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

(루드비히 반 베토벤에서 넘어옴)
베토벤, 요제프 루트비히 슈틸러, 1820년[1]

1 개요

악성(樂聖)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양 고전음악가 중 하나

Ludwig van Beethoven
루트비히 [2] 베토벤 정확히는 루트비히 판 베트호픈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

독일클래식 작곡가. 서양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이며 흔히 악성(樂聖)으로 불린다. 아무리 클래식에 관심 없어도 베토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특유의 까탈스럽고 불같은 성격때문에 '괴팍한 천재'의 대명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흔히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함께 고전파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알려져 있지만, 단지 고전파라는 틀로 이 세 거장을 묶기에는 각자가 성취한 음악적 봉우리가 너무나 우뚝하다. 하이든은 소나타 양식을 비롯하여 교향곡, 현악4중주, 협주곡 등 현재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는 각종 음악 양식들을 확립하고 그 예술적 가능성을 확인한 작곡가이며,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음악양식을 더욱 발전시키고 오페라를 스토리와 음악이 긴밀하게 어울리는 진정한 극음악 양식으로 개척했고, 베토벤은 견고한 구축법을 통해 선배 작곡가들이 확립한 양식들이 좀더 깊이 있고 큰 규모를 갖는 작품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곡의 전개방식와 화성, 악기 배치등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을 추구하여 낭만주의 등 새로운 음악사조가 탄생 할 수 있는 산파 역할을 한 음악가로 평가받는다.

후배 또는 후계자를 자청한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바그너, 브루크너 등을 위시해 수많은 음악가들이 베토벤의 영향을 받았으며[3] 사실 상 베토벤 이후의 모든 음악가들은 베토벤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 현재까지도 그의 음악을 공부하지 않는 작곡가나 작곡가 지망생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음과 관련하여 한가지 지적하자면, 원래 베토벤은 '베트(호)-픈'이라고 읽어야 독일어 원음에 가깝다.[4] 이것은 姓인 '베토벤'이 Beet+hoven[5]의 합성어이기 때문인 듯하며 Beet-ho-ven으로 끊어서 읽게 된다. 발음기호상 /ˈluːtvɪç fan ˈbeːt.hoːfən/. 독일 음악대학으로 유학한 대한민국인들이 베토벤 베토벤 거리면 현지 교수들이 발음을 고쳐주려고 한다고 하지만, 정작 이름은 네덜란드식이다. [6] 영어로는 베이토우븐, 또는 베이토우벤('토'에 강세가 있다) 정도로 발음한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해방 직후까지 음차한 이름인 배도변(裵道邊) 또는 변도변(邊道邊)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피아노 소나타 Op.106 No.29 "함머클라비어"(Hammerklavier) 전 악장. 다니엘 바렌보임 연주.

2 생애

베토벤은 음악뿐만 아니라 생애 자체도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대상이자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베토벤의 사후 그의 생애를 다룬 평전과 논문이 엄청나게 많이 출판되었으며 이런 베토벤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로맹 롤랑처럼 아예 그의 일생을 소설로 승화시킨 작가까지 있을 정도이며 당연히 그를 다룬 영화나 소설도 많다. 이처럼 그의 삶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그가 단순히 위대한 음악가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다이나믹하고 극적인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그의 인생 자체가 세인들에게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가다보니 베토벤이 태어나기 수백년 전에 살았던 그의 조상들과 그의 형제 및 일찍 죽은 누이들[7], 후손들, 그의 지인들까지 모조리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가 잠시라도 머물렀던 곳은 모조리 기념관/박물관 등의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또 그가 생전에 남겼던 유품이나 악보, 편지, 노트 등은 경매장에서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보통 그의 생애를 본인의 음악양식과 결부지어 초기/중기/후기(또는 1기/2기/3기)로 분류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초기는 보통 그의 탄생부터 모차르트, 하이든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는 빈 초기시기까지,
중기는 두 선배작곡가의 영향을 벗어나 본격적인 독창적 작법을 수립했던 1810년대 후반기까지,
후기는 청력을 완전히 잃은 후 단순히 작법상의 독자성을 넘어 자신만의 명상적이고 심원한 음악세계를 구축했던 생애 마지막 시기를 가리킨다.

아래 서술된 베토벤의 생애도 이 분류를 참고하여 작성된 것이다.

2.1 초기

1770년 12월 17일 독일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루트비히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독일로 이주하여 본 궁정의 악장을 지냈다. 아버지인 요한은 궁정 가수였지만 잦은 폭음으로 결국 목소리가 상했다. 오늘날에도 '베토벤의 아버지' 하면 바로 술주정꾼의 이미지가 떠오를 정도로 아버지 요한은 심한 알콜중독자였으며 심지어 베토벤이 연주회 등에서 벌어온 돈도 술값으로 탕진했을 정도. 할아버지는 어린 그를 귀여워해줬지만 1774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유럽에서는 신동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이 크게 주목받았기에, 베토벤의 아버지인 요한도 아들을 이용해 돈과 명성을 얻을 속셈으로 어린 루트비히를 그야말로 쥐잡듯이 잡으면서 완전 정서학대 수준으로 엄격하고 가혹하게 피아노를 연습시켰다고 한다. 베토벤은 이런 교육방식에 너무 화가 너무 나서 피아노를 부수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만류로 포기한 적도 있고 1792년 부친이 사망하자 장례식에서도 슬퍼하기커녕 비웃기만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요한이 아들에게 강압적으로 피아노연습을 시킨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이런 주장들은 모두 소문에 의존한 것들로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이미 5살경부터 오르간 주자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토비아스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친척으로부터는 현악기 다루는 법을 배우는 등 일찌감치 여러 사람에게 음악을 배웠다. 또 당시에 아이들과 자주 어울려 놀면서 골목대장 노릇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8]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 이야기는 완전 거짓말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783년 13살의 베토벤, 화가 미상

다만 교육방식 논란과 별도로 요한이 자기 아들을 모짜르트처럼 천재로 포장해서 한몫 벌어보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아들을 팔아 유명세를 타는 것을 부러워했던 요한은 나름 음악적 재능을 가진 자기 아들도 볼프강 모짜르트처럼 신동으로 만들어 돈을 벌려고 했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서 요한은 아들이 6살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 루트비히의 실제 나이는 8살(정확하게는 7살 3개월)이었다. 이렇게 아들을 천재로 만들어보려고 나이를 2살이나 줄이기까지 했지만[9] 당시 베토벤은 대중들에게 모짜르트만큼 강한 임팩트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신동으로 부각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재능은 인정받아서 9살 때 평생의 은인이 된 궁정음악가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를 만나 본격적으로 음악의 기초를 배웠고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맡고 있던 네페를 따라 무급 오르간 보조주자로 일하게 된다. 그가 13살 경에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인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변주곡(WoO 63)에는 네페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후 베토벤은 1784년에 본 궁정의 정식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1789년에는 궁정 교향악단에서 비올라 주자 겸 부지휘자 되었는데, 그는 이 교향악단에서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를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세계를 넓힐 수 있었다.

1786년에는 친구이자 당시 의대생이었던 프란츠 베겔러의 소개로 귀족가문인 브로우닝 집안(von Breuning)과 인연을 맺었고 이 집안 아이들의 피아노 선생이 되었다. 브로우닝 집안의 소개로 베토벤은 수준있는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고 이들은 그에게 많은 중요한 도움을 주었는데, 특히 이 중에는 그의 평생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던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도 있었다.[10][11]

1787년에는 본의 선제후(이자 대주교)인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후원으로 당시 북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다. 이때 평소 존경하던 모차르트도 만났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에는 모짜르트와 베토벤이 만난적이 없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모차르트가 베토벤을 만나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다는 일화는 모짜르트의 전기작가인 오토 얀(Otto Jhan)의 일방적인 주장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1787년 당시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지오반니"의 작곡에 전념하고 있어서 관계자 외에는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명의 음악가 베토벤을 굳이 만나 주었을지는 의문. 게다가 1787년 베토벤의 1차 빈 여행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현재는 두 사람의 만남을 부정하는 견해가 우세하다.[12] 그리고 그 해, 어머니가 49세로 세상을 떠났다.[13]

1789년에는 알콜중독으로 생활력을 상실한 아버지 대신 가장의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아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 된 루트비히였지만 당시 음악의 본고장 비인에서 음악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못했던 그는 고향의 절친한 귀족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1792년에 막시밀리안 선제후에게 일정기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 후원금으로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빈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또 비인에서 저명한 음악가인 하이든에게 배울 수 있도록 주선도 받았다.[14]

1801년의 베토벤, 카를 트라우고트 리델
1803년의 베토벤, 크리스티안 호른먼

빈에서 베토벤은 계획한 대로 요제프 하이든의 문하에 들어가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베토벤은 하이든의 지도방식에 불만을 가졌으며 하이든은 하이든대로 이전 스승 밑에서 했던 숙제를 똑같이 제출했다가 들키는 등의 뻘짓을 한 베토벤을 돼 먹지 못한 존재로 취급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베토벤과 하이든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는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의 잔치나 모임에서 연주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는데 그의 뛰어난 즉흥연주능력은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기간이 끝났지만 곧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같은 든든한 후원자도 얻었기 때문에 생계에 곤란함을 느끼지 않았다. 1795년에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등의 레파토리로 정식 공연에 데뷔한 후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후원으로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유럽 각지에도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15] 1800년에는 1번 교향곡과 6곡의 현악 4중주곡을 발표해서 성공을 거두면서 피아니스트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아직 모차르트와 하이든이라는 선배 대작곡가들의 영향하에 있었으나 이미 중기 이후의 그의 빛나는 음악적 성과의 서광도 충분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베토벤은 이때부터 귀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는, 음악가로선 치명적이라 할 만한 문제[16]를 안게 된다.

베토벤은 이 귓병때문에 유서를 쓸 정도로 고통스러워 했다. 그럴만도 한게 음악가에게 청각장애라는 질병은 사실상 사형선고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친구들 기록을 보면 표정이 너무나도 어두워졌고 말수가 적어졌으며 사람 만나길 꺼려하며 엄청나게 괴로워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하일리겐슈타트로 가서 쓴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베토벤 사후에 발견되었으나 유서를 썼다고는 해도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은 듯하다.[17] 그러나 유서를 쓴 후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새롭게 결의한 베토벤은 그 후로 걸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802년에는 2번 교향곡을, 이듬해에는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를 작곡했다.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에서는 사망을 눈앞에 두고 고뇌하는 예수의 모습이 귀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고뇌하던 베토벤의 절절한 모습과 묘하게 중첩되어 있다.

2.2 하이든과 베토벤

하이든은 1790년 말 경에 런던으로 음악여행을 가던 당시 본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베토벤은 이 위대한 음악가를 처음 만났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후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두 곡의 칸타타(WoO.87,WoO.88)[18]의 악보를 받아본 후 베토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승낙한다.

1792년 11월 10일에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몇달 전 7월에 런던에서 돌아와서 비인에 머무르고 있던 하이든의 제자로 들어간다. 그동안 동네 음악가들에게만 배우다가 모처럼 당대의 거장에게 배우게 된 베토벤의 기쁨과 희망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가르침을 받게 되자 하이든에 대한 기대는 점차 실망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이든은 분명 작곡가로는 1급이었지만 스승으로서는 의문부호가 한두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느긋한 성격 탓인지 2차 런던여행에 대한 준비에 치중했던 탓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튼 하이든은 기대했던 만큼 베토벤을 열성적으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언젠가 베토벤이 작성한 악보를 하이든이 고친 후에 돌려주었는데, 요한 밥티스트 셴크(Johann Baptist Schenk)는 이 수정된 악보를 보고 하이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지적해 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 베토벤은 자신의 교육에 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하이든에게 크게 실망했다. 이 외에도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몇 곡에 대해 악평을 하거나 출판을 반대하여 베토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베토벤 자신이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C단조의 피아노 3중주를 하이든은 신예 작곡가의 작품 치고는 너무 길고 복잡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베토벤은 자신과 너무 성향이 다른 하이든에게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1년여만에 사제관계를 청산한다. 후에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크게 실망했었다. 물론 이 말은 하이든이 배울게 없는 시시한 음악가라는 뜻이 절대 아니라, 단지 자신을 제대로 지도해주지 않은 하이든에 대한 섭섭함을 표현한 것이다. 여튼 하이든과 결별한 베토벤은 전술한 요한 셴크를 비롯 음악이론가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이론과 작곡법을 배우고 비인의 궁정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에게 이탈리아 음악양식과 오페라 및 성악곡 작법을 배웠다.

한편 베토벤의 작품 가운데 비인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피아노 3중주 3곡(op.1-1,2,3)의 출판때 하이든은 표지에 '하이든의 제자 베토벤'이라는 내용을 삽입하라는 제안을 한 적이 있는데, 베토벤은 이 제안을 가차없이 일축해 버렸다. 하이든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 베토벤을 낮게 평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해서였다. 당대의 거장 '하이든의 제자'라는 타이틀은 베토벤의 운신에 꽤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인데,[19] 자존감의 사나이 베토벤은 애초에 하이든의 제자 같은 타이틀로 출세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한 하이든은 자신의 2차 런던 여행때 베토벤에게 제자이자 비서격으로 동행하자고 제안했지만 그 전에 사제관계가 끝나버리는 바람에 이 제안도 성사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그냥 파국으로 끝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헤어진 이후에도 다른 스승들의 가르침과 독학을 병행하면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곡수법을 익혔으며, 그로 인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양식을 수립하기 전까지 그의 초기음악에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이나 피아노 소나타, 현악 4중주 등을 분석해보면 하이든의 작곡 방식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어 수제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 비록 스승으로서 하이든은 기대에 못미쳤지만 작곡가로서는 당시에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 필적할만한 롤모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94년 하이든이 2차 런던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베토벤은 자신의 첫 피아노 소나타 3곡(op. 2-1,2,3)을 작곡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이듬해 8월에 하이든이 비인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리히노브스키 공작 저택의 연주회에 참석한 하이든에게 자신의 연주로 이 곡을 들려주었다. 베토벤은 이 소나타를 통해 자신의 발전된 모습을 스승에게 과시하고 싶어 했던 것이며 하이든은 대인배답게 이 소나타에서 드러난 베토벤의 재능과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베토벤을 만날 당시 하이든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대음악가였으며 유럽 각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유명세를 감당하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베토벤처럼 자존심 강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후배 음악가의 비위를 일일이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하이든은 그냥 베토벤에게 중요한 것만 알려주고 세세한 음악공부 같은 것은 스스로 하면서 자신의 제자라는 후광을 입고 운신의 폭을 넓히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반면 베토벤은 하이든의 제자로 출세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자신의 음악적 잠재력을 깨워줄 열의가 넘치는 스승을 원했다. 결국 두 사람의 이런 입장차이가 사제관계의 결렬을 가져온 것.

하이든은 1809년 사망했으니까 베토벤이 자신을 딛고 본격적인 대작곡가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도 생존해 있었다. 그가 1804년 발표된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한데 이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아쉬울 따름.

