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3세

라틴어: Sanctus Ioannes PP. XXIII
이탈리아어:Papa San Giovanni XXIII
스페인어: Santo Papa Juan XXIII
영어: Saint Pope John XXIII
독일어: Papst Johannes XXIII
프랑스어: saint pape Jean XXIII
그리스어: Πάπας Ιωάννης ΚΓ΄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 하지만 가톨릭 교회에 폭탄을 떨궜다![1]
교황명성 요한 23세 (Sanctvs Ioannes XXIII)
세속명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Angelo Giuseppe Roncalli)
출생지이탈리아 베르가모
사망지바티칸
생몰년도1881년 11월 25일 ~ 1963년 6월 3일 (81세)
재위기간1958년 10월 28일 ~ 1963년 6월 3일 (4년 218일)
대관미사1958년 11월 4일
장례미사1963년 6월 6일
시복2000년 9월 17일, 요한 바오로 2세
시성2014년 4월 27일, 프란치스코
축일10월 11일[2] / 6월 4일(캐나다 성공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역대 교황
260대 비오 12세261대 요한 23세262대 바오로 6세
1962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남자
Time Man of the Year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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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
1961
요한 23세
1962
마틴 루터 킹
1963
요한 23세 즉위식 동영상 중 urbi et orbi

로마 가톨릭의 제261대 교황이자 성인. 사목표어는 'Oboedientia et Pax(순명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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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23세의 문장

요한 바오로 2세와는 달리 외모가 뛰어나거나 대중적인 쇼맨십이 있진 않았으나, 선함과 소박함, 진솔함을 무기로 인망을 얻고 존경받았다. 교황이 된 뒤에도 권위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소박함과 진솔함을 잊지 않았다. 그 때문에 교황으로서 권위가 없고 교회를 세속화시킨다고 바티칸의 추기경단 일부와 마찰도 컸지만, 교황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았다.

살아 생전 이탈리아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은 선하신 교황(Il Papa Buono) 요한. 그리고 교황이 되기 전이나 후나, 실로 그 별명에 어울리게 산 교황이었다.

1 교황 재위 이전

1.1 사제 시절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미래의 요한 23세는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의 시골 마을 소토 일 몬테(Sotto il Monte)[3]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13자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안젤로는 12살에 베르가모 신학교에 입학해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며, 1904년 사제로 서품받았다. 대학원에서 수학 중 베르가모의 주교 비서로 임명되어 9년간 일했는데, 고향 베르가모는 롬바르디아의 공업도시로 공장 노동자들이 많은 곳이었다. 주교 비서로 일하면서 노동자들의 고충을 알게 되어 사회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후에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게 된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 때문에 근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아 교황청으로부터 찍혀 있었다.[4]

1.2 교황청 대사

이후 교황청에서 근무하다가 1934년, 터키그리스의 교황청 사절 겸 이스탄불의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교황청 사절로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파견되어 가기 전에 주교로 서품받았다.) 사실 본인은 교황청 사절, 즉 외교관으로 임명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본인이 신자들 속에서 일하는 사목자를 바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교관이 되면 누이들을 하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론칼리 집안이 가난하므로, 안젤로는 누이들을 자기 일을 돌보는 하녀로 두어 월급을 주었다. 성직자든 뭐든 론칼리 집안에서 그래도 가장 성공한 사람이 안젤로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도와달라 돈을 부쳐달라는 부탁을 많이 들었으므로, 가족들을 돕는 일환으로 누이들을 하녀로 두었던 것. 그런데 외교관이 되어 해외로 나가버리면 더 이상 누이들을 하녀로 둘 수 없고, 따라서 월급도 줄 수 없으므로 꺼려했다.. 하지만 결국 외교관이 되었다.

터키에서는 정부와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과감하게 공식문서에 터키어를 도입, 터키 정부와 유화적인 관계를 맺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 불필요한 어그로를 끌지 않고자 성직자용 수단 대신 평범한 양복을 입었는데, 한 번은 양복을 입은 자기 사진을 어머니에게 부치면서 "양복을 입은 주교 아들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스탄불에서 그는 국제정세와 각종 국가들의 정보들을 입수해서 교황청에 보고하는 역할도 맡았다.

