買肖城戰鬪
전쟁기념관에 있는 매소성 전투 기록화 |
매소성 전투 | ||
날짜 | ||
음력 675년 9월 29일 | ||
장소 | ||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신라 | 당 |
지휘관 | 불명 | 이근행 |
병력 | 불명 | 주변 지역 20만 명 교전 병력 4만 명 |
피해 규모 | 불명 | 6,047명 전사 |
결과 | ||
신라군의 승리로 대 신라전선을 담당한 이근행이 청해로 배치됨. |
675년 음력 9월 29일 매소성(買肖城, 지금의 연천군)[1]에서 벌어진 통일신라와 당(唐)의 대결. 신라군[2]이 당군 4만을 물리친 전투다.[3]
1 소개
668년 보장왕이 항복하며, 당나라와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삼국을 통일하고, 통일신라가 되었지만, 당나라는 한반도에 지속적인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나당전쟁이 발발했고 전황은 신라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1.1 철옹성 매소성
유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자, 조서를 내려 이근행(李謹行)을 안동 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고,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여 경략(經略)케 하였는데, 이근행이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 《동국통감》 권9 신라기 문무왕 을해년
675년 2월, 당나라는 유인궤가 철중성을 공략해 신라군을 격파한후, 당나라로 돌아가자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고 매초성에 주둔시키게 했다. 신라군이 3차례에 걸쳐서 교전을 펼쳤지만 모두 패배했고, 이 때문에 문무왕이 당고종에게 사신을 보내 사죄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는 등 좋지 않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1.2 설인귀의 실수
675년 9월, 설인귀는 김풍훈[4]을 앞세워 신라의 천성(泉城)[5]에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이때, 신라의 장수 문훈(文訓)등이 맞서 싸워 1,400명의 목을 베고 40척의 함대를 탈취했으며, 말 1천필을 획득했다. 설인귀는 포위망을 뚫고 겨우 살아날 정도의 대패였다. 이러한 대 참패에 당나라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4만의 병력을 매소성 일대에 주둔 시킨다.
1.3 매소성을 공략하다
400px |
위에 보이는 강은 임진강. 천성에서 패배했다는 당수군은 이쪽을 통해 보급을 시도했을 것이다. |
이에 신라군은 북한산성을 출발해 매소성 근처의 수철성, 초성리산성, 초성리토성[6]일대에 주둔 시켰다. 그리고 9월 29일, 교전이 시작되었다.
二十九日 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擊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 稱是(9월) 29일,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소성(買肖城)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쫓아버리고 말 3만3백8십 필을 얻었으며 그밖에 얻은 병장기도 그만큼 되었다. - 《삼국사기》권7 신라본기 문무왕 下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습격하여 패주(敗走)시키고 전마(戰馬) 3만 3백80 필을 얻었으며, 그 나머지 병장기(兵仗器)도 이와 맞먹는 수치였다. - 《동국통감》 권9 신라기 문무왕 을해년
이날 승리는 대승이었다. 20만에 달하는 당나라 병사들은 30,380필의 말과, 어마어마한 수의 병장비들을 놔두고 임진강변의 칠중성으로 도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소성 근처에 "말무덤"이라 불리우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당나라 말들을 묻었다는 구전이 전해져 내려 오는 것을 보아 엄청난 수확을 거둔듯 보여진다.
이 전투에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참전하였는데 간혹 김원술을 매소성 전투를 이끈 지휘관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매소성 전투를 이끈 신라측 지휘관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없고 김원술은 이미 김유신에게 버림받아 가문에서조차 쫓겨난 관계로 관직이 없이 그저 의용군의 입장에서 참전했을 따름이다.
300px |
1.4 실제 교전이 있었는가?
보통 전투를 나타낼때 삼국사기에선 "싸워서(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매소성 전투에서는 "공격하여 쫓아버리고(我軍擊走之)"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따라서 전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천성을 공격했던 부대는 사실 보급을 담당하던 부대였는데, 이 부대가 격퇴되니 당군이 물러선것 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특히 당나라 병력은 기병 3, 보병 7의 분포로 인해 보급의 중요성은 보병부대보다 더욱 중요했는데 이러한 부대가 싸우지 않고 퇴각했다는 것은 보급의 문제일 것이라는 것이다.