2.3 중기

에로이카 변주곡(op. 35)과 2번 교향곡(op. 36) 이후 베토벤은 선배작곡가의 그늘에서 본격적으로 벗어나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1815년의 베토벤, 요제프 윌브로드 뮐러

1804년은 베토벤의 음악인생에서 매우 기념비적인 해인데, 바로 자신의 3대 교향곡 중 첫 번째 작품인 3번 교향곡 "영웅"과 피아노 소나타 분야의 한 획을 그은 발트시타인(Waldstein, op. 53) 소나타가 작곡된 것이다. 이 영웅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앞선 두 교향곡에 남아있던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자신만의 음악세계 구축에 성공했다. 기존 교향곡 작곡가들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장대한 전개부를 가진 1악장과 장송 행진곡을 도입한 2악장은 당대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실험이었으며 이 실험은 음악사에서 역대급으로 불릴만한 성취를 거두었다.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달았다가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격분한 베토벤이 "보나파르트"라고 적은 표지를 갈갈이 찢고 "에로이카"(영웅)로 고쳤다[20]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일각에선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쓴 곡이 아니라 어떤 귀족에게서 청탁받아 쓴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영웅 교향곡부터 약 10년간 베토벤은 절정의 물 오른 창작열을 발산해 많은 걸작을 탄생하게 했다. 영웅교향곡을 작곡한 이듬해인 1805년에는 오페라 "피델리오"를 작곡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21] 그 후 괴테의 시에 기초한 시극 "에그몬트", 5번 교향곡 "운명", 6번 교향곡 "전원"과 피아노 협주곡 4번과 제5번 "황제", 바이올린 협주곡 등 다양한 작품이 탄생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음악의 심오함은 공교롭게도 그의 청력 상실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즉, 베토벤이 청력이 악화된 이후로 사람들과 만나 사교를 즐기는 대신 독서와 사색을 즐겼으며 이것이 그의 음악적 깊이를 갖추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 실제로 베토벤은 당시에 청력상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 대문호들의 작품에 빠져 들었고 칸트와 인도 철학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당대의 대시인이었던 괴테나 쉴러의 작품도 열독하였다. 대음악가 답게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승화시킨 것.

베토벤은 이전 작곡가들과는 달리 귀족들에게 후원받았지만 그 귀족들에게 예속되지는 않았고 유럽 각국의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베토벤의 여러 작품의 악보를 인쇄해 판매한 덕에 베토벤은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소위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이 편지의 주인공인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논란 중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불멸의 연인 항목을 참고.

1815년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정세가 안정되었다. 정세가 안정되자 빈 청중의 음악상 유행도 바뀌어서 그 전보다 가볍고 경쾌한 음악이 애호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상 스타일은 이런 추세와는 거리가 있었던 탓에 창작 활동이 잠시 주춤하게 되었으나 그의 음악은 더 원숙해지고 깊은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40대 이후 베토벤은 갈수록 옷차림이나 외모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 심지어 거리의 노숙자와 분간되지 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자제력도 갈수록 상실하여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된 걸 길거리에서 소리를 마구 지르면서 풀거나[22] 종종 집에서 그냥 찬물을 얼굴에 퍼붓곤 바깥으로 나오는 통에 사람들을 멍하게 해 미치광이 취급을 받곤 했다. 한번은 경찰관에 의해 노숙자로 오인받아 체포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자칭 베토벤이라는 노숙자 영감을 미치광이 취급하던 경찰관은 뒤늦게 달려온 경찰서장이 그 사람이 진짜 베토벤이라고 확인하자 데꿀멍했고 베토벤은 경찰서장에게 이렇게 훈계했다고 한다. "베토벤도 못 알아보는 녀석들더러 도둑은 어떻게 알아보라고 거기 세워 놓았소?"

그리고 작곡가·음악가를 대상으로 한 저작권에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신경쓴 선구자로서도 알아준다. 더불어 당시까지만 작곡가들이 귀족들이 대주는 후원금으로 생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인재다.[23] 제 아무리 돈을 줘도 귀족들이 뭐라고 하면 가차없이 쓴소리를 퍼부었고 굉장히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왕족이니 귀족이니 그딴 거 뭔데?"라고 여겼으며 프랑스 혁명도 바람직하게 여겼기에, 숭배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황제가 되자 배신감으로 바치려던 악보("영웅" 교향곡(No.3))의 표지를 수정했다는 이야기가 인정될 정도이며 나폴레옹이 비토리아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공작에게 패배하자, 베토벤은 웰링턴을 찬양하는 "웰링턴의 승리"라는 곡을 만들 정도로 나폴레옹을 증오하였다.[24][25]

베토벤의 저런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굉장히 유명한 일화가 바로 1812년 당시 작가로서 유럽에서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던 괴테와 만난 이야기이리라.[26] 베토벤은 평소 괴테의 글을 좋아했고 괴테도 베토벤의 명성을 잘 알던 터라 둘은 무려 21살 차이에도 즐겁게 대화했지만… 얼마 뒤 거리에서 오스트리아 황족 일행 혹은 어떤 귀족이 나타나자 괴테는 모자를 벗고 물러서서 고개를 숙였는데 베토벤은 모자를 쓴 채로 고개를 뻣뻣이 들고[27] "황족이 뭐 잘났어?" 라는 투로 황족 일행 사이를 거리낌없이 지나갔다. 괴테가 나중에 그걸 뭐라고 하자 실망한 듯이 "당신과 나는 안 맞나 보군요…"라고 고별하고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후일 베토벤 연구에 기여한 막알렉산더 윌록 세이어의 기록을 보면, 괴테도 나중에 그 일화를 회고하면서 베토벤과 자신은 맞지 않는다고 지인들에게 이야기했다고. 즉, 위 일화는 사실에 가깝다.[28]

그런데… 애니메이션 감독이면서 클래시컬 뮤직 마니아로서 책도 여럿 쓴 신동헌 감독이 쓴 책에서도 돈에 유달리 매달리던 음악가로 단연 베토벤이 꼽혔지만, 베토벤이 구두쇠이거나 돈에 미친 건 절대로 아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가면서 집안을 맡을 당시 가난에 시달리던 시절도 있었고 귀가 들리지 않으면서 모처럼 안정되던 음악단 지휘자도 그만 두면서 생활고로 곤란해했기에 저작권에 죽을 힘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돈에 관련된 일화로, 유서를 쓰던 곳으로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안정을 취할 당시 그 지역 작은 시골 악단이 베토벤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지역을 상징하는 음악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그 유명한 베토벤 선생이 오신 걸 듣고 찾아왔다는 것. 다만 워낙에 시골이고 겨우 마을 사람들과 농부들을 이롭게 하려고 연주하는 수준인지라 돈이 조금밖에 없지만 염치불고하고 부탁 한번 드려보고자 찾아왔다고 하자 베토벤은 이런 작은 마을에 음악단이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대단하다면서 내 어찌 그런 여러분 요청을 거부하겠느냐고 작곡까지 헐값에 해준 적이 있을 정도로, 그가 태생적으로 돈에 얽매인 사람은 아니었다. 귀족들에겐 거액을 부르곤 했지만, 그것조차도 많이 준다고 거들먹거리는 귀족들을 보며 코웃음치기 일쑤였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베토벤이 개무시하자 감히 후작인 나를 우습게 보느냐며 화를 낸 어느 귀족에게 차가운 눈으로 한 마디 던졌던 적도 있다. "세상에는 당신 같은 후작은 얼마든지 있으나 베토벤은 이 세상에 나 하나 뿐이오."

이렇게 귀족들을 디스한 에피소드로 유명한 베토벤이지만 실제 베토벤의 귀족들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을 루트비히 (von) 베토벤으로 불렀는데[29] 그는 이런 칭호를 굳이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귀족들의 무위도식과 위선을 혐오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일반 서민의 위치에 놓지도 않았다. 그는 일반 생계활동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과 예술가인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구별했으며 음악적, 예술적 소양도 없는 주제에 돈 좀 벌었다고 깝죽대는 상공업자들은[30] 오히려 귀족보다 훨씬 더 멸시하고 혐오했다.

결국 그의 귀족에 대한 냉소와 멸시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이념적 바탕이나 근대적인 시민의식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라,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조차 얻을 수 없는 자신의 음악적 능력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4 베토벤의 여인들

훌륭한 작곡가가 되면서 그의 연애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너무 길어져서 따로 항목을 만들어 서술한다.

2.5 말년의 베토벤

말년으로 갈수록 베토벤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졌는데 가장 큰 원인은 조카 칼의 문제였다.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자식이 없던[31] 베토벤은 1815년에 사망한 동생 카스파르 판 베토벤의 아들인 칼 판 베토벤의 친권을 놓고 카스파르의 부인과 소송전까지 벌인 끝에 어렵게 칼의 친권 획득에 성공하지만 죽을 때까지 칼과 갈등했다. 자세한 것은 따로 항목을 만들었으니 참고하자.

1823년의 베토벤, 게오르크 발트뮐러

한편 사생활과 별도로 그의 음악은 점점 깊고 심원해졌으며 대위법적인 성향이 강해지게 된다. 여태까지 보기 힘들었던 복잡한 구조와 큰 규모를 가진 대작들이 잇따라 창작되었다.[32] 이 시기 그의 후기 교향악을 대표하는 "장엄미사(Missa Solemness)"와 9번 교향곡 "합창"이 작곡되었으며 피아노 분야에서도 소나타 29~32번, 디아벨리 변주곡과 같은 큰 규모의 작품들이 작곡되었다. 이들은 각 음악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걸작들이다.

합창 교향곡의 초연은 1824년 5월 7일 빈에서 있었다. 그런데 당시 관객들은 두개의 포디움과 두명의 지휘자라는 괴상한 무대를 보아야 했는데, 이는 합창 교향곡의 지휘를 반드시 직접 해야겠다는 베토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였다. 난감해진 극장 측은 결국 빌헬름 움라우프를 보조 지휘자로 무대에 올렸고, 악단원들은 두 명의 지휘를 동시에 보며 연주해 나갔다고 한다. 마지막 4악장까지 끝난 후 베토벤은 청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었고, 알토 가수 웅거가 베토벤를 부축해 돌려세워서 청중의 엄청난 환호를 보게 하자 비로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웅거는 고음 파트가 너무 어려워 베토벤에게 수정을 요청했다가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던 적이 있는 가수였다.

생애 막판에는 교향곡보다 더 위대한 음악으로 찬사받으며 베토벤판 백조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후기 현악 4중주곡이 대거 작곡되었다. 많은 사람은 이 후기 현악 4중주곡을 "현악 4중주의 성서", "인류가 도달한 가장 위대한 음악의 경지"라고 부르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더불어 이 시기엔 돈도 제법 벌었다. 한 번 연주로 엄청난 거액을 받은 것도 이 시절 일이지만 이 와중에도 몸 속에 파고드는 고통 때문인지 베토벤은 종교에 대하여 매우 탐탁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일기장에 교회에 가서 헛소리로 울며불며 기도하느니 작곡하면서 남은 시간을 지내겠다고 쓴 걸 보면,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서도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그걸 극복하려 한 모양.

당시 빈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가 말년의 베토벤이 기거하던 하숙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베토벤은 세빌리아의 이발사같은 좋은 곡을 많이 작곡하라는 덕담을 했다.[33] 후에 로시니는 자기처럼 별볼일 없는 작곡가는 가슴에 훈장을 달고 유복한 생활을 하는데 이 위대한 음악가는 어떻게 저렇게 궁핍할 수 있느냐며 가슴아파했다. 또 후에 로시니는 베토벤을 위해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34]

베토벤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많은 작품을 구상했을 만큼 음악에 열중했다. 영국 필하모니아 협회가 청탁한 교향곡을 일부 작곡하던 중이었고[35] 이 밖에도 레퀴엠과 괴테의 파우스트의 오페라화도 구상되던 중이었다고 하나 모든 구상은 베토벤의 사망으로 결국 구상으로만 남고 말았다. 제자이던 모셀레스의 증언에 의하면 죽기 며칠 전까지도 음악을 구상했다고 한다. 심지어 배에 물이 차오르면서 혼수 상태가 되는 와중에도, 정신이 돌아오면 쓴웃음을 지으며 "괜찮아… 머리에 물이 차서 아무 것도 생각지 못하는 것보단 낫지……"라고 애써 담담히 말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방문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2km도 안되는 거리에 살고 있었지만 소심한 성격 때문에 이 대작곡가를 만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지인들의 주선으로 죽기 직전에야 어렵게 만나게 된 것이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악보를 보고 크게 감탄했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슈베르트 자네를 좀더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자네는 분명 세상을 빛낼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부디 용기를 잃지말게."

그리고 슈베르트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는데,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괴로운 나머지 방을 뛰쳐 나가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36]

1827년 3월 26일에 베토벤은 친구들 및 지인, 제자와 비서 앞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유언"유감인걸, 너무 늦었어.(Schade, zu spät.)"이다. 이것은 임종을 지킨 안젤름 휘텐브렌너의 증언이다. 죽기 전에 쇼트 음악출판사의 출판업자에게서 베토벤이 즐겨 마시던 라임 와인 12병이 선물로 들어온 걸 알려주자 품 안에 있던 베토벤이 허공을 향해 주먹을 쥐며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끝으로 베토벤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와인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도착했다. 휘텐브렌너는 베토벤이 '코미디는 끝났다(Plaudite, amici, comedia finita est)'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이게 좀 더 간지나는지 자주 인용되기는 하지만.

베토벤의 묘비베토벤의 데스마스크

29일에 빈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시민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전한다. 베토벤의 운구하는데 여러 음악가가 선발돼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프란츠 슈베르트도 있었다. 슈베르트의 친구들이 쓴 기록을 보면 슈베르트는 그날 그야말로 종일 울면서 말도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37] 동생 요한은 군중들에게 맞아죽을까 두려워서 나타나지 못했고 조카 칼은 삼촌의 부고소식을 듣고 급히 비인으로 출발했으나 당시의 교통사정 때문에 베토벤의 장례식이 3일 지난 후에야 비인에 도착한다.[38]

여튼 유서에 의하여 베토벤의 그렇게 많지 않은 재산이 칼에게 상속되었다(자세한 것은 아래 조카 칼 항목 참조).

2.6 베토벤의 두 동생 카스파와 요한

1. 첫째 동생 카스파 판 베토벤

베토벤의 첫 번째 동생이자 아래 언급할 칼 판 베토벤의 아버지 카스파 판 베토벤(Kaspar van Beethoven, 1774~1815)은 원래 형을 따라 음악가가 되려고 피아노를 배웠다. 형이 비인으로 떠난지 2년 뒤인 1794년에 카스파도 형을 따라 비인에 와서 음악활동을 한다. 베토벤은 카스파가 빈에 정착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도와주었고 카스파는 피아노 교습으로 돈을 좀 벌었다.
하지만 형만한 재능을 갖지 못했던 카스파는 피아니스트로건 작곡가로건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결국 음악가로의 길을 접고 1800년 경에 비인 재무국의 직원으로 취직한다. 한편 부업 차원에서 형의 음악을 출판할 때 출판사와 악보를 중개하는 역할도 맡았다. 그런데 카스파는 돈욕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형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 작품이나 습작을 허락없이 출판사에 팔아먹다가 형과 사이가 벌어졌으며 형이 지정한 출판사를 배제하고 멋대로 다른 출판사에 악보를 팔아먹었다가 들켜서 얻어맞기도 했다.

