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당나라의 안동도호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당시에 존재했던 안동도호부에 대해서는 안동시/역사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安東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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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동도호부는 당의 6도호부 중 하나이다. 당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누고, 평양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1] 그러나, 신라가 이에 반발해 나당전쟁이 터졌다. 이때부터 동족의식이 형성되어 신라와 고구려 유민은 연합하여 당군을 패배시켰다. 안동도호부는 이후 요동으로 치소를 옮겼다가 758년, 안록산의 난으로 폐지되었다.
2 역사
2.1 평양에서 요동까지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초대 도호는 우리가 잘 아는 설인귀이다. 한편, 신라 내에서는 불만이 계속 표출되고 있었다. 이전에 당은 취리산에서 백제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서로 화맹을 맺게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잘 생각해보면 이미 멸망한 백제와 독립국인 신라를 동일시했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당군과 신라군이 전투 중에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은 점도 있었다. 이러한 불만 속에서 당은 고구려를 기미지배하기 위한 일환으로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것은 신라로써는 대단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당의 팽창이 한반도 전체에 번질 수 있다는 의견이 집중되자 신라는 결국 당과 전쟁을 불사하기로 마음먹는다.
670년, 고구려 장수 고연무와 신라 장수 설오유가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요동을 선제 공격했다. 이후 신라는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당군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당의 세력을 한반도 밖으로 몰아냈다. 676년, 이에 따라 당은 안동도호부를 요동 고성으로 이전했다. 이듬해 신성으로 다시 이전했다가 일시적으로 폐지하기도 했다.[2] 677년, 당은 보장왕을 요동주도독조선왕(遼東州都督朝鮮王)으로 봉하고 안동도호부로 부임하게 하여 남아있는 고구려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은 말갈과 결탁해 독립을 꾀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특이하게도 이후 보장왕 후손이 도호부를 통치하였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당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당은 이때 요동 지배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당은 안동도호부가 기존에 있던 목적을 점점 상실하자 698년, 안동도호부를 안동도독부로 격하하였다. 이듬해에 보장왕의 셋째 아들 고덕무가 안동도독이 되었고 이 해에 요동반도에 소고구려를 건국했다.
2.2 도호부로 승격 그리고 폐지
안동도호부는 잠시 안동도독부로 격하되었다가 705년, 유주 도독과 겸임하는 형태로 안동도호부는 부활했다. 714년, 당은 거란의 발호를 차단하기 위하여 평주에 이치하였다. 그러다가 안동도호부는 요서 고군성에 이전되었다. 이곳이 안동도호부의 마지막 치소이다. 안동도호부의 실권은 개원 말부터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이후 평로절도사의 통제 하에 있다가 결국 758년, 안사의 난의 계기로 폐지되었다.[3] 안동도호부는 668년 설치되어 758년에 이르기까지 91년동안 존속하다가 그 명칭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3 부속 관할
3.1 도독부(都督府)
신성주(新城州), 요성주(遼城州), 가물주(哥勿州), 위락주(衛樂州),사리주(舍利州), 거소주(去素州), 월희주(越喜州), 거단주(去旦州), 건안주(建安州)
3.2 주(州)
남소주(南蘇州), 개모주(蓋牟州), 대나주(大那州), 창암주(倉巖州), 마미주(磨米州), 적리주(積利州), 여산주(黎山州), 연진주(延津州), 목저주(木底州), 안시주(安市州), 제북주(諸北州), 식리주(識利州), 불열주(拂涅州), 배한주(拜漢州)
4 연혁
- 평양(平壤):668년—676년
- 요성(遼城):676년—677년
- 신성(新城):677년—699년
- 유주(幽州):705년—714년
- 평주(平州):714년—743년
- 요서고성(遼西故城):743년—75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