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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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41대42대43대
이사벨 데 페론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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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돈도
(Jorge Rafael Videla Redondo)
생몰년1925년 8월 21일 - 2013년 5월 17일
출생지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망지아르헨티나 마르코스파스 교도소
정당무소속
종교로마 가톨릭
배우자알리시아 라켈 아르트리드헤

1 개요

일명 더러운 전쟁이라는 탄압정치를 펼치며 아르헨티나를 굵고 짧게 철권통치한 악명높은 독재자

현재 아르헨티나 독재 피해를 조사하는 단체의 추정으로 3만 ~ 4만5천명, 공식적인 집계로 1만5000명에 이르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납치당하거나 고문, 살인 등으로 사망 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비델라 집권 당시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외채 증가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경제도 심히 안습한 상태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피해자들의 시신은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는데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외곽의 그랑부르 공원에서 400여구의 유골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2 초년 생애

비델라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에서 태어났고, 아르헨티나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아르헨티나의 군장성으로 되었고, 1973년에는 아르헨티나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75년에 이사벨 데 페론[1] 이 비델라를 아르헨티나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비델라는 후안 페론의 뒷통수를 쳤다. 결국 1976년 3월 24일 군부 쿠데타를 주도 이사벨 데 페론 대통령을 대통령 자리에서 날려버렸고 페론을 대통령 자리에서 쫒아보낸 후 1976년 1981년까지 아르헨티나 대통령 자리에 약 5년 동안 집권했다.

3 더러운 전쟁

비델라는 1976년 3월 "좌익세력의 폭력적 위협이 심각하다"면서 "신의 도움에 힘입어 완전한 국가 회복을 이룩하고 국민에게 혼란과 부담을 안겨주었던 상황을 종식시키겠다"면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이사벨 데 페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물론 모든 군부독재자들이 주장하는 똑같은 레페토리를 했다 비델라는 취임식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이 수습되면 민정으로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호르헤 비델라가 군사 독재를 시작하자 비델라의 군부 독재와 쿠데타에 반발하는 시위가 아르헨티나 전역에 일어났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군부는 시위를 벌이는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납치했고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그리고 340여개의 비밀수용소를 만들고 아르헨티나 군과 경찰과 같은 국가기관과 아르헨티나 반공동맹이 불순분자라고 지목된 인사들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납치, 고문, 구금, 체포, 사형시켰다. 국민을 절차 없이 사형에 처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으며, 국회를 3인의 군사 위원회로 대체하고 폐쇄했다.

또한 인접 군사 독재 국가들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6개국 군사정권과 같은 라틴계 유럽 국가들 스페인, 포르투갈 등 2개국 독재정권이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벌인[2]콘도르 작전’을 통해 군인들은 매일 밤 골목에서 시민들을 감시하고 체포하였으며, 이 만행을 인접국가까지 펼쳐서 남미 역사상 가장 잔인한 공포의 시대라고 부른다. 희생자 대부분은 자동차 수리점으로 위장한 군부 독재 정권의 조사실에서 고문, 살해된 것으로 현재 확인되고 있다. 당시의 악명성을 보여주는 일화로 당시 가장 악명높았던 해군공병학교 지하감옥에서는 매일같이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로 주변이 울릴 정도였다고 하며, 군인들은 고통스럽다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시끄럽다며 총으로 쏴 죽여버렸다. 그리고는 그렇게 숨진 사람들과 고문으로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밤마다 비행기에 태워 라플라타 강에 던져버렸다. 이렇게 군부가 좌파 인사를 색출하기 위해 벌인 ‘콘도르 작전’으로 남아메리카에서는 무려 10만여 명이 사망하고 40만여 명이 고문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30만~2백만 명에 달하는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군부의 무자비한 학살을 피해서 라틴계 국가를 제외한 외국으로 망명했지만 국가들이 탈출하는 걸 법으로 금지했기에 탈출하다 잡혀 죽은 사람들도 많았으며 탈출에 성공해서 살아남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미국, 유럽 등지에 탈출한 사람마저도 국가 간 범죄인 인도 협약에 의해 송환되어 처벌되었다. 게다가 자신을 반대하는 미국인, 유럽인까지 처벌하였다.

이 시기 라틴아메리카 군사 독재정권이 얼마나 잔혹했느냐면, 군사독재 시절 한국보다 더 강하게 법적 처벌로서의 연좌제가 당당히 집행됐고, 일례로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당시에는 월드컵 결승전이 치러지던 당일 그 시각에, 그 경기가 치러진 경기장 바로 옆 건물에서 호르헤 비델라 정권 반대인사를 고문하고 있었다. 심지어 재판도 없이 그저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만 명을 항공기에 태워 대서양이나 태평양 앞바다에 던져버리던 시절이었다.