카스파는 결정적으로 결혼때문에 형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버리는데, 1806년 평판이 좋지 않았던 요한나 라이스(Johanna Reiß)라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던 것이다. 형은 이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으나 문제는 결혼이야기가 오갈 당시 이미 요한나는 카스파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는 것. 속도위반에 걸려 있던 카스파와 요한나는 루트비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혼할 수 밖에 없었으며 얼마 후에 베토벤의 후반기 인생을 지배한(?) 칼이 태어났다.[39]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요한나의 부친이 부유한 포도주제조업자였기 때문에 요한나는 결혼하면서 꽤 많은 지참금과 부동산을 가져왔으며 카스파는 이 돈과 부동산에서 나오는 임대수입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카스파는 1812년 결핵에 걸렸으며 이듬해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재무국 일도 그만뒀으며 치료비와 생활비를 형 루트비히로부터 원조받아야 했다.

카스파는 죽기 2년 전에 형 루트비히를 아들 칼의 후견인으로 삼겠다는 문서에 서명했고 죽기 직전에는 삼촌과 친모가 같이 칼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칼 판 베토벤 항목에 나와 있다시피 이 유언은 오히려 칼을 둘러싼 삼촌과 친모의 처절한 양육권 싸움의 시발이 되어 버린다.

2. 둘째 동생 요한 판 베토벤

요한 판 베토벤(1776-1848)

베토벤의 두번째 아우인 요한(본명은 Nicolas Johann van Beethoven)은 20살 전후에 돈벌이를 찾아 형이 있던 비인으로 왔으며 여기서 제약법을 배워 약국의 조수로 들어간 후 얼마 후 린츠(Lintz)에 있는 약국을 사서 독립했으나 장사가 안되서 빚만 졌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했고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의 철강[40]이 들어오지 못하자 창문틀이나 자기 집에 있던 쇠붙이를 팔아 적자를 메꿨다. 이후 나폴레옹 군대가 주둔하면서 린츠에 부상병동이 세워졌고 그는 이 부상병동에 약을 팔아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다.[41] 그는 이때 번 돈으로 꽤 많은 부동산을 사들였으며 1848년에 74살로 죽을 때까지 약국을 운영하면서 돈걱정 없이 살았다.

그런데 돈은 벌었지만 그에 걸맞는 교양이나 인성을 갖추지 못한 요한은 적군에게 약을 팔다가 엄청 욕먹은 것을 비롯해서 이래저래 평판이 좋지 않았다. 비뚤어진 얼굴에 음흉한 표정으로 그려진 그의 초상화만 봐도 당시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졸부였는데, 이런 속물적인 태도는 형에게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한 때 생활이 어려워진 루트비히가 요한에게 도와 달라고 했더니 요한은 '형도 돈버는 능력좀 기르세요'라는 식으로 비웃는 투의 거절편지를 쓰면서 편지 말미에는 '땅의 소유자 요한 판 베토벤'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칭호까지 붙여서 보냈다. 이를 읽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루트비히는 동생에게 '네 돈은 필요 없다. 네 충고는 더욱 필요 없다. 두뇌의 소유자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이렇게 답장하기도 했다.

카스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요한도 결혼문제로 형과 사이가 더욱 나빠졌다. 요한은 1812년 자신의 하녀였던 테레제 오베르마이어(Therese Obermeyer)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베토벤은 근본도 없는 천한 여자가 '베토벤'이라는 성을 갖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이 결혼에 결사 반대했다. 물론 요한은 형이 결혼까지 상관하지 말라며 무시했다. 그러자 베토벤은 동생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휴양차 머무르고 있었던 테플리츠를 급히 떠나 린츠까지 찾아와 결혼을 뜯어말렸다. 요한의 집에서 둘은 격렬하게 다투다가 급기야 베토벤이 요한을 때리는 바람에 주먹싸움까지 벌이게 되었으며 테레제가 신고한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까지 빚어졌다. 분을 삭이지 못한 형 베토벤은 결국 경찰에 의해 요한의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끝내 요한은 테레제와 결혼을 강행하였고, 이 일로 형제간에는 평생 앙금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카스파 못지 않게 요한도 이 결혼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그나마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요한의 아내 테레제는 아이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드세서 평생 남편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이래저래 베토벤가의 3형제들은 모두 결혼과는 인연이 없었던 셈.

게다가 요한은 형과 티격태격하면서도 자신이 대작곡가 베토벤의 아우라는 점을 사업에 자주 써먹었고 가끔 형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형의 악보를 챙겨서 멋대로 처분하는 짓도 저질렀다. 당연히 베토벤과 베토벤의 주변 사람들은 이런 요한의 속물근성을 거세게 비난했으며 그의 평판은 점점 떨어지다 못해 나중에는 베토벤의 제자와 지인들의 분노가 무서워 형의 장례식 참석조차 포기해야 하는 수준까지 내려갔다. 요한이 만약 참석을 강행했다면 진짜 뭇매를 맞았을 지 모를 정도로 당시 분위기가 험악했다.

하지만 베토벤과 요한은 평생 으르렁댔으면서도 절연까지 하지는 않았으며 베토벤이 조카 칼의 양육권을 획득한 후에는 종종 요한의 별장에서 칼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특히 루트비히가 죽기 얼마 전에는 동생과 구원(舊怨)을 털고 화해했다고도 한다. 지인들이 인정을 안해줘서 문제였지.

한편 카스파나 요한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과 루트비히와의 불편한 관계는 베토벤의 자칭 비서였던 쉰들러가 과장/왜곡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쉰들러가 베토벤 일가에게 푸대접 받은 원한으로 조카 칼과 베토벤의 동생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증언했다는 것. 후술하는 쉰들러라는 인간의 수준을 보면 이게 결코 과언이 아니다.

2.7 베토벤의 조카 카를 판 베토벤

카를 판 베토벤(1806-58)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초상화

카를은 베토벤의 인생 후반기에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따로 항목을 만들어 서술한다.

베토벤은 1815년 자신의 첫째 동생인 카스파 판 베토벤이 결핵으로 41세에 사망하자 카스파의 아들이자 자신의 유일한 조카인 카를 판 베토벤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을 획득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 이유는 첫째, 베토벤 본인이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자식이 없었으며 카스파가 죽었을 당시 둘째 동생인 요한마저 자식이 없는 상태였다.[42] 결국 베토벤 가문을 이어갈 유일한 후손은 카스파의 아들 카를 판 베토벤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

둘째 이유는 베토벤은 카스파의 아내이자 칼의 엄마였던 요한나 판 베토벤을 거의 창녀로 멸시했으며 칼이 그녀 밑에서 자라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편지에서 자주 요한나를 사악한 여자로 비난하면서 밤의 여왕(모짜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배역을 빗댄)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물론 베토벤의 생각이 다소 극단적이긴 했지만 이게 과언만은 아닌게, 실제로 요한나는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몰래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으며 카를이 카스파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로 평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요한나는 아들의 양육권을 놓고 법정 다툼을 하는 와중에도 종 주조업자와 눈이 맞아 그의 사생아(여아)를 낳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베토벤 입장에서는 당연히 요한나가 베토벤 가문의 유일한 후손을 제대로 키울 능력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베토벤은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카를을 보호하기 위해 요한나를 상대로 카를의 양육권을 찾는데 주력하게 된다. 당연히 요한나는 반발하였고 결국 베토벤과 요한나는 카를의 양육권을 두고 치열한 소송전을 벌이게 되는데, 베토벤의 카를에 대한 집착은 점점 심해져서 거의 편집증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 소송[43]은 카를이 대략 10대 초반일 때부터 시작해서 거의 4년이나 끌었으며 이 때 카를은 어머니의 부정한 행동에 대한 증언을 강요받고 몇 시간씩 법정 관리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했다. 어린 카를이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결국 어렵게 양육권을 획득한 베토벤은 카를이 어머니 요한나를 만나는 것을 전면금지했다.[44] 하지만 괴팍하고 고집불통인 삼촌은 카를에게 부정한 엄마 이상으로 견디기 힘든 존재였다. 자식을 키워본 적이 없었던 베토벤은 제대로 양육하겠다고 조카를 친모로부터 무작정 뺏어왔지만 막상 제대로 가르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베토벤은 권위주의적이고 툭하면 화를 내는 데다 대화가 아니라 명령으로 자식을 가르치려고 하는 빵점짜리 아빠였다.[45] 삼촌의 집착을 견디지 못한 카를은 자주 엄마를 만나러 갔으며, 이에 분노한 베토벤은 경찰을 동원해서 카를을 요한나의 집에서 강제로 데려오기도 했다.

베토벤은 카를이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장차 자신처럼 뛰어난 음악가가 되길 바랬다. 하지만 카를은 삼촌이 없는 돈을 쪼개서 보낸 사립학교에서 번번이 문제를 일으켜 퇴학을 당했고 음악을 가르치려 해도 그에 대한 대한 흥미나 재능이 전혀 없었다. 카를은 1824년 빈 대학교에 떠밀리듯 입학하자마자 자퇴하고 군대를 가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베토벤은 반대했고 2년간 이 문제를 놓고 다투다 점점 격해져서 둘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았으며 급기야 카를이 권총 자살을 시도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다행히 총알이 빗나가서 카를은 찰과상 밖에 입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 한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이후 잠시 베토벤 곁에서 조용히 지내던 카를은 베토벤의 생애 마지막 해인 1827년 결국 군입대를 강행하고 보헤미아의 이글라우(Iglau)로 떠나버린다. 이미 중병에 걸려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던 베토벤은 크게 상심하였으며 카를이 떠난 후 약 두달 후에 사망하고 만다.[46] 베토벤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를은 즉시 빈을 향해 떠났지만 빈과 이글라우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장례식을 치룬지 3일 후에야 빈에 도착했다.

삼촌은 자신이 남긴 모든 재산을 카를 앞으로 남겼고 [47] 아직 나이가 어렸던 카를은 앞서 양육권 소송 당시 자기 엄마(요한나)의 변호인이자 그녀의 친척이었던 야콥 호셰바(Jakob Hotschevar)가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다행히 호셰바는 신사적인 사람으로 카를과 카를의 재산을 잘 돌봐줬다고 한다.

이후 카를 판 베토벤은 5년간 군대에 있다가 제대 직후 카롤리네 나스케(Caroline Naske)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둘은 1남 4녀를 낳았는데 그래도 생전의 자신의 삼촌이 그리웠는지 자신의 독자에게 루트비히라는 이름을 붙였다. 칼 판 베토벤은 52살에 간암으로 죽었으며 아내는 33년이나 더 살았다.

카를의 아들 루트비히(1839~1916)는 나중에 자신이 베토벤의 직계 후손인 양 뻥치면서[48] 자신의 큰할아버지 루트비히의 작품으로 위조한 악보 따위를 여러 곳에서 팔아먹는 추태를 저질렀다. 후에 사실이 밝혀져 제대로 욕을 처먹자 미국으로 도망치듯 이민해서 거기서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지만 링컨이 "베토벤이 누군데?" 할 정도로 당시 미국에서는 베토벤이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탓에 큰 돈은 벌지 못했다고 한다.[49] 그렇다고 그가 사기만 치고 다녔던 것은 아니고, 미국 이주 후 철도 회사(Michigan Central Railroad Co.)에 근무면서 나름 성실하게 살다가 피아니스트인 마리아 니체(Maria Nitshe)와 결혼하여 아들 카를 율리우스(Karl Julius Beethoven)를 두었다. 이 줄리어스가 1917년 47살로 자식없이 죽음으로서 베토벤의 가계는 여기서 끝난다.[50]

카를의 엄마 요한나는 83세까지 장수했으며 심지어 아들 카를보다도 10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 베토벤 사망 후 그녀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줄어든 탓에 말년이 어땠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베토벤의 사망 이후에도 딱히 재혼을 하거나 정착하지는 못하고 불우하게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카를의 이부(異父) 여동생이자 요한나의 사생아인 루도비카 요한나(Ludovika Johanna)는 대략 성인이 될 때까지 요한나와 함께 살았던 것 같지만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미국의 베토벤 연구가 메이너드 솔로몬은 베토벤이 요한나를 멸시한 이유가 일종의 애증때문이라는 가설을 제기한 적이 있다. 즉, 카스파가 사망하고 나서 베토벤이 요한나에게 들이댔으나 요한나가 거절하자 복수심에 조카 카를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소문은 베토벤 당시에도 있었으며 한술 더 떠서 카를이 사실은 베토벤의 조카가 아니라 요한나와 베토벤의 친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51] 솔로몬의 가설은 이런 풍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영화 '불멸의 연인'도 이 풍문들을 낭만적으로 각색해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소문 이상의 증거가 전혀 없는데다 요한나가 죽을 때까지 베토벤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지 않고 그에 대해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던 점, 베토벤이 기본적으로 음악적 소양이 없는 여자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감안했을 때 현실성이 별로 없다. 그러니 솔로몬의 가설이나 영화 불멸의 연인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냥 재미로 보자.

2.8 베토벤의 자칭 비서 안톤 쉰들러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 1795-1864)

안톤 쉰들러는 베토벤의 제자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 쉰들러는 베토벤 숭배자를 자처하면서 그의 (1822년에서 1824년 26년에서 27년에 걸쳐) 비서로 활동하던 음악인 중 한 사람이다. 거의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애원하여 베토벤의 비서로 일했는데 베토벤도 참 모를 사람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현재 쉰들러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지 않은데, 그가 순수하게 비서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토벤의 유명세를 이용해 한몫 잡아보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협잡꾼이라는 것. 실제로 그는 베토벤 사후 이런 저런 유품을 미리 챙겨서 한 몫 벌었으며 베토벤 전문가로 행세하면서 각종 정보를 언론이나 연구자들에게 돈받고 팔아먹었다.무엇보다 공책 400~500권 분량으로 추정되는 베토벤의 대화록[52]을 모조리 가로채서 137권만 남기고 그걸 자기가 팔아서 엄청난 이득을 취하는 바람에 베토벤의 제자와 지인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게 된다. 베토벤의 제자 칼 체르니는 안톤 쉰들러에게 나머지 대화를 적은 공책을 어찌했느냐고 하자 답변하지 않았는데 죽을 때에서야 그 수백여 권 공책을 몽땅 태워 버렸다고 밝혔다.[53]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Alexander Wheelock Thayer)

그 덕분에 베토벤의 제자들과 지인과 딸로 추정되는 사람까지 찾아가서 베토벤 연구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1817~1897)는 안톤 쉰들러가 베토벤이 대화를 적은 공책 수백여 권을 태워 버려서 베토벤의 숨겨진 이야기는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고 탄식했다. 안톤 쉰들러는 베토벤 연구가와 제자들의 분노를 뒤로 하고 그럭저럭 잘살다가 죽었는데 교묘하게도 안톤 쉰들러가 베토벤의 제자라거나 심지어 친구(...)라는 잘못된 정보[54]위인전에 실리기도 했다.

