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칼라

로마의 역대 황제
세베루스 왕조세베루스 왕조세베루스 왕조
20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21대 카라칼라, 게타22대 마크리누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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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을 팍 쓰고 있는 것이 한 성깔 있어 보인다.[2]

Caracalla.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로서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로마제국 황제. 186년 4월 4일 ~ 217년 4월 8일(31세)

1 소개

본명은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 황제 즉위 후의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였다. 그러므로 황제로서 공적인 통칭은 "세베루스 안토니누스"가 된다. 카라칼라는 사실 별명으로 이는 당시의 갈리아식 의복을 가리키던 말인데, 모자가 달린 몸에 꼭 맞는 짧은 망토였다. 카라칼라는 발까지 내려오도록 옷의 길이를 늘려 입었는데, 새로운 스타일의 이 망토는 그가 옷에서 딴 별명을 쓸 정도로 그가 좋아했고 그래서 그런 별명을 얻은 까닭이 그가 카라칼라를 즐겨 입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가 직접 카라칼라를 디자인한 일이 있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뭐 2세기 전에 칼리굴라라는 황제가 장화에서 딴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으니... 웃긴 것은 사물 이름 붙은 로마 황제들은 다 통치를 왜 그렇게 하는지

2 폭군, 카라칼라

그는 부도덕하고 잔인했던 아버지보다도 더 잔혹했다. 그는 식탐이 있고 포도주에 중독되었다. 식솔들은 그를 싫어했으며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군사도 그를 혐오했다. 그와 동생 게타는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

ㅡ 로마황제열전 중 카라칼라의 생애, 9

카라칼라는 로마의 폭군이라고도 불리는 만큼 평가가 나쁘다, 널리 알려진 역사책들을 보면 카라칼라는 아주 잔인하고 난폭하며, 로마의 포악한 황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카라칼라는 콤모두스 황제와 함께 능력이 보장되지 않는 부자 세습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제시되는 황제 중 하나다. 그러나 혹평을 받는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를 못된 황제로 못박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잔인했다고 해도 그는 군인들에게는 분명히 인기가 있었던 인간이였다. 기드그 카라칼라의 유년 시절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의 그는 매력적이고 영리하며,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친구들에게 예의 바른 사람이였으며, 민중들에게 사랑받았으며,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고 사람들의 애정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의 장점들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던 사람이며, 카라칼라는 글에서도, 친절한 행위에서도 뒤쳐지지 않는 듯 보였고, 남에게 베푸는 데도 전혀 인색하지 않았고 용서할 때에도 마지못해 하는 적이 없었다[3]는 좋은 기록들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래 세베루스 재위시 일찌감치 부제로 임명되어 후계자 지위가 공인되어 있었으나 게타와 카라칼라는 각각 22세와 23세의 젊은이였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경쟁 상대였고 서로에게 적대감이 깊었던 상태였다. 이에 비추어 보면 세베루스가 죽은 뒤 카라칼라가 먼저 단독 황제가 되려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세베루스는 일찍이 198년에 카라칼라에게 '임페라토르 테스티나투스'와 아우쿠스투스'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두형제의 나이 차이가 1년 밖에 안 되는데도 게타가 아우구스투스 서열에 오른 것은 209년이 되어서였다. 게타의 재위 계승 요구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친어머니 율리아 돔나 황후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고, 결국 단독 황제가 되려는 카라칼라의 시도는 실패했고 두 형제는 공동 통치자로서 아버지의 유해를 들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렇게 세베루스 만년에 그와 사이가 나빴던 동생 게타가 경쟁자로 떠올라 갈등이 깊어갔다.

두 황제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는 황궁을 반으로 나누어, 각각 주 출입구를 따로 하고, 동시에 서로 연결되는 문과 통로들을 모조리 막아서 두 개의 궁으로 만들어 함께 거처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타협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였고, 게타와 카라칼라는 각자 원로원 의원들과 그 밖에 중요한 인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암투를 벌였다. 로마의 학자들 사이에는 지지층을 형성한 게타가 카라칼라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통치라로서 그 둘 사이에 선택의 여지가 많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황제는 관료를 임명할 때에도 자신의 사람을 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며, 서커스 경기에서도 서로 다른 팀을 지지하고 서로 다른 팀들의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사법, 행정에도 관여하면서 이들의 경쟁은 법 판결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결국 황제들은 서로를 독살할 생각을 했다.