이렇게 동방정교회와의 화해를 적극 모색하게 된 안젤로는, 그 노력으로 1937년 교회일치위원회를 방문했을 때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불가리아 대사로도 임명되었다. 하지만 터키든 불가리아든 모두 가톨릭이 소수종교인 지역이라, 교황청 대사로서는 한직에 불과했다.

1944년 프랑스 주재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었는데, 처음 자기가 프랑스 주재 대사로 임명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명령이 잘못 전달된 줄 알기도 했다. 한직만을 맴도는 자기가 갑자기 프랑스 주재 대사라는 요직에 임명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안젤로가 임명된 것은 당시 교황 비오 12세가 처음 프랑스 대사로 생각한 성직자가 건강상 이유로 임명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직만을 맴돌긴 했지만 가는 곳마다 온후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평을 듣는 론칼리 주교를 프랑스 대사로 임명했던 것. 이 사실을 알고 론칼리는 "이 없으면 당나귀라도 일해야지."하고 자조했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진 사항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에 좌파 사상의 영향을 받은 신자, 성직자들이 제법 있었으므로, 역시 적당히 그쪽 물이 든 안젤로가 파견되면 잘 다독거릴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외교관"이란 말을 들었으며, 외교관으로서뿐만이 아니라 또한 성직자로서 프랑스의 본당들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프랑스에 붙잡힌 나치 포로들의 공정한 처우와 석방을 프랑스 정부에 촉구하는 한편, 나치에 협력한 혐의가 있는 주교들을 조사해 교회에서 퇴출시켰다.

1.3 베네치아 총대주교(추기경 론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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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로는 교황이 되기 전 베네치아의 총대주교[5] 였는데, 이 자리는 '유배지'라고도 불렸던 밀라노 대주교 자리와 함께 대표적인 한직이라고 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지내다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이 3명이나 있었는데 바로 성 비오 10세, 성 요한 23세, 그리고 하느님의 종 요한 바오로 1세였다. 밀라노 대주교였던 바오로 6세 또한 교황이 되었다.

여하간 당시에는 듣보잡이라서 추기경들 사이에서 파워가 없던 관계로, 안젤로 추기경이 교황 요한 23세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 반응은 '엥? 그게 누구?'였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도 자신이 설마 뽑힐 거라고는 생각을 안해서 비오 10세처럼 베네치아행 열차표를 예약해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 안젤로의 문장은 상단부에는 베니치아의 상징인 사자가, 하단부는 론칼리 집안의 문장인 탑이 있는 것이었다. 문장이 말하는 바는 결국 론칼리 집안 출신 베네치아 총대주교라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내용인데, 교황이 된 뒤에도 전임자 비오 10세의 전례를 따라 총대주교 시절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교황 문장으로 따왔다.

1.4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와의 마찰

추기경 시절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라면, 당대의 실권자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와의 대립 정도. 파스칼리나 수녀는 안젤로 추기경에게 엄청난 결례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배우 클라크 게이블바티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파스칼리나 수녀와 비오 12세 모두 게이블의 팬이었다. 그런데 파스칼리나 수녀가 스케줄로 잡혀있었던 론칼리 추기경의 교황 면담을 취소하고, 게이블의 교황 알현을 스케줄에 넣어 론칼리 추기경을 바람 맞힌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저 두 사람이 연예인 팬이라 저지른 즉흥적인 사태라기보다는, 고위 성직자들에 대한 일종의 '길들이기'로 벌인 일이기는 했다. 실제로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비오 12세의 묵인 하에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들의 교황 알현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서 교황과 파스칼리나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킨 것이 이 무렵이다. 또 파스칼리나 수녀는 훗날 "안젤로 추기경이 교황으로 즉위할 것을 알았더라도, 배우 하나 때문에 바람맞히는 일을 했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대답은 YES였다고 한다(…). 심지어 "이 세상에 추기경은 많지만 클라크 게이블은 한 명뿐 아닙니까?" 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런데 안젤로는 교황이 된 뒤에, 자신을 계속 경계한 것은 물론 결례를 저지른 적이 있는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에게 보복을 하긴커녕 그녀를 불러 위로를 건넸다고 하니 그야말로 대인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파스칼리나 수녀와 요한 23세의 성향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결국 죽을 때까지 둘이 화해는 하지 못했다. 요한 23세가 파스칼리나 수녀를 위로하려고 부른 자리에서도 잔잔한 키배가 벌어졌다니 말 다했다. 요한 23세와 파스칼리나 수녀가 만났을 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보수 성향이 강했던 파스칼리나 수녀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후임자인 바오로 6세도 파스칼리나 수녀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화해했다. 그 후에는 바오로 6세가 파스칼리나 수녀의 자선 사업에 직접 도움을 주었다.