한편 어떤 베토벤 전기학자들은 쉰들러가 많은 부분을 왜곡했다는 의심을 하고 있으며 이는 결코 괜한 의심이 아니다. 전술했다시피 그는 베토벤의 혈육들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많은 베토벤의 유명한 일화가 쉰들러의 증언에서 나왔는데 일부 증언들은 사안을 이슈거리로 만들기 위해 내용을 각색했거나 정황상 일어나기 어렵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어찌됐건 그가 중요한 베토벤의 목격자이자 증언자[55]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리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게 문제.

3 베토벤이 남긴 화제

음악계의 본좌답게 그가 남긴 화제거리도 굉장히 많다.[56] 아는 분들이 있다면 계속 추가 바란다. 에피소드 모집합니다

1. 베토벤의 숨겨진 딸?

베토벤의 일생이 본격 연구되면서 베토벤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떡밥이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데, 최근에 그에게 친딸이 있었다는 주장이 점점 유력해지고 있다. 바로 베토벤과 요세피네 폰 브룬스비크 사이에서 미노나 폰 슈타켈베르크라는 딸이 태어났다는 것.[57]

미노나 폰 슈타켈베르크(Minona von Stackelberg). 미노나와 30대의 베토벤의 초상화를 비교해보면 광대뼈와 작은 입술, 꽉 닫은 입, 아래쪽으로의 응시한 눈이 닮았다. 하지만 정말로 베토벤의 사생아인지는 알 수 없다.

1812년 말 요세피네와 베토벤은 테플리츠에서 확실히 만난 적이 있으며 둘째 딸을 낳은 이후 슈타켈베르트과 일절 동침하지 않았던 요세피네였기에 이 미노나는 베토벤의 자식이 아니냐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다.[58] 그러나 베토벤은 죽을 때까지 미노나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몰랐는데 요세피네가 이 사실을 철저하게 숨겨왔기 때문이다. 요세피네가 죽게 될 때에서야 비로소 딸에게 이런 사실을 고백하였지만 파장을 우려하여 세상에는 일절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혔다가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를 위시한 많은 베토벤 연구가에 의하여 비로소 이런 의혹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유전자 검사해 보면 안되려나?

현재까지도 미노나가 정말로 베토벤의 딸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 미노나는 작곡이나 피아노 연주에 소질이 있었다고 하지만 특별히 전업음악가로 활동하지는 않았으며 1898년 85살의 나이로 죽었다. 베토벤 연구가 세이어가 1884년에 미노나를 직접 만났을 당시, 그녀는 자신이 베토벤의 딸이라는 사실을 매우 자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요세피네의 언니 테레제 브룬스비크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주장은 현재까지는 풍문 이상의 근거는 없다.

2. 베토벤의 사인은 매독인가 납중독인가

베토벤의 사인, 그리고 귀머거리가 된 원인은 당시에 창궐하던 매독 때문이라는 설이 정설이었는데 머리카락을 분석한 결과 당시 독일 수도관의 주재료였던 중독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 납중독이 확실한 사인은 아니라는 반론도 많다. 그 외에도 발진티푸스, 면역 장애, 손거스러미라는 설도 있다. 가장 독특한 가설은 베토벤이 잠에서 깨려고 찬물에 머리를 담그는 버릇이 있었는데 수도관의 재료인 납이 물에 많이 녹아 있었기에 이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것이다. 해부 도중 밝혀진 바로는 과음으로 말미암은 손상이 심했다고 한다. 만년에 황달로 고생한 것을 보면 과음으로 인한 간손상이 분명 그의 사망에 일정부분 원인제공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3. 메모광 베토벤

청력장애에 시달렸던 탓인지 꽤나 메모광이었으며 악상이 떠오르면 늘 메모했는데 정작 악보는 별로 쓴 적이 없다고 한다. 주변에서 "왜 많이 메모하는데 악보는 별로 안 쓰나요?" 그러자 나온 대답이 "나는 한 번 메모하면 다 외우니까 쓸 필요없다." 흠좀무. 베토벤이 자주 휴가를 보냈던 어느 여관에서는, 베토벤이 왔다 갈 때마다 악상을 메모한 문짝이나 벽지, 식탁보 등을 수집가에게 팔아서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나.

베토벤의 수많은 명작은 오히려 베토벤이 귀가 들리지 않던 때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더 경이롭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이룩한 고전이 될 만한 내용이나 의의가 있는 형식미에 자신만의 독창성을 띤 강인과 힘찬 역동성, 열정을 결합하여 위대한 음악계를 창조했다. 오늘날에도 베토벤의 음악은 베토벤의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열정과 감동을 환기하고 음악을 향한 열정으로 생활의 온갖 역정을 극복한 베토벤의 생애도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선사한다.

그리고 가계부를 썼던 몇 안 되는 음악가 중 하나다. 하이든과 만나서 핫초코와 커피를 마셨는데 비용은 베토벤이 부담했다는 기록이 있다.


4. 천하의 악필 베토벤

더불어 악필로서도 명성이 높다(...). 베토벤가 쓴 편지나 일기나 기록도 대체 무슨 글씨인지 몰라서 연구가들을 애먹이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오죽하면 이 악필이 곡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Fur Elise)’는 본래 ‘테레제를 위하여(Fur Therese)’였다. 출판사 담당자가 ‘테레제’를 '엘리제'로 오인했다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베토벤을 다룬 정보는 상당수가 알려지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공책을 줘서 대화 내용을 적게 하여 그걸 보고 대화했다.[59]

이런 공책이 400권에서 600권이 넘는다고 알려졌지만 전술한 안톤 쉰들러라는 인간 때문에 137권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행방불명된 상태.

5. 베토벤의 생가.
시내에는 베토벤의 생가가 아주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게 사실 19세기에 한차례 헐릴 뻔하다가 그 집 1층의 술집 단골들(…)의 주도로 살아 남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술집 같은 곳은 없다. 생가가 보존된 덕분에 베토벤이 22살까지밖에 살지 않은 본은 지금도 베토벤을 열심히 팔아먹는데 베토벤이 일생 대다수(35년)를 지낸 오스트리아 도, 빈이야말로 베토벤이 일생을 대부분 지내면서 많은 작품을 창작한 진정한 고향이라면서 본을 까면서 베토벤이 마지막을 보낸 집을 베토벤 박물관으로 만들어 전시한다.

어차피 베토벤이 거쳐간 곳은 모조리 베토벤의 이름을 팔아 명소를 만드는 분위기고[60] 그가 손가락이라도 건드렸던 물건들은 모조리 경매시장에서 아주 인기가 좋은 고가의 기념품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굳이 이 두 도시의 알력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만큼 베토벤이 유명하다는 뜻이고 또 유명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니.


6.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베토벤빠 로맹 롤랑.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1866~1944)은 베토벤을 매우 존경하여 베토벤을 연구한 책인 '베토벤의 생애'[61]까지 썼지만, 이 책은 베토벤을 과다히 미화해서 호불호가 갈린다. 참고로 로맹 롤랑은 이 책에서 "신이 벌인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큰 잘못은 바로 베토벤이 소리를 못 듣게 한 것이다!"라고 썼다. 이 외에도 로맹 롤랑의 명작 소설 중 하나인 '장 크리스토프' 역시 베토벤을 모델로 했다.
반면 독일 음악가인 막스 레거(1873~1916)는 베토벤을 부풀려진 음악가라고 혹평했다. 책에서도 "베토벤이 귀가 안 들렸다면 이렇게 평가받았을까?"라고 주장했다가 로맹 롤랑을 비롯한 베토벤 매니아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던 것은 당연지사. 하루는 어느 애송이 피아니스트가 막스 레거 앞에서 연주했는데 연주가 끝나자 "베토벤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가운데 한 사람의 흉상을 피아노에 올려놓고 싶습니다. 어디가 나을까요?"라는 질문하자 막스 레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길. "베토벤이나 올려놓으라고. 베토벤은 귀가 막혀서 못 들을 테니까." 즉 연주 솜씨를 깐 거다.


7. 시대연주의 어려움
베토벤 덕분에 고전 악보를 그대로 재현하는 시대연주가 어렵기로 유명해졌다. 베토벤은 메트로놈을 써보고 거기에 매료되서 자신의 악보에 메트로놈 박자수를 일일이 지정해 놓기도 했다. 문제는 그 연주 속도가 일반으로 알려진 빠르기 2배에서 3배였던 탓에... 흠좀무.[62]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피아니스트 임현정이 EMI와 계약을 맺고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전집을 냈는데, 이 분의 연주 취지는 최대한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겠다는 것. 그래서 곡의 순서도 1번부터 시작하지 않고 연주속도도 베토벤의 지시속도를 존중해서 굉장히 빠르다. 전집을 수록한 CD 수가 8장으로 최근 연주자들이 10장 정도에 담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편.[63] 문제는, 이런 급속한 연주조차도 베토벤이 지정한 빠르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 굳이 작곡가의 뜻에 맞추려면 그냥 2배속으로 듣자

한편 즉흥연주의 달인이었던 베토벤은 피아노로 카덴차를 연주할 때 너무 심취한 나머지 예정 시간을 훨씬 넘기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때가 잦았다고 한다. 심할 때는 1시간 이상 연주해 동료 연주자들이 기다리다 지칠 정도였다고.


8. 연주속도는 빠르지만 작곡속도는 늦었던 베토벤.

앞서 베토벤이 직접 지정한 연주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빠르다는 일화를 소개했는데, 이와 달리 작곡속도는 당대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늦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당대 다른 작곡가들 대비 작품수도 상당히 적은 편. 특히 공연에 맞춰 작품을 의뢰받은 경우 공연 전날 완성된 악보가 도착하면 다행인 수준이었으며 공연당일에 즉흥연주로 때우고 뒤늦게 악보를 완성해서 출판하거나 아예 공연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곡이 미완성으로 남아버리기도 했다. 이는 그의 완벽주의 기질도 한몫 했지만 기본적으로 치밀한 전개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법 스타일상 당대의 일반적인 작곡가들처럼 양산형으로 곡을 쏟아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토벤은 당시의 일반적인 작곡가들의 작곡속도에 맞춰진 공연 일정을 따라가지 못해 애를 많이 먹었으며 많은 작품이 공연 직전에야 완성되었던 탓에 연주자들은 제대로 리허설도 해보지 못하고 공연을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게다가 연주하기 쉽기라도 하면 그나마 나을텐데, 연주기교는 뭣같이 어렵고 작곡가는 요구사항이 많고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연습조차 해보지 못하고 공연을 해야 했으니...... 연주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상당히 많은데 가장 처절한 에피소드로 피아노 협주곡 3번의 초연이 있다. 초연 당시 베토벤이 직접 피아노연주를 맡았는데, 초연시까지도 피아노 파트가 제대로 완성되지 못해서 악보에 대략적인 선율과 중요한 부분만 적어놓고 상당 부분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다고 한다. 나중에 출판된 피아노 협주곡 3번의 피아노 파트는 당연히 초연시의 그것과 많이 달라졌다고. 그리고 그가 손댄 오페라는 피델리오를 제외하고 모두 시작단계에서 중단되어 버렸는데, 여기에는 느린 작곡속도도 한몫 했다. 그나마 피델리오도 몇번이나 대폭적인 개작을 한 끝에 간신히 공연되었을 정도.

9. 정치적으로 악용된(?) 베토벤
후대에 베토벤의 음악을 정치상 이용한 집단이 있는데 바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을 독일인들의 베토벤 음악 애호를 이용해 베토벤 찬양으로써 독일의 민족주의를 고취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여러 곡이 '독일 민족의 우월성과 단결'이란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9번 교향곡의 합창의 순수한 휴머니즘적인 가사를 제멋대로 왜곡해서 이 가사가 게르만민족의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는 헛소리를 해댔다. 독재와 권위주의를 혐오하던 베토벤이 이 사실을 알면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 당연히 2차 대전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패망한 후 이런 주장들은 금세 사라져버렸고 유태인을 혐오한 전과가 있는 바그너랑 다르게 어떤 비난도 듣지 않았다.[64]

10. 공포스러운 얼굴
얼굴이 보다시피(…) 포스가 느껴지다 못해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인지라 음악실에 걸린 베토벤의 초상화는 학교와 관련된 괴담의 단골이다. 심지어 베토벤에게 수업받은 체르니조차 베토벤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데꿀멍하고 울었다고 한다.

이게 반영된 학교괴담베토벤의 망령은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은 사람을 끝까지 추적하며 엘리제를 들려주는데[65] 그걸 4번 이상 들으면 죽고 하는 게 스토커 이상이라서 나해미도 반쯤 정신이 붕괴될 뻔했지만 낭만클럽에서의 베토벤 초상화는 피아노 귀신을 진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개구리 중사 케로로 중 케로로 소대가 킷쇼 학원의 7대 괴담을 연기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중 <음악실의 움직이는 초상화>를 연기했던 기로로는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베토벤 초상화를 보고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지 마" 하며 역으로 자신이 공포에 질렸다.


11. 음식 취향
평소 미식가였다. 자신이 고용한 요리사의 요리가 미흡하자 요리사를 해고하고 자신이 직접 쇠약한 몸을 이끌고 요리했다고 한다. 간단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먹고, 값 비싼 와인을 마셨다. 건강이 나빠지고 난 후 설사로 고생도 했고 배가 점점 불러와 복대를 하고 다닐 정도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점심 때 계란 반숙 비슷한 음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와인만큼은 마셨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맛있는 요리를 먹는 것으로 투병 생활에 대한 위안을 찾았다. 식사 후에는 촛불의 심지를 자르고 시커멓게 그을린 가위로 이를 쑤시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12. 형편없는 요리사
한번은 베토벤이 친구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베토벤이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해서 초대한 것이었는데 베토벤의 기행을 잘 아는 친구들은 마지못해 초대에 응했다. 역시 베토벤은 친구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까맣게 타 버린 구이, 묽은 수프, 익지 않은 야채로 차려진 식탁에서 친구들은 머뭇거렸지만 베토벤은 혼자서 황홀한 표정으로 정말 맛있게 식사를 즐겼다. 친구들은 ‘형편 없는 요리사’라는 별명을 베토벤에게 붙여 주었는데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이 별명으로 서명을 했다고 한다.


