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헨리 8세의 6번째 왕비 캐서린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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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therine Parr (1512 - 1548) 1543 - 1547 (결혼기간)
캐서린 파는 한미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는데, 헨리 8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기 전에 이미 2번 결혼해서 모두 사별한 바 있었다. 두 남편들은 모두 나이 많은 재력가였는데 아마 그녀의 친정 형편이 어려워서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원치 않은 결혼을 한 듯하다.
첫 결혼을 고작 13세 때 환갑이 넘은 노인과 했는데 불과 4년만에 사별했고, 얼마 뒤에 역시 노령의 부자 라티머 경과 결혼했지만 라티머가 몸이 좋지 않아서 제대로 된 결혼생활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캐서린은 어렸을 때부터 늙은 남편들의 실질적인 간병인 노릇을 해야 했지만, 다행히도 남편들이 결혼하고 얼마 못 가 죽으면서 아직 젊을 때 부유한 미망인이 되었기에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올 수 있는 신분이 됐다. 라티머와 사별했을 당시에 캐서린 파는 고작 31세였는데 우연히 그녀를 알게 된 헨리 8세는 자연히 그녀를 탐내게 된다.
당시에 헨리 8세는 앤 불린이나 캐서린 하워드와의 결혼생활을 겪고 나서, 이제는 어리고 경박한 아가씨라면 지긋지긋하게 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노령인데다 승마 사고로 다리까지 저는 불편한 몸이 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연륜이 있고 나이 많은 남자를 편안하게 돌보는 데 능숙한 여자를 왕비감으로 물색하다가 라티머의 아내인 캐서린에게 마음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라티머가 곧 죽을 정도로 위중한 상황이었으므로 헨리 8세는 느긋하게 캐서린이 홀로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캐서린은 당시 첫사랑인 토머스 시모어[1]를 남편감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 왕비인 캐서린 하워드가 목이 달아나고 궁정에 피바람이 한번 몰아친 적이 있었던 데다가 그 이전의 다른 왕비들도 모두 결말이 그리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왕은 이미 고령인데다 심한 병 때문에 성질까지 날카로워져서 아직 젊은 캐서린이 결혼을 원치 않았을 이유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미 결혼했던 두 남편들이 죄다 늙고 병든 사람들이었으니 이제라도 또래 남자와 정상적으로 결혼하고픈 마음도 컸을 것이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기어이 캐서린을 왕비로 삼아 자신의 말년을 지키게 했다.
이렇게 결혼의 시작에는 좀 문제가 있었지만 천성이 현명하고 너그러웠으며 교양도 많았던 캐서린은 헨리 8세와 잘 지냈다고 한다. 병에 시달리는 왕을 정성스럽게 돌보았으며,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서로 존중하며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부부였다. 그러고 보면 둘다 결혼 경험도 많다.(...) 또 캐서린은 헨리 8세를 설득해서 그때까지 사생아 신분이었던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신분을 복원했고, 의붓자식들인 메리나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6세와 헨리 8세의 친척인 제인 그레이를 같은 궁으로 불러서 잘 양육했다. 캐서린은 전남편들의 전처 소생 자식들도 살뜰히 챙긴 바가 있었다.
캐서린 파는 또한 교육에 관심이 많은 만학도였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지라 딱히 고등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의붓자녀들의 교육에도 열정을 쏟았고 자신도 뒤늦게 라틴어와 신학 등 열성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헨리 8세와는 곧 열성적으로 신학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캐서린 파는 잉글랜드 왕비 중 처음으로 책을 2권이나 집필하여 출판하기도 한다. 여성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상당히 보수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정치적인 역량 역시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544년 헨리 8세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 출전하자, 캐서린 파는 섭정직을 훌륭히 수행했다. 당시 섭정을 수행하던 원로들이 있었으나 실질적인 리더십은 캐서린 파가 발휘했다고. 어느 정도의 제왕 교육을 받는 왕족 여성과 달리, 귀족 여성으로서 기본적인 교육만 받은 여성으로서는 탁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평온히 왕비 역할을 수행하던 그녀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헨리 8세는 성공회 수장임에도 실질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였던 반면 캐서린 파는 성공회 교도였기 때문. 라틴어가 아니라 영어로 된 기도문을 작성하는 등 캐서린 파는 자신이 신교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캐서린 파는 보수적인 헨리 8세와 달리 진보적인 편이라 앤 불린이나 캐서린 하워드처럼 불같은 성정의 헨리 8세의 눈 밖에 나게 됐다. 헨리 8세가 아파서 힘들어하자 캐서린 파는 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종종 종교 토론을 하곤 했는데 이때 그녀는 자신의 신념대로 신교도적인 주장을 펼쳐 헨리 8세의 미움을 사기 시작했던 것.
