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츠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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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No. 21
와다 츠요시(和田 毅, Tsuyoshi Wada)
생년월일1981년 2월 21일
국적일본
출신지시마네현 이즈모시[1]
출신학교하마다고교 (시마네) - 와세다대학
포지션투수
투타좌투좌타
프로입단2003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입단
소속팀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2003~2011)
볼티모어 오리올스 (2012~2013)
시카고 컵스 (2014~2015)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6~)
200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신인왕
쇼다 이츠키
(닛폰햄 파이터즈)
와다 츠요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미세 코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010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다르빗슈 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와다 츠요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치카와 세이이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 개요

소프트뱅크 호크스, 볼티모어 오리올스(마이너),시카고 컵스를 거쳐간 좌완 투수이자 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다시 돌아온 좌완 투수. 그리고 한국인들에겐 참사를 안겨준 한국킬러

2 학창 시절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으며 1991년에 아버지를 따라 시마네현으로 이사를 갔다. 고등학교 시절 하마다 고등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2학년때 고시엔에서 끝내기 밀어내기 패배를 당하고 3학년에는 8강전에서 연장에서 지는 등 고시엔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와세다대학으로 진학해 투구폼을 바꾸더니 구속이 늘어나면서 많은 회전으로 인해 치기 어려운 와다의 공이 더 치기 힘들어졌고 삼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에가와 스구루가 가지고 있던 대학 최다 삼진 기록도 경신했다.[2] 그리고 4학년 때마저 와세다 대학이 우승하면서 와세다 대학의 첫 4연패를 기록했다. 덕택에 프로구단의 관심을 받는건 당연지사. 그리고 2002년 다이에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다. 다이에 호크스에 들어간 이유는 아키야마 코지의 은퇴식 때 감명을 받았고 다이에 호크스 팬들의 응원이 흡사 소케이센을 연상시켜서라고 한다.[3] 입단 후 등번호는 21번을 달았다.

3 프로 시절

3.1 NPB 시절

2003년 팀에 입단하자마자 스기우치 도시야, 그리고 기존에 있었으나 드디어 포텐이 터진 유리몸 사이토 가즈미와 함께 선발진을 형성하여 14승 5패를 기록하면서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의 큰 기여를 했다. 신인 자격으로 일본시리즈 7차전에서 완투승을 기록하는 등 큰 무대에서도 나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으며한신만 안습[4] 이 활약을 바탕으로 국내에선 삿포로 참사로 유명한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겸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의 한일전 선발투수로도 나와 5.1이닝 무실점 호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2004년 본인이 2년차 징크스는 없다고 외쳤으나 피홈런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낮은 피안타율에도 불구하고 4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소포모어 징크스에 걸렸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음.

팀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바뀐 2005년에는 소프트뱅크 호크스 최초의 개막전 선발투수로 등판하여 이기더니 팀에서는 거의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데뷔 후 첫 3년 연속 10승 투수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 활약을 바탕으로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기록을 갈아치운 4년차 최고 연봉을 기록했다. 그리고 2006년과 2007년에도 꾸준히 10승+씩 달성하면서 팀의 기록을 계속 달성했다.그 사이에 WBC 금메달도 있었다. 2008년에는 올스타전 직전까지 8승을 달성하는 등 이번에도 10승+를 기록하는가 했으나 팀이 올림픽 증후군에 걸렸는지 8승에 머물고 말았다. 2009년에도 개막시리즈에서 완봉승을 거두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나 이번엔 팔꿈치 통증으로 팀에서 빠졌다.

그리고 2010년 前 시즌 못 던진 한을 푸는 듯이 올스타 선정, 개인 최다 탈삼진 기록, 개인 최다승을 기록했고 그 기록으로 퍼시픽 리그 베스트 나인과 퍼시픽 리그 MVP를 차지하는 등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5] 다만 팀은 저주에 걸렸는지 지바 롯데에 일본시리즈 진출 기회를 내줬다. 어쨋든 이 활약을 바탕으로 2011년 개막전 선발을 다시 차지했다. 그리고 스기우치 도시야, 데니스 홀튼, 셋츠 타다시와 함께 선발진을 형성했고 팀은 8년 만에 일본시리즈를 우승했다. 그리고 FA를 행사해 메이저리그로 진출했고 아시안 수집에 열을 올리던 댄 듀켓 단장의 눈에 들어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등번호는 대학시절에 달던 18번.