일명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던 아르헨티나 군부정권 시기에 비델라는 자신에게 반대하던 민주화 인사들과 정치범들을 모아서 컨테이너에 던져 넣은 다음 폭격기에서 태워서 대서양 한가운데로 투하시킨(!) 적이 상당히 많다. 또는 헬기를 몰고서 대서양 연안 쪽으로 조금만 가서 죄수의 몸에 추를 달고 쥐도새도 모르게 대서양 한가운데로(!) 던져넣은 사례도 비일비재할 정도로 극악무도한 군부독재를 자행했는데, 이 수법은 몽골의 스탈린이라고 불린 허를러깅 처이발상이 아주 잘 써먹었던 처형기술이기도 하다. 훗날에는 이러한 막장적인 처형 방식이 계속해서 업그레이드 되어서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민주화인사, 야당 정치인들을 공군 비행기에 태운뒤 비행기 안에서 마약을 잔뜩 투약시켜 환각상태로 만들고 대서양에다 떨궈놓는 식으로(이른바 죽음의 비행)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실로 흠좀무한 처형 방식을 사용했다. 물론 비델라 정권도 마약을 먹인 후 투하시켰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임산부들은 살려줬으며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몇몇 임산부들은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서는 대우를 받은 경우도 있다. [3]

하지만 대부분의 임산부들은 좁은 수용소 안에서 수갑과 족쇄를 찬 채 아이를 출산해야 했으며, 심지어 어떤 임산부들이 고문을 받으며 고통의 비명을 지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출산하면 바로 옆 방에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가 아이를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경악스러운 사실은 임산부가 아기를 낳고 나면, 산모들은 용도폐기가 되었다는 듯이 군용기에 실려가서 산채로(!) 바다에 던져졌다. 그리고 수용소에 끌려간 임산부는 출산일까지 감시하다가 출산 후에 총살당했으며, 임산부에게서 갓 태어난 아기가 총살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하는 짓은 사탄이랑 똑같은 놈들이 일단 명색은 카톨릭 국가를 다스리는 카톨릭 정권이랍시고 대충 기독교적 생명존중의 교리를 지키는 척을 한 셈이다.

이후 임산부가 낳은 아기들은 출산 직후 아르헨티나 군인들에게 보살펴져서 군인과 경찰 등 친정부 성향의 인사들의 가정에 양자나 양녀로 보내졌고, 몇살 미만의 아이들 즉 사리분별력이 없는 아이들의 경우에도 친정부 인사들의 양자나 양녀로 보내졌다.

이런 아이 입양 정책은 스페인의 정신과 의사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가 이론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을 위해 일한 나제라는 반정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 등의 이념은 일종의 정신 질환이며 이들로부터 아이들을 구출해 스페인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이론을 설파했던 것이다. 실제로 프랑코 정권도 집권 기간 반체제 인사의 아이 3만명을 납치해 친정부 인사 가정 등에 입양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어린 반정부 인사들의 아이들이 잔혹한 탄압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될 경우 이 아이들이 정권에 위험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또한 자기들이 많은 사람들을 죽여 아르헨티나의 인구가 모자랄 수도 있기 때문에[4]그 아이들을 친정부의 핵심 인사들로 만들면서 아르헨티나의 인구도 조금이라도 보존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군부는 이것을 좌익환경에서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내세우며 이런 짓을 자행했고, 그렇기 아이들을 친정부 인사에 입양시켜 키워졌다. 심지어 몇몇 아이는 자기 부모를 죽인 사람에게 길러진 일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군부의 예상대로 양부모와 같은 친정부 인사의 성향을 가지며 자랐고, 실제로 반정부 인사에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 방식은 이미 옆나라 칠레에서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써먹은바있다. 칠레한테 제데로 배운셈.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아르헨티나의 국민 시인 후안 헬만의 며느리 마리아 클라우디아 이루레타 고이에나도 희생자 중 한명이였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로 ‘자동차 수리점’으로 납치되어 그곳에서 출산한 뒤 아르헨티나 공군기로 우루과이로 옮겨진 후 바다에 던져져 살해됐다. 또한 헬만의 아들도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 독재정권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뒤 기름통에 넣어져 페르난도 강에 던져졌다. 그들의 딸 마카레나 헬만은 최근에서야 그녀의 진짜 신분을 확인하고 할아버지와 만날 수 있었을 정도다. 기사

그리고 미국은 제국 주변의 안정이라는 미명 하에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독재 정권을 적극 지원했다. 이슬람처럼 서방을 무작정 증오할 만한 다른 이유도 없고,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자신의 제국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세속 가치관을 서방과 공유하기까지 하는 라틴아메리카인들이 괜히 미국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다.

