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히사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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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감독
이토 쓰토무
(2004 - 2007)
와타나베 히사노부
(2008 - 2013)
이하라 하루키
(2014)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한 우완 정통파 강속구 투수. 대만프로야구에서 현역 생활을 계속 이어나갔으며, 은퇴 후에는 해설자로 활동했다. 친정인 세이부에 복귀해서 2군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후에 1군 감독을 역임하였다.

2 선수시절


1994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 표지모델 와타나베.[2]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뽑혔지만 사실 세이부에선 다른 선수를 지명하려고 했다. 신인 때부터 1군에 정착하고 속구와 포크볼을 무기삼아 3년차인 1986년 시즌 최다승과 최다탈삼진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1988년과 1990년에도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히가시오 오사무, 쿠도 키미야스, 궈 타이위엔[3], 이시이 타케히로 등과 함께 선발 마운드를 지키며 세이부 왕조 시대를 지탱했다.

치밀한 제구력보다 강속구와 힘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의 투수였으며, 탈삼진을 많이 뺏어냈지만 반대로 피안타와 피홈런도 많이 허용했다. 이런 스타일의 투수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노쇠화로 인한 구위의 약화가 나타난 이후에도 전성기 시절의 투구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선배 투수이자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히가시오 오사무가 강속구가 통할 때 투구 스타일에 변화를 주라는 충고를 했지만 성공에 이르진 못했다.

1997년 시즌을 마치고 세이부에서 방출 된 후, 노무라의 ID야구를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노무라 카츠야 감독이 이끄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했다. 철지난 것으로 여겨지던 노장 선수들을 잘 활용한다고 해서 '노무라 재생 공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무라 감독 아래에서 부활을 기대했지만, 성적의 향상을 이뤄내지 못하고 시즌 후 전력 외 통고를 받았다.

이 이후 현역 은퇴를 결정하고, 야구 해설자 계약을 맺었지만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의 추천에 의해 지도자 공부를 위해 대만으로 건너가 프로팀의 투수 코치로 취임한다. 그러나 의사소통이 곤란했던 것으로 당시 대만프로야구계에서 기술고문을 맡고 있던 궈 타이위엔에게 통역사를 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와타나베가) 스스로 던져 몸으로 가르치면 좋겠다"고 조언을 받고 급히 선수 겸 코치로 현역에 복귀했다. 완급조절을 구사한 투구의 결과 입단 1년차에 18승을 거두며 다승, 탈삼진, 평균 자책점 부문 3관왕을 기록하는 등 대만 야구계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활약했다. 2001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3 감독시절

은퇴 후에는 TV 해설자, 스포츠신문 평론가를 거쳐 2004년에 세이부 2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2005년부터는 2군 감독을 겸임, 2007년부터는 2군 감독만 맡았다. 2008년 이토 쓰토무의 후임으로 1군 감독 자리에 올랐다. 2007년 B클래스의 팀을 취임 1년만에 퍼시픽리그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같은 해 아시아 시리즈도 제패하였고 이러한 공적을 높게 평가받아 2008년 쇼리키 마쓰타로 상 수상자가 되었다. 에 선출되었다. 세이부 역대 감독 중 1 년 만에 일본으로 이끈 것은 히로오카 타츠로, 모리 마사아키, 이토 쓰토무 에 이어 4명째다.

그러나 2009년~2013년 기간 팀을 리그 및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지 못하고 2013년 10월 사임을 표명하였다. 재임 기간 중 나카무라 타케야, 아사무라 히데토, 아키야마 쇼고 등 젊은 야수진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화 내지 않는 것을 지도 방침으로 삼고 있지만, 전문성이 결여 된 사람을 매우 싫어한다. 대만 시절, 신인이면서 소질이 충분해 연습하지 않아도 활약하여 경영진이 참견하지 않았던 투수를 불러내 꾸짖거나 실수를 저지른 후에도 하이파이브 하는 선수를 보고 호통친 적도 있다. 세이부 2군 감독 시절에도 "어엿한 야구 선수가되기 전에, 우선은 한 사람의 사회인이 되어야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으며, 젊은 선수들의 긴장감이 결여 된 태도에 대해서 엄격하게 대했다.

4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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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에는 큰 키와 슬림한 몸매, 잘생긴 얼굴로 여성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남성의 주적탈모가 시작되면서 여성 팬들의 인기는 점차 줄어버렸고, 대만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포장마차 밥에 빠진 것이 원인이 되어 지금은 전형적인 대머리 과체중 아저씨가 되었다는 슬픈 일화가 있다. 선수들에게도 "지금은 믿을 수 없겠지만 옛날에 꽃미남으로 알려졌다"고 자학적으로 농담을 했다.

메르세데스 벤츠를 애용했으며, 당시 팀 내에는 프랜차이즈 최고참이던 도이 마사히로[4]히가시오 오사무외에 벤츠를 타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지만, 그 룰을 깨고 벤츠를 구입했다고. 그 이후 후배 선수들이 잇따라 벤츠를 구입하여 "내가 벤츠해금의 선구자가 됐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입단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의 관리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와타나베 본인조차, 관리를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감독이되면 절대로 저런 관리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예전 팀 동료였던 쿠도 키미야스기요하라 카즈히로 한테서 "프로 야구 투수로는 최고의 존재"라고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중학교 시절부터 흡연을 하는 등 자기관리가 썩 뛰어나지는 않았음에도 폐활량은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근육도 강해서 한 시즌 200이닝 이상을 던져도 경기 후 전혀 마사지를 받지 않은 일화를 들고 있다. 기요하라는 팀 후배인 키쿠치 유세이와의 대담에서 와타나베 감독과 시오자키 테츠야 코치를 극찬했다.
  1. 현역 시절 배터리를 이뤘던 이토 쓰토무와 함께
  2. 이는 그 해 메이저리그가 선수노조 파업으로 인해 월드 시리즈가 열리지 않아서 미국 야구팬들이 볼 수 있는 가을야구라고는 일본시리즈밖에 없었던 사정에서 연원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전 경기가 중계되기도 했다고.
  3. 대만 출신의 투수, 일본명은 카쿠 타이겐
  4. 2군 타격코치,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성장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