13. 커피 애호가
와인만큼이나 커피를 좋아했다. 과거에 널리 사용되었던 퍼콜레이터라는 커피추출주전자를 이용해 직접 추출하여 아침형 인간답게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작곡을 시작하며 아침식사 때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추출할 때도 작곡을 할 때처럼 신중을 기해서 커피한 잔에 원두 낱알 60개를 정확히 세어 넣었다. 손님이 오게되면 온 손님의 수만큼, 커피 낱알을 일일이 세어 커피를 추출했다. 링크 그의 친구인 카를 마리아 폰 베버는 베토벤의 방 안이 온통 악보와 옷으로 어질러져 있으나, 테이블에는 악보 용지 한 장과 끓는 커피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14. 베토벤의 IQ
베토벤의 IQ를 추정한 수치는 140정도로 높은 지수를 가지고있지만 수리계산력은 0점인 듯하다. 그 예로 베토벤은 가계부를 직접 꼼꼼하게 적었는데, 169 곱하기 3을 169+169+169 하는 식으로 계산하는 뿐만아니라 그 합도 틀렸다.
사실 그는 자신을 음악신동으로 포장하려고 했던 아버지 때문에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따로 직업교육이나 사회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숫자계산과 같이 실생활에 필요한 실무나 인간관계는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66]

그나마 19살 때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1762-1823) 백작[67]의 주선으로 본대학에서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과목들을 청강하면서 무식쟁이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마침 이 해(1789)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해였고, 그 덕분에 그는 대학에서 프랑스 혁명의 새로운 정신과 칸트로 대표되는 계몽주의, 실러의 예술 사상 등 심오한 인문학을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규교육이었던 이 대학 청강은 다소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평생 그가 동경하고 그의 음악의 기반이 된 인류애나 진리의 승리와 같은 이념적 바탕을 마련해준 계기가 되었다.

칸트 철학에 심취해 "하늘엔 빛나는 별. 가슴엔 실천이성"이라는 칸트의 명언을 어디엔가 써놓았다.

유품들 중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와 함께 그리스 비극호메로스의 영웅 서사시, 플루타르코스의 열전인 플루타크 영웅전과 안경[68]이 있다.


15. 피아노 레슨
베토벤은 신세진 귀족들의 자제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곤 했는데, 맘에 안들면 30cm자로 손등을 내려치기도. 심하면 어깨를 물어 뜯은 적도 있다한다. 수아레스? 요하임이란 독일 음악학자의 견해로는 베토벤이 자기가 어렸을때 혹독하게 당한 체험을 복수하는 것이라고. 그나마 유달리 친절히 대해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피아노 교본 체르니로 유명한 카를 체르니다. 체르니는 뛰어난 피아노 실력이 있었지만 너무 내성적인 성격이라 연주회를 거의 갖지 않았다고 한다.


16. 스트레스 해소
베토벤의 하숙집 주인들은 위대하지만 괴팍한 작곡가를 하숙생으로 들이면서 여러가지 고충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틈만 나면 들려오는 베토벤의 괴성과 무언가 부숴지는 소리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작곡 작업이 잘 안 풀리면 그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괴성을 지르거나 책상을 두드리고, 혹은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심지어는 벽에 머리를 박거나 그냥 물을 한가득 머리에 확 뿌려 열을 식혔다. 문제는 그 빈도가 너무 잦았다는 것. 따라서 다른 방에 거주하고 있던 집 주인이나 다른 하숙생들이 밤에 베토벤의 괴성과 소음에 의해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하소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물을 하도 뿌리니 결국 물이 새는 통에 참다 못한 집주인이 버럭거리며 내쫓은 적도 있다.[69]


17. 잦은 이사
빈에서 살던 35년동안 무려 40번 이상을 이사다녔다고 한다. 이는 위에 나온대로 저런 민폐를 끼치니 화가 난 집주인이 내쫓아버린 경우가 많았다. 황당한 것은 때론 집주인이 너무 잘해줘서 자신이 부담간다고 그냥 이사가던 적도 있다. 그래서 아쉬워하는 집주인에게 사인을 해주던 적도 있는데 위에 서술되듯이 베토벤이 죽고나서 전설이 되며 이런 사인을 거액에 파는 경우도 있었다고. 1970년대에 나온 일본 위인전 만화 베토벤(위에 나온 1981년 삼성서적 베토벤 만화가 이걸 그대로 표절한 거다.)에서 피아노를 큼직한 짐마차에 통째로 놔두고 이사가는데 그 짐마차 위에 둔 피아노에서 작곡하는 베토벤을 그리기도 했다. 물론 이건 만화 속 이야기이고 실제로 이런 적은 없다.


18. 가정부들
그리고 베토벤 본인이 쓴 일기장을 보면 집안일을 하던 가정부들에게도 두어 달을 못 견뎌 그만두게 할 정도로 깐깐하게 굴었다고 한다. 가정부가 청소하다가 어디 한군데라도 대충 청소했다 싶으면 종일 잔소리를 했던 건 기본이다. 그래도 베토벤같은 유명인을 자주 볼 수 있는 직업이라면 나름 명예로운(?) 자리였을텐데, 이게 독이 든 성배였던 셈.

4 베토벤의 작품세계

베토벤 작품의 특징은 한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지만, 일단 그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양식적인 특징은 견고한 구축력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악상 전개능력이다.

베토벤은 선배인 모차르트나 후배인 슈베르트처럼 머리속에서 쉴새 없이 흘러나오는 악상과 멜로디를 옮겨 적었던 작곡가들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선율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곡가가 아니라 선율을 이끌어 나가는 측면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한 작곡가이다. 그래서 베토벤 음악의 주제 자체는 의외로 소박하고 단순한데, 이런 단순한 선율이나 악상, 심지어 음표 몇 개 수준의 주제를 가지고도 큰 규모의 교향곡이나 협주곡, 변주곡을 작곡했을 정도로 주제를 변화시키고 전개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베토벤이 선율미가 없는 작곡가라거나 딱히 전개가 필요하지 않은 짧은 음악을 못썼다는 말은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자.[70]

여튼 베토벤의 음악이 이런 튼튼한 구축력을 가진 덕분에 교향곡이나 협주곡 소나타 등의 분야에서 긴 연주시간과 큰 악기편성을 갖춘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3번, 9번 교향곡이나 장엄미사와 같은 장대한 작품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그 긴시간 동안 계속 연주가 이루어지는데도 지루하거나 장황함을 느낄 틈이 없다. 쉴 새 없이 주제가 변화하고 분위기가 바뀌고선율을 연주하는 악기가 바뀌고 곡조가 바뀌기 때문이다. 물론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작품을 들어봐도 그냥 소음에 불과하겠지만(...)

낭만주의 이후 등장하는 큰 규모의 작품들, 특히 연주시간이 1시간이 훌쩍 넘는 장대한 교향곡의 원조가 바로 베토벤이다. 베토벤의 등장 이후 후배 작곡가들은 예외없이 그를 철저하게 연구하였고, 또 벗어나기 너무나 어려운 베토벤의 영향력을 어떻게 극복하고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 것인지가 지상과제가 되었다.

한편 베토벤의 작품은 후기로 갈수록 화성 위주의 비인 고전파 양식에서 벗어나 대위법적인 경향이 두드러지며, 즉흥곡/환타지풍의 변주양식(주제의 주선율이나 화성 등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변주방식) 도 자주 활용되었다. 그의 피아노 소나타 29번 '하머클라비어'의 마지막 4악장의 푸가나 장엄미사의 크레도/대영광송 및 생애 최후기에 작곡된 현악사중주 등에서 베토벤식 대위법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이 베토벤의 대위법은 바흐처럼 엄격한 성부의 맞물림을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헨델식으로 각 성부가 상당히 자유롭게 변화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71] 또한 반골기질로 가득찬 작곡가답게 음악적 효과를 위해 대위법 규칙을 의도적으로 많이 벗어난 전개방식도 자주 보여준다.[72] 같은 푸가라도 바흐의 푸가와 베토벤의 푸가가 많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73]

4.1 베토벤 작품의 분류법

너무 심하게 중요한 작곡가답게 베토벤의 작품 분류는 여러가지가 있고 분류의 근거도 복잡하니 그의 음악에 대해 알아볼 때에는 다음 사항을 참고하자.

1. opus(op.)
베토벤의 작품 중에 출판되어 공식으로 작품번호(opus)가 붙은 작품은 op.라는 기호와 작품번호를 붙여서 표시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베토벤의 유명한 작품 또는 중요한 작품 대부분은 당연히 이 공식 작품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베토벤 생전에 부여된 이 공식 작품번호는 135번까지 있다.[74] 하지만 실제 곡 수는 135개보다 훨씬 많은데 그 이유는 한 작품번호로 두개 이상의 곡을 묶어서 출판한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품번호 1번에는 세 곡의 피아노 삼중주가 있고 2번에는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가 있다. 특히 작품번호 108의 스코틀랜드 가곡은 무려 25곡이 수록되어 있다!![75]


2. WoO
공식번호가 붙은 작품 외에도 공식 번호가 붙지 않은 작품들이 다수 있는데 이는 WoO로 분류한다.

이 WoO라는 기묘한 기호는 독일어로 Werke ohne Opuszahl(Works without Opus number)의 이니셜을 따서 만든 것으로 말 그대로 Opus 번호가 안붙은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 WoO 계열 작품들은 베토벤 생전에 출판된 것도 있고 출판되지 않은 것도 있고 미완성이거나 스케치로 남은 작품들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이 WoO는 공식목록이 아니기 때문에 학자마다 조금씩 목록이 다른데, 현재는 주로 1955년에 수립된 킨스키 목록(Kinsky catalog)을 참조한다.

WoO 계열의 작품들은 아무래도 작곡자나 출판사에서 공식번호를 붙이지 않은 만큼 opus 계열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는 편이며 연주 횟수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하지만 WoO 라고 해서 무조건 가볍게 여기면 안되는 것이 WoO 59의 바가텔(엘리제를 위하여와)과 같은 유명한 작품이나 WoO 80의 32 변주곡처럼 중요한 작품들도 꽤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변주곡이나 칸타타를 비롯한 몇몇 장르는 양적인 측면에서 공식발표된 것보다 WoO 쪽에 압도적으로 많다.

한편 WoO 계열의 작품에서는 악기/기법 등에 대한 베토벤의 여러가지 음악적 실험이 나타나거나 독창적인 양식을 확립해 나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76] 이들은 연주가치와 별도로 베토벤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들이기도 하다.


3. Hess
작곡가이자 바순연주자였으며 열성적인 베토벤 연구가였던 스위스 출신의 윌리 헤스(Willy Hess,1906~1997)가 빈 시절 초기나 그 이전(본 시절)에 작곡되었던 베토벤의 초기 작품들, 또는 그간 발굴되지 않았던 미완성 스케치 등을 모아서 헤스 번호(Hess Number)를 붙여 발표하였다.[77] 그런데 헤스 번호가 붙어 있는 작품 상당수는 이미 WoO에도 포함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WoO와 헤스 번호가 동시에 붙어 있는 작품의 경우에는 관례상 헤스번호가 아니라 WoO로 표시한다.


4. Anh
기타 베토벤과 관련된 상당히 특이한 목록으로 Anh 목록이 있는데, 이 Anh 번호가 붙은 작품은 사실 베토벤의 작품이 아니라 베토벤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거나 베토벤이 작곡했다고 사칭한 위작의 목록이다. 베토벤이 실제로 작곡했는지 여부를 두고 논란이 많았던 예나 교향곡 [78]이 당당히 Anh 목록 1번에 올라 있다. 베토벤이 워낙 위대한 작곡가이다 보니 심지어 위작들까지도 분류번호를 갖는 영광을 갖게 되었는데, 실제 분류의 목적은 연주보다 베토벤 연구의 편의를 위해서라고 보면 된다.

이상 이야기한 것을 염두에 두면서 아래의 작품목록을 살펴보자.

5 주요한 여러 작품

베토벤의 작품목록
베토벤 자신이 붙이지 않은 비공식 부제에는 취소선을 그었다.

5.1 교향곡

하나같이 유명하고 중요한 작품들이라 다들 따로 항목이 작성되어 있다.

5.2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1번 C장조 - 원래 이 1번보다 2번이 먼저 작곡되었다. 다만 이 곡이 출판이 먼저 되었기 때문에 작품번호가 앞선다. 기법적으로도 2번에 비해 1번이 좀더 규모가 크고 작법상으로도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 피아노 협주곡 2번 B플랫 장조
  •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 - 협주곡 분야에서 베토벤의 독창성이 본격 드러나기 시작하는 작품. 더 놀라운 것은 초연때에는 악보를 완성하지 못해 피아노 파트를 거의 즉흥으로 연주했다는 것.
  • 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 - 조용히 말을 거는 듯한 피아노 독주로 시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고전적 협주곡에선 긴 오케스트라 서주가 등장했던 것에 비하면 큰 파격이다.
  • 피아노 협주곡 5번 E플랫 장조 "황제" - 4번과 유사하게 피아노 독주가 상당히 이른 시간 등장하지만, 시작부터 관현악과 호흡을 맞추며, 단순한 독주라기보다는 카덴차에 가깝다. 이런 파격은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가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바이올린 솔로를 아예 처음부터 등장하게 시도하는 동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 피아노 협주곡 0번 E플랫 장조(WoO 4) - 베토벤이 14살때인 1784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에는 피아노 독주 파트만 온전히 남아 있고 관현악 파트는 실전되었다. 자주 연주되지는 않지만 종종 연주될 때에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하워드 섈리(Howard Shelley) 등이 따로 작성한 관현악 파트가 추가된다.
  • 피아노 협주곡 6번 D장조(Hess 15) - 베토벤이 45살때인 1815년부터 작곡되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1악장 일부분만 작곡된 채 중단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악보를 살펴보면 파격적인 형식이 많이 시도되었던 5번 협주곡과 달리 좀더 전통적인 양식에 충실하게 작곡되고 있었다. 1987년 그리스 출신의 영국 음악학자인 니콜라스 쿡(Nicholas Cook)이 이 미완성악보를 바탕으로 1악장을 연주가능한 버전으로 완성했는데,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다.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Op. 61) - 오늘날에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끝판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의외로 베토벤 당대에는 그다지 많이 연주되지 않았다. 베토벤 다음세대부터 바이올린 분야의 파가니니를 필두로 해서 각종 악기에서 엄청난 기교와 연주력을 자랑하는 비르투오조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이에 따라 독주악기의 기교와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작법이 유행했는데, 이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연주하기는 매우 어려운 반면 독주자의 기교를 과시할만한 화려함이 부족한데다 당시 관점에서 관현악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르투오조시대의 명연주자였던 아우어나 요아힘, 그리고 이들 다음 세대인 크라이슬러 등이 이 곡에 독주자들의 아쉬움(?)을 달랠만한 화려한 카덴차를 만들어 붙였다. 오늘날의 연주자들은 주로 요아힘의 카덴짜로 이 작품을 연주하며 크라이슬러 버전도 꽤 인기가 있다. 한편 이 곡의 초연때 독주를 맡았던 바이올리니스트 프란츠 클레멘트(1780~1842)는 거의 연습없이 초견으로 이 난곡을 연주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베토벤이 공연 직전에야 이 곡을 완성했기 때문. 참고로 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피아노로 편곡한 버전도 있다.
  • 바이올린 협주곡 C장조(WoO 5) - 이 작품은 1870년대에 악보가 발견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작품번호 61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가려져서 사실상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작곡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20대 초반에 씌어진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이 작품은 연주시간이 14분 정도 소요되는 하나의 악장만 남아 있는데, 완성된 작품이었는데 다른 악장이 소실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한악장만 완성된채 중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피아노,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3중 협주곡 C장조 - 말 그대로 세 개의 독주악기를 위한 협주곡이다. 베토벤 이전에도 두 개 이상의 독주악기를 위한 협주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모차르트의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과 브람스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 피아노 삼중주의 멤버와 관현악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당시 기준으로 충분히 파격적이고 실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세 악기를 동시에 배려하다보니 천하의 베토벤도 구성이 산만해지는 점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이런 저런 완성도의 문제로 인해 오늘날 베토벤의 음악 가운데에서는 잘 연주되지 않는 곡이 되어 버렸다. 베토벤 자신도 이런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는지 이 곡을 완성한 이후에는 비슷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5.3 독주악기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론도 B플랫 장조 WoO 6 - 1793년에 작곡되었으며 정식 작품목록에 올라있지 않지만 의외로 자주 연주되는 편이다. 초기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베토벤 특유의 독창적인 피아니즘을 엿볼 수 있다.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1번 G장조 Op. 40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2번 F장조 Op. 50 - 로망스 1번보다 일찍 작곡되었으나 더 늦게 작품목록에 올랐다. 로망스 1번보다 인기도 높아서 훨씬 자주 연주된다.