2 교황 재위기간

2.1 “징검다리”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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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베네치아 총대주교 겸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베네치아에서도 예의 자기 성품대로 따뜻하고 온화하게 다른 사람들을, 혹은 문제들을 껴안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또한 성직에 입문한 뒤로 신자들 속에서 일하는 사목자를 꿈꾸었기 때문에, 외교관 일 대신 실제로 일선 교구를 맡음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젤로는 교황이 되리라 예상치 못했다. 베네치아 총대주교가 된 시점에서 이미 나이가 70대 노구였으므로, 이를 마지막으로 고향 소토 일 몬테로 은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안젤로의 조카 중에서도 (주교 삼촌을 둔 영향인지) 신부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 삼촌이 고향 마을로 은퇴하면 거창한 축제를 열려고 준비하기도 했다. 안젤로는 이 소식을 접하고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럴 필요 없으니 관두라고 했다.

1958년 10월 9일 비오 12세가 선종하고 동월 28일 콘클라베에서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으로 선출되면 흰색 수단(soutane)을 입고 사도궁 발코니에 서서 그 앞에 군중들과 온 세상을 위해 축복함이 관례다.[6] 누가 교황이 될지 모르므로 바티칸 재단사들은 미리 상/중/하 크기로 임시 수단을 지어둔다. 그런데 허리통 굵기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허리통이 굵은(…) 론칼리 추기경이 교황이 되자 당황했다. 그래서 수단을 뜯어서 옷핀으로 고정시켜 겨우 입혔는데, 인덱스? 사람들은 수단이 너무 꽉 조여서 꼭 죄수복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당시 콘클라베는 정말로 누가 교황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신문에서는 차기 교황이 될 만한 추기경 후보를 20명이나 뽑았는데, 당시 콘클라베에 참가한 추기경 총수가 51명에 불과한 만큼, 거의 4할이 후보로 거론된 것이다. 하지만 론칼리 추기경은 그 신문에 소개되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투표가 시작되자, 콘클라베 시작 전 예상과는 달리, 처음부터 안젤로가 유력한 교황 후보임이 드러났다. 첫 투표부터, 비록 당선이 유효한 투표 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론칼리 추기경은 가장 표를 많이 받았다. 투표가 계속되면서 한때 지지율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표가 몰려 교황으로 당선되었다.

추기경단 중 이탈리아 파와 프랑스 파가 나뉘었는데, 쉬어가는 역할도 하면서 양(兩) 파가 모두 합의할 만큼, 나이도 많고 야심도 없으면서도 덕망은 있는 추기경이 론칼리 추기경뿐이었다.[7] 새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에서 양 파가 서로 합의에 달하지 못하자, 서로가 합의할 수 있고 쉬어갈 수 있는 사람을 뽑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인 것. 그래서 요한 23세 즉위 당시에는 '징검다리 교황'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콘클라베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안젤로 자신도 교황이 되리라 생각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2.2 요한이라는 이름

교황으로 최종 당선이 되기 전, 안젤로는 자기가 교황으로 당선되리라 짐작하고, 만약 당선될 경우에 추기경들 앞에서 할 라틴어 연설문을 미리 작성하였다. 당선된 뒤에 교회법이 규정한 대로 추기경단 대표와 의전 사제가 콘클라베 결과를 받아들일지, 그리고 받아들인다면 교황명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물어보았을 때, "결과를 받아들이며, 교황명으로 요한을 택하겠다."라고 말하면서 미리 작성한 연설문을 읽었다. 이 연설문은 요한 23세의 사목방침과 영성을 간결하게 드러내었다.