몇 달 뒤 두 황제는 제국을 양분하는 것이 유일한 평화적 해결책임을 알고 게타는 아시아를 차지하고 카라칼라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북서 지역을 맡기로 했다. 게타는 새 수도를 안티오키아나 알렉산드리아로 삼을 계획이였는데, 학자들은 이런 구도가 형성되었다면 제국에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전면적인 내란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어머니 율리아 돔나가 두 형제에게 "제국을 서로 나눠 가질 거라면 이 엄마는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이냐"라며 물었고 이로 인해 계획은 중단되었다.

계획이 무산되자 카라칼라는 게타가 지지자들의 밀착 경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12년 2월, 게타가 율리아 돔나와 함께 있는 때를 틈타 그를 살해했다 야사에 의하면 게타는 "어머니, 형이 날 이렇게 했어요. 형이 날 이렇게 했어요. 도와주세요! 날 도와 주세요!"라고 외치면서 율리아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렇게 결국 세베루스 사후 그 무렵에는 사실상 공동 통치자였던 게타를 참살하고(212년 2월) 권력을 독점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카라칼라에 의해서 살해됨으로 인해 게타의 이미지는 순교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제위를 계속 유지했다면 카라칼라보다 더 나은 또는 더 많은 덕을 지닌 황제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4]

카라칼라는 죽은 동생 게타의 생일 기념일을 없앨 정도로 그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냈고, 그의 상들을 받치고 있는 돌들을 깨부수거나 게타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를 녹여버렸다. 그러나 게타에게는 막강한 지지자들이 있었으며 자신이 그들이 자신에게 반대할 것임을 안 카라칼라는 신변안전을 위해 가장 먼저 근위대를 찾아가 자신이 하마터면 동생에 손에 죽을 뻔했기에 그를 죽였고 그건 정당방위였다고 게타의 지지자들에게 주장했다. 군인들은 그를 의심했지만 많은 선물을 내리고 급료를 대폭 올린다는 약속에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다음날 그는 원로원에 나타나 게타가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자신의 행동을 해명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입지가 불안하다고 생각한 카라칼라는 동생의 옛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원로원의원, 근위대장, 식민지의 총독, 궁중의 시종, 군인 ,전차를 모는 사람, 게타의 옛 친구들도 재판도 없이 또는 아주 그럴 듯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그들은 식사를 하던 도중에, 공공 목욕탕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212년 초 몇 달 동안 무려 2만명이 이렇게 죽어갔다. 대대적인 처형에 대한 항의가 있었지만, 카라칼라는 이들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가혹하게 진압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인 초로의 코르니피키아[5]와 카라칼라의 아내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도 있었다. 212년에 자행되었던 게타의 지자자들에 대한 학살 사건은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로마 사회는 다른 계층들과도 멀어지게 만들었고, 이러한 갈등은 카라칼라의 치세 동안 계속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213년 초, 로마에 머물르기 불편했던 카라칼라는 게르마니아 변경 지역을 향해 떠났다. 마차를 타고 가는 대신 병사들과 나란히 행군하고 로마에서 특별히 수송해온 고급 음식 대신 평범한 현지 음식을 먹는 젊은 황제는 곧 군인들이 좋아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보릿가루를 직접 갈기까지 했다. 물론 군대에 대한 지원이 결코 사사로운 생각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였다. 그는 단독으로 황제가 되자마자 군사들의 급료를 최소 50%로 대폭 인상하여 국고에서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비용이 빠져나갔다.

213년 여름, 로마는 아그리 데쿠마테스(agri decumates)지역과 라인란트 국경 양쪽에서 게르만 부족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원로원은 이러한 승리에 감동하여 카라칼라에게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수여했다. 이듬해, 카라칼라와 수행원들은 동쪽으로 길을 떠나 다키아와 트라키아를 거쳐 소아시아로 들어갔다. 그가 갑자기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되어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대제를 새롭게 기리게 된 것은 트라키아를 통과할 때였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제를 흉내내서 여러 마리의 코끼리를 수행원들과 함께 다니게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철학자들을 처형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제의 죽음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로마와 다른 도시들에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카라칼라의 영웅 숭배는 극에 달했고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와 자신의 얼굴을 반씩 조합한 두상을 그리게 했다. 그러다가 일리움의 유적지와 아킬레우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찾아가 그곳을 화환과 꽃으로 장식했고, 그들이 일리움에 머무는 동안 수행원 한 사람이 숨을 거두자, 카라칼라는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루스(Patroclus)에 대해 묘사한 것을 본따서 화장용 장식을 사용해 동물 희생제를 드리며 성대한 장례식을 했다.

