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우치 도시야

(스기우치 토시야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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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의 에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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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진군 입단회견. 왼쪽은 하라 타츠노리 감독

요미우리 자이언츠 No.18
스기우치 도시야 (杉内俊哉)
생년월일1980년 10월 30일
국적일본
포지션투수
투타좌투좌타
프로입단2001년 드래프트 3위
소속팀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2002~2011)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2~)
2005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가와카미 겐신
(주니치 드래곤즈)
스기우치 도시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5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마쓰나카 노부히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스기우치 도시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03년 일본시리즈 MVP
니오카 도모히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기우치 도시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이시이 다카시
(세이부 라이온스)

1 개요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좌완투수. 좌완 스리쿼터 투수들의 모범적인 견본으로 평가받는 깨끗한 폼을 지니고 있으며, 이상적인 릴리즈포인트에서 뿌리는 직구와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1]의 변화구로 상대를 요리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1980년생 선수들을 통칭하는 마쓰자카 세대에서 마쓰자카를 빼면 팀 동료였던 와다 츠요시와 더불어 가장 성공한 선수.

2 후쿠오카 호크스 시절

가고시마 실업고등학교 시절 에이스로 활약하며 여름 고시엔 가고시마 현 예선에서 47.2이닝에 64탈삼진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보여주며 '남국의 닥터 K(南国のドクターK)'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1998년 여름 고시엔에서 1회전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으나 2회전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요코하마고등학교에게 8이닝 6실점(마츠뽕의 홈런 포함)으로 패전투수가 됐다. 하지만 현대회에서 엄청난 성적을 거둔지라 고교 졸업 후 촉망받던 유망주로 손꼽았다.

고교 졸업 후 일본실업야구팀인 미츠비시 중공 나가사키에 입사한 뒤 200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3라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했다. 데뷔 시절부터 투구폼 자체가 매우 깨끗하고 안정적이라 그런지 기복도 거의 없으며, 조정기였던 데뷔 첫 해 이후로는 2003년부터 현재까지 손가락 부상으로 시즌 아웃 된 2004년을 제외하면 단 한 해도 부진한 적이 없어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중흥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2003 시즌에 사이토 가즈미-와다 츠요시-스기우치 도시야-아라카키 나기사로 이어지는 황금 선발진의 일원으로 뛰며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 파리그의 수준급 투수로 성장하게 된다.

그 2004년의 부상이 강판된 후 분에 못이겨서 양 주먹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강타하다 셀프골절을 당한 흑역사급 경험이긴 하지만. # 그래도 넘치는 승부욕을 보여준 일화이며, 그 이후로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니 스기우치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호크스에서 남긴 성적만으로도 10년 통산 평균자책 2.92에 103승 55패 42완투 17완봉 1597탈삼진 WHIP 1.15라는 실로 괴물같은 기록. 이는 한때 센트럴리그를 풍미했던 6대 에이스 우에하라 코지(전 요미우리), 이가와 케이(전 한신), 카와카미 켄신(전 주니치), 이시카와 마사노리(야쿠르트), 미우라 다이스케(요코하마 디엔에이), 쿠로다 히로키(전 히로시마)랑 비교해봐도 그 누구보다 좋은 성적이다. 동갑내기인 괴동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비교해도 완투기록을 빼면 떨어질 게 없는 수준. 능력, 실적, 꾸준함 등 모든 면에서 실로 최고의 투수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왠지 일본야구, 아니 퍼시픽 리그에서조차도 최고의 투수라는 느낌은 거의 없는데, 안 그래도 호크스가 워낙 투수 강팀인데다가 전성기가 시작된 2003년은 하필이면 지금까지도 꾸준히 회자되는 사이토 가즈미, 스기우치 도시야, 와다 츠요시, 아라카키 나기사라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4선발 투수진이 결성된 해이기 때문. 그 중에서도 지금으로 치자면 다르빗슈 유에 맞먹는 괴물로 평가받던 사이토 가즈미에게 포커스가 워낙 집중된 경향이 커서 상당히 손해본 감이 있다.[2] 사이토와 아이들이라는 인상이 워낙 강하달까. 온갖 야구 커뮤니티가 마쓰자카 다이스케사이토 가즈미의 비교로 들끓었던 시대였으니. 팀 내에서도 사이토의 입지가 워낙 독보적이라 그가 부상으로 잠정은퇴하게 되는 2007년까지는 단 한번도 개막전 투수를 맡아본 적이 없다. 이후 마쓰자카는 메이저로 떠나고, 사이토는 잠정 은퇴하게 되어서 드디어 파리그를 좀 호령해보게 되나 싶더니 다른 괴물이...

그렇다고 사와무라 에이지사이토 가즈미처럼 비운의 에이스라든가, 미우라 다이스케쿠로다 히로키처럼 약팀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안타까운 에이스라는 이미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조강지처가 좋더라이와쿠마 히사시처럼 화려하게 재기한 것도 아닌 그냥 꾸준히 잘 하는 선수이기에 호크스 팬이나 타팀 팬이나 스기우치가 잘 던져서 이겨도 져도 그냥 스기우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제일로 무서운거여.

