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도 키미야스

(일본프로야구/감독)
세리그 감독 | 파리그 감독
70px나시다 마사타카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65px츠지 하츠히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65px후쿠라 준이치
(오릭스 버팔로즈)
70px이토 쓰토무
(치바 롯데 마린즈)
65px쿠리야마 히데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65px쿠도 키미야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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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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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소프트뱅크의 감독! 얼핏보면 가수 최헌같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No.81
쿠도 키미야스 (工藤公康)
생년월일1963년 5월 5일
국적일본
출신지아이치 현 토요아케 시
출신학교나고야전기고교 (아이치)
포지션투수
투타좌투좌타
프로입단1981년 드래프트 6순위
소속팀세이부 라이온즈 (1982~1993)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4~1999)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0~2006)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007~2009)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10)
지도자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2015~)
199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이시이 다케히로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9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마쓰이 가즈오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마쓰나카 노부히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86,87년 일본시리즈 MVP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라이온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역대 감독
아키야마 코지
(2009 - 2014)
쿠도 키미야스
(2015 - 현재)
현임감독

1 개요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전 프로야구 선수. 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통산 224승 142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3.44의 성적을 기록한 대투수로, 그가 거둔 통산 224승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1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투수분업화가 이루어진 요즘에 기록한 200승은 카네다 마사이치의 통산 400승에 버금가는 대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별명은 에나츠 유타카의 뒤를 잇는 '우승 청부사'. 세이부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다이에20년짜리 비밀번호를 끊고 퍼시픽 리그의 강자로 거듭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요미우리에서는 노장의 관록으로 요미우리가 센트럴 리그 정상을 되찾는 데 한몫을 했다. 하지만 요코하마는 구제할 수 없었다. 지도자로서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최초 2연패를 달성시켰다.

일본프로야구의 제이미 모이어라 불릴 정도로 선수생활을 오래 지속한 것으로 유명한데, 데뷔 당시에는 정통파 투수였다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기교파 투수로 변신했다는 점은 송진우와 비슷하다. 하지만 이제 이 기믹은 주니치야마모토 마사에게 넘겨야 될 듯. 그러나 야마모토는 50세까지 뛰고 은퇴했다.

2 선수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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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80년대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1981년 고3 때 코시엔 여름대회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 해 드래프트에서 6순위로 지명받아 1982년에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하였다.

1980년대 세이부 황금시대 당시 투수로 중심투수로 활동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85년 8승3패 평균자책점 2.76을 기록하며 평균자책점 부문 리그 1위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1986년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상대로 4차전까지 1무 3패 후 치러진 5차전에서 1대1 동점 상황에서 연장 12회까지 역투하고, 본인도 답답해서 직접12회말에 끝내기 안타를 쳐 팀에 승리를 거둬, 1무 3패 후 역스윕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 숨은 주역이 되고, 본인도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한다. 1987년 일본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6차전을 완투승으로 장식하는가 하면, 그 해에 팀 선배인 히가시오 오사무와 평균자책점 1위 쟁탈전을 하여 결국 여기서 승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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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중심투수로 활약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이후 FA를 선언해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하였으며, 당시 만신창이였던 팀 분위기를 개선하는데 일등공신[1]이 되면서 1999년에는 팀에 35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주게 된다. 당시 상대는 선동렬, 이종범, 이상훈 등의 한국인 삼총사가 있었던 주니치 드래곤즈. 1차전에 선발로 나서서 13탈삼진 완봉승을 거두면서 일본시리즈 우승경력 7번의 관록이 허세가 아님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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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청부사로 불린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호크스를 우승으로 이끌며 다이에의 과감한 투자에 보답한 뒤, 200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2000년2002년에도 리그 우승 -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여 최초로 3개구단에서 우승을 차지한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2004년 8월 17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도쿄돔 홈경기에서는 통산 200승[2]과 함께 10승 7패를 평균자책점 4.67을 기록, 40대 나이로는 역대 세번째로 시즌 두자리 승수를 거둔 투수가 되었으며,[3] 2006년까지 요미우리에서 뛴 후, 요미우리로 이적한 카도쿠라 켄의 보상선수로 2007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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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열심히 뛰었던 그러나 팀을 구제하진 못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절.

