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郡六鎭
1 개요
파저강(婆猪江)[1] 전투 영상. 신기전도 잠깐 나온다.
조선 세종대왕 시기에 계획된 북방 개척의 결과물이다.(여진족의 입장에서는 침략이지만) 1433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만 5천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소탕한 후 설치한 4군(四郡)과, 같은 해 김종서 장군이 이징옥, 황보인 등과 함께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물리쳐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6진(六鎭)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6진 지역에서는 육진 방언이 존재했고 재가승이 있었다. 현재 이곳엔 북한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나선특별시와 은덕군, 경원군, 온성군, 회령군, 부령군, 그리고 청진시 동부 지역이 위치한다.
세종대왕은 이 지역에 삼남 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인구를 보충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고, 그 지방의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는 토관 제도를 실시하였다.
2 개척 이전의 역사
발해 멸망(926년) 후 함경북도, 평안북도 전 지역, 그 외 평안남도 일부 지역이 한반도 국가의 지배범위를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 고려대에 수복하는 평안남도, 평안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야인들의 영토가 된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유민을 받아들이며 북진정책(北進政策)을 추진,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을 비롯한 평안남도 일부지역을 수복했다. 이후 고려 성종 13년(994년)에는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강동 6주(江東六州)를 설치함으로써 마침내 한반도의 서북 경계 끝이 압록강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예종시기(1108년) 윤관의 고려군이 천리장성을 넘어 함경북도 지역에 동북 9성을 개척해보려 시도했지만 여진족들의 반발로 1년만에 반환해야 했고, 이후 260여년간 고려의 영토는 천리장성 안으로 완전히 확정된다.
그러다 고려말기 공민왕 시기에 이르러 평안북도 일부 지역을 회복하는데 공민왕 10년(1361년) 압록강 하류지역인 창성(昌城)·벽동(碧潼)·강계(江界)에 진출하여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를 두었다. 또한 원 간섭기 시절 몽고에게 빼앗긴 함경남도 지역을 되찾는데에도 성공했다. 원래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이북 지역은 고려 정부의 통치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고 고려의 유이민(流移民)과 여진인이 섞여 살고 있던 곳이었는데, 대몽항쟁 시기인 1258년(고종 45)에 이 지역의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 사람 탁청(卓靑)이 고려의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에 항복하였다. 이후 몽고는 여기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세우고 조휘를 총관(摠管),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고, 조휘와 탁청의 일족들이 총관과 천호를 세습하면서 이 지역을 다스렸다. 공민왕 5년(1356년)에 대대적인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전개하면서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철령(鐵嶺)[2]을 넘어 이 지역을 공격했고 당시 해당 지역의 토착 천호였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군에 내응하면서 100여년간 잃어버렸던 함경남도를 되찾게 되었다. (다만 이후 명나라가 중국땅을 멋대로 빼앗았다며 쌍성총관부 자리에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면서 한바탕 난리가 나게 된다.)
이후 홍건적이 서북지역을 침입해와 평안도가 뚫려 개경이 함락되었고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으로 파천하였지만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최영(崔瑩), 이성계 등의 명장들의 활약으로 다시 회복하였고,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군사를 이끌고 동북면 쌍성(永興, 영흥)에 쳐들어오지만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과 함흥평야의 대회전(大會戰)을 벌여 참패하고 달아났다. 이로서 해당 지역의 지배를 확고히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일부 지역도 회복되는데 당시 고려 변방의 방위를 맡고 있던 이성계(李成桂)가 여진(女眞)·달달(達達)·요심(遼瀋) 등과 인접한 요해지로서 자주 이민족의 침략을 당하는 아오(我吾)·읍초(邑草)·갑주(甲州)·해양(海陽) 등 변경에 대한 방위 대책을 건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3년(1391년)에 이성계에 의해 갑산군 지역이 회복되어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를 설치했다.
하지만 여전히 함경북도, 함경남도, 평안북도 북부 지역 대부분은 500년 가까이 야인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고, 고려를 이은 조선은 다시 고토 회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고려 성종대 서희의 강동 6주 개척 이후 근 4백여년간 큰 소득이 없던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개척이 크게 진척되었다. 태조 2년(1393년) 동북면안무사(東北面安撫使) 이지란(李之蘭)이 갑주만호부 지역에 대규모 축성(築城)을 하였고, 태조 7년(1398년)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을 동북면으로 보내 주·부·군·현의 지계를 정하고, 새로 편입된 지역의 중심지인 공주(孔州)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여 부를 설치, 경원(慶源)이라 이름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의 동북방 영역은 두만강 하류 일부 지역에까지 이르렀으며, 이후 태조는 경원부를 ‘흥왕(興王)의 땅’이라고 하여 동북면 경영의 본거지로 삼았다.