카라칼라의 여행은 다음해에도 계속되었는데, 214-215년의 겨울은 소아시아의 북서 지역에 있는 니코메디아에서 보냈지만, 215년 5월에는 이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여름을 보낸 후에 알렉산드리아에 갔는데 여기서 그의 알렉 산드리아의 대학살이 벌어진다, 그곳에서 그는 시민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았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인구는 약 50만명으로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곳은 황제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묻힌 곳으로 매우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 도시였다. 카라칼라는 그곳에 가서 처음으로 한 일은 또 대제의 묘지를 찾아가 자줏빛 황제복과 그가 달고 있던 장식품들을 무덤 앞에 놓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카라칼라를 격노하게 만드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데, 무슨 사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였을 수도 있지만,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그가 게타를 살해한 것을 비판한 일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원인이 무엇이든 카라칼라가 보인 잔인성은 굉장했다. 도시의 젊은이들이 거짓 약속에 속아 검거되었고,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으며, 이러한 대학살은 곧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서 비무장한 수천 명의 시민이 죽어갔다.

거대 목욕탕과 같은 문화 시설들을 건립하고[6] 제국 영내 모든 자유민을 로마 시민으로 격상시키는 등(안토니누스 칙령)[7][8] 민심을 얻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다. 마초적인 천재 군주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경했던 황제였고 그 때문에 여러 기이한 언행을 하면서 조금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면 마구 시민들을 학살하는 괴행태를 저질렀기에 이런 정책의 의미는 반감되지만, 의외로 통치에서는 상당한 자질을 보였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이 이미 이 시기부터 상당히 강해진 상태였으며 제국의 한계 수익성도 이미 세베루스 시절부터 악화되어가고 있었지만, 그 현상들은 카라칼라 때 닥쳐왔다. 그는 앞서 말했듯 세금을 올리고 화폐의 질을 낮추는 것으로 해결한다.[9] 물론 화폐 가치 절하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오며 제국의 경제력이 악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징표지만, 당장 방위 수요는 급속히 늘어나 세금 쓸 데는 빠르게 늘어나는데 화폐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군대의 충성도가 떨어지고, 임오군란이 괜히 터진 것 같은가? 외적이 침입해서 영토를 까먹으며, 경제적 잠재력과 성장률이 대폭 떨어져 결국 경제는 훨씬 더욱 망가질 뿐이었다. 갈리에누스도 화폐 절하를 단행했으며, 3세기의 위기를 수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금화는 절상했지만 은화는 크게 절하시켰다.

카라칼라는 어쨌든 자신이 군주임을 자각했기에 재판에도 상당한 열의를 기울였고, 법률에도 꽤 관심이 많아 많은 시간을 들였다. 군사적으로도 대 게르만족 전선에서 상당한 전과가 있었으며 [10] 기동대(벡실라티오네스)와 수비대를 분리하여 종심 방어적인 전략 사고를 도입하는 것도 하였고 이는 이후 로마 제국 방어전략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11] 카라칼라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넘어선 "예방전쟁"을 통해 원로원에게 '파카토르 오르비스(pacator orbis/이 땅에 평화를 가져온 황제)'라는 존칭을 얻었다.

다만 이 모든 재능과 자질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자기통제력 탓에 돌발적인 충동 제어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닮고자 했던 노력과는 무관하게 제국 통치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동생을 죽인 죄책감 탓에 발기 자체가 안 되는 성불구자가 되어 자식도 남기지 못하게 되고 만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확연하기도 하고 은밀하기도 한 고통 때문에 몸이 아팠을 뿐 아니라, 어떤 괴로운 환영으로 고통을 받아 마음까지 병들었으며, 종종 자신이 칼을 든 아버지와 동생에게 쫒기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게타를 죽인 것도 그가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의 극단적인 불안이 그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야사에 의하면 카라칼라는 죽기 직전에 아버지가 나타나서 "네가 동생을 죽였으니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로마를 떠나서 군대에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 했었다고 하며, 카라칼라는 몸이 아파서 신전에서 질병 치유를 기원하기도 했지만 사실 카라칼라를 가장 괴롭힌 것은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죄의식과 불안감이였고 대순방 기간 동안 발생한 알렉산드리아에서의 대학살 같은 잔인무도한 행동 뒤에는 이러한 원인이 숨어 있었다고 한다.