5.4 관현악, 합창과 독주악기를 위한 작품

  • 피아노와 합창, 관현악을 위한 합창환상곡 Op. 80 - 합창환상곡이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피아노와 합창을 위한 이중협주곡으로 볼 수도 있다. 보통 이 곡은 9번 교향곡의 프리퀄격의 작품으로 많이 거론되는데 그렇다고 단순히 프리퀄의 의미만 있고 독자적인 가치가 없는 작품은 결코 아니다.
곡명이 '환상곡'이 된 이유는 이야깃거리에 나와있듯이 공연때까지도 완성을 못시키는 베토벤 특유의 느린 작곡속도 때문이다. 하필 이 곡이 초연된 1808년 12월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공연에서는 무려의 그의 작품만으로 4시간이 훨씬 넘는 공연 일정이 짜여 있었다.[80] 공연준비에 여념이 없던 베토벤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고 공연의 맨 마지막 레파토리이기도 했던 이 곡에 많은 신경을 쓰지 못했고 초연 당일까지도 처음 4분가량의 피아노 파트를 제대로 악보로 옮기지 못했다. 결국 공연시에는 베토벤 본인이 거의 즉흥으로 피아노 파트를 연주해서 연주회를 치렀으며 이런 내력을 감안해서 출판시에도 그대로 Choral Fantasy로 명명되었다.

5.5 실내악

베토벤은 가장 중요한 교향곡 작곡가, 피아노곡 작곡가이기도 하지만 실내악 분야에서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이다.
실내악이 교향곡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상이 어려운 탓에 대중들에게 덜 알려진 것일 뿐.
아래 열거된 16곡의 현악 4중주와 대 푸가,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외에도 7곡의 피아노 3중주, 5곡의 첼로 소나타, 7중주곡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실내악의 정수들이다.

  • 7중주 E플랫 장조 Op.20 - 베토벤 초기를 대표하는 실내악의 걸작
  • 현악 4중주 1~6번 Op.18
  • 현악 4중주 7~9번 Op.59 '라주모프스키'
  • 현악 4중주 10번 E플랫 장조 Op.74 '하프'
  • 현악 4중주 11번 F단조 '세리오소'
  • 현악 4중주 12번 E플랫 장조 Op.127
  • 현악 4중주 13번 B플랫 장조 Op.130
  • 현악 4중주 14번 C샤프 단조 Op.131
  • 현악 4중주 15번 A단조 Op.132 [81]
  • 대 푸가 B플랫 장조 Op.133
  • 현악 4중주 16번 F장조 Op.135
  • 피아노 3중주 B플랫 장조 Op.97 '대공'
  • 피아노 3중주 D장조 Op.70-1 '유령'
  • 바이올린 소나타 5번 F장조 Op.24 ''
  • 바이올린 소나타 9번 A장조 Op.47 '크로이처'

5.6 피아노 독주곡

많은 작곡가들이 일단 연주자로 명성을 얻은 것처럼 베토벤도 당시 빈에 진출한 후 일단 피아노 연주자로 명성을 알렸다. 다른 음악장르들은 띄엄띄엄 작곡되거나 특정시기에 몰아서 작곡되거나 그랬지만 이 피아노곡만큼은 그의 음악 인생 내내 쉬지 않고 작곡되었으며, 당연히 그의 작품 중에 양적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일단 작품번호가 붙은 피아노 소나타만 32개나 된다. 물론 양적으로만 많은 것이 아니고, 작품의 가치와 영향력을 따지자면 일일이 다 글로 옮길 수 없을 정도.
베토벤에게 피아노라는 악기는 자신의 각종 음악적 상상력과 실험을 설계하고 구현해볼 수 있는 최적의 도구였으며 피아노곡에서 얻은 음악적 성과는 다른 악기 다른 장르에도 두루 활용되었다. 따라서 이 피아노곡들은 베토벤의 음악의 발전과 변화양상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일종의 이정표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음악 연구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5.6.1 피아노소나타

  • 피아노 소나타 1번 F단조 Op.2-1
  • 피아노 소나타 2번 A장조 Op.2-2
  • 피아노 소나타 3번 C장조 Op.2-3
  • 피아노 소나타 4번 E플랫 장조 “그랜드소나타” Op.7
  • 피아노 소나타 5번 C단조 Op.10-1
  • 피아노 소나타 6번 F장조 Op.10-2
  • 피아노 소나타 7번 D장조 Op.10-3
  •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Op.13 '비창'[82][83]
  • 피아노 소나타 9번 E장조 Op.14-1
  • 피아노 소나타 10번 G장조 Op.14-2
  • 피아노 소나타 11번 B플랫 장조 Op.22
  • 피아노 소나타 12번 A플랫 장조 “장송 행진곡” Op.26[84][85]
  • 피아노 소나타 13번 E플랫 장조 Op.27-1
  • 피아노 소나타 14번 C샤프 단조 “월광” Op.27-2
  • 피아노 소나타 15번 D장조 “전원” Op.28
  • 피아노 소나타 16번 G장조 Op.31-1
  • 피아노 소나타 17번 D단조 “템페스트” Op.31-2[86][87]
  • 피아노 소나타 18번 E플랫 장조 “사냥” Op.31-3
  • 피아노 소나타 19번 G단조 Op.49-1[88]
  • 피아노 소나타 20번 G장조 Op.49-2
  • 피아노 소나타 21번 C장조 “발트슈타인” Op.53[89]
  • 피아노 소나타 22번 F장조 Op.54
  •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아파시오나타” Op.57[90]
  • 피아노 소나타 24번 F샤프 장조 “테레제” Op.78[91]
  • 피아노 소나타 25번 G장조 Op.79
  • 피아노 소나타 26번 E플랫 장조 “이별” Op.81a
  • 피아노 소나타 27번 E단조 Op.90
  • 피아노 소나타 28번 A장조 Op.101
  • 피아노 소나타 29번 B플랫 장조 “하머클라비어” Op.106 [92] [93]
  • 피아노 소나타 30번 E장조 Op.109[94]
  • 피아노 소나타 31번 A플랫 장조 Op.110
  • 피아노 소나타 32번 C단조 Op.111.[95]

5.6.2 변주곡

5.6.3 바가텔

  • 7개의 바가텔 Op.33
  • 11개의 새로운 바가텔 Op.119
  • 6개의 바가텔 Op.126
  • 바가텔 포코 모토 A단조 “엘리제를 위하여” WoO59

5.7 종교음악

  •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 op. 85 - 작품번호는 85번이지만 정작 작곡 및 초연은 33살때인 1803년에 이루어졌다. 다만 출판이 1811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작품번호가 한참 뒤로 밀린 것이다. 젊은 베토벤은 최초로 시도하는 대규모의 종교음악 창작에 부담을 느꼈는지 리허설 직전까지도 악보를 계속 손질했다고 한다. 초연 당시에는 평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 나중에 출판시에 합창이나 목관파트 등을 많이 수정했다.
  • 미사 C장조 op. 86 - 나중에 씌어진 장엄미사에 밀리다 못해 아예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 되어버린 불행한 작품. 하지만 처참한 유명세와는 별도로 음악적으로는 가볍게 봐선 안되는 작품이다. 또한 장엄미사보다는 이 미사 C장조가 미사의 원래 취지에 더 어울리는 편성규모와 연주시간을 가지고 있다. 장엄미사의 경우 교회에서 연주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전례음악으로 사용할 목적보다는 연주회장에서 공연하기 위해 작곡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5.8 오페라, 무대음악

  • Vestas Feuer (Hess 115) - 베토벤이 당시 대본작가이자 극장 주인이었던 에마누엘 쉬카네더[97]의 의뢰로 33세때 최초의 작곡을 시도했던 오페라이다. 하지만 오페라를 작곡해본 적이 없었던 베토벤은 빠른 속도로 작곡을 하지 못했고, 계속 공연계획이 지체되다가 결국 아리아 두어곡과 관현악 부분의 일부 스케치 정도만 남긴 채 중단되었다. 이후에도 베토벤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비롯해서 몇몇 오페라의 작곡을 시도했지만 생전에 완성된 작품은 피델리오가 유일하다.
  • 극음악 슈테판 왕((König Stephan, op 117) - 1811년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1세는 새롭게 제국에 편입된 헝가리지역의 부다페스트에 대극장을 세우라고 명하고 개막작품으로 헝가리 초대 왕으로서 기독교를 전파시킨 국민 영웅 이슈트반(독일어명 슈테판)1세를 기리는 극을 상연하기로 했다. 대본은 극장의 초대 매니저이자 시인인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August von Kotzebue)에게 맡기고, 부수음악은 당시 빈에서 활약하고 있던 베토벤을 시켜 작곡하도록 하였는데, 이 부수음악이 후에 "슈테판 왕"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총 9곡이 있는데 대부분이 합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에는 서곡만 주로 연주되고 전곡의 연주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98]
  • 발레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Die Geschfe des Prometheus, op. 43) - 베토벤은 생전에 두 곡의 발레음악을 작곡했는데[99] 오늘날에는 둘 모두 인기가 없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은 1번 교향곡과 2번 교향곡 사이에 씌어진 초기 관현악곡 중 하나로 서곡을 포함한 16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짜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아무래도 베토벤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이전인 초반기의 작품인데다 낭만주의 시대 이후 세련된 발레음악들이 대거 등장하는 바람에 현재는 서곡만 가끔 연주될 뿐 이 음악으로 발레공연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이 작품에서 기억할만한 것은 이 발레음악의 마지막곡(Finale)의 주제가 여러 작품에 다시 활용되었다는 것. 베토벤의 에로이카 변주곡(op. 35)이나 영웅교향곡 4악장이 바로 이 피날레의 주제를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5.9 가곡

베토벤의 가곡은 그의 작품 중에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분야인데, 아무래도 그의 후배인 슈베르트가 가곡분야에서 워낙 돋보이는 덕분에 이 후광에 가려진 탓일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과 별도로, 베토벤의 가곡들은 이후 독자적인 장르로 크게 번성한 독일가곡(Lied)의 효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음악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베토벤은 반주악기로서 피아노의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가사내용에 걸맞는 노래선율과 이를 절묘하게 뒷받침하는 피아노 반주 등, 독일가곡의 핵심적인 특징들이 이미 베토벤의 가곡에서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다만 후배인 슈베르트나 슈만 등의 가곡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세련미는 좀 떨어지는 편이다. 그리고 악상이나 곡의 전개도 이 분야 본좌급 후배들에 비하면 대체로 단순하게 처리되고 있다.

  • 아델라이데(Adelaïde, Op.46) -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들은 곡이라는 소문이 있다. 죽음을 앞둔 베토벤에게 찾아온 조카딸이 이 노래를 불렀다. 사실 베토벤은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그대를 사랑해(Ich Liebe Dich, WoO 123) - 작품번호가 붙어 있지 않은 작품 중에서는 엘리제를 위하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곡일 것이다. 베토벤이 33세때 헤르롯세라는 듣보잡 시인의 시에 붙인 작품인데, 음악적 가치는 그리 높지 않지만 이런 평가와는 별도로 소박하고 순수한 사랑을 노래하는 가사와 귀에 착 감기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멜로디로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90년대 가요계를 강타한 신승훈의 명곡 보이지 않는 사랑의 도입부로 잘 알려진 곡이기도 하다. 베토벤빠라면 자기 연인에게 반드시 이 노래를 선물해 주자.
  • 연가곡집 멀리 있는 연인에게(An die ferne Geliebte, op. 98) - 1816년에 작곡, 출판되었으며 모두 6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배인 슈베르트나 슈만 등 낭만파 음악가들의 연가곡을 예견하고 있는 최초의 본격 연가곡이며 베토벤의 가곡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이 곡의 작사자가 특이한데, 당시 22세였던 알로이스 야이텔리스(Alois Jeitteles)라는 의학도가 베토벤에게 보낸 시가 그대로 노래가사가 되었다.[100] 작곡 당시 베토벤은 46세로 이미 중년이 되었지만 젊은 시인의 감성을 놓치지 않고 매우 낭만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 작품을 쓸 당시 그는 완전히 귀가 멀어서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든 상황이었고 작곡도 거의 손을 놓고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현실의 힘든 삶을 이 음악을 통해 위안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 학자들은 이 가곡집의 '멀리있는 연인'의 실제인물이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녀에 대해서는 베토벤의 여인들 항목을 참고하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베토벤은 1809년 스코틀랜드의 출판업자의 요청으로 영국 지역의 민요를 편곡하는 작업을 했다. 독창과 피아노 3중주 악기 멤버(피아노/바이올린/첼로) 반주[101] 형태로 편곡되었다. 애초에 40~50곡 정도 편곡할 예정였으나 후에 기획이 바뀌어 곡 수가 대폭 늘어났고, 최종적으로 거의 170곡에 달하는 민요를 편곡했다. 어디까지나 민요의 편곡이기 때문에 순수한 베토벤의 창작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반주를 비롯해서 곡 부분부분 베토벤의 음악적 특징이 드러나고 있다. 이 중 스코틀랜드 가곡은 후에 작품번호가 붙어서 출판되기도 했다. 베토벤 당시에는 연주가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그리 많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는데, 현재 관점에서 보면 딱히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주는 잘 안되고 있다.
베토벤은 이 영국민요 편곡 외에도 다양한 나라의 민요를 편곡한 다국민요편곡(WoO 158)를 출판하기도 했다. 이 편곡의 연주형태는 독창 + 합창 + 피아노 3중주 멤버로 되어 있다.

6 매체에 등장한 베토벤

미국 애니 피너츠에 등장하는 슈로더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베토벤. 베토벤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하면서 피아노를 늘 치는 슈로더에게 베토벤 흉상은 보물. 그로 말마암아 슈로더를 짝사랑하는 루시가 아득한 옛날에 죽은 사람 생일이나 기억한다면서 질투하자 슈로더가 루시를 노려보기도 했다.