구교도 세력은 캐서린 파의 몰락을 획책했고, 윈체스터의 주교 스티븐 가드너와 대신 라이오드슬리는 헨리 8세를 설득해서 캐서린 파의 체포영장을 발행한다. 당시 "헨리 8세는 캐서린 파와 이혼하고 서포크 공작부인과 7번째 결혼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는 터였다(...). 어떠한 연유로 캐서린 파는 이 체포 영장을 미리 읽어보게 되었고, 절망한 그녀는 헨리 8세에게 가서 "나는 무지한 여성일 뿐이며 전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했을 뿐이다. 앞으로는 전하의 가르침만 받겠다."라는 요지의 말을 하며 밤새 용서를 빌었다. 그녀의 태도에 헨리 8세는 마음이 풀어져 캐서린에게 "우린 여전히 친구요."라고 화해의 말을 건넸으며, 다음 날 아침 라이오드슬리가 왕비를 체포하러 들어오자 그를 손수 때려서(...) 쫓아냈다.
그리고 노령인데다 몸이 좋지 않았던 헨리 8세가 결혼 후 4년도 지나지 않아 사망하는 바람에 살아서 왕비로 남을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잘 돌봐준 캐서린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었는지 헨리 8세는 유언장에 캐서린에게 고급 식기들을 유산으로 남기고 연금을 지급할 것과 원활하게 재혼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명시했다고 한다.
헨리 8세가 죽고 나서 얼마 뒤에 첫사랑이던 토머스 시모어와 비밀리에 재혼했다. 그러나 너무 빠른데다 극비리에 이뤄진 재혼에 세간은 경악했고[2] 특히 보수적인 의붓딸인 메리가 비난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캐서린 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붓딸인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새 가정을 꾸리며 행복한 새출발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사랑하고 관심을 쏟아주는 계모 밑에서 마음껏 공부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재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기준으로는 한참 늦은 35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아이를 갖는 기쁨도 누렸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시모어가 당시 겨우 14살이었던 엘리자베스를 유혹하면서 부적절한 행동을 한 것이 발각됐다. 야심 많은 토머스 시모어는 왕위계승권이 있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위에 다가서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에 아직 어렸던 엘리자베스는 외모가 출중한 토머스 시모어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호기심을 가졌고 그대로 그 유혹에 넘어가면서 부적절한 관계가 시작됐던 것.
캐서린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엘리자베스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그래도 캐서린은 엘리자베스와 인연을 끊지는 않았고, 의붓딸을 원망하는 대신 진심으로 그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계모의 진심에 엘리자베스도 그녀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으며, 토머스 시모어가 다시 수작을 걸어오자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캐서린은 엘리자베스를 용서했고, 캐서린의 산달이 다가왔을 무렵에 엘리자베스는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메리도 이 무렵에 캐서린과 드디어 화해하고 '순산을 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결혼하고 1년쯤 뒤에 산달이 다가왔고 캐서린은 모두가 고대하던 아들 대신 딸 메리를 낳았다. 그러나 캐서린은 득녀한 기쁨을 미처 누리지도 못하고 당시에 유행하던 산욕열 때문에 그대로 몸져 누웠다. 캐서린은 죽기 전에 고열에 시달리는 혼수상태 속에서 자신을 찾아 온 지인들을 붙잡고 토머스 시모어와 엘리자베스에 대해 원망을 퍼부었다고 한다. 자신의 굴곡 많은 삶에 처음으로 꾸린 가정다운 가정이 남편과 의붓딸의 불륜으로 파탄 위기를 맞았으며, 이로 인해 크게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이대로 무덤까지 담아가기 억울했던 듯.