사실 카라칼라가 동부를 방문한 목적은 파르티아인들을 상대로 한 정복 전쟁이였는데 이를 니시비스 전투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학살 사건 이후 그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서 군대를 편성하고 전투를 시작했다. 원정 준비는 이미 2년전 그가 소아시아에 있을 때 시작되었으며 군대를 강화하고, 통신 라인을 개선했으며, 군대에 주화를 공급하기 위해 새로운 조폐국을 설립했다. 216년 초여름에 시리아 국경 지역에 집합한 군 병력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군인 8개 군단 전부 또는 일부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였다. 파르티아 제국은 213년 이후, 두명의 경쟁자들이 일으킨 내란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격 하기에는 매우 적절한 타이밍이였다. 두 경쟁자 중 하나인 볼로가이세스 5세(Vologaeses V)는 메소포타미아 하류 지역과 수도 크테시폰을 장악했고, 다른 경쟁자 아르타바누스 5세(Artabanus V)는 이란 고원 너머 지역을 장악한 상태였다. 카라칼라는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여, 아르타바누스의 편을 들었고, 동맹 강화를 위해 그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제안은 함정이였고 카라칼라는 그가 안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로마군은 티그리스 강 동부의 시골 지역을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파괴했다. 어떻게 기습했냐 하면 파르티아의 황녀와 결혼식을 올리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어 파르티아 측 하객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새신부를 포함한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살해당했다.피의 결혼식 뒷통수 치기로 얻은 결과였지만 카라칼라는 만족해했고 그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 원정의 본부가 된, 메소포타미아 북부 도시 에데사로 가서 사냥과 전차 경주로 시간을 보내면서 다음해에 파르티아인들과의 교전에 필요한 새로운 군사 작전을 세웠으나 이 교전은 일어나지 못했다.[12]

카라칼라가 동부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황제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던 것이다. 카라칼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군대 사령관인 플라비우스 마테르니아누스(Flavius Maternianus)가 음모 소식을 알게 되었고, 카라칼라에게 서신으로 이 소식을 알리려 했지만 그의 서신은 안티오키아에서 황실의 서신을 담당하고 있는 카라칼라의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 전해졌다. 이 때 근위대장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Marcus Opelius Macrinus)가 주모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의심받았다.

그의 잔인성과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은 당연히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으며, 많은 사고를 친 제국 동방에서는 여론이 당연히 최악이었다.[13] 이런 성격적인 결함은 대 페르시아 원정에서 재앙으로 닥쳐오는데, 행군 중에 뭔가 잘못을 범한 두 병사를 여러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질책했으며 이에 앙심을 품은 두 병사 중 한명인 마르티알리스 진작부터 은근히 황위를 넘보았을 마크리누스를 충동질했다. 그 중에서 마르티알리스는 카라칼라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는데,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그의 형제가 입증되지 않은 혐의를 받고 며칠 전에 처형된 것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가 자신을 백인대장으로 승진시켜주지 않아서 화가 나서 그랬다는 기록이 있다. 어찌 되었든 마크리누스와 마르티알리스는 둘 다 4월 8일에 에데사에서 카르하이[14]까지 카라칼라를 동행하는 수행원단에 포함되었다. 황제는 당시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는 볼일을 보기 위해서 가는 길을 멈췄다. 당시 카라칼라 곁에는 단 한명의 시종만 있을 뿐, 나머지 호위병들은 황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마르티알리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고 마르티알리스는 부름을 받은 척하며 앞으로 다가가서는 바지를 내리는 그를 검으로 한번에 찔러 죽였다.[15][16]

마크리누스는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였지만 병사들에게는 사랑을 받았던 카라칼라의 시신은 정식으로 화장되었고, 시신은 안티오키아의 율리아 돔나에게 보내졌다. 그의 나이는 겨우 29살이었다 시신을 담은 납골 단지는 다시 로마로 옮겨져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몇 주 후에 율리아 돔나도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고, 몇 달 후 어머니와 아들은 엘라가발루스에 의해 함께 신격화되었다. 그리고 마크리누스가 그를 뒤이어 황제가 된다.

죄의식과 불안으로 잔인해졌지만, 통치자로서의 능력도, 훌륭한 정부에 대한 관심도 없지는 않았던 카라칼라의 삶은 이렇게 끝났다 법률을 심리할 때에도 인내심을 보였고 양심적이었으며 또한 통화 제도를 개혁하여 '안토니니아누스(antoninianus)'라는 새로운 은화를 도입했다. 그 외에도 212년 안토니네 헌법에 로마 시민권을 제국의 모든 남성 자유민물론 노예는 빼고에게 처음으로 확대했다. 시민권을 확대한 이유가 비록 공공 의무를 확대하고 황실 재원을 늘리기 위해서였지만 시민이 되면 세금을 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칙령은 로마인과 비로마인의 차이를 없애버림으로써 제국의 개념을 이탈리아가 지배하는 식민지가 아니라 연방에 비슷한 형태로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카라칼라의 치세를 지속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것은 시민권의 확대도 악명 높은 그의 잔혹성도 아닌, 바로 그가 로마에 세운 거대한 욕장이다. 오늘날 욕장은 그 유적지만으로도 로마 제국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기념비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3 트리비아