영화 불멸의 연인에선 게리 올드만이 베토벤으로 분했다. 이 영화의 주제에 대해서는 칼 판 베토벤 항목의 내용을 참고하자.
한편 말년의 괴팍한 베토벤은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 매우 자세히 묘사되었다. 귀머거리 베토벤의 음악활동을 돕는 여인은 물론 가공의 인물이지만. 더 록의 프랜시스 허멀 장군역으로 유명한 에드 해리스의 베토벤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 이 베토벤역은 에드 해리스의 영화 커리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로 인정받고 있다.

키아누 리브스 무명 시절에 나온 코믹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러 나라를 내왕하면서 위인들을 현대 미 합중국으로 데려온 주인공 둘 덕분에 현대 미합중국으로 온다. 현대 미합중국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지만 백화점에 가득히 있는 전자 피아노를 보고 흥미를 느끼더니만 오래가지 않아 미친 듯이 이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경악스럽게 구경한다. 백화점 담당 직원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지만 경비를 불러와 결국 억지로 내보내는데 나가는 순간까지 연주하고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손뼉치고 감탄해한다. 참고로 베토벤은 이 영화에 나온 위인들 가운데 괜찮게 나온 것이다. (...) 이 영화에서 잔다르크는 에어로빅 강사, 나폴레옹은 다이빙만 죽어라 하고 연설하다가 미친 놈 소리 듣는 링컨이나 프로이트, 빌리 더 키드는 백화점에서 총기 코너를 보고 좋아라 총을 골라 천장에 쏘다가 경비원들에게 잡혀 끌려나가고 칭기즈 칸은 마네킹이고 백화점 물품을 다 때려부수다가 한 경비원이 무전기로 웬 미친 놈이 기물 부수고 있다고 하여 몰려든 경비원들과 우당탕 싸움이나 하다가 역시 끌려나간다. 이런 영화를 진지하게 보면 지는 거다.

2015년 12월 17일, 베토벤 탄생 245주년 기념으로 구글 로고만들어졌다. Google 글자는 악보로 만들어진 것과 커튼 콜 이후에 나오는 평범한 Google로 두 번 나온다. 특징은 종이의 질감을 살려낸 애니메이션이자 베토벤의 음악들을 순서대로 끼워맞춰 완성하는 플래시 게임이라는 점. 난이도는 당연히 쉽다. 베토벤이 악보를 되찾아 콘서트홀로 가기 위해 힘들고 고된 여정을 거친다는 점이 웃음 포인트로, 베토벤의 행적과 완성하는 악보는 다음과 같다.

  • 운명 교향곡: 악보를 챙겨 나가려던 차, 진흙탕에 발이 걸려서 낑낑대는 베토벤 옆에 서 있던 말이 악보를 먹어버린다. 둘의 시선이 교차되며 흐르는 빠빠빠 빠-암 멜로디가 인상적. 악보 4개로 이루어져 있다.
  • 엘리제를 위하여: 어떻게든 남은 악보를 확보한 베토벤. 그러나 발을 빼지 못한 나머지 넘어지고 만다. 그 순간 악보들이 바람에 날려가는 것으로 모자라 나뭇가지에 하나하나 꽃혀버린다! 악보 5개로 이루어져 있다.
  • 월광소나타: 나무에 올라가 악보를 하나하나 빼 낸 베토벤이었지만, 하필 나무에 걸려 있던 둥지에서 들이 베토벤을 공격한다. 또 다시 바람에 날려간 악보는 마차에 짓밟혀 산산조각. 악보 5개로 이루어져 있다.
  • 환희의 송가: 어찌저찌 남은 악보를 챙긴 베토벤은 보름달을 배경으로 다리를 걷는다. 그러나 악보가 다시 한 번 바람에 날려가자 눈을 질끈 감은 채 강에 뛰어들지만 몸은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고, 그마저도 젖은 악보를 물고기들이 조금씩 먹어치웠다. 악보는 8개지만 사실상 4개나 마찬가지다. 악보 몇 장을 건져서 물 위로 올라온 베토벤 앞에 보인 광경은 광명마냥 빛나는 콘서트홀.[102] 그렇게 베토벤이 성공적으로 지휘를 끝마치면서 애니메이션이 마무리된다.

7 베토벤 오류

책 같은 데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애 엄마는 결핵 환자고 애 아버지는 매독 환자다. 그 둘의 첫째 아이는 맹인이고 둘째 아이는 유산했고 셋째 아이는 귀머거리에 벙어리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다. 그 사람들은 이제 다섯째 아이를 가졌다. 이 아이를 낙태하게 해야 하는가?

위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면, 다음과 같은 충공깽 답변을 듣게 된다.

