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먼 데 벌레라

풀네임Éamon de Valera (에이먼 데 벌레라)
출신 정당신페인당
아일랜드 공화당
생몰년1882년 10월 14일 ~ 1975년 8월 29일

1 개요

아일랜드의 정치인. 마이클 콜린스와 더불어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며[1], 아일랜드 자유국[2]아일랜드 공화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아일랜드 현대사의 거물이자 국부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

2 생애

2.1 초기

1882년 미국 뉴욕에서 아일랜드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난다. 이 시기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1세대들은 가난을 비롯한 열악한 생활조건 탓에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데 벌레라 역시 두 살때 아버지를 여읜다. 아버지를 여읜 직후 가족들과 함께 아일랜드로 돌아온 데 벌레라는 1904년 더블린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교사로 임용된다. 이 시기 민족주의 운동이 거세지던 아일랜드 내에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게일어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는데, 데 벌레라 역시 이 운동에 활발히 참가했고 이후로는 점차 아일랜드 독립운동에도 참여하기 시작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데 벌레라는 아일랜드 내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신페인과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에 가입했고 1916년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이 일으킨 부활절 봉기에도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참가한다. 이 부활정 봉기는 영국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됐고, 패트릭 피어스를 비롯한 데 벌레라의 동지들은 대다수가 처형됐지만 데 벌레라 본인은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영국 당국이 데 벌레라를 살려둔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데 벌레라가 미국 시민권자라는 점이 가장 컸다. 이 당시 1차대전은 한창 격화되고 있었고 영국은 어떻게든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여 전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시민권자를 처형했다가는 미국 내 반영감정을 대폭 증폭시킬 가능성이 컸으므로 영국은 데 벌레라를 살려둘 수 밖에 없었던 것.[3]

1917년 석방된 데 벌레라는 신페인의 일원으로 1918년 총선에 출마했고 '당연히' 당선된다.[4] 아일랜드에서 선출된 신페인 당 소속 의원들은 영국 의회로 출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체적인 아일랜드 의회를 수립했고, 이 의회를 이끌 수장인 대통령으로는 데 벌레라가 임명된다. 데 벌레라는 파리 강화 회의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아일랜드의 독립을 이끌어보려고 노력하지만 이는 수포로 돌아갔고 애초에 영국이 떡하니 있는데 될리가... 이에 데 벌레라는 자신이 직접 미국으로 들어가 외교전을 벌이기로 결정한다. 1919년 6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미국에서 체류하면서 데 벌레라가 실행한 외교전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아일랜드 계 미국인들의 후원에 힘입어 미국 상원에서 아일랜드 독립 결의안이 통과됐으며, 무려 500만 불 이상의 자금도 모집했던 것. 데 벌레라가 미국에서 외교전을 벌이는 시기에 아일랜드 본국에서는 마이클 콜린스의 주도 하[5]에 무장독립투쟁이 격렬히 벌어지고 있었고 데 벌레라가 미국에서 보내온 자금은 IRA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2.2 아일랜드 내전 시기

하지만 국력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지라 완벽한 군사적 승리는 불가능했고 결국 아일랜드와 영국은 독립 문제를 두고 협상을 벌이게 된다. 아서 그리피스와 마이클 콜린스가 대표로 파견되어 진행된 협상의 결과는 전반적으로 아일랜드에게 썩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고[6] 데 벌레라는 이 협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이 협상안이 아일랜드 의회에서 통과[7]되자 이에 반발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한 데 이어[8] 자신의 지지세력에게 협상안의 인정을 거부하고 계속 투쟁을 지속할 것을 주장한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조약반대파가 아일랜드 대법원을 무장 점령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터져버리고 결국은 내전이 발발한다. 그렇지만 전황은 시종일관 조약찬성측에게 유리했고 결국 데 벌레라는 1923년 항복한다. 항복 직후 데 벌레라는 체포됐지만 아일랜드 자유국 당국이 조약반대측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리 오래지나지 않아 석방된다. 전쟁중에 가혹했던 건 함정

2.3 아일랜드 공화국 시기

합법적인 정치투쟁으로 전환을 선언한 이후 1926년 데 벌레라는 자신의 지지자를 규합해 아일랜드 공화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했고 1937년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에이레 공화국을 선포하고 명목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완전한 독립을 이룩한 뒤 신생 에이레 공화국 수상에 취임하게 된다. 취임 직후 데 벌레라는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과의 담판을 통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이 진행된 영국과 아일랜드 간 무역전쟁을 해소한다.

