...)이어서 실제로 10원짜리 동전을 녹여서 악세사리를 만들어 주는 가게들까지 있었다.[1] 그 결과로 바뀐 현 10원 주화는 일단 장난아니게 얇다.

게다가 2000년대 후반까지도 이 행위의 처벌 법규가 없었다. 2011년 12월 와서야 처벌규정이 나올 정도. 그리고 아직까지도 시장에 유통되는 구 10원 동전을 녹여서 동괴를 만들어서 판 일당이 검거됐다는 뉴스가 매년 나온다. 2014년에도 20억 원 가까히 부당이익을 챙긴 일당이 검거되었다. 수집책들이 전국 금융기관에서 보유중인 10원짜리를 "인테리어 장식용으로 쓸 계획이다"는 핑계로 개당 몇원의 웃돈을 주고 수천만 원씩 사들인 뒤, 이를 녹여서 동괴로 만들어서 내다 팔았다.

조선 시대 때는 상평통보에 대해서 사람들이 정확히 이 짓을 했다는 민담이 있다. 맨 처음에는 돈을 쓰더니 돈을 녹여서 그 금속으로 물물교환을 하는 게 낫다고 해서 마을 대장간에서 돈을 전부 다 녹이니까, 정부가 그걸 알아채고 상평통보 엽전을 여러 금속의 합금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양반들이 한수 위여서, 그 합금의 레시피를 알아내서 마을 대장간에서 돈을 직접 찍어내서 썼다는 이야기. 물론 조선시대에는 상평통보를 녹이는 것도 처벌 대상이었으며, 합금으로 당백전을 직접 찍어낼 경우에는 화폐 위조죄로 그 자리에서 사형이었다.[2]

반면 당백전이라는 악화가 나온 흥선대원군 시기에는 양화인 상평통보를 죄다 숨겨버리고 당백전만 유통되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당시 당백전은 상평통보에 비하면 6/100의 가치 밖에 없는[3] 악화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수된 것이 청나라 화폐의 위조품들인데 이걸 청전이라고 했다. 가치는 상평통보의 1/3. 하지만 당백전에 비하면 양화이다. 그런데 당백전이 폐지되고 오히려 청전 유통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부터는 청전이 악화가 되었고, 상평통보는 여전히 창고속에서 나오지 않았다라는 이야기. 결국 조선정부는 대원군이 물러난 다음에 청전마저 폐지해야 했다. 청전과 당백전의 유통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화폐에 대한 불신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

다만 위 단락에서 언급된 인플레이션의 근본적인 이유는 당백전을 너무 많이 발행했기 때문이다. 소량만 찍어냈다면 당백전을 모을 만큼 여유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상평통보를 숨겨놓고 당백전으로만 거래 했겠지만, 상평통보(양화)를 대체할 만큼 당백전(악화)이 많지가 않다면 그레샴의 법칙처럼 완전히 구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에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총액은 약 1천만 냥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풀린 당백전의 총액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1천6백만 냥 정도나 되었다.[4] 생각해보면 상당히 특이한 상황인데, 북쪽의 어느 왕정국가처럼 새 화폐가 구 화폐를 100:1의 비율로 대체한 것도 아니라서 여러모로 곤란하다. 공식수치만 두고 보자면 기존에 1천만 냥 분량의 상평통보가 있었고 새로이 당백전 1천6백만 냥(액면가)을 발행했는데, 이 당백전들의 금속가치는 96만 냥(1600 / 100 * 6)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1천만 냥의 양화가 모두 사라져버리고 실질가치 100여만 냥의 악화만 유통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이는 하이퍼디플레이션 상황이었다. 현대의 신용화폐(지폐, 은행예금 등)는 내재가치가 제로에 가까우므로,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대신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오겠지

참고로 윗 사례는 금화가 양화이지만, 반대로 화가 악화가 된 사례도 있다. 금본위제도가 바로 그것인데, 19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금 자체가 귀한 화폐다보니 비싼 화폐로 통용됐으나 사람들은 더 작은 단위이면서 쓰기 편한 은화를 즐겨 사용했었다. 그러나 실제 시장에 돌아다니는 금의 양이나 은의 양이나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금의 실제 가격은 낮아지고 은의 가격이 높아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리고 결과는 양화였던 은화가 악화였던 금화에게 구축당했다. 즉, 주화의 가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액면가와 실제가치를 재서 실제가치가 낮다면, 즉 화폐로 사용하는게 다른 용도로 쓰는것 보다 나은 화폐라면 그것이 악화라는 것이다. 금이 귀하다고 해서 무조건 양화라고 생각하면 오산.

실제로 이런 과정을 통해 변동환율제가 될때까지 국제 표준화폐가 금화가 되는 금본위제도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금화가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금화야말로 모든 금속화폐를 구축한 최악의 악화였기 때문에 그렇다(…). 금이 가치있는 귀금속임은 분명하지만, 타 금속화폐보다 실질가치 대비 액면가를 높게 만들어 버리면 악화가 될 수 밖에..

실제로 금본위제를 연구하는 학자는 이 시기에 정상적으로 금화가 구축당했다면, 브레튼우즈 체제가 은본위제로 굴러갔었을것이고(금이 민간의 손에 들어가서 시중에 유통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공급 유연성이 좋은 은화를 기축통화로 했다면 고정환율제가 좀 더 버티지 않았을까 라고 하는 전망을 내놓는 학자도 있었다. 뭐 그렇다고 브레튼우즈체제의 불안정성때문에 몇 년 더갔을정도에 그칠게 뻔하다는게 일반적인 중론이라 그다지 지지받고 있지는 않다. 어차피 원인은 달러화의 불안정성이 제일 크기도 하고...