당신은 방금 베토벤을 살해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근본주의 기독교도가 낙태 반대론을 펼칠 때 써 먹는 레퍼토리에 불과하며 베토벤의 어머니는 이전 혼인에서 하나, 요한에게서의 첫째 아이는 출생 후 곧 잃었지만 셋째로 태어난 베토벤가 첫째로 생존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증세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판본에 따라서 아이들의 수라든가 병명이 달라지기도 한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특수 사례를 일반론에 대입하게 하여 일부러 틀려 놓은 논리라는 것으로 낙태 반대론자들을 비판하려는 논리라든가 아니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도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인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낙태하지 않아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났다는 내용의 소설도 있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한다
  1. 베토벤의 초상화는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초상화는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초상화다. 이 그림은 베토벤 사후 그의 강렬한 인상과 날카로운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 상징적인 초상화가 되었다. 한편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베토벤은 장엄 미사(Missa Solemnis D major, Op. 123)의 작곡에 열중하고 있었다.
  2. 보통 '반'으로 읽으나 '판'이 맞다.
  3. 한편으로 후배들이 음악적으로 넘어서기 너무나 힘든 높은 산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브람스는 젊은 시절 피아노 소나타를 3곡 작곡했는데 베토벤만큼 훌륭한 소나타를 쓸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이후에는 피아노 소나타를 남기지 않았다. 브람스의 첫 교향곡도 구상을 한지 무려 20년만에 완성되었는데, 베토벤을 의식한 흔적이 여기저기 드러나고 있다. 오죽하면 이 교향곡에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
  4. 사실 독일어도 지역에 따라 발음의 편차가 있다. 베를린 출신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전혀 다르게 발음한다.
  5. 아인트호벤의 그 호벤이다. 과거 영주들이 농부 등에게 할당한 소규모 토지를 뜻하는 단어 hove의 변형.
  6.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독일식은 베트호펜(독일어의 표기에서 ә는 ㅔ로 적게끔 규정이 되어 있다)이고 네덜란드식은 베이트호번. 베토벤은 아니다!
  7. 4명이 있었는데 3명은 며칠만에 죽었고 1명은 3살때 죽었다.
  8. 개구쟁이에다 골목대장이였던 탓에 얼굴에 흉터가 많았다고 한다. 살짝 곰보에다 어깨는 넓어서 친구들이 '몽골대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이라 툭하면 친구들에게 주먹질을 해댔다고 한다.
  9. 이 덕분에 베토벤은 한동안 자기 나이를 실제보다 2살 적은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
  10. 보너스로 브로우닝가의 장녀랑 연애도 했다. 자세한 것은 베토벤의 여인들 항목 참조.
  11. 유명한 발트슈타인 소나타(Op. 53)는 바로 이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12. 베토벤은 훗날 지인과의 대화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연주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표한 바가 있다. 일생 모차르트를 경애했던 베토벤이지만 피아노 연주자로서 레가토 방식을 중시했던 그이기에 짧고 명료하게 끊어치는 모차르트와는 지향점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베토벤이 최소한 모차르트의 연주 모습을 지켜봤다는 뜻이므로 청강생 자격으로 몇 번 수업을 들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13. 하필 이 해에는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1787)도 사망했다.
  14. 이 장학금은 일종의 유학비로서 일정기간 후 본으로 돌아온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일단 비인으로 떠난 후 다시는 본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행히 대인배이자 계몽군주였던 막시밀리안 선제후는 베토벤의 성공을 바라면서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15. 이 음악여행에는 리히노스프키 공작도 같이 동행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모짜르트 생전의 연주여행에도 동행한 적이 있다.
  16. 베토벤은 이걸 철저하게 숨겼기에 이 질병을 다룬 기록이 없지만, 1799년과 1800년 몇몇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처음 느낀 건 20대 중반에서 후반인 1796년에서 1798년쯤부터 귀울림이 들리더니만 차츰 귀가 들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를 진료한 의사는 찬 바람에 몸을 노출시키며 무리한 산책을 한 것이 원인이라고 추정했다고. 친구들을 믿고 이야기하니 절대로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으며 영원히는 아니라도 내가 살아 있을 때만이라도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베토벤이 소리가 아예 안 들리면서 굳이 비밀을 지킬 필요도 없었지만 친구들은 이 약속을 묵묵하게 지켜 줘서 베토벤이 죽고서야 그 편지들을 공개했다.
  17. 참고로 당시 지내던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던 집도 현재까지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 박물관으로 남아 그의 유품과 당시 쓰던 물건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18. 한곡은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의 사망을 애도하는 곡이고 다른 한곡은 레오폴트 2세의 황위 계승을 경축하는 곡이다.
  19. 지금도 어떤 분야에서 새로 이름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그 분야의 대가나 유명한 사람의 제자 또는 협력자라는 타이틀을 내거는 일은 상당히 흔하다.
  20. 부제 격으로 붙은 글이 "이 곡은 한 사람의 영웅을 대상으로 한 추억을 기리고자 쓰여졌습니다"...
  21. 흥행실패는 이 오페라의 작품성과는 무관하게 창작에서 공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
  22.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의 베토벤 연구 기록을 보면, 당시 빈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헝클어진 머리와 매서운 눈매를 한 사람이 홀로 마구 소리를 지르면 "아... 베토벤이구나!"라면서 아무렇지 않게 여기기도 했다고 썼다!
  23. 유력자의 후원을 받지 않고 자수성가를 시도한 작곡가의 시초는 바로 모차르트. 다만 이 분은 경제관념이 없어서(본인만 그러면 모르겠는데 부인까지 콤비로) 번 돈을 잘 간수하지 못하고 모조리 날려먹었다.
  24. 웰링턴은 이 곡을 듣고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대작곡가가 자기 이름이 붙은 곡을 썼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25. 곡 자체도 좀 특이하다. 드럼과 큰북으로 전장의 머스킷대포의 사격음을 재현했는데 의외로 잘 구현된 편이니 한 번 쯤 들어볼 법 하다.
  26. 괴테도 침략자 격이었던 나폴레옹에게서 시대정신을 발견했다고 썼으나 나폴레옹이 황제로서 즉위한 후 돌아섰다.
  27. 심지어 상대가 인사했는데도 손가락을 턱에 대면서 대충 예의를 표했다고도 한다.
  28. 이 일화는 말을 옮긴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데 괴테가 머리를 숙인 모습을 보고 베토벤이 괴테도 속물이라고 비웃는 식으로 말을 옮기고 다녀 괴테가 불쾌하게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괴테가 황족에게 예를 표하려고 할 때 베토벤이 '황족은 세상에 수백 명이 있는데 괴테와 베토벤은 단 둘밖에 없으니 저쪽이 비키도록 놔두라'고 했다는 버전도 있다.
  29. von은 독일에서 귀족 계급에게만 붙이는 칭호다. van은 독일어의 von과 의미가 유사하기는 하지만 네덜란드어에서는 귀족에게 붙이는 칭호가 아닌 그냥 출신을 나타내는 칭호일 뿐이다. Beethoven이 Beet(사탕무)+hoven(밭)이라는 뜻이므로 풀이하자면 그의 이름은 '사탕무 밭에서 온 루트비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어를 썼던 몇몇 귀족들은 von=van으로 알고 베토벤을 귀족 취급하기도 했다고 한다.
  30. 자신의 동생 요한이 대표적인 인물. 당연히 베토벤과 요한은 사이가 몹시 나빴다.
  31. 정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베토벤이 남긴 화제' 항목을 참고.
  32. 물론 큰 규모의 작품만 썼던 것은 아니고 피아노 소품이나 가곡집, 관현악을 위한 서곡 등의 작품도 썼다. 아도르노는 베토벤 후기 작품들을 말년의 양식이라고 부르며 그의 음악 분석에서 심도있게 다루었다.
  33. 엄밀하게 말하면 그냥 덕담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가시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로시니 항목에 나와 있다. 한편 베토벤은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인기 때문에 자신의 연주회는 흥행에 실패한 사례가 있었느데, 로시니의 작품이 훌륭해서 인기를 얻는 것이라며 순순히 인정했다.
  34. 아마 로시니는 후줄근한 옷차림에 하숙집에 얹혀 사는 베토벤을 보고 측은함을 느꼈을텐데, 사실 베토벤은 돈이 없어서 가난했던게 아니라 그냥 돈 쓰는데 관심이 없어서 가난하게 보였을 뿐이다. 그는 생애 후반기에 작곡료와 이런저런 후원으로 나름 큰 돈을 벌었으며, 덕분에 베토벤 재산의 상속자인 조카 칼은 한동안 운신하기 충분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35. 이 일부의 스케치가 지금도 남아 10번 교향곡으로 추정된다.
  36. 그런데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해 다음해에 슈베르트도 마치 베토벤을 따라가듯이 매독 혹은 식중독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베토벤의 곁에 매장된다. 슈베르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유언까지 베토벤을 언급할 정도로 엄청나게 존경했다.
  37. 또 베토벤을 해부할때 슈베르트가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38. 생전에는 애증의 관계였지만 그래도 칼은 삼촌의 묘지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39. 당시 요한나의 평이 얼마나 좋지 않았냐면 칼이 카스파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 그런데 이걸 뜬소문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게 진짜 문제였다.
  40.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나 유럽 제일의 산업강국이 되어 있었다.
  41. 한편 린츠 주민들에게는 적군을 도와주는 배신자로 찍혀 욕을 많이 먹었다.
  42. 요한 부부는 결국 평생 자식을 낳지 못했다.
  43. 이 때 귀족 법정에서 재판을 벌였는데, 베토벤이 귀족 행세를 하고 다니다가 평민이라는게 들통나서 기각되기도 했다. 당시 귀족 법정에서는 평민의 소송은 아예 취급하지 않았다.
  44. 판결상으로는 요한나는 제한적이지만 카를에 대한 면접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베토벤은 이런 판결 내용을 가차없이 무시했다.
  45. 베토벤은 조카 뿐만 아니라 동생들에게도 권위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걸핏하면 화를 내고 폭력을 행사하였다. 동생들이 괜히 형인 베토벤을 싫어한게 아니다.
  46. 베토벤은 카를 때문에 중병에 걸린 상황에서도 폭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 조카를 그냥 내버려 뒀다면 베토벤의 수명이 10년은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것을 카를의 잘못으로만 볼 수는 없다. 카를 역시 삼촌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큰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으니.
  47. 카를이 조금만 더 세상 물정을 잘 알았다면 쉰들러 같이 베토벤의 주변에 기생하던 협잡꾼들이 베토벤의 유품이나 필기록 등을 마구 빼돌려 팔아먹는 것을 막고 스스로 관리하면서 훨씬 큰 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를은 당시 겨우 20살밖에 되지 않은데다, 삼촌의 그늘에서 살았던 샌님이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48. 카를이 베토벤의 친아들이 아니니 루트비히는 베토벤의 직계후손이라고 볼 수 없다.
  49. 루트비히는 미국에서는 루이스 폰 호펜이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바꿨다. 그런데 van을 von으로 바꾼 것을 보면 귀족 행세를 한 듯.
  50. 카를과 루트비히의 딸들이 낳은 후손들은 현재도 생존해 있다. 다만 이들은 당연히 베토벤이라는 성을 쓰지 않는다.
  51. 사실 이 풍문은 딱히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베토벤이 카를에게 너무 집착했던 탓에 나온 이야기들이다.
  52. 그런데 이 대화록도 아쉬운게 귀가 안 들리는 베토벤은 이 대화록, 즉 공책에 상대방 질문을 적게하여 그걸 보고 답변하다보니 베토벤이 쓴 답변은 없고 상대방 질문만 적혀있기에 베토벤 연구에 아쉬움이 있다. 물론 이 질문을 통하여 어떤 걸 당시 궁금해했고 일상 대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긴 하다.
  53. 태워버린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대체로 계속 비밀리에 보관하기 힘들어서 그랬다거나 자기가 거짓말한 것들이 탄로날까봐 두려워서 그랬다는 설 등이 있다.
  54. 1981년에 삼성서관에서 나온 만화 위인전 베토벤에서 쉰들러가 친구로 나와 바로 슈베르트를 소개하는 걸로 나왔다...
  55. 그가 쓴 베토벤 전기는 베토벤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참고문헌 중 하나이다. 물론 거기 나온 이야기가 다 맞는건 아니지만.
  56. 다만 이 분과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는 과장/왜곡/창작된 것들도 많으니 상큼한 일화라고 해서 덥썩 믿지는 말자.
  57. 공식적으로 미노나는 출산 당시 요세피네의 남편이었던 슈타켈베르크의 딸이다.
  58. 거기에 재결합을 줄기차게 요구했던 요세피네의 남편이 갑자기 떠나버렸고, 하필 베토벤의 유명한 편지인 '불멸의 연인'도 이 시기에 씌어진데다 두 사람이 만난 시기와 미노나가 태어난 시점간의 기간이 통상적인 가임기간과 일치하고, 미노나(Minona)라는 이름이 'Anonim(Anonym=익명)'을 거꾸로 한 것이라는 정황이 이 의혹을 더욱 부추긴다.
  59. 보청기도 썼지만 한마디로 작은 나팔 같은 것을 귀에 꽂고 상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당시 보청기. 1810년 초반까지는 이거라도 쓰면 조금 들렸으나 그 후로는 아예 들리지 않아 이것도 안 쓰게 된다.
  60. 대표적인 곳이 그가 유서를 썼던 하일리겐슈타트나 요양을 위해 머무르면서 7번교향곡을 썼던 체코의 테플리츠.
  61. 베토벤 전기의 스탠다드로 평가받는다. 신틀러의 증언을 토대로 썼다.
  62. 그래서 농담 삼아 베토벤의 메트로놈이 사실은 고장나 있었던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지만 몇몇 지휘자는 가능하면 베토벤의 연주 속도를 존중하려 노력했고 최근 녹음된 베토벤의 여러 음악은 마치 2배에서 3배 속도로 연주한 듯이 매우 빠르게 들리기도 한다. 작곡가 본인의 의도를 존중하겠다는 취지 자체는 물론 바람직한 것이지만 감상자 입장에서는 음악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빠르게 진행되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
  63. 분량이 적어진 것은 32 소나타중 19, 20번이 작곡가의 의사에 반하여 출판됐다는 이유로 빠진 탓도 있다.
  64. 살리에리 항목에도 나오는 베토벤 제자인 이그나츠 모셀레스(1794~1870)가 유태인이며, 유태교를 믿던 사람인데 베토벤은 종교 가지고 일절 뭐라고 한 적이 없다. 베토벤은 늘그막에 기독교라는 게 예수라는 유태인 애송이가 만든 종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여 친구들이 이 말을 수습하느냐 진땀을 뺐는데 병세가 심해져서 그런가 보다라고 당시 문제삼지 않으며 넘어갔다고 한다.
  65. 초인종 누를때 그 소리.
  66. 그래서 그의 친구나 주변사람들은 모두 그의 괴팍하고 지랄맞은 성격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대인배들이었다.
  67. 베토벤은 그에게 나중에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헌정한다.
  68. 말년에는 노안 때문에 안경을 써야지만 글을 읽을 수 있었다.
  69. 그러다보니 현대 정식의학자들은 이런 베토벤의 증세를 분노 조절장애, 우울증으로 평가한다.
  70. 기본적으로 이런 평가는 어디까지나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정도 되는 지존급 작곡가들하고 비교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평범한 2류급 작곡가들 수준에 눈높이를 두고 평가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71. 디아벨리 변주곡에서 베토벤은 각기 대선배들에 대한 예우를 담아 24변주에선 바흐의 오르간 작품집을 연상케 하는 전통적인 푸가를, 32변주에선 헨델풍의 정력적인 푸가를 거의 3중 푸가에 가깝도록 자유롭게 전개하며 밀어붙인다.
  72. 예컨대 악보에 '조금 자유로운 3성 푸가'라고 표기된 '하머클라비어' 4악장 같은 경우 오르간 베이스의 울림 같은 효과를 위해 때로 3성부 이상 벗어나는 지점도 있다. 아예 악보에 푸가라고 표기되지 않은 현사 14번 1악장 같은 경우 푸가인가 아닌가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의 의견으론 '많은 사람들이 그 악장을 푸가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음악이다.' 라고 평가했다. 바인가르트너가 푸가의 형식을 제대로 갖춘 보기로 제시했던 곳은 교향곡 3번 영웅 4악장의 변주 부분이었다. 요약하자면 어떤 악곡이 형식적으로 푸가인가 아닌가 논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전체적인 완성도를 평가하는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73. 슈만은 당대의 가벼운 음악 경향을 개탄하면서 온종일 바흐,헨델,베토벤의 푸가만 듣고 싶다고 토로한 적도 있다.
  74. 그의 사후에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던 3곡이 작품번호가 붙어 출판되어 현재는 138번까지 있다.
  75. 나름 꽤 많은 곡을 작곡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넘쳐났던 '양산형 작곡가'들의 작품수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76. 예를 들면 만돌린과 같은 악기를 위한 작품은 WoO에만 존재하는데, 아마 만돌린이라는 악기가 자신의 음악을 표현할만한 수단으로 적합한지 테스트를 해보다가 결국 공식작품은 쓰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77. 헤스는 단순히 악보를 발굴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수 작품의 초연에도 공헌을 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0번'의 초연도 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78. 결국 이 예나 교향곡은 베토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작품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79. 정식 부제는 실러의 송가(頌歌) 〈환희에 붙임〉에 의한 종결합창을 수반한 관현악, 독창 4부와 합창을 위한 교향곡 제9번이다.
  80. 참고로 이 테아테안데르빈 공연은 역사적으로도 기념비적인 공연이다. 이 합창환상곡을 비롯해서 교향곡 5번(운명)과 6번(전원), 피아노 협주곡 4번 등 베토벤의 무시무시한 걸작들이 대거 초연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상 열렸던 연주회 가운데 가장 고퀄초연이 많았던 연주회로 볼 수 있다.
  81. 이 작품의 3악장에는 '병에서 회복한 자가 신께 바치는 성스러운 감사의 노래, 리디아 선법에 의함'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베토벤이 얼마간 병상에 누웠다가 회복한 뒤 쓴 음악이다.
  82. 비창적 대 소나타(Grande sonate pathétique)의 줄임.
  83. 그런데 사실 pathétique은 불어로 ‘비창(悲愴)다운’이 아니라 ’비(悲壯)다운’이라는 뜻이다. 다행히도 요즘 악곡 해설에서는 슬픔(愴)보다는 장엄(壯)이 더 두드러진다는 쪽이 더 많으며 이 오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어는, 전자는 bēichuàng(悲怆)이고 후자는 bēizhuàng(悲壮)으로 성조가 완벽히 똑같지만 한국어의 ‘ㅊ’, ‘ㅈ’차이처럼 뒤 단어의 미묘한 자음에서 차이가 나는데 일본은 애석하게도 두 단어 모두 발음이 히소-(ひそう)로 똑같다. 아무래도 영어의 pathetic이랑 철자가 유사해서 야기된 오역인 듯하나 외국에서 먼저 오역된 것이 그대로 번역되어 들어왔을 가능성도 적지는 않다.
  84. 소나타이지만 4개의 악장 중에 소나타 형식으로 된 악장은 하나도 없다. 1악장은 변주곡, 2악장은 스케르초 형식이며 3악장은 '장송 행진곡'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고 베토벤의 장례식 때 실제로 연주되었다고 한다. 4악장은 론도 형식으로 작곡되었다. 한편 3악장은 작곡자가 직접 관현악으로 편곡한 버전(WoO 96)도 있다.
  85. 이런 점은 모차르트의 피아노소나타 11번 A장조와 비슷하다.
  86. 베토벤 사후에 3자에 의해 지어짐. 쉰들러가 "이 소나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힌트를 주세요." 라고 하자, 베토벤은 "셰익스피어템페스트를 읽어라." 라고 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베토벤의 유품들 중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템페스트가 있었다.
  87. 영화 토탈리콜에 이 작품이 나온다.
  88. 19번과 20번은 규모가 작은 소나타로 베토벤의 소나티네 앨범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두 소나타는 1번 소나타가 작곡되기 전인 1795~97년 경에 작곡되었으나 출판이 1805년 비인에서 되었기 때문에 번호가 뒤로 밀린 것이다. 두 소나타 모두 2악장 구성이며 첫 악장은 느린 템포의 소나타형식을 갖추고 있고 2악장은 론도형식에 가까운 빠른 템포의 곡이다.
  89. 23번 열정(Appassionata)소나타와 더불어 베토벤의 중기 피아노음악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특이하게 2악장 구성인데, 원래는 느린 2악장이 따로 있는 3악장 구성이었으나 곡이 너무 길다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2악장을 빼고 대신 2악장이 된 3악장에 느린 서주를 추가하였다. 소나타에서 빠진 2악장은 안단테 파보리(Andante Favori, WoO 57)라는 곡명으로 따로 출판되었다.
  90. Appassionata라는 제목은 베토벤 본인이 아니라 이 작품을 출판한 출판업자 크란츠(Kranz)가 붙인 것이다. 괜히 이런 제목이 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베토벤의 피아노곡 가운데 가장 격정적인 작품 중 하나이며, 출판 당시 연주하기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출판업자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편곡버전을 다시 출판하기도 했다. 이 작품을 쓸 당시 베토벤은 브룬스비크 백작 가문의 두 자매인 테레제와 요제피네 사이에서 마음이 오락가락 하고 있는 양다리를 걸친 상황이었는데, 학자들은 이 소나타에 이런 마음상태가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공평(?)을 기하기 위해서인지 이 소나타는 요세피네나 테레제가 아니라 두 사람의 남자 형제인 프란츠 폰 브룬스비크에게 헌정되었다.
  91. 베토벤이 잠깐 사귀었던 테레제 폰 브룬시비크에게 헌정되어 테레제라는 부제가 붙었다.
  92. 하머클라비어는 독일어로 피아노의 뜻인데 베토벤은 후기에 악곡의 나타냄말을 이탈리아어 대신 독일어로 고쳐서 쓰고 있었으며 제 28번 소나타에도 함머클라비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래에 언급되는 디아벨리 변주곡과 함께 베토벤의 피아노곡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연주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특히 4악장의 서주 후 밑도끝도 없이 이어지는 장대한 푸가는 연주기법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엄청난 난곡으로, 대위법의 대명사인 바흐의 대위법과 상당히 다른 베토벤식 대위법의 진수가 드러난다.
  93. 베토벤의 해석으로 정평이 난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바인가르트너가 관현악으로 편곡한 버전이 있다.
  94. 이 소나타의 가장 특징적인 3악장은 주제와 6개의 변주로 구성되어있다. 여기서 말년 베토벤의 도약적인 변주방식을 통한 주제 전개를 관찰할 수 있다. 32번(Op.111)의 2악장의 마지막 정신적 승화부분이 여기서 먼저 나타났는데, 이 곡의 3악장 마지막 6변주에서 두 개의 트릴 후 처음 주제로 되돌아오는 부분은 그 부분의 자유성 뿐 아니라 악장 내 강렬하면서 유연한 주제 전개를 통해 마치 육성없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실현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95.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이다. 별명이 없는 탓인지 다른 유명소나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으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분야의 대미를 장식하는데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단 두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연주시간이 23~31분으로 상당히 길며 특히 2악장의 심오하면서도 명상적인 분위기는 베토벤 피아노 음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 2악장은 주제와 5개의 변주로 되어있는데, 이 변주방식에서 당김음이 많이 나타나는 3변주 부분이 재즈 멜로디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게한다. 그 후 나타나는 조성변화와 악상 전개에선 현세를 벗어난 느낌을 준다.
  96. 정식 작품번호가 붙어 있지는 않지만 상당히 중요한 변주곡이다. 후기에 본격적으로 꽃피우는 베토벤의 성격변주양식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작품이며 흔히 이 변주곡과 에로이카변주곡, 디아벨리 변주곡을 베토벤의 3대 변주곡으로 일컫는다. 8마디의 짧은 주제 제시 마지막 32변주를 제외하고는 모든 변주에서 8마디 구조가 계속 유지되며 각 변주 사이에 중단이 없이 계속 연주가 되는데, 이런 양식상의 특징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이 변주곡을 샤콘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97.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와 현자의 돌의 대본을 이 분이 썼다.
  98. 일종의 어용 작품이기 때문에 오늘날 무대에 올리기에는 내용이 많이 진부하다.
  99. 다른 한곡은 WoO 8 번호가 붙어 있는 12곡의 독일 춤곡(Twelve German Dances for orchestra)
  100. 야이텔리스는 본업이 의사였지만 문학에 관심이 많아 시집과 연극을 남겼으며 해외 문학작품의 번역에도 관여했다. 다만 작품성은 아마추어 수준을 많이 뛰어넘지 못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이 곡의 작사자로만 알려져 있다.
  101. 이때 오간 서신 내용을 살펴보자면, 출판업자는 영국에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며 플룻을 끼워 편곡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베토벤은 플룻은 그리 훌륭한 악기가 아니라고 하며(...) 거절했다. 아무래도 이전 자신이 많이 다루어봤고 가장 균형적이라 여기는 편성을 밀어붙인 듯 한데 단순히 돈만 받고 기계적으로 편곡에 임한 게 아니라 나름 신경을 썼음이 드러난다.
  102. 이 때 그 유명한 환희의 송가의 합창 부분이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