4 월드컵의 부정부패

비델라 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축구를 이용하기로 결정했고 이게 바로 축구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월드컵인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시작이였다. 해외 여론은 쿠데타가 일어났던 아르헨티나에서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이 열리는 것에 반대했으며, 실제로 최고의 스타였던 요한 크루이프는 불참을 선언하기도 했다.[5] 하지만 비델라의 핵심내각 중 한명인 군사평의회의 의원이자 해군 총사령관인 에밀리오 마세라가 대회를 유치하기위해 FIFA뿐만 아니라 각계의 수뇌들을 만나며 적극적인 로비활동을 했으며, 철저한 물밑작업 끝에 마침내 월드컵을 유치해내는데 성공했다. 마세라는 아르헨티나 월드컵의 공약으로 엄청난 자본을 투입할것을 약속했으며 아르헨티나 재무장관이었던 후안 알레만조차 경악하게 만든 액수였다고 한다.

처음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은 군 장성이긴 했지만 비델라와는 껄끄러운 사이였다. 비델라는 컬러 TV의 전면 송출 즉, 아르헨티나 국내외 모든 TV를 전면 송출하기를 원했는데 그 조직위원장은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얼마 후 조직위원장은 좌익 게릴라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다. 그 뒤를 이어 조직위원장을 맡은 사람은 비델라의 심복이었는데, 전 조직원장을 누가 사망하게 했는지 뻔히 얼고 있던 축구선수 관계자들은 공포에 떨었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한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임무는 단 한 가지였다. "어떻게든 우승하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정부는 무조건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거리지 않았다.

강호 헝가리와 맞붙은 조별 리그에서 상대 선수 2명을 퇴장시키면서 2-1로 억지로 이겼다.[6] 2차 조별 리그는 조편성을 일방적으로 했는데, 전 대회 우승팀 서독과 준우승팀 네덜란드를 한쪽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0으로 대파하는 바람에 브라질을 골득실 차로 제치고 결승에 올랐고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와의 경기 전 페루의 부채 5천만달러를 탕감해주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심지어 페루팀 골키퍼로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가 전격 기용되는가 하면, 페루의 공격수들은 유난히 헛발질을 벌이고 최종 수비수가 공격진에 가세하는 기괴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반면 브라질 측에서 역시 경기전 아르헨티나전을 무승부로 틀어막으면 선수 1명당 6만 달러씩 보상금을 주기로 했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결승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빠진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기어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툭하면 반칙 호각을 불어대는 심판 때문에 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불공정한 경기였다. 이로 인해 잠시 동안은 호르헤 비델라의 지지도가 상승하기도 했으나 월드컵의 열기가 사라지자 비델라의 지지도는 다시 내려갔다.내려갈 지지율은 내려간다 그리고 이 월드컵은 역사상 최악의 월드컵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참고

5 임기 막판

한편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후안 페론이 주장한 페론주의 대신에 시장개방 정책을 추진하며, 일정부분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아르헨티나의 외채가 급속도로 늘어났으며 아르헨티나 화폐의 인플레이션 문제가 매우 심각해졌다. 결국 이뤄 놓은 것 하나도 없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군부에서는 핵심 세력들을 아르헨티나 대통령직에 올리며 돌려막기를 시도하다가 레오폴도 갈티에리 장군이 포클랜드 전쟁이라는 대삽질을 저지르자 결국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는 종식되었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라울 알폰신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되자 라울 알폰신과 맺은 협상 때문에 자신들이 안전할 줄 알았지만 라울 알폰신은 군부의 뒷통수를 치며 비델라와 레오폴도 갈티에리와 같은 군부의 핵심 지도자들이 모조리 재판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6 재판과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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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받는 비델라 왼쪽인물

