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미국의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으로부터 나왔다. 그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후로도 없었다.
1 개요
Mark Twain
미국의 소설가. 《톰 소여의 모험》 같은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아동소설 작가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미국 풍자 문학, 나아가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분이다. 당장 《왕자와 거지》도 굉장히 노골적인 풍자를 담아냈으며, 《허클베리 핀의 모험》 또한 흑인 아이인 짐이 상당한 비중으로 나온다. 당시 흑인들의 인권을 생각해 보면 조연으로라도 큰 비중으로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혁신적인 요소다. 다만 《톰 소여의 모험》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인 조가 악역으로 나온 걸 두고 비난하는 분석도 있다.
2 이름에 관하여
마크 트웨인은 필명으로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이다. 사실 그는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 말고도 '토머스 제퍼슨 스노디글래스'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지만 이 이름으로 낸 작품은 그다지 평이 좋지 않아서 쓰지 않게 되었다.
마크 트웨인이란 필명은 그가 젊은 시절 증기선에서 일하면서 증기선이 항구로 도착할 때 물 속 깊이를 재던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물 깊이를 패덤(fathom; 1패덤 = 2야드 = 182.88 cm)이라는 단위로 측정하는데, 정확히 몇 패덤이라고 나오면 "By the mark~~"로 알린다. 이때 2패덤이 나올 경우 "two"라고 하지 않고 "twain"이라고 한다. 즉, 정확히 2패덤이 나온다면 "By the mark twain."이라고 말한다. 2패덤(약 3.66m)은 강을 지나가는 배가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평균 깊이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이제이어 셀러'라는 이름의 미시시피 강 수로 안내인이었는데, 그는 수로 안내인 생활에서 겪은 것을 토대로 잡다한 이야기를 지어내어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새뮤얼 클레먼스가 그 이야기들을 신문에서 익살스럽게 흉내 냈다. 그 뒤로 셀러는 다시 글을 발표하지 않았고 클레먼스가 마크 트웨인을 필명으로 썼다.
3 생애
1835년 미국 미주리 주 플로리다에서 태어났다. 4살 때 가족이 미시시피 강변의 소도시 핸니벌(Hannibal)[1]로 이사를 갔는데, 후에 여기서 《톰 소여의 모험》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11살 때 아버지를 폐렴으로 잃은 그는 인쇄소에서 수습공으로 일하게 되었다가 이게 인연이 되어 브라질을 탐험하고 미시시피 강을 누비는 증기선 키잡이 일도 하였다.
1840년대 미국 서부에서 금이 발견되어 미국에서 골드 러시가 일어나자, 약간의 토지를 매입해 금을 찾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덕분에 빚이 늘어나 신문사 일을 했는데 여기에 첫 단편들을 실은 것이 호평을 받아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밑에서 나올 독설가적인 면과 대조적으로 가정적으로는 매우 자상하고 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아내를 매우 사랑하여 아내가 아프면 그는 이런 글을 나무에 걸어둘 정도였다.
새들아, 너희들이 우는 것은 본능이니 울지 말라곤 하지 않겠지만 되도록이면 좀 멀리서 울면 안되겠니? 지금 우리 아내가 잠을 자고 있단다.
결혼까지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신문사에서 여행보내 줄 테니 여행에서의 영감으로 글을 써달라는 조건으로 여행 중 우연히 지금 부인의 오빠를 만난다. 당시 조금씩 유명세를 얻어가던 중이어서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 오빠가 그를 그의 선실로 초대하는데 거기서 지금의 부인 사진 혹은 그림을 보고 반해 버렸다. 그리고 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가서 부인에게 청혼하지만 유명한 작가인 것은 알지만 아직 좀 가난했던 처지인 지라 거절했고 장인의 반대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수를 쓰는데 바로 마차에서 스스로 굴러떨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허리를 다쳐 며칠간 그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계속해서 청혼을 한 결과 결국 받아들여 결혼에 골인 하였다.
다만 선량한 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들과의 사이는 평생 행복했으나 4명의 자녀 중 3명을 병으로 일찍 잃었기 때문. 첫째인 장남은 생후 19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자서전에서 트웨인은 추운 겨울 날씨에 아들을 바깥에 데리고 나간 게 잘못이었다며 크게 자책한다. 3명의 딸 중 2명은 각각 뇌수막염과 간질 발작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게다가 아내도 오랫동안 병에 시달리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가 핼리 혜성이 지나갈 때 태어나서 살아생전 트웨인 자신은 "혜성이 다시 지나갈 때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말한 게 실제가 되었다.