교황은 이름으로 요한을 선택한 이유를 부친의 이름과 자신이 세례받은 본당의 이름, 가톨릭 교회의 주교좌 대성당의 이름이 모두 요한이기 때문이라고 한 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지금까지 총 22분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셨으며,[8][9] 이 이름을 선택한 분들은 대부분 짧은 기간 동안 교회를 통치하셨습니다. 로마 교황좌의 장엄한 계승 앞에 우리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이름을 감추어 버립니다."

실제로 14세기의 요한 22세(18년 119일 재위)를 제외하면 어떤 요한 교황도 15년 이상 재임한 적이 없다. 역대 22분의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교황 가운데 요한 23세는 12번째로 오래 재임한 교황이며, 5년이 안 되는 재위기간만으로도 이 요한 교황들 가운데 평균에 든다. 그런데 정작 이름의 유래가 된 사도 요한은 12사도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며 자연사했다는 게 함정

2.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세간의 예상과 달리 요한 23세는 교황이 된 지 얼마 안 된 1959년 1월부터 공의회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교회법 개정작업도 추진하는 한편 추기경들의 숫자를 대폭 증가시켰다. 1959년 1월 20일, 요한 23세가 공의회를 개최하고자 한다는 의중을 처음으로 국무성 장관 타르디니 추기경에게 드러내었을 때, 의외로 타르디니 추기경은 놀라긴 했지만 적극 찬성하였다. 같은 달 25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하면서, 그 자리에 있던 추기경 70명에게 공의회 개최를 하려고 한다면서 반응을 살폈을 때, 대부분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요한 23세는 실망하였다. 어떤 추기경은 교황이 경험이 없고 충동적이라, 별다른 고려 없이 즉흥적으로 공의회 개최를 이야기했을 거라고도 했고, 어떤 추기경은 교황의 귀가 얇아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설득당해 그랬을 거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요한 23세는 즉흥적으로 결정하지도,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결정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명백히 자기 주관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자신도 그 와중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불면증에 시달렸다. 요한 23세는 공의회에서 무엇을 다루면 좋을지 전세계 가톨릭 교회 주교와 중요 기관들에 설문지를 보내었으며, 이들 중 7할 정도가 답장을 교황청으로 보냈다. 그중에는 별의별 의견이 다 있었으며, 교황청에서는 이렇게 모인 답장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처음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1963년에 거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교황청 관리들이 63년은 너무 빠르다고 말하자, 오히려 62년으로 개최 일정을 앞당겨버렸다.[10]

그리하여 1962년 10월 11일, 회개와 쇄신을 위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나만으로 요한 23세는 가톨릭 역사에 엄청난 한 획을 그었다. 자세한 내용에 관심 있으면 책을 찾아보길 권한다. 변화가 너무 엄청나서 여기에 대충 적기도 힘들다(…). 위의 관련 항목은 정말 간략하다 못해 부실하니, 저 항목만으로 공의회에 대해 알았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게 좋다.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가톨릭의 역사는 공의회 전과 공의회 후로 나뉜다고 해도 괜찮다. 이런 점을 지적한 논문이나 단행본 또한 부지기수라, 예를 들기가 어려울 정도.

정작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1963년 6월 3일 바티칸에서 숨을 거두었다.

2.4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의 교황의 행동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미국과 소련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요한 23세는 소련 서기장인 흐루시초프와 미국 대통령 존F.케네디에게 각각 전쟁 반대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또한, 더 나아가 요한 23세는 라디오를 통해 현 세대엔 전쟁이 아닌 평화가 필요하다란 내용을 담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로 인해 뉴욕시를 방문한 미국의 언론인 노먼 커즌스는 타임지에 요한 23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도록 노력했으며, 결국 맨 위의 < 1962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에서 보듯 요한 23세는 역사상 최초로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2.5 선종과 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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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시신성 예로니모 제대 안에 안치된 시신

부모와 형제 대부분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요한 23세도 가족력을 피할 수 없었고, 교황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위암 진단을 받았다.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고자 자신의 병을 숨겼고, 바티칸에서는 교황이 위통을 앓고 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요한 23세의 몸 안에 자리 잡은 암세포는 바티칸 공의회 1차 회기가 끝날 무렵에 크게 전이되었지만, 요한 23세는 놀라운 정신력으로 육체의 고통을 버텨냈다. 결국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서도 교황이 위통이 아닌 위암을 앓고 있으며 이미 말기라고 보도했다.