비델라는 세 번에 걸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라울 알폰신 대통령의 민선정부 출범직후 `더러운 전쟁'을 통해 인권을 탄압한 혐의로 다른 군사평의회 지도자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1983년 민주화를 이룬 2년 후에 1985년 알폰신 대통령시대에 군사 독재 시절의 범죄행위로 파면되고 1986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의 사면법과 미국의 눈치, 군부의 눈치에 의해 1990년 메넴정부에서 실시한 범법자에 대한 사면으로 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6년 인권단체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가 집권했던 시기에 벌린 유아 유괴에 대한 범죄로 1998년 다시 무기형을 받고 감옥에 보내졌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 법률에 의해 70세가 된 이후 외출 등은 금지되었으나, 본인의 집에서 복역하도록 바뀌었으나, 2008년에 다시 주거 복역이 금지되고 다시 감옥으로 옮겨졌다. 2010년 키르치네르 정부에서는 군사정권 시절의 사면법과 메넴 정부 시절의 사면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하고, 또 다시 무기징역에 처해졌고 그가 시체로 발견되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마르코 파스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다른 사건들을 군부독재가 종식된 이후 대부분 드러났지만 아이들을 양자나 양녀로 입양시킨 것은 2000년대에 와서도 드러나지 않았고 비델라 정권의 악행은 묻히는 듯 했지만 그러나 2003년 네스트르 키르치네가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1977년 실종 자녀를 찾아 달라며 시위를 시작한 어머니·할머니 등 14명이 '5월 어머니회'라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아이들이 강제로 입양된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비델라 정권 시절 희생자 가족들이 모여 만든 ‘5월 광장 어머니회’의 계속된 집회로 아기 납치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납치된 아이들 500여명 중 100여명이 DNA검사를 통해 진짜 가족을 되찾았지만 아직도 파악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몇명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악행으로 인해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2011년 아르헨티나 법정에서 50년형을 선고 받았으며 양부모들 역시 납치된 아이를 키운 혐의를 인정 받아 실형을 선고받았다. 웃긴 사실은 비델라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해 댔다.

"아르헨티나 사회는 당시 마르크스혁명을 막기 위한 강경진압이 필요했다면서 오늘날 '테러범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정부 전복세력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7천~8천명이 죽어야 했다"

"희생자들의 시체를 비밀리에 처리한 것은 국내외의 저항 촉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의 엄마들은 ‘열혈 테러리스트’였다, 그들은 아이를 인간방패로 이용했다"

"대안이 없었다 군부 지도자들은 반정부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는데 견해를 같이 했다"

"실종자 전체 명단은 없으며 부분적인 명단이 있을지 모르나 부실하다 엄격히 군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쿠데타가 필요없었으며 실수였다" 기사

라며 항변하는 개드립의 향연을 이어갔다. 한편 아이들을 납치한 양부모들은 자신들은 아이들을 키운 죄 밖에 없으며 모든 것들은 조국을 위한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라는 변명을 했다고. 여담으로 양부모에게 키워진 아이들중에는 나중에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다 자살하거나 양부모를 총으로 쏴죽인 일도 있었다.

결국 2013년 5월 18일 복역 중이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마르코 파스 감옥 독방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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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신부(?)와 당대 넘버원 인물 호르헤 비델라의 모습

한 때 교황을 고르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델라 정권 당시의 폭압 정치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다만 그가 협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자들은 돌려가며 해먹었는데 이 중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가장 오래 해먹었다.[7] 다른 독재자들은 다들 1년 남짓 해먹은 반면 이 양반은 무려 5년 동안이나 해먹었다.
  1. 후안 페론의 세번째 부인, 후안 페론이 1974년에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지만 후안 페론만한 카리스마가 없는데다가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펴고 좌파세력을 탄압하는 등의 실정으로 인해서 지지율이 크게 낮아진 상태였다.
  2. 다만 페루와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콜롬비아는 포함되지 않는다. 콜롬비아는 우파 집권국가였지만 자국내 반군들에게 밀려서 국가적인 단위에서 공포정치를 펼래야 펼 수가 없었고, 베네수엘라는 오일쇼크로 한창 호황기를 누렸던 때인데다가 타 국가와는 다르게 그리 억압적인 체제는 아니었던지라 중남미의 독재체제를 까던 대표적인 국가였으며, 페루는 군부가 독재를 하기는 했어도 타 국가와는 다르게 극우파 성향이 아닌 좌파 내지 중도파였던데에다가. 에콰도르는 이제 막 군사독재기를 끝내던 참이어서 끼어들어봤자 이득이 되지 않았다.
  3. 임산부들중에서는 수감 도중 군부 협력 정치인, 군인, 경찰, 혹은 죄수(물론 민주화운동으로 잡힌게 아닌 범죄로 잡힌 흉악범)들에게 수도 없이 강간당해서 임신한 경우도 많았다.
  4. 물론 아르헨티나의 인구증가율은 매년 1.6-1.7%대로 상당히 높은 수치로 매년 40만씩 증가하던 상황이기는해서 일단 통계상으로만 본다면 기우지만 그에 준할만큼 사람들을 죽여버렸다는 얘기다.
  5. 그러나 이는 크루이프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 때문에 불참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가족이 납치당할뻔한 일 때문에 불참했다고 2006년에 밝혔다.
  6. 이것이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는 독일 상대로 똑같이 되돌려받는다.
  7. 이 동네는 피노체트나 반대로 좌파쪽의 카스트로 정도나 혼자 해 먹은 개인 장기독재자였지, 근본적으로 독재의 형태는 군부와 정계 우익 인사들이 서로 짜서 돌려 해 먹는 과두독재정이 일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