당연히 시모어는 당황해서 '왜 이러냐? 난 당신께 부정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며 캐서린을 달래려 했지만 캐서린은 '아니긴 뭐가 아니냐?!'며 계속해서 독설을 퍼부었다. 지인들은 그제서야 그녀가 겪은 일과 그로 인한 엄청난 고통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가장 잘해준 계모인 캐서린에게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독설을 퍼부은 뒤 캐서린은 죽음을 직감하고 정신을 수습하여 '남편에게 모든 재산을 남긴다.'는 호의적인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 이때 겨우 36세였는데 헨리 8세가 죽고 나서 자유를 찾은 지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헨리 8세의 모든 아내들이 그랬듯이 그의 마지막 왕비였던 캐서린 파의 삶도 참 기구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캐서린이 사랑한 남자이자 마지막 남편이었던 토머스 시모어는 권력자가 되겠다는 야심으로 형 에드워드 시모어와 정쟁을 벌이다가, 조카인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하고 해하려 했다는 죄로 처형당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헨리 8세의 여섯 아내들에게 "이혼 -> 처형 -> 사별"의 사이클이 2번 반복됐다는 기이한 얘기가 있다. 마지막 아내였던 캐서린 파 역시 이 사이클에 포함됐는데, 그래서 첫 사이클의 마지막이었던 3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처럼 캐서린 파도 출산 후 얼마 못 가 산욕열로 숨졌다. 물론 헨리 8세의 아이를 낳다 죽은 게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2 튜더스의 캐서린 파
졸리 리처드슨[3]이 연기한 캐서린 파.
시즌 4 중반부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고령에 지병까지 겹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라티머를 살뜰히 챙기는 후처로 등장하지만 토머스 시모어와 밀회를 가지면서 라티머 사후에 그와 재혼할 것을 약속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라티머에게 씌워진 반역 혐의를 벗기고자 궁중 연회에 참석했다가 공교롭게도 헨리 8세의 눈에 띄고 만다. 이후 캐서린은 영문도 모른 채 헨리 8세의 부름을 받고 단둘이 만나게 된다. 그에게서 남편의 결백을 보장받고 안도한 것도 잠시뿐이었다. 헨리 8세는 캐서린으로부터 라티머가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전남편들과 직접 낳은 자녀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하여 당혹스럽게 만든다. 캐서린이 머뭇거리다 아이를 낳은 적은 없다고 답변하자 이에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4]
짧은 첫만남이 끝나고 헨리 8세는 캐서린에게 뜬금없이 온갖 호화로운 선물을 가져다 주고, 캐서린은 선물의 의미를 짐작하며 크게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시모어가 "영국 왕비가 되고 싶지 않냐"는 말을 넌지시 건네자 캐서린은 경악하며 단호히 아니라고 말했다.[5] 이전의 왕비들이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맞은데다 이제는 노쇠한 헨리 8세의 정신적 건강 상태마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캐서린의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왕비가 되고싶은 생각은 전혀 없고, 여태껏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이어왔으니 남편이 죽은 뒤 당신과 재혼하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시모어에게 말했다. 하지만 헨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이후 캐서린이 보는 앞에서 시모어를 네덜란드 대사로 보내 버린다.