4 사상
계몽주의자로 제국주의를 혐오했다. 조국인 미국이 필리핀으로 쳐들어갈 때 제국주의 국가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을 독립시키려는 전쟁으로 여겨 처음에는 환영했지만, 갈수록 미군이 필리핀인들을 마구 학살하는 것에 분노하여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책을 써서 미국을 호되게 학살자라고 분노어린 비난을 쏟아냈다. 때문에 이 책은 미국에서 24년간이나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1923년에서야 나오게 된다. 당연히 필리핀 침공을 명령하고 "하나님이 나와서 명령했다"고 종교적 개드립으로 정당화하던 윌리엄 매킨리 당시, 미국 대통령을 가리켜 "남북전쟁 이래 미국에 내린 최악의 재앙. 그는 정치계의 톰 소여이며 무게 잡을 기회가 50%면 캐나다까지 가고, 그 기회가 100%면 지옥까지도 갈 작자이다."라는 증오어린 평가를 내렸다.
그 밖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중미에서 벌어지는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학살과 지배를 지독하게 싫어해 이를 풍자하는 글도 많이 썼다. 때문에 "열등한 필리핀을 백인이 지배해야 한다"며 필리핀 침략전쟁 및 학살을 옹호하고 또한 백인 우월주의 사상인 백인의 의무를 내세운 러디어드 키플링을 극도로 혐오했다. 하지만 키플링의 문학적 재능은 칭찬하고 존경하는 의미를 담은 글도 쓴 것을 보면 단순 혐오보단 애증에 가까운 듯하다. 그밖에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를 악마라고 비난하며 그가 콩고에서 저지른 학살을 엄청 비난했고 레오폴드 2세보단 덜하긴 했지만 아프리카를 식민지배하는데 앞장서서 자원과 영토 탈취와 원주민 노예화 등 악행을 저질렀던 세실 로즈를 반어법으로 찬양하면서 비꼰 인물이기도 하다.
트웨인이 쓴 글에 나온 분노 어린 문장을 보면 당시 기독교 사상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기독교에 대하여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악랄하고 피를 흘리며 무자비하고 약탈하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비기독교 국가에서 우리의 신앙이라면서 자행되는 일이다. 지옥을 들이대면서 벌이는 범죄를 성경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오늘날 우리들의 기독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만일 예수가 지금 이 세상에 있다면 그는 절대 기독교 신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종교는 끔찍한 종교일 뿐이다.
트웨인이 늘그막에서 쓴 이 글은 100년 동안이나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0년에서야 그의 사망 100주기 기념 행사에서 비로소 공개됐다.
다만 트웨인의 "공식적"인 종교는 장로교였고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장로교 교회를 짓는 데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신론자까지는 아니고 그냥 진보적 개신교도였는듯.
그 외에도 YMCA 간사이던 앤서니 콤스톡(Anthony Comstock. 1844~1915)을 "진화가 안 된 원숭이"라고 호되게 깠다. 콤스톡은 미국의 목사로 "대중문화가 사탄의 창조물"이라는 주장을 하는 근본주의자로 악명이 높았다. 어느 정도냐면 콤스톡 때문에 한동안 미국 우체국에서는 해부학 교과서를 소포로 보낼 수 없었다! 이런 짓을 하던 게 바로 탈레반이다 게다가 허구헌날 트웨인은 물론 조지 버나드 쇼, 헨리 제임스 같은 유명 작가들의 소설이나 글에서 만화,그림,시....예술 및 의학과 과학을 음란하고 불경하다고 비난했기에 살아생전 미국 문인들,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비난과 풍자를 당했다. 어느 미국 시사만화가는 신문에서 '콤스톡의 고소 이유'라는 1컷만화를 연재했는데 "알몸인 아기를 낳은 임신부가 저질이라는 이유로 고소한다는 콤스톡 목사"라고 풍자를 담아 그렸을 정도이다. 하지만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그에게 존경을 내비쳐서 쇼는 윌슨을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콤스톡은 윌슨의 지지 속에 영국까지 연설하러 가던 길에 그만 배에서 급사하고 말았다. 게임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의 악역 재커리 헤일 컴스탁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이렇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진화론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지지를 보였다. 또한 과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니콜라 테슬라와 친한 친구 관계였다.