태종 3년(1401년)에 강계만호부를 발전시켜 강계부(江界府)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1410년(태종 10년)에 경원부를 중심으로 여진족들의 내습이 잦아지자 잠시 부(府)를 폐지하고, 길주(吉州) 도안무찰리사(都安撫擦理使) 조연(趙涓)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도록 하여 적장 파아손(巴兒孫)을 쳐 두만강 건너 적의 본거지까지 점거한 후, 1417년에 경성(鏡城)에 부를 다시 설치하였다. 1413년에 갑주만호부 또한 갑산군(甲山郡)으로 승격되었다. 1416년에는 갑산군 관하의 일부를 분리해 현 중강진(中江鎭) 부근에 여연군을 설치하였고, 1417년에는 이를 함길도(咸吉道)로부터 평안도에 이관하는 동시에 거리가 가까운 강계도호부에 소속시켰다. 이로써 갑산 서쪽의 압록강 남안(南岸)이 모두 조선의 영역이 되었다. 북방 군사체계도 강화하여 익군체제(翼軍體制)를 정비했다.
세종 3년(1421년) 최윤덕이 군사적 목적으로 북방 지역의 소현(小縣)들을 혁파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하자는 건의를 하여, 동북면과 서북면의 모든 지역을 몇 개의 도, 즉 군익도에 분속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로서 서북면에 연대적인 방어체제를 마련하였다.
세종 14년(1432년)에는 경원부의 서쪽, 야인들의 주요 통로였던 석막(石幕:富寧)을 쳐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하였다. 영북진의 설치는 북방 영토 개척에 있어서의 세종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로부터 1년 뒤, 4군 6진 개척이 시작되었다.
3 구성
서북 4군 : 여연(閭延), 무창(茂昌), 자성(慈城), 우예(虞芮)
동북 6진 :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 부령(富寧), 회령(會寧), 종성(鍾城)
4 목적
북방에서 약탈과 분탕을 저지르던 야인(주로 여진족)들의 위협을 제거, 굴복시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과 함께 조선 남방, 북방의 경계지역을 안정시켰다.
5 개척 이후
4군의 경우 여진족이 계속 대규모로 침입해오면서 1445년 여연, 무창, 우예가 폐군, 1459년 자성이 폐군되었다. 이후 이 곳은 폐4군이라 불렸으며 위험지역으로 지정되어 거주가 금지되었다. 몇번의 치열한 복군 노력 끝에 1788년 무창이 복군되었고, 1869년 자성군(여연, 우예, 자성)이 복군되었다.
폐사군 시절에는 일반인의 거주를 금지하고 행정 기관을 파했을 뿐 영토 자체는 계속 조선으로 유지되었다. 당시 폐사군 지역 등 조선의 북방 영토 내에 들어와 사는 여진족들을 번호(藩胡)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거주지와 활동지역을 일정하게 통제받고 다른 번호와의 왕래를 금지하는 조건으로 폐사군 지역에서의 거주를 허가받아야 했다. 반대로 조선의 백성들 중 여러 이유로 거주가 금지된 폐사군 지역이나 여진족 지역으로 들어가 조선정부의 관리를 피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변민(邊民)이라 불렀다.
대부분의 여진족 번호들은 조선 출신의 변민(邊民)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졌으며, 수령이나 변장(邊將)의 세력권에 있었으므로 항시 조선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했고 변방 조선 관원의 지시에 복종하는 형태를 취했다. 또한 조선에 친부(親附)하지 않은 오랑캐가 변방에 침입하려 할 때면 번호가 즉시 조선에 연락하거나 이들을 막거나 구원을 하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번호는 본토 여진족들의 반감을 사는 일이 종종 있어서 동족간에 충돌이 야기되기도 했고, 번호가 변경 조선 관원에게 구원을 청하는 일도 있었다. 다만 선조 연간부터 북방 변방의 방어에 손을 놓으면서 번호들을 제대로 관리하거나 품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 번호들이 자주 조선에 반기를 들었다. 때문에 이후부터 다시 복군 노력이 시작된다.