시무어와 반 강제로 헤어진 후에 캐서린은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라티머에게 아내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헨리가 캐서린에게 보낸 선물을 라티머마저 보게 되고, 그는 참담한 표정을 짓는다.[6] 얼마 뒤 캐서린은 라티머의 임종을 지키게 됐는데 라티머는 죽기 바로 직전에 캐서린에게 "Go to hell(지옥에나 가시오.)"라고 독설을 한다. 그간 말은 못했어도 생전에 아내를 뺏기는 걸 보게 됐다는 자괴감이 상당했던 듯. 그 직후에 남편의 죽음으로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는 그녀에게 에드워드 시모어가 헨리의 청혼을 전달하면서 한 화가 끝나는데, 이때 그녀의 표정은 정말 절망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다음화에선 청혼을 거절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일단 왕비가 되고 나서 메리와 엘리자베스, 에드워드와 모두 가깝게 지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고 헨리 8세의 고름이 흐르는 다리를 직접 보살피는 등 따뜻한 마음씨를 보인다.[7] 배우의 이미지 때문인지 헨리 8세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제인 시모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가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캐서린 파는 루터파였던 것. 신교도 처형에 열을 올리는 가드너 주교는 그녀가 신교도라는 심중을 잡고는 조사를 시작한다. 그와중에 그녀가 종교에 관한 이야기에서 자신의 의견을 아낌없이 피력하자 헨리는 그녀의 지성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언짢아하기까지 했다.[8]
결국 체포 명령이 떨어졌지만 명령이 이행되기 하루 전에 그 공문이 캐서린에게 은밀히 전달된다. 캐서린은 자신이 신교도라는 증거를 모두 없애고 무사히 위기를 넘긴 후, 헨리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위기를 넘긴다. 헨리도 캐서린을 더이상 의심치 않겠노라고 약속한다. 그걸 모르고 다음날 눈치없이 그녀를 잡으러 온 병사들에게 헨리는 고래고래 역정을 퍼붓고 내쫓아 버린다. 일을 주도했던 가드너 주교 역시 궁정에서 쫓아 버린다. 캐서린이 처신을 잘하기도 했지만, 헨리 역시 자신을 잘 돌봐주었던 그녀에게까지 굳이 벌을 내려 자신의 말년을 홀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애정없이 결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젠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노인이 되어버린 헨리를 보살피며 정이 들었는지 헨리가 사후를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는 몹시 슬퍼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헨리는 그녀에게 울지 말라며 자신의 사후에도 그녀가 합당한 대우를 받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물론 캐서린이 헨리 사후에 고작 2년도 못 살고 갔다는 역사를 감안하면 참으로 눈물나는 일이지만(...)
졸리 리처드슨과 메리 역의 사라 볼저는 실제로도 나이차가 많이 나고 드라마에서도 외모상 나이차가 꽤 있어 보이는데 실제 역사의 캐서린 파는 메리보다 겨우 4살 연상인 언니뻘의 젊은 여인이었다.
- ↑ 헨리 8세의 3번째 왕비이자 에드워드 6세의 생모인 제인 시모어의 셋째 오빠.
- ↑ 토머스 시모어의 형인 에드워드 시모어의 부인인 앤 시모어가 "캐서린 파는 이제 왕비도 아니고, 내 시동생의 부인이니, 이제 내가 왕의 큰 외숙모로서 궁정에서 가장 높은 여자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캐서린 파와 기싸움을 벌인 일도 유명하다. 앤은 원래 캐서린 파가 왕비였던 시절 그녀의 시녀이기도 했는데, 헨리 8세의 사후에 캐서린이 곧바로 재혼하자 이제는 캐서린보다 자신의 신분이 더 높다면서 왕가의 보석을 두고 캐서린 파와 갈등을 빚었다.
- ↑ 영화감독 토니 리처드슨의 딸이다. 리엄 니슨의 부인인 나타샤 리처드슨의 여동생(니슨의 처제)이기도 하다. 2011년도에 나온 영화 '위대한 비밀'에서는 젊은 엘리자베스 1세로 등장한 바 있다.
- ↑ 만약 캐서린이 전남편들과 자녀를 낳았다면 왕비로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던 듯. 실제로 캐서린이 두 번이나 결혼해 사별한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은 바 없는, 그래서 처녀와도 같은 몸이라는 점이 헨리 8세가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한 큰 원인이 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출산 경험이 불임이 아님을 입증해주는 것이므로 헨리 8세의 눈에 든 이상 왕비가 되어야만 했다는 반박도 있다. 사실 당시 헨리 8세는 노령에 고도 비만으로 거의 불임 상태인지라 새 왕비 후보를 더 고를 형편도 못 되었다.
- ↑ 이러한 캐서린의 반응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정색을 하는 표정으로 나왔다.
- ↑ 라티머는 "벌써부터 죽은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 같다"면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 ↑ 처음에는 왕실 어의, 시종들이 헨리 8세의 상처를 보여주는 것조차 만류하려 했지만, 캐서린은 "이보다 더 심한 상처들도 보아 왔다."면서 침착하게 치료했다.
- ↑ 드라마 내내 헨리는 자신의 아내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