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11시즌 종료 후 FA권리를 행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어제까지는 FA 신청할 생각도 없었다. 평생 호크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라는 발언으로 신나게 까이는 중(...). 가고시마 출신이라 호크스의 홈보이인데, 고향팀을 져버린다는 자체가 호크스 팬들의 멘붕을 불러 일으킨 건 당연하다.

이미 FA 권리를 1년 남은 2010년 시즌 오프부터 싹수는 보였다. 소프트뱅크에서 LG 트윈스의 이른바 신연봉제와 비슷한 연봉시스템을 채택하면서 연봉산정에서 커리어 고과의 비중이 줄어들고 직전해의 성적이 비중이 높아진 것. 그때문에 스기우치는 연봉산정 시스템에 이의를 제기했고 연봉협상 석상에서 "구단이 이 시스템을 고집하면 나도 FA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라고 발언했다. 그런데 협상을 담당한 구단이사라는 분이[3] 당시 9년동안 95승을 올린 리그의 에이스 투수에게 "FA 신청하면 손들고 나서는 구단은 있습니까?"라는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멍청한 대답을 했고 여기서 빡친 스기우치는 이미 2011년 시즌 들어가기 전에 구단에서 마음이 떠나 있었다.

구단 프런트가 머리를 박고 사죄를 하고 오 사다하루 구단 회장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직접 나서서 만류를 해도 모자랄 판에 스기우치가 FA를 선언한 이후에도 미적지근한 대응으로 일관했고, 기껏해서 성의를 보인다는 게 요미우리와 같은 대우였다. 결국 모두의 예상대로 스기우치는 호크스를 떠나서 요미우리로 이적하게 되었다. 결국 그 이사님은 스기우치 이적의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내야 했다. 소뱅이나 여기나 그놈의 신연봉제와 막장 프런트가 문제다.

네이버에서 일본프로야구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키무라 고이치 기자는 이 과정이 석연치 않다면서 의혹을 제기했다. 퍼시픽 리그 관중동원 1위를 기록하면서도 선수들의 연봉상승으로 재정압박에 시달리는 소프트뱅크와 당장 선발로테이션을 채울 선발투수가 절실한 요미우리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을까하는 견해를 피력한 것. 실제로 소프트 뱅크는 스기우치에 대한 보상으로 선수대신 금전을 선택했고 이 점은 두터운 선수층으로 기회를 못잡는 유망주들이 넘쳐나는 요미우리의 선수층을 생각하면 약간 의혹이 남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뱅이 이후 주축 선수들이 빠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돈지랄브래드 페니와 윌리 모 페냐를 영입한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일 가능성은 별로 없는 듯. 막상 그 둘은 다 망했고, 특히 페니는 NPB 역대급 먹튀 용병이었기에 전혀 빈자리를 채우진 못했지만.

어쨌든 교진군에 입단, 에이스 번호인 18번[4]을 달고 뛰게됐다. 그리고 원 에이스인 빈볼러 우츠미 테츠야와 에이스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2012년 5월 30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 홈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9회말 투아웃까지 26 up 26 down을 시전하다가 마지막 9번 투수 타석 대타 나카시마 도시야에게 풀카운트에서 아쉽게 볼넷을 내주며 노히터에 만족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 해당 경기 장면

결과적으로 2012년 시즌에서는 163이닝을 던지며 12승 4패, 평균자책 2.04, WHIP 0.98, 탈삼진 172개를 기록하며 요미우리의 세리그 우승에 큰 공헌을 하며 돈값을 톡톡히 했다. 다승에서는 우츠미에게 밀렸으나 그 외 세부성적으로는 에이스로 꼽기에 손색없는 좋은 기록을 남겼다. WHIP과 탈삼진의 경우는 리그 1위.[5] 특히 시즌 초반 거인이 개삽을 푸고 있을 때 연패를 계속 끊어주며 거의 홀로 팀을 지탱했다는 점 때문에 팬들의 평가도 매우 좋다. 그러나 정작 막판에 어깨부상이 도지면서 중요한 클라이맥스 시리즈일본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으로 선발되었으나 대표팀 합숙 훈련 도중 숙소에서 한 여성과 밀회하여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프라이데이에 잡혀 크게 곤욕을 치뤘다. 스기우치는 2003년에 결혼한 유부남. 이걸로 이와쿠마 히사시에 이어 합법 대열 합류 결국 요미우리 구단으로부터 엄중 경고 조치와 함께 벌금 징계에 처해졌고니오카 꼴 안난게 어디냐, 이 때문인지 브라질전에서 2이닝 1실점, 대만전에서는 불륜세이브블론세이브를 할 뻔 하는 등 WBC에서의 폼도 영 좋지 않다.