1963년 6월 1일, 성 베드로 광장에는 '선하신 교황'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몇 차례 의식을 잃었다가 회복을 반복한 교황이 6월 2일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두 번 반복한 말은 요한 복음서 21장 15~19절에 나오는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였다.[11] 이 말을 끝으로 교황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성령강림대축일 전날인 6월 3일 오후 7시 49분에 선종하였는데, 그 시간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봉헌된 교황의 건강을 기원하는 야외 미사가 끝난 무렵이었다.

유해는 6월 4일 사도 궁전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운구되어 이틀간 조문객을 받았고, 6월 7일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 매장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시복 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관을 열었는데, 유해가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선종 후 유해에 특수 용액을 주입해 방부처리했기 때문이다. 2000년 9월 17일에 이미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요한 23세의 거룩함을 기리기 위해 선종 38주년인 2001년 6월 3일 무덤을 개장해 얼굴에는 피부 보호용 밀랍을 한 겹 씌우고 교황으로서의 의관을 갖춘 후 청동과 유리로 만든 새로운 관에 입관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신자들의 공경을 받고 옥외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그 후 교황의 유리관은 지하 무덤이 아니라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의 성 예로니모 제대 아랫쪽에 안치되었다.

2013년 7월 5일 드디어 교황청에서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성인으로 공식 승인 한다고 선포하였다. 시성식2014년 4월 27일. 복자에서 성인이 되려면 승인받은 기적 사례 보고가 한 건 더 필요하지만,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업적이 능히 기적 사례를 대체한다는 이유로 시성을 허가하였다. 축일은 10월 11일/6월 4일이며 교황사절, 베네치아 총대주교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수호성인이다.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식, 2014년 4월 27일시성식 당일 모여든 인파
시성식 때 불린 축가 Pastore buono del gregge di Cristo(그리스도인의 선한 목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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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성상도 제작되었다.

3 평가

3.1 교회 쇄신에 매진한 탈권위주의자

현대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황이다. 본시 성품이 소탈하고 서민적이었고 개인적인 욕심도 없었지만, 교황으로 당선된 초부터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려고 결심한 상태였다. 현대 사회의 발전과는 달리 격리되어 쇠퇴의 위기를 맞고 있던 가톨릭 교회의 쇄신을 위해 노력했다.

권위주의적이던 이전의 교황들의 스타일에서 탈피해, 되도록 검소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적인 예로, 교황청 기관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지에서는 교황에 대해 언급할 때, 말하자면 "존엄하신 분의 입술에서 옥음이 내리셨다" 같은 식으로 표현했는데, 요한 23세는 그냥 "교황이 말했다"라고 쓰라고 지시했다. 이런 공식적인 활동에서뿐만이 아니라 교황청 안에서 인부들과 만날 때에도 시골 신부 같은 온화하고 탈권위적인 태도로 대해서 크게 인망을 얻었다.

추기경들은 교황이 너무 권위가 없다고 싫어하기도 했다. 사회정의에도 관심을 쏟아서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등 관련 교서를 발표했는데, 미국의 우익 신자들이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당시 가톨릭의 분위기에 거스르는 점이 많았다.

또한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들, 동방정교회개신교와의 화해 및 대화에 대한 노력을 기울인 교황이기도 했다. 이미 교황이 되기 전부터 동방정교회와의 대화에 노력한 요한 23세는, 동방정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던 이전의 시각에서 탈피해 갈라진 형제로 규정했다. 또한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다.

