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 9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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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東北九城: 고려조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던 9개의 성

1.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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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학설들에 대한 동북 9성의 추정도.
강동 6주와 더불어 고려의 북진정책을 상징하기도 한다.

1.2 설명

1108년(예종 3) 윤관이 예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 별무반을 조직하여 천리장성 동북방의 여진족들을 정벌한 후 쌓은 9개의 성으로 각 성의 위치는 함주(咸州)·복주(福州)·영주(英州)·길주(吉州)·웅주(雄州)·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공험진(公嶮鎭)에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9성의 위치문제는 현재까지도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있다. 더불어 학계를 더욱 어렵게 하는 이유는 설치될 때의 9성과 여진에 반환했을 때의 9성 명칭이 불일치하여 더욱 더 9성의 위치는 미궁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1.3 개척에서 반환까지

척준경 등의 활약으로 윤관이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9성 지역에 대해 개척을 시작하였는데 사민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기후나 토양,교통,방어 등 이러저러한 문제로 1년만에 실패하고 만다. 이에 대해서는 윤관 문서 참조. 조선 세종때의 4군 6진 개척에서 봤듯이 개척이란게 단숨에 될 정도로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고려가 9성을 개척하자 살 곳을 잃어버린 여진족은 이에 완안부 오아속(烏雅束)이 중심이 되어 여러 차례 9성을 침범하는 한편 고려에 강화를 요청하여 9성의 반환을 요청하였고 고려는 위에 써있는 이유로 윤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었고 여진족은 9성을 발판으로 성장하여 나라를 세우게 된다.

1.4 위치에 대한 논란

9성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으며 현재 3가지 설이 주장되고 있다.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은 선춘령과 함께 공험진의 위치만 밝혀진다면 9성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현실은 시궁창. 만약 이 때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공험진에 세웠다는 선춘령비나 그 흔적이 발견된다면 그야말로 한국 역사학계가 뒤집어진다.

1.4.1 함흥평야설

함흥평야 일대에 있었다는 설. 현재는 부정되고 있으며, 국사교과서는 함흥~길주일대설과 두만강설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 설에는 국력이 더 약했던 공민왕 시절조차도 함흥평야를 넘어 개마고원까지 진출했으므로 진격에 어려운 것이 아니며, 함흥평야 일대에 옹기종기 있었다면 17만 대군을 편성할 이유도 없고, 방어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는 지적등이 있다.

함흥평야 일대를 차지한 이후로 여진족이 이를 발판으로 금나라를 세웠다는게 정황상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여진족이 일어난 발판은 어디까지나 만주벌판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함흥평야를 차지해서 그 곳을 발판으로 나라를 세웠다 하더라도 높고 높은 개마고원과 함경산맥이 있어서 적절치 않다는 것. 하지만 여진의 기반과 별개로 나름대로 생산성 좋은 함흥평야를 후방의 곡창지로서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

1.4.2 만주일대설

9성이 천리장성 이북과 만주에 걸쳐있었다는 설이다. 위 설과 마찬가지로 정설로서 통하지 않고 있다.

함경남도 일대설과 절충해서 두만강 하류까지 진출했다는 추정하는 함경남북도-두만강 일대설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애초에 국력이 훨씬 약해진 고려를 이끌었던 공민왕도 함경남도 일대와 개마고원 일부를 정복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고려사동국여지승람에 쓰여있는 기록을 근거로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으로 700리가 되는 곳으로 간주하여 9성이 함경남도와 만주 일대에 걸쳐 있었다는 주장. 세종실록지리지에 공험진을 소하강(송화강)이라고 기록한걸을 근거로 삼고 있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은 세가지 정도의 의견이 사서 내에서 충돌하고 있고, 4군6진 개척에 따른 오해라는 지적이 있다.

9성반환에 대한 고려쪽 찬성측의 주장[1]을 모두 만족한다고 하지만 이건 아래의 함경남도 일대설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1.4.3 함경남도 일대설(함흥~길주 일대설)

1과 2의 절충 정도 되며 사실상의 주류설이다.

조선 후기 정약용등 실학자들이 주장한 설로 9성의 위치가 길주 내지 마운령 이남부터 정평까지 주로 함남 일대에 9성이 위치했다고 주장했다. 2와 마찬가지로 이 설이 맞다면 고려쪽 찬성측의 주장이 딱 들어맞는다. 함경산맥 남쪽에 해안을 따라 9성이 일렬로 위치해 있다면 방어선이 지나치게 넓어지는데 반해 교통로가 취약해지는데 중간에 한 곳만 끊어져도 9성 전체의 교통 전달로 이어지고, 이럴 경우 9성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다. 상호 연계를 통해 방어선을 짤 수 있는 서희의 강동 6주와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쟁과 역사의 저자인 임용한 교수가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

2 東北九省: 만주에 위치했던 중화민국의 성

만주에 있는 중화민국의 9개 성을 이르는 말. 자세한 것은 중화민국/미수복지구를 참고.

  1. 방어의 문제점, 실질적 이득이 없다, 개척의 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