2 결과
이날 승리만으로 당나라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주진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는 이날 전투가 끝나고 얼마 안있어 석현성(石峴城, 개풍군 청석동으로 추정[7])을 함락시켰고, 이후 총 18번의 신라군과의 교전이 있었기에 당나라의 병력에 큰 타격을 준 전투는 아닌 듯 보인다.[8]
又我兵與唐兵大小十八戰 皆勝之 斬首六千四十七級 得戰馬二百四또한 우리 병사가 당나라 병사와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047명의 목을 베고 전마(戰馬) 2백 필을 얻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거점인 매소성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나당전쟁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4만명에 달하는 대군이 힘을 쓰지 못하고 도망갔으며, 그 결과로 중요 요충지인 매소성을 함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이 시기 당나라 서쪽의 토번이 군사적으로 강성해 지는데,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당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있었다. 이에 대 신라전선을 담당하던 이근행과 그의 부대가 청해로 이전 배치되었다.[9] 신라는 방어를 강화하고 내부 사정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3 매소성의 위치?
매소성은 초기에 경기 양주군 주내면(州內面)의 "양주산성설"과, 주내면 남방리(南方里)의 "남방리산성설"이 있었다.[10] 1984년, 역사편찬위원회의 실측조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경기 연천군 청산면(靑山面) 대전리(大田里)의 "대전리산성"이 바로 매소성의 터로 확인이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성터는 둘레 670m, 넓이 1,960㎡이다.
4 기타
대왕의 꿈에서는 나레이션과 함께 매우 짧게 묘사되어 소정방 휘하의 장수 두 명이 매소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는데, 김원술이 말갈족 출신의 소정방 휘하의 장수를 죽이는 모습이 나오고 당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승리하자 함성을 외치는 것으로 나온다.
이준익 감독이 구상한 삼국시대 3부작 시리즈가 황산벌, 평양성 그리고 이 매소성 전투를 다룬 영화였다고 한다. 하지만 평양성이 흥행에 실패하면 상업영화계에서 은퇴하겠다는 발언을 했고 그뒤 평양성의 흥행이 실패하며 은퇴하는 바람에 물거품 되었다고.출처[11] 그러나 이준익 감독이 소원을 연출하고 이어 사도세자를 다른 사도, 윤동주를 주인공으로 한 동주, 등 역사 소재 영화 연출에 다시 나서 성공을 거둔 만큼 매소성 기획이 부활할 가능성도 없진 않다. 황산벌과 평양성의 개봉시기를 보아 제작하면 2018년 개봉이 유력하다 거시기가 다시 주인공으로 나올까? 매소성이 하필 거시기 살던 곳과 가까운곳이여서 다시 참전하게 되겠지
- ↑ 학자에 따라 매초성이라고도 읽기도 한다.
- ↑ 간혹 이때 신라군 병력이 3만이라는 말이 있지만 정작 삼국사기에는 신라군의 병력은 물론이고 지휘관이 누구인지조차 기록에 없다
- ↑ 다만 《삼국사기》에서 당의 20만 병력이 주변 지역에 진을 치고 있었다. 4만은 중국측 기록의 교전 병력이다.
- ↑ 그의 아버지 김진주가 신라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 ↑ 현재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변에 위치한 오두산성(烏頭山城)으로 추정된다.
- ↑ 초성리산성 바로 아래에 위치
- ↑ 문경시의 석현성과는 다른 성이다.
- ↑ 사실 나당전쟁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갈랐던 전투는 기벌포(伎伐浦) 전투다. 기벌포 전투에서도 22회에 걸친 크고작은 교전이 있었다.
- ↑ 이후 이근행은 토번군을 격파하면서 급한 불을 끄지만, 당은 말갈족인 이근행이 요동에 독자 세력을 다질까봐 두려워하여 그대로 청해 방면에 배치시켰다. 이근행은 나당전쟁이 끝난 후에도 요동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결국 682년 병사한다.
- ↑ 실제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양주 대모산성이 조사중이라고 보고까지 올린 상황이었다고 전해진다.관련 기사
- ↑ 기사 원본 링크가 깨져 여기로 대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