2013년에는 전년도보다 떨어지긴 하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성적을 거뒀다. 최종 153이닝 11승 6패 ERA 3.35.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선 그럭저럭 호투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서 2경기 선발 등판해서 두 번 다 2이닝도 채우지 못하는 등 대차게 말아먹으며 교진팬들에게 역적으로 찍혔다. 그리고 두 경기 모두 단신 미마 마나부에게 패하면서 미마의 일본시리즈 MVP 수상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14년에도 10승 6패 방어율 3.16으로 그럭저럭 던졌고 한신과의 클라이막스 3차전에 출전해 5.1이닝 2실점으로 선방했지만 이 날은 불펜이 털리며 팀은 패전하고 본인은 노디시전을 기록했다.

15시즌엔 방어율 1위 순항을 하기도 했으나 어린이날에 0.2이닝 6실점으로 거하게 말아먹고 나서 전반적으로 흔들리다 7월 21일 이후로 1군에서 자취를 감췄다. 현지에서는 만성적인 엉덩이 통증으로 구속이 저하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결국, 10월에 오른쪽 고관절 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같은 팀의 다른 선수들은 고관절 수술 후 1년만에 복귀했다고는 하는데, 스기우치는 수년 동안 참았던거라 언제 복귀할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15시즌 최종 성적은 6승 6패 ERA 3.95. 결국 연봉이 5억엔에서 5천만엔으로 무려 90%나 삭감되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 최다 연봉 삭감액.#[6]

2016년 8월 15일 현재, 올해 1군 등판 기록은 없다. 먹튀테크

4 플레이스타일

일단 최고구속은 150km/h이긴 하나 이건 별 의미없는 최고기록에 불과하고, 실제 경기에서 던지는 직구 평속은 140km/h 전후에 불과하다. 컨디션에 따라서는 130 중반까지도 떨어지는 편. 이러한 점 때문에 단순히 기록만 보고 똥볼 피처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스기우치는 엄연히 직구를 주무기로 하며 변화구를 섞어서 던지는 파워피처 타입의 선수에 속한다.

그 증거로 탈삼진율이 엄청나게 높은데 2013년까지의 통산 K/9가 9.40. 이는 1000이닝 이상을 기준으로 일본프로야구 역대 2위에 해당한다.[7] 이러한 투구가 가능한 이유는 간결한 투구템포와 릴리즈에서 뿌려져 나오는 직구 덕분에 구속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인데, 실제로 타자가 느끼는 체감상으로는 140 후반대의 직구와 맞먹는다고 한다.

게다가 직구를 뒷받침해주는 변화구가 무시무시하다는 점도 직구의 위력을 높여주는 데 한몫 한다. 스기우치의 커브는 일본프로야구계를 대표하는 커브 중 하나였으며, 커브를 밀어내고 주력으로 삼은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은 마구로 평가받고 있는 수준. 탈삼진이 많다고 이닝을 못 먹어주는 것도 아니고 평균 7이닝 이상을 꼬박꼬박 먹어주니 그야말로 이상적인 선발투수라고 할 수 있다.

5 기타

1980년생에 2016년 기준 37살이지만 2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안이다.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등 국제경기에서 자주 마주치는 선수.

[1] 니코동 주의

2013년 WBC 대만전에서 불펜피칭하는 장면에서

ちょっと心配ですがブルペンには杉内がいます [조금 불안하지만 불펜에는 스기우치가 있습니다!]

해설가의 말이 끝나고 불펜 피칭을 힘차게 던지는데 되 받는 장면에서 받지를 못하고 그 순간 NEC의 광고가 흐르는 장면이 절묘해서 니코동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1. 팜볼에 가까운 무회전이라고 한다.
  2. 사이토 가즈미는 96년 드래프트 1라운더로 구단에서 애지중지하던 유망주였으나, 어깨부상으로 오랜동안 제 활약을 못한 '비운의 에이스'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걸 완전히 깨고 나온게 바로 2003년 시즌.
  3. 고바야시 이타루라는 사람으로 치바 롯데 출신의 선수였다. 드래프트 때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두번째 도쿄대학 출신이라는 이색적인 이력 때문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공부해서 도쿄대 들어갈 정도인 사람이 고등학교 때부터 프로를 목표로 단련해온 괴물들과 상대가 될 리는 없고 결국 1군에서 등판 못하고 은퇴했다. 그래도 머리는 좋았는지 은퇴 후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스포츠 마케팅을 공부하고 일본으로 돌아와서 프런트로 활동했었다.
  4. 이 계보는 후지타 모토시-호리우치 츠네오-쿠와타 마스미에서 이어졌다.
  5. 양대리그 탈삼진왕 타이틀을 차지한 것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라고 한다.
  6. 다만 이러한 연봉 대폭 삭감은 스기우치가 먼저 제안한 것이다. 일본프로야구는 연봉 1억엔 이상이면 40%까지만 삭감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본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7. 역대 1위는 10.31의 노모 히데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