2009년 5월 26일 교류전에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전에서 구원등판하여 승리투수가 돼 센트럴리그 최고령 승리투수(46세 20일) 기록도 세웠으며, 이후 이 기록은 2009년 7월 1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전에서 승리투수가 되면서 46세 1개월 25일로 다시 경신하였다. 이후, 팀이 3년 연속 꼴찌가 확정되자, 팀 리빌딩 차원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방출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현역에서 계속 뛰기를 희망 중. 다만 고령이라는 점도 있고 구위도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 타팀에서 오퍼가 올 가능성은 적어보였으나 처음 프로에 입단했던 팀이였던 세이부 라이온즈로 복귀하는 쪽으로 확정되었다. 실로 16년만의 친정 복귀. 그리고 만 47세의 현역으로 일본 기록을 또 갈아치우게 생겼다(…). 분위기 상으로는 은퇴 직전 친정팀 유니폼이라도 입혀서 은퇴시켜주자는 세이부 팬들의 분위기가 반영된 듯. 당시 감독은 현역 시절 팀 후배(2살 연하)였던 와타나베 히사노부 였다. 세이부의 전성기 시절 배번호 47번은 같은 좌완투수 호아시 가즈유키가 달고 있어서[4] 대신 55번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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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결과적으론 유증의 미를 거두지 못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그러나 2010 시즌에는 왼쪽 팔꿈치와 허리 부상으로 인해 10경기에서만 출장한 채 무승 2패 평균자책점 10.50으로 부진하면서 세이부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다만 본인은 50세까지 뛸 것이며, 일본에서 안 된다면 한국 등 타국리그에 가서라도 뛰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3 은퇴

그러나 그도 결국 선수생활에 한계를 느끼고, 2011년 11월 24일자로 선수생활을 접고 베이스타즈의 감독직을 수락했다. 이례적으로 코치 경력 없이 즉시 감독 내정이 된 케이스. 베이스타즈가 다음 시즌 리그 참가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감독 활동 여부는 불확실하나 베이스타즈의 매각협상에서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위해 과감하게 베이스타즈 출신인 쿠도를 낙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코치진 선임 문제와 선수 겸 감독의 허용 문제로 구단과 이견차를 보이다 끝내 결렬되었고, 요코하마 측에서는 요미우리 OB 출신의 나카하타 키요시를 선임하였다. 다만 쿠도 키미야스도 감독직에 대한 큰 집착 없이 선수생활 연장과 감독직 수락 사이에서 고민하던차에 협상에는 들어갔는데 서로 맞지 않아서 결렬되었으니 크게 아쉬울 일은 없는 셈.

2011년 12월 25일 공식적으로 선수생활 은퇴를 발표하였다.

4 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

은퇴 후 3년 동안 야인생활을 했다. 야인생활을 하면서도 쓰쿠바 대학 대학원에 등록하여 운동생리학과 컨디셔닝 등에 대한 강의를 수강하는 등 지도자가 되기 위한 준비는 꾸준히 해왔다. 아내의 병간호 문제로 2014년 시즌 종료 후 사임을 발표한 예전의 팀 동료 아키야마 코지의 뒤를 이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전년도 일본시리즈 우승팀을 이어 받아서 부담이 엄청난 상황임에도 불구, 구단의 돈질로 긁어 모은 선수들을 잘 활용하면서 직전 해보다 더 무시무시한 성적으로 퍼시픽리그 사상 최고속 리그 우승 기록을 세우면서 팀을 리그 2연패로 이끌었다.