그가 살아있을 당시 유럽 각지에서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가 우리 교회에 있다는 헛소리를 하며 교회 홍보를 했었는데, 그게 유럽 각지에서 너도나도 서로들 그런 홍보를 했기에 그는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그 십자가들을 죄다 모아 배를 만들어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들로 만든 배라는 이름을 지어서 전세계를 떠돌며 선교해봐라. 전세계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웃음을 실컷 받을 거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서는 에밀 졸라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끝없는 찬사를 보낸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라며 졸라를 옹호했으며 그가 알 수 없는 사고로 죽자 그를 추모하는 글도 남기면서 살해당한 게 아닐까 여기기도 했다.
졸라를 지지하는 문단에서도 언급했듯이,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특이하게도 잔 다르크에 관심이 많아서, 그녀를 다룬 소설을 가명으로 쓰기도 했다. 왜 잔 다르크라는 인물에 그토록 관심이 많았는지는 의문. 마크 트웨인 ENFP, 잔 다르크 INFP. 서로 동류라서 끌린다.어린 시절 우연히 바람에 날아가는 종이를 잡았는데 잔 다르크 위인전 중 일부였다는 전설이 있다. 아쉽게도 그녀의 시성(諡聖.기독교에서 특정 인물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일)은 그의 사후 10년 뒤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굉장히 냉소적이었다. 저서 《도금 시대》(Gilded Age)에선 미국 정치인을 더럽다고 엄청나게 풍자했으며 정치적 비리와 선거에 대한 여러 가지를 콕 짚으며 독설을 퍼부었다. 때문에 실제로 미국 정치인들에게 비난도 많이 받았으며 교회에서도 그를 사탄이라며 비난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금시대라는 명칭은 실제로 남북전쟁 이후 미국이 겉으로는 번영하고 있던 시절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겉보기만 번드르르하다 해서 도금한 것 같다는 뜻.
미국 교회들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가출을 유도하는 문제작이라고 아이들에게 읽지 말라는 권고를 하기도 했다.
더불어 유명한 일화로 신문에 쓴 칼럼으로 "모든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다!"라고 대놓고 썼다가 항의와 고소를 겪자 사과문으로 "어떤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 아니다."('모든'의 부정은 '어떤', '개자식이다'의 부정은 '개자식이 아니다.')라는 말로 고쳤던 적도 있다... 이는 《논리야 놀자》 같은 주로 어린이용 논리학 서적에서 자주 써먹는 예문 중 하나이다. 물론 아이들 도서이니 '멍텅구리'라는 단어로 순화되었다. 문장의 뜻을 뜯어보면 알 수 있지만, 두 문장 모두 미국 정치가들 중에 '개자식'이 포함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혹은 '대부분의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다'라고 썼다가 항의를 받아 '일부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 아니다'라고 했다는 버전도 있다. 이 경우에도 역시 그 말이 그 말...
5 기타
- 헬렌 켈러와 만나서 그녀를 위대한 여성이 될 것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그녀와 만났을 당시 켈러는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녀에게 트웨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앞을 못 보는 사람 같은 장애인을 가엾게 여긴단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은 몸이 멀쩡할지 모르지만 피부색이나 종교만으로 다른 이를 죽이고 차별한단다. 그런 건 과연 멀쩡한 걸까?
- 그래서 켈러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지 않고 단지 몇 번 만났을 뿐임에도 그녀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사람 중 하나로 평가된다.