3.2 선하신 교황 요한

요한 23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가 많이 전하는데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교황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상류층 사람들에게 노골적인 무시와 푸대접을 당하곤 했다. 한 번은 어느 고급 파티에서 누군가 성직자인 그에게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여주며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요??" 하고 물었다. 요한 23세는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 네. 어머님이신가 보군요. 참 잘생기셨습니다. 패드립의 시초이신 요한 23세
  • 요한 23세가 외교관으로 재직하였을 때의 일이다. 한 여인이 파티에서 야한 복장으로 나타나서 론칼리 몬시뇰에게 아는 척을 하자, 그녀에게 사과를 건네며 이렇게 디스를 했다고 한다.
자매님!! 이 사과를 드시고 부끄러움을 느끼시지요.
이 에피소드는 구상 시인이 요한 23세에 관해서 쓴 수필에 소개된 것이다.
  • 요한 23세는 밤에 잠을 조금 자고 일찍 일어나는 대신 낮잠을 자곤 했다. 요한 23세가 낮잠을 자는데 뭐라고 잠꼬대를 하고 있어서 들어봤더니,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모릅니다. 교황에게 물어보지요.
  • 로마시 경비대장이 요한 23세를 알현하러 와서 예법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요한 23세는 경비대장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일어나세요! 당신은 장교지만 나는 병사였답니다.
사실 요한 23세는 신학생 시절 징집되어 병사로 1번, 사제 시절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의무병으로 징집되어 복무한 적이 있다. 대전 중에 군이 복무 중인 사제를 군종 신부로 임명함에 따라 장교 임관.
  • 요한 23세가 아직 안젤로 추기경이던 시절, 동유럽공산주의 정권 밑에서 복역하다 풀려난 추기경이 로마에 찾아왔다. 안젤로는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 같이 기차를 타고 바티칸으로 향하는데, 감옥에 있다 나온 이 추기경은 바깥 구경을 더 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차가 잠시 정차한 틈을 타서 두 추기경이 함께 산책하기로 했는데, 바깥 구경을 정신 없이 하는 사이에 기차가 떠날 시간을 놓쳤다. 감옥에 있었던 추기경이 당황하는데, 안젤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지금 제 뒤에 있는 분 보이죠? 이 분이 기관사입니다. 기차에서 내려올 때 잡아왔죠. 이 분이 있는 한 기차는 떠나지 못합니다.
  • 요한 23세는 소탈하면서도 개방적인 인물이라 가톨릭 교회의 오랜 관성을 혁파하려고 했다. 그래서 권위적이며 보수적인 로마인이었던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 타르티니 추기경과 마찰이 잦았다. 교황 집무실이 국무원장실 바로 위에 있던 관계로, 국무원장은 요한 23세에게 화가 나면 "저 위에 계신 분"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 소식은 돌고 돌아 요한 23세의 귀에까지 전해졌고, 국무원장과 독대한 자리에서 요한 23세가 말을 꺼냈다.
저 위에 계신 분은 오직 하느님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국무원장보다 1층 위에서 일하는 사람일 뿐이고요. 다시는 계급을 혼동해서 부르지 마십시오.
  • 요한 23세가 교도소를 방문하였을 때, 수감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들이 제게 오시기 어려울 것 같아서, 제가 여기에 왔습니다. 바티칸에서는 교황이 죄수들에게 갑니다!!
  • 요한 23세가 교황청을 산책할 때였다. 포도원에서 일하던 정원사가 와인을 한 잔 권했다. 요한 23세는 맛을 본 뒤 이렇게 말했다.
“엔리코, 다른 신부들이 여기에 와서 와인을 맛보지 못하도록 해주겠소? 한 번만 맛을 보면 추기경들이 모두 미사에 쓰자고 할 테고, 어쩌면 하루에 네댓 번이나 미사를 드리자고 할지도 모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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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몬티니 추기경과 교황

4 이야깃거리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서문에서 화자인 멜크의 아드소는 까오르의 자크라는 노인네가 교황으로 선출돼 요한 22세를 참칭했다면서, 하느님이 보우하사 다시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거역스러울 터인 이 이름을 쓰는 교황이 없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 요한 22세가 1334년 선종한 이후 요한 23세가 즉위한 1958년까지 수백 년 간 요한이라는 이름의 교황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대목.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존재했으나 폐위되어 무효화된 적이 있는데, 폐위될 때 죄목이 이단, 성직 매매, 배반, 알렉산데르 5세의 독살, 볼로냐의 200명 이상의 여인들을 유혹한 죄였다. 성직자 맞아? 폐위가 아니라 파문이 더 적절해보인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항목 참조.