4 오해

이 현상은 여러 분야에서, '나쁜 것이 좋은 것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의미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원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학문적 의미와 쓰이는 의미가 완전히 와전된 대표적인 예. 이런 예에는 차라리 경로의존성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린다. 위의 설명에서 보다시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은 재화의 보존과 유통의 기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화폐의 특수성이 원인이기 때문에, 그레샴의 법칙은 철저하게 화폐, 혹은 자산가치를 저장 가능하고 환금성이 있는 재화에 한정된다.

이런 와전된 의미로 사용되게 되는 이유는 우선 말 자체가 아무데나 끼워 맞춰도 대충 맞아 떨어지는 중의적인 의미이며, 결정적으로 위의 고대 로마 시절에 비슷한 이론을 철학적으로 무리하게 연결하려던 당대 철학자들이 비슷한 발언을 했던것에서 기인한 점이 크다. 화폐가 신용카드나 수표 지폐같은 신용화폐로 전환되면서 화폐시장과 관련한 경제학에서는 의미가 희미해져서 이제는 경제학속에서도 환율 관련한 토픽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었다.

말이 쉬워 보이는데다가 오해하기 딱 좋고 덤으로 왠지 어감이 착착 감겨서 쉽게쉽게 생각하는거 같은데, 이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학부 수준의 경제학 개론에서 나오는 화폐의 정의와 기능, 통화량, 이중 화폐 체계, 화폐간 법적 교환비 이 네가지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암만 말이 쉬워보여도 실제로는 적어도 경제학 개론은 떼야 이해가 가능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그레샴의 법칙이 성립하려면, 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려면 두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한다.
1. 가치의 보존과 유통 기능을 모두 가진 두 종류 혹은 그 이상의 재화와
2. 두 재화간에 법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교환비가 있을것.

5 기타

늑대와 향신료 초반에 이것과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환치기를 하려는 시도가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이를 역으로 이용했다.

소설 백룡공작 팬드래건에서는 팬드래건 공작령 내부에서 금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금화를 자체 주조함으로써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식으로 지역 경제를 장악하려는 모습이 나온다.

영화 평론가의 탈을 쓴 스노브 허지웅JTBC에 출연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라는 말을 짝퉁 한류가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에 완전히 잘못 빗대어 설명했다. 흔히 그레샴의 법칙을 구축(驅逐)을 구축(構築)으로 이해하곤 하는데, 이것이 대표적인 예.
  1. 10원 주화 훼손을 표현한 장면이 나오는 대중 작품에는 박인권쩐의 전쟁이 있다. 주인공 금나라가 빚에 시달리다 자살한 자기 아버지의 모습에 분노한 상태에서 그 후에도 자기 엄마, 친누나, 매형, 조카 등을 계속 괴롭히는 사채업자에게 참던 분노가 모두 폭발하여 10원짜리 주화 수천개를 녹여 작은 칼을 만들어 달라고 전문업자에게 부탁하여 얻은 칼로 사채업자를 찔러죽인다. 악세사리업자는 상술된대로 당시 유행하던 10원짜리 동전으로 만든 악세사리를 원해서 부탁한 줄 알았다. 아무튼 돈으로 남들 죽이던 놈들은 돈으로 죽어야 한다는 게 금나라의 논리였다. 조금 과장된 면은 금나라가 서울대 수학과 수석 엘리트 출신이라는 설정을 보여주려고 사람을 죽이는 게 매우 어려울 정도로 작은, 그야말로 사람손보다 작은 칼로 죽였다고 한 부분인데, 미리 사람 급소를 의학적으로 연구한 뒤 전문적인 고등수학의 함수들을 미분과 적분을 하며 계산하여 정확한 급소 위치와 찌르는 방향, 횟수 등을 모두 찾아낸 뒤, 사채업자에게 가서 그대로 찔러 죽였다고 나온다. 뭘 미분하고 적분한다는 거냐? 최댓값이라도 구했겠지 미적 모르는 작가가 쓴거지 뭐. 간단하잖아
  2. 화폐위조는 나라(정확히는 정권)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심각한 행위인지라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들이 반역에 준하는 중죄로 여겨 극형으로 다스렸다. 금속화폐에서 종이(신용)화폐로 넘어간 다음에는 전시에 적국의 화폐를 위조해서 적국에 대량으로 뿌려 경제를 공격하기도 했다.
  3. 당백전의 액면가는 상평통보의 100배였지만, 금속가치는 5~6배에 불과했다.
  4. 현대의 화폐에 비하면 위조하기가 쉬운 옛날 금속화폐의 특성상 금속의 가치가 액면가치랑 비슷한데, 상평 6냥짜리 동전이 100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쏟아져 나오니 기존의 상평통보는 모조리 장롱행... 그런데 총 통화량은 2천6백만 냥으로 증가했으므로 물가는 최소한 이론적으로 2.6배 뛰었을 것이기 때문에 당백전(100냥 단위)으로 거래할 만한 부자들이 아니면 죄다 물물교환으로 회귀하고 화폐경제는 파탄나고 세금도 제대로 안 걷히고...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