- 다소 뜬금없지만 율리시스 그랜트의 자서전을 완성하여 출판했다. 마크 트웨인 자신이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사업에 실패하여 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된 그랜트가 자서전을 헐값에 팔아치우려고 하기에 자기가 끼어들어서 출판을 도와주었고, 그 덕분에 그랜트 사후 유족에게 20만 달러 상당의 인세를 유산으로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 마크 트웨인의 큰 누나의 외손녀는 《키다리 아저씨》의 작가 진 웹스터이다. 웹스터의 아버지이자 트웨인의 외조카 사위는 트웨인 작품을 출판한 출판사 사장이기도 했다. 허나 출판사가 파산하고 웹스터의 아버지가 약물 과용으로 자살하여 둘의 관계가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자서전에서 참 열심히 씹어대더라. - 미국의 SF소설 작가 존 스칼지의 작품 《마지막 행성》 초반부에는 주인공 존 페리가 사는 행성의 이름으로 '허클베리'가 나오는데, 이 이름에 관해 "어느 마크 트웨인 광이 붙였는지 모르겠다"는 주인공 존 페리의 독백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허클베리 행성의 두 위성에는 각각 '소여', '베키'라는 이름이 붙었고, 허클베리 행성의 3개 대륙에는 마크 트웨인의 본명인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가 붙었다. 뿐만 아니라 이중 클레먼스 대륙에서 길게 이어지는 화산섬들에는 마크 트웨인의 아내 이름인 '리비'의 이름이 붙었으며, 바다의 이름은 트웨인의 첫 번째 단편 <켈라베라스의 높이 뛰는 개구리>에서 따온 '켈라베라스 해(海)'이다.
- 작전주에 손을 댔다가 25,000달러[2]를 허공에 날려버린 적이 있다. 그후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기도.
19세기 주갤러.
10월, 이 달로 말할 것 같으면 주식투자에 특히 위험한 달 중 하나이다. 다른 위험한 달로는 7월, 1월, 9월, 4월, 11월, 5월, 3월, 6월, 12월, 8월, 그리고 2월이 있다.[3]
- 여성 브래지어의 후크를 발명한 발명가이기도 하다. 그의 아내가 당시 끈으로 묶게 되어 있는 브래지어 끈 때문에 옷 입는걸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착안해서 발명 특허까지 받았다.[4] 하지만 당시 여성들은 브래지어 대신 코르셋을 많이 입고 다녔기 때문에 트웨인이 발명한 후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이 후크가 대박을 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아내는 '발명 같은 거 하려고 하지 말고 글이나 쓰세요' 라고 조언했다.[5] 지금 전세계의 모든 여성들이 입는 브래지어에 다 달려있는 후크를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 하지만 이후에도 니콜라 테슬라와 교류를 하면서 계속 발명에 관심을 가져서 '풀없는 신문 스크랩북'이나 보드게임 등을 발명하기도 했다.
물론 이 역시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다.그 후 제임스 페이지라는 사람이 만든 '페이지 식자기' (자동으로 식자를 교환해 가면서 인쇄할 수 있는 기계)에 30만달러[6]를 투자했으나 비슷한 기계가 먼저 개발되는 바람에 쫄딱 망했다. 이후 미국 경제대공황 등으로 인해 결국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5년 9월 6일자에서도 다루었다. - 자신의 사망설이 엄청나게 신빙성 있는 카더라로 나돌았을 때 "내 죽음에 관한 보고는 굉장히 과장되어 있다.(Reports of my death have been greatly exaggerated.)"라는 말을 뉴욕저널에 보낸 기고문에 남기며 기레기들을 대놓고 깐 적이 있는데, 이 멘트는 이후 《킹스맨: 골든 서클》의 공식 포스터나 그외 수많은 매체에서 그대로 인용되었다.
- 위에 잠깐 나왔듯이 니콜라 테슬라의 친구였는데, 테슬라는 평생 가까이 지낸 사람이 트웨인을 포함해도 5명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절친인 듯. 테슬라도 자기 연구소에 트웨인이 찾아 오면 기꺼이 자기 발명품을 보여 주곤 했다고.
6 주요 작품 목록
- 도금시대(1873)
- 톰 소여의 모험(1876)
- 왕자와 거지(1881)
-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
-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1889)
- ↑ 어원은 한니발이다. 항목 참조.
- ↑ 현재 가치로 300만 달러에 달한다.
- ↑ October. This is one of the particularly dangerous months to invest in stocks. Other dangerous months are July, January, September, April, November, May, March, June, December, August and February.
- ↑ 발명 특허 121992: 분리,조절가능한 의류용 스트랩의 개선 / 등록일: 1871년 12월 19일.
- ↑ 그 조언을 받아들여 쓴 글이 바로 《톰 소여의 모험》과 《왕자와 거지》다.
- ↑ 현재 환산가치로 약 800만 달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