요한 23세가 생전에 사용하던 지구본을 복원하는 데 한지가 사용된다고 한다. 링크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 시절 론칼리 대주교는 제 3차 유엔 총회에 상정된 대한민국 독립 승인 결의안 의결을 적극 도우라는 당시 교황 비오 12세의 당부에 따라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 지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 넉 달만에 UN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승인을 받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 정부 유엔 승인에 바티칸 역할 있었다
  1. 론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에 이미 만 76세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기경단이 그를 뽑은 이유는, 전임 교황이었던 비오 12세가 하도 고집불통이라 힘들었으니 이제 “좀 쉬자”는 것이었다. 고령인 데다가 별로 야심도 없어보였기 때문에 별 일은 없겠지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2. 10월 11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 날이다.
  3. 이탈리아어로 '산 밑 마을'이란 뜻이다. 훗날 요한 23세를 기리고자 마을 이름에 '요한 23세'를 덧붙여, Sotto il Monte Giovanni XXIII가 되었다.
  4. 훗날 요한 23세가 교황이 된 뒤에, 교황청 문서들 중 자기 관련 서류를 보았는데, 거기에 "근대주의자 혐의가 있다"라는 문구가 적힌 것을 보고 열이 뻗친 나머지 그 문서에 직접 "나, 요한 23세 교황은 근대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선언한다!"라고 적었다. 이후 분노가 가라앉자 "나는 성무성성으로부터 감시받던 사제도 교황이 될 수 있다는 예다."라고 추가로 적어넣었다.
  5. 실권이 없을 뿐이지 베네치아와 리스본의 총대주교는 가톨릭 교회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총대주교의 착좌 후 빠른 시기에 추기경으로 서임되는 특권은 물론 추기경으로 서임되지 않더라도 추기경의 의장을 갖추는 특권을 누렸다. 리스본의 총대주교는 교황보다 작은 싸이즈의 세디아 제스타토리아와 공작 부채를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6.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에 하는 이 축복을 '도시(로마)와 온 세상에'라는 뜻의 라틴어 urbi et orbi라고 부른다. 교황은 당선 직후뿐만 아니라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교황이 판단하기에 특별한 때에 이 장엄한 축복을 행한다.
  7. 당시 가장 유력한 교황 후보로 꼽혔던 프랑스 파 타르티니 추기경이 낙선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이 사람은 능력도 있고 정치 세력도 당시 추기경들을 통틀어 가장 큰 편에 속했지만 정적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과격하고 괄괄한 성격이 문제였는데, 교황(비오 12세) 앞에서 그 자리에 없던 누군가를 욕하는 육두문자를 퍼부었다는 일화까지 있다. 참고로 이 때 교황 앞에서 욕설을 퍼붓는 타르티니 추기경의 모습에 빡친 파스칼리나 수녀(당대 바티칸의 실권자인 그 사람 맞다)는 타르티니 추기경에게 싸닥션(!!!)을 날렸다고 한다! 교황 앞에서 육두문자를 퍼붓는 사람이나, 수녀의 몸으로 추기경의 싸닥션을 날린 사람이나 참 대단한 인간들이라고 밖에는...
  8. 사실은 요한 20세는 없다. 요한 15세를 요한 16세라고 잘못 명명했는데, 이게 요한 21세 명명 이후에 밝혀졌기 때문. 그러므로 요한 23세가 사실은 22번째 교황이 된다.
  9. 사실 대립 교황까지 치면 요한으로 명명된 교황은 23명을 넘는다.
  10. 그런데 요한 23세가 암 때문에 63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만약 처음 일정대로 63년에 했거나, 혹은 교황청 관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 이후로 미루었더라면, 요한 23세는 자신이 계획한 공의회 시작도 보지 못하거나, 혹은 공의회를 연다는 계획 자체가 무산되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때만 하더라도 아직 요한 23세 본인도 자신이 위암에 걸린 줄 몰랐다. 공의회 성사를 위해서 정말로 하늘이 도운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11. 예수부활 후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재회했을 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3번째로 받은 사도 베드로의 대답. 굳이 같은 질문을 3번씩이나 한 것은 십자가 수난 당시 베드로가 목숨을 부지하려고 3번 예수를 모른다고 한 것에 대해, 예수가 친히 용서해주기 위함이라고 해석된다. 이 대답을 듣고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하여 자신의 후계자이자, 사도들의 수장으로 재신임했다. 오늘날 교황들이 갖는 교회 수위권의 유래 중 하나가 되는 성경 속 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