6진의 경우 선조 시기 여진족들의 대공세가 있었으나 막아내었다.
그러나 사실 이전부터 6진쪽 영향력이 약해졌고 왜란이후엔 흘라운 우디거가 조선 토벌군을 대패시키며 6진쪽의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6 의의
4군 6진이 개척되면서 조선의 영토는 압록강-두만강 이남으로 확장되었으며, 현대 한국(북한, 남한)의 북방 국경선을 거의[3] 확립시켰다는 점에서 한국사에 큰 의의가 있다.
7 기타
조선은 여진족에게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행하는 교린정책을 실시했다. 그 중 강경책이 이 4군 6진 개척이다.
회유책으로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반농반수렵 생활을 하던 여진족들이 자급자족할 수 없던 종이, 면포 등의 여러 물품을 모피 등과 교환토록 했고, 여진인들의 조공과 귀화를 장려했으며, 여진 추장들에게 만호, 천호 등 조선 정부의 명예직을 주었고, 서울 동대문 근처에 북평관이란 객관을 만들어 조공을 온 여진 사신들의 진상품을 받고 하사품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이런 회유책들은 명나라가 크게 성장한 건주여진을 매우 경계하여 여진과의 정식교류를 끊으면서 조선에서도 더이상 시행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조선은 명나라의 바램과는 달리 여진과 완전히 적대하지는 않고 만포진에서 약간의 식료품을 교류하는 등의 최소한의 우호활동은 계속 했다.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徙民政策)의 경우 이 4군 6진 개척 때 본격적인 시행이 이루어졌고 실제로 이 때의 이주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그 전에도 시행된 적은 여러번 있었다. 기록상 가장 처음은 고려 윤관의 동북 9성 개척 때로 이때 주변 많은 사람들을 9성 지역에 이주시켰지만 1년만에 땅을 반환하면서 많은 이가 해를 입었다고 한다. 덕종 때에도 정주(靜州)에 1,000호를 이주시켰다. 조선의 경우 1398년(태조 7년) 경원부 지역을 얻은 후 관내 지역에 사는 부유한 백성들을 이주시켰고, 1410년(태종 10년) 두만강 주변 부거참에 1,000여 호를 이주시켰다.
조선시대엔 무작정 끌고 간건 아니었고 법적으로 이주 혜택이 있었다. 사민 정책에 호응하여 북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양반이면 자품(資品)을 높여 주거나 토관직을 주었고, 향리나 역리(驛吏)일 경우 부역을 면제(免役)해 주고 관직 진출의 길을 열어 주거나, 양반으로 면천(免賤)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모든 천인은 양인이 되었고, 역시 부역이 면제되었다. 지금은 잘 와 닿지 않지만 신분제 사회에 부역의 강도도 높았던 당시엔 큰 혜택이었기 때문에 함길도(현, 함경도)보다는 살만했던 평안도 지방의 경우 자발적인 이주가 많이 이루어져 강제적 이민의 필요성이 많이 없었다. 때문에 세종 19~20년에 세종대왕이 평안도 일대에서 천여 호를 뽑아 국경 연변에 이주시키고, 그 빈 자리에는 다시 황해도, 하삼도의 주민을 뽑아 이주시키려는 이중 사민 꼼수를 부리려 했으나, 당연히 관리들과 백성들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물론 이 당시에도 범죄자는 큰 혜택 없이 강제로 이주되었고, 훗날 동북방 지역이 일종의 유배지 같은 기피 지역 이미지가 된 이후에는 자발적인 이주 그런거 얄짤 없었다. 그리고 큰 혜택을 준다고 해도 개척하는 과정에서의 고통까지 경감되는 것은 아닌지라 많은 이들이 개척 과정에서 죽어나갔다. 살아남아 자리를 완전히 잡으면 한 단계 위의 신분을 누리고 부역 걱정도 없이 살 수 있었지만, 그 살아남아 자리잡는 과정 자체가 힘든게 당시 동북방 미개척 지역이었다.
사족이지만 누르하치는 6진쪽 친조선파 여진족들을 흡수하며 커진 흘라운 우디거와 전투를 벌인곳이 6진중 하나 종성도호부 부근이었다.
여기서 승리한 누르하치는 기존에 우디거가 흡수한 세력을 고스란히 먹어서 조선과 직접적으로 맞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