이어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자 데 벌레라는 중립을 선포했고, 이는 전반적으로 아일랜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9] 이후로도 1951년부터 1954년까지,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총리직을 역임한 이후 고령을 이유로 총리직에서 물러난다.[10] 대신 그는 명목상의 국가 원수인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973년까지 활동한다. 75살에 대통령이 된 것도 엄청 고령이구만 89살까지 해먹다니.. 이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령 국가 원수 기록에 등재되어있다. 이후 1975년 92세를 일기로 데 벌레라는 세상을 떠난다.

3 여담

  • 아일랜드 내전 항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정치적, 사회적인 판세를 읽는데 서툴렀다. 그래서인지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마이클 콜린스의 평가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 것과 비교해서 데 벌레라는 점점 역사가들에게 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 어떤 역사가는 아예 '데 벌레라는 공보다 과가 더 많은 인물이다!'라고 단죄해버리기도. 공칠과삼이 아니라 공삼과칠인건가
  • 아일랜드인답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937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선포한 헌법 내용에 아예 이혼을 금지시키는 내용을 집어넣었을 정도. 그렇지만 아예 종교적으로 꽉 막힌 사람은 아니어서 그의 재임 기간 내내 아일랜드 내에서 종교의 자유는 보장됐고 성공회, 유대교 등의 마이너 종교들도 아일랜드 내에서 잔존했다.[11] 그의 가톨릭 신앙심은 바티칸에서도 인정받아서 교황 요한 23세에게 그리스도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한가지 안습한 것은 오늘날 아일랜드 내에서 사제들의 각종 성추문이 터지고 가톨릭의 위상이 미친듯이 추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게 다 데 벌레라가 가톨릭을 싸고돌아서다!'라고 까이기도 한다는 것.
  • 1996년 개봉된 영화 <마이클 콜린스>에서 알란 릭맨이 데 벌레라 역을 맡기도 했다.[12] 영화 내에서 묘사되는 모습은 당연히 썩 좋지 않다. 시시건건 콜린스에게 태클을 걸면서 콜린스를 정치적으로 음해하고 시기나 하는 찌질이(...) 정도의 묘사.
  1.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IRA가 무장투쟁을 이끌었다면 데 벌레라는 (미국에서의) 외교노선을 이끌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무장투쟁노선과 외교노선이 서로 반목했던 한국의 독립운동과 달리 콜린스와 데 발레라의 노선은 상부상조적인 관계였다.
  2. 아일랜드가 독립투쟁을 통해 실질적으로 독립을 획득한 시기의 체제이다. 명목상으로는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한채 자치권만을 획득했고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자유국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3. 또한 더블린 주재 미국 영사관에서도 영국 측에 '데 벌레라 죽이면 재미없는 거 알죠'?라고 공연히 압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4. 부활절 봉기의 영향으로 신페인 당은 아일랜드 전체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18년 총선에서 아일랜드 내 150석 중 73석을 획득했으니 이건 뭐...
  5. 자신이 미국으로 가면 정부가 똑바로 운영되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아예 데 벌레라는 콜린스에게 임시로 대통령 직을 맡겨준다.
  6. 아일랜드 내전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북아일랜드는 영국 영토로 존속할 것, 아일랜드 역시 명목상으로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을 것, 아일랜드 정부는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 등이 협상안이었다.
  7. 그렇지만 매우 아슬아슬했다. 찬성 64표에 반대 57표였으니...
  8. 이 사임을 두고 데 벌레라의 반대파들은 '누가 협상하더라도 이 결과 이상은 얻기 힘들었는데 정치적으로 부담을 피하려고 똥을 콜린스에게 떠안겨버렸다.'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린다. 뭐 어느정도는 사실이기도 했고
  9. 윈스턴 처칠이 어떻게든 데 벌레라를 구워삶아서 아일랜드를 자기 측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데 벌레라는 한큐에 무시했다. 다만 벨파스트가 독일 공군에게 공습당하자 소방대를 지원해주기는 했다.
  10. 아닌게 아니라 이미 1959년 당시에 데 벌레라는 심각한 시력 문제로 안과수술을 6번이나 받아야 했다.
  11. 여담이지만 이 이혼 금지법은 1996년에나 이르러서야 아일랜드에서 폐지된다.
  12. 당연히 주연은 마이클 콜린스. 콜린스 역은 리암 니슨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