여담으로, 미술학도라면 누구나 친숙하게 느낄 석고상 카라칼라는 바로 그의 흉상을 모델로 한 것이다.
  1. 마크리누스는 세베루스 일족이 아니었으나 그를 몰아낸 이후 황제들은 세베루스의 피를 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 자체는 여전히 세베루스 왕조에 포함된다.
  2. 카라칼라의 초상들은 종종 성이 난 듯 찌푸린 표정의 불독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거친 군인'의 이미지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황제를 묘사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마지막 조상들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다. 하지만 이제 카라칼라의 초상들에서는 그의 영웅인 알렉산드로스 대제를 느낄 수 있다.
  3. 로마황제열전 중 카라칼라의 생애 1
  4. 기록에 의하면 게타의 성품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는 기록도 상당히 있다. 기록에 따르면 게타는 어려서부터 얼굴이 잘생겼고 무례하진 않았지만, 무뚝뚝했으며, 여자를 밝혔으며, 비열하고 탐욕스러우며 다양한 향신료를 넣은 음식과 포도주를 좋아했으며, 자신의 옷과 보석에 돈을 많이 쓰면서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선물을 하지 않는 다는 평판을 받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5. 게타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발견된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6. 그가 로마에 남긴 공공 건축물 가운데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욕장이 있다. (당대에는 "안토니누스 욕장". 현재는 테르메 디 카라칼라(카라칼라 욕장)이라고 부른다. 욕장의 '켈라 솔리아리스' 부분은 돔 지붕 전체가 청동이나 구리 격자로 지지되어 있어, 크기가 얼마나 방대한지 역학에 조예가 깊은 건축가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지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고 한다.
  7.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속주세를 걷을 수 없게 되어 국가 재정을 망쳤고 로마인의 자긍심을 기득권으로 바꾼, 이상주의자의 부정적으로 획기적인 칙령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보가 아니었던 카라칼라는 이전과 달리 거주지가 이탈리아가 아니면 시민권자에게도 세금 크리(게다가 기본 시민세 자체가 인상되어 속주세와 동일한 10%)를 먹였고, 이와 동시에 상속세도 올렸다.
  8. 시오노 나나미는 카라칼라의 칙령이 로마인의 계층 고정화를 불렀다고 단언하지만, 당시의 로마 제국은 이미 계층이 고정화되는 등 500년 뒤의 동아시아 어느 사회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거대한 사회 불만 세력을 떠안고 가는 건 그 자체로 위험 천만한 행위였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렇게 시민권을 얻은 속주민의 대다수는 로마 제국에 끝까지 충성을 바쳤다. 다만 로마 시민권의 가치가 다소 하락하고, 임시특별세가 남발되어 조세제도가 어지러워지기도 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9. 금화인 아우레우스의 무게를 1/45 리브라에서 1/50 리브라로 10% 낮추고, 데나리우스는 1/96 리브라에서 1/108 리브라로 12.5% 낮추며(은 92% -> 70%), 2데나리우스에상당하는 안토니누스를 신설하여 그 무게는 1/60, 즉 2/120 리브라로 했다.(20% 절하 + 은 72% -> 은 50%/동 50%)
  10. 라인 강도나우 강을 잇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보수하고 선제 공격을 감행해 게르만족에게 제법 타격을 줬다. 카라칼라 황제의 방어선 손질로 20여년 간 북방 게르만 전선은 평온했으며 이후 무너진 것도 게르만족이 갑자기 강해져서가 아니라 로마인들 스스로의 내분 및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참패 등으로 전방 경계에 소홀해진 결과였다.
  11. 시오노 나나미는 추측을 통해서 이 정책이 전대 황제들이 하지 않은 앝은 정책으로 수비대의 노령화와 약화를 불러왔다고 주장하지만 자기 말마따나 추정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업다.
  12. 시오노 나나미는 심지어 이 결혼식 사건을 깨끗히 거절 당했다는 역사 왜곡을 하면서, 카라칼라의 이런 시도가 로마인들의 지지를 잃는 무모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13. 황제를 야유한 알렉산드리아 청년 학살 사건이 있다.
  14. 지금의 터키 우르파 주 발리크 강가에 있는 마을 하란
  15. 그러나 정작 카라칼라를 죽인 병사들은 마크리누스에게, 황제 시해의 범인으로서 바로 즉결 처분당한다.본디 쓰고 버리는 카드들의 용도가 다 이렇다. 또는 곧바로 말을 타고 달아났으나, 카라칼라의 호위 기병이 던지는 창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16. 혹은 태양신을 참배하는 신전에서 기도중에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