타 팀으로 가면 1군 주전으로 뛸만한 선수들이 벤치와 2군에서 줄줄이 대기하면서 기회가 없어서 뛰지를 못하는 등 남아도는 선수들을 주체할 수 없는 거대 전력을 받은 데다, 경기 시작부터 철저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경기가 승리로 끝나야 비로소 웃는 표정을 짓던 전임 감독과 는 달리 경기 도중에도 상황이 의도대로 풀리면 기뻐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덕분에 타 팀의 팬들로 부터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덕아웃에 앉아있는 팔자 좋은 팬 아저씨라는 야유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지도자 경력없이 갑작스럽게 감독자리를 맡은 초짜라는 취임 당시의 우려와는 달리 마치 감독생활을 10년은 넘게 한 듯한 통찰력과 안목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 하세가와, 혼다 등 주전급이 시즌 아웃 수준으로 빠진 자리에 후쿠다, 다카타, 다카야[5], 가와시마, 아카시 등 백업급 선수들을 기용하면서 완벽하게 메워왔고, 고비나 승부처마다 기용하는 대타는 할 때마다 성공을 거두는 등 절대로 그냥 최강급 전력을 이어받아 편하게 놀고 먹는 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게다가 투수 출신이라서 로테이션과 불펜 운용의 정교함에 있어서는 전임 감독보다 훨씬 나은 수준이며 전년도 까지 유망주 수준에 그치고 있던 투수들을 줄줄이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선발 로테이션을 3개를 꾸려도 될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투수진을 구축하면서 본인이 괜히 명투수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소프트뱅크의 2015년 시즌을 보면 이 사람을 단순히 감독 데뷔부터 막강 전력을 받은 운 좋은 감독으로 평가하는 것은 본인에게는 상당히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이제 남은 것은 페넌트레이스와는 모든 면에서 양상이 달라지는 포스트 시즌의 단기전에서의 운용 능력을 증명하는 것뿐. 그리고 일본시리즈에서 이대호를 제외한 중심타선이 부진했으나 적절한 테이블 세터의 기용 등으로 우승에 성공하면서 단기전에서도 충분히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명장의 자질을 지녔음을 증명해보였다. 오토나리 겐지의 수술, 호아시 가즈유키의 은퇴로 좌완 선발진이 약해진 것은 고민

2016년 1월 18일, 90년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였던 사이토 마사키와 더불어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발표되었다. 후보자격 1년차만에 한번에 통과. 헌액식은 2016년 올스타전 중에 있을 예정. 감독 개인으로서는 그야말로 인생의 최절정기를 맞은 느낌.

그러나 집권 2년 차인 2016년, 현역 시절 모셨던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2년차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다. 교류전에서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는 등 6월 30일까지 2위 지바 롯데 마린스와 8.5게임 차, 3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9.5게임 차를 내면서 퍼시픽 리그 3연패가 유력한 듯 싶었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이 후 5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는 등 DTD를 시전하면서 교류전을 기점으로 연승 행진을 거듭한 니혼햄에게 8월 25일 자로 선두 자리를 내줬고, 끝내 9월 28일 자로 리그 2위가 확정되었다(...) 아직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남아있긴 하지만 일본시리즈 3연패에 실패할 경우 지도력 문제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을 피하기 힘들 듯 싶다. 그러나 결국 CS에서 2승4패로 패하며 3연패의 꿈은 사그라지며 시즌을 마감했다. 특히나 패배가 결정된 5차전에서 1회 4득점으로 크게 앞서나갔다가 이후 선발 셋쓰 타다시와 후속투수 히가시하마 나오의 대방화7점이나 내주는 대역전극을 허용하는 추태를 보이는 바람에, 한동안 까여도 할 말 없게 되었다.