3.2 MLB 시절

그러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입단하자 스프링캠프에서 팔꿈치에 통증을 호소했다. 그리고 시즌이 들어가서 한 경기 등판을 하고 다시 통증이 다른 위치에 발생했고 토미 존 서저리 판정이 나서 1년을 통째로 날려먹었다. 그리고 2013년에도 마이너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시즌 후에 방출이 되었다. 와다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오리올스에 입단한 NPB 출신 선수가 바로 천웨이인이었는데, 결론적으로 천이 와다가 먹튀(...)한 몫까지 활약했다.

이후에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했다. 마이너 계약이다보니 등번호도 67번. 그리고 2014년 마이너에서 좋은 활약을 하면서 40인 로스터에 들더니 제프 사마자 트레이드로 선발진에 공백이 생기면서 콜업, 미국 진출 3년만에 드디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게 되었다. 2014년 8월 19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서 5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가운데 비로 인해 메이저리그 커리어 첫 완봉승을 따낼 뻔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항의로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바뀌면서 무산. 승리투수 요건은 갖춰져 있는 상태였고 경기가 2:1로 시카고 컵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2014시즌 최종 성적은 13경기 4승 4패 평균자책점 3.25로, 빅리그 첫 시즌을 무난히 잘 보냈다.

하지만 2015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8경기 등판에 그쳤고, 결국 2015년 11월 3일, 컵스에서 전력 외로 판정받아 방출되어 소프트뱅크와 다년 계약 합의했다는 기사가 났다.

3.3 NPB 복귀

친정팀으로 복귀하면서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맡았다. 돌아온 에이스의 모습을 보이며, 6월 10일 현재 7승 1패로 리그 다승 선두를 달리고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평균 130km/h 후반 정도의 구속만 보면 전형적인 좌완 기교파 투수일 것 같지만 독특한 투구폼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동시에 패스트볼을 스트라이크존에 우겨넣는 파워피쳐에 가까우며, 공에 회전이 많이 걸려 탈삼진율이 높다. 이절벽 선생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으로 보면 될 듯. 변화구랑 구속은 비교불가지만 다만 구속이 낮다보니 홈런을 좀 맞는 편.[6]

5 기타

  • 일본 내에선 팬들의 애칭은 와치(わっち)라고 한다.어??[7]
  • 2005년부터 투구수X10개[8]의 백신을 JCV에 기부하고 있다. 그리고 본인의 고향인 이즈모시에 300만엔씩 기부하고 있으며 사비로 야구대회도 열어 우승팀은 홈구장 개막전에 초대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피해를 받은 후쿠시마 현에 버스를 기부하기도 했다.
  • 야구 내외적으로도 좋은 선수고 일본 내에서도 커리어가 나쁘지 않은 선수고, 한국전에서 잘 던져서 '한국 킬러'라는 명성으로 국내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은 선수이며, 미국에서의 커리어도 더 망한 선수가 있음에도 한때 같은 팀이자 더블에이스였던 스기우치 도시야보다 항목 작성이 한참 늦어졌다. 실제로 이 항목은 항목이 만들어진 날 류현진과 매치업을 가진 덕분에 항목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1. 실제 출생지는 외가가 있는 야마가타현.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아이치현 고난시에서 자라다 시마네로 이주, 야구를 처음 접한 것도 아이치에 살던 시절부터다.
  2. 덤으로 와세다 대학 좌완투수 최다승도 기록했다.
  3. 하지만 실상은 학생시절부터 물밑에서 다이에 스카우트진의 밀착 마크와 (금전을 동반한) 스카우트 공세가 있었을 거라고 (즉, 탬퍼링) 다들 생각하고 있다. 참고로 아마추어 선수들 대상으로 '소소한 용돈(이를 일본야구계의 은어로 '영양비', 즉 밥값이라고 한다.)'이 동반된 이런 드러나지 않는 탬퍼링 행위는 12개 구단 모두가 다 하면서 서로 눈감아주고 있는 게 일본야구의 현실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이른바 역지명 제도를 통하여 드래프트 1, 2순위까지는 사실상 선수 본인이 자기가 가고 싶은 팀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였다. 물론 이치바 야스히로(전 라쿠텐, 야쿠르트)처럼 용돈을 과하게 챙기면 주간지 기사로 까발려지고 제재를 받지만. 은퇴식과 응원만으로 가고싶은 팀을 고를 정도로 세상 그렇게 순진하지는 않다.
  4. 그러나 그해 일본시리즈 MVP는 2승을 거뒀던 스기우치 토시야가 가져갔다.
  5. 사와무라 상웬 하위권팀의 에이스가 가져갔다.
  6. 그 중 가장 유명한 홈런이 바로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풀리그 라운드에서 이대호에게 맞았던 장외홈런.
  7. 실제로 구글에 쳐보면 와다 츠요시보다 이 처자가 나온다.
  8. 승리일 땐 20개 추가 완봉승일 땐 30개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