5 기타

  • 노무라 카츠야가 세운 기존 1군 시즌 연속 출장기록인 26시즌을 넘어선 무려 29시즌 동안 활약하면서도[6] 승리를 거두지 못한 시즌은 단 3시즌(1984년, 2008년, 2010년)뿐일 정도로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하다. 선동열과 같은 1963년생인데 선동열이 은퇴한지 10년을 넘어서도 계속 현역에 있었으니.
  • 하지만 정말 의외의 사실이면서 미스터리한 것이 이 사람 헤비 스모커다(...). 물론 투수라서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7] 그래도 46세까지 프로 생활하는 사람치고는 대단히 놀라운 일. 본인도 몇 번이나 담배 끊어야지 하고 결심하고 실행한 적이 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그냥 포기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대신 다른 쪽으로 몸관리는 철저해서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농가와 직접 계약해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야채만 주문해서 먹는가 하면 웨이트 트레이닝에도 큰 공을 들이는 등, 버는 만큼 자기 몸에 투자하는 것도 아끼지 않았다.
  • 이러한 몸 관리에 대한 관심은 은퇴 후에도 이어져, 야인생활동안 츠쿠바 대학 대학원에 등록해서 주로 수강한 과목이 스포츠 생리학과 컨디셔닝 관련 과목이었으며 감독이 된 현재도 가장 최우선시 하는 것이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이다. 감독으로서의 지론 중 하나가 "부상을 당하면 아무리 좋은 기량을 가지고 있더라도 소용 없다."이며 "1군 레벨의 선수쯤 되면 기술 향상보다 본인이 다치지 않고 한 시즌을 치르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감독 취임 첫해 투수 운용과 관련하여 "불펜 투수가 한 시즌에 60 경기 이상 등판 하는 것은 무리다. 내가 재임하고 있는 동안에는 불펜투수의 등판을 시즌 60경기 안 쪽으로 제한하겠다"라고 선언하고 그대로 실천 중이며 부상이 잦은 선수들에게는 트레이닝 방법의 전환이나 식생활 개선법을 직접 고안해서 추천하는 등 본인 괜히 현역시절 장수만세의 커리어를 쌓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 "감독은 경기를 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상을 당하는 것도 아니라서 쉴 필요가 없다"면서 휴식일에도 1, 2군을 오가면서 정력적으로 선수들의 컨디션과 부상여부를 부지런하게 체크하고 있다. 선수들이 특별한 부상이 없더라도 피로의 조짐이 보이면 과감하게 엔트리에서 제외해서 휴식을 주고 그 기간 중에 2군에서 기회를 엿보며 노력하는 선수들로 하여금 그 빈 자리를 채우게 함으로써 컨디션 관리와 선수단에의 동기부여라는 두가지 토끼를 잡고 있는 중이다. 컨디션 관리에 관해서는 "(구단에서 돈질로 선수들을 긁어 모아서) 선수층이 그렇게 두터우니까 가능하지"라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까'들도 선수들에 대한 동기부여에 대해서는 다들 인정할 정도. 그러한 선수단 운영이 그 전까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깜짝 스타들이 속속들이 등장하여 물샐 틈 없는 시즌 운영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 일본야구계의 대표 정자왕. 2남 3녀의 아버지이다. 이중 장녀인 쿠도 하루카는 현재 골프선수로 활동 중이고 장남인 쿠도 아스카는 탤런트로 활동하고 있다. 쿠도 아스카는 일본의 사회인야구를 다룬 드라마인 루즈벨트 게임에 비중있는 역할로 출연하기도 했다.
  1. 특히 자신의 승수를 포기해가면서 웬 당돌한 신인급 포수를 조련한데 큰 공을 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2. 7회말 승부를 결정짓는 2점 홈런을 날려 결국 그 홈런이 결승타점이 됐고, 4-2 완투승을 거두며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당시 쿠도가 친 홈런은 자신의 프로생활 첫 홈런이었으며, 이는 데뷔 후 최고령 첫 홈런 기록이기도 하다.
  3. 1번째는 한신 타이거스와카바야시 타다시, 2번째는 롯데 오리온즈무라타 쵸지.
  4. 호아시는 쿠도에게 양보하겠다고 했으나 쿠도가 정중히 사양하였다.
  5. 사회인 야구에서 하쿠오 대학을 거쳐 프로에 진출하였으나 주전포수 자리를 잡지 못하고 통산 타율도 1할대에 머물러있으나 2008년 이후 무려 2504일만에 홈런을 기록하였다.
  6. 세계 프로스포츠를 둘러봐도 29년차는 엄청난 경력이다. 그런 쿠도 옹의 29년차 기록을 뛰어넘는 이가 있으니 체코의 전설적인 아이스하키 골리인 도미니크 하섹의 31년차(실제로는 2010년 말 기준 28시즌 째 활약 중). 그리고 주니치 드래곤즈야마모토 마사히로가 2014시즌에 31번째 현역 시즌을 맞아 선발투수로 뛰었다. 오오오.
  7. 물론 하체 발달을 위해 그만큼 러닝을 많이 하겠지만, 그걸 빼곤 투수가 경기 중에 전력을 뛰어야 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그런데 타자인 경우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