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모리 마사아키(森 祇晶) |
생년월일 | 1937년 1월 9일 |
국적 | 일본 |
출신지 | 기후 현 기후 시[1] |
학력 | 기후 현립 기후 고등학교를 졸업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좌타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5~1974) |
지도자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2~1974) 야쿠르트 스왈로즈 (1978~1979) 세이부 라이온즈 (1982~1984, 1986~1994)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001~2002) |
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감독 | ||||
히로오카 타츠로 (1982 - 1985) | → | 모리 마사아키 (1986 - 1994) | → | 히가시오 오사무 (1995 - 2001)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역대 감독 | ||||
곤도 히로시 (1998 - 2000) | → | 모리 마사아키 (2001 - 2002) | → | 야마시타 다이스케 (2003 - 2004) |
1 소개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현역 시절 소속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 당시 주전 포수로 팀을 받쳤고, 감독으로서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본명은 모리 마사히코(森 昌彦) 였으나 1986년 마사아키로 개명했다.
2 선수시절
당초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었으나 집안 사정으로 요미우리에 입단하였다. 미즈하라 시게루,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했다. 빠른 두뇌회전, 늘 연구에 노력하는 자세, 상대 타자의 약점과 상대팀 배터리의 볼배합을 모조리 기억하는 암기력 등 우수한 기량을 갖춘 당대 최고의 포수로 명성을 날렸다. 또한 캐칭 기술도 좋아서 폭투 내지 패스트볼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고, 이러한 모습으로 그의 표면적인 성적에 비해 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막대하여 선수 시절에 이미 "V9의 두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또한 강견을 바탕으로 높은 도루 저지율을 자랑하며 도루를 시도하는 상대 팀 주자는 전부 죽는다(잡힌다)는 의미에서 "몰살의 모리"라는 별명도 있었다. 부상에도 강해 좀처럼 결장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카와카미 감독은 그를 안주시키지 않기 위해 계속 아마추어 계에서 우수한 포수들을 영입하였고, 모리는 카와카미 감독의 그러한 행태에 대해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라고 생각 했지만 영입된 새로운 경쟁 포수들에게 절대 뒤쳐지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2] 일본 시리즈에서 상대 할 퍼시픽리그의 전력을 분석하기 위해 난카이 호크스의 라이벌 포수 노무라 카츠야 집에 방문하기도 했다. [3]
타율은 높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필요할 때 한방을 쳐 주는 클러치 능력이 뛰어났다. 같은 시기 1루수 오 사다하루,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팀의 일본 시리즈 9연패에 기여했다.[4]센트럴 리그 - 일본 시리즈 10연패 달성에 실패한 1974년 시즌[5]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나가시마 시게오도 모리와 같은 해에 은퇴했다).
3 지도자 시절
현역이던 1972년 부터 요미우리의 배터리 코치를 겸임했다. 은퇴 후, TV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요미우리 팀 선배 히로오카 타츠로가 감독을 맡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1978년과 1979년에 팀의 배터리 코치로 활동하면서 1978년 스왈로즈의 사상 첫 센트럴리그 우승,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한다. 이후 1979년 히로오카가 최하위로 떨어진 팀 성적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자신도 코치직에서 물러나 잠시 TV 해설위원으로 돌아갔다가, 1982년부터 1984년에는 다시 히로오카 감독이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수석 겸 배터리 코치를 3년간 역임했다. 엄격한 관리와 통제로 대표되는 히로오카 감독의 관리야구 코칭 스타일에 따라 선수들의 경기장 밖에서의 사생활까지 관리하여 '모리 KGB', '모리 CIA'라는 원성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모리도 그 당시 히로오카의 이러한 방침을 선호하지 않았으며[6] 후에 히로오카와의 갈등을 빚으며 세이부의 코치직을 내려 놓았다. 다시 야인으로 지내던 중 1986년, 히로오카가 떠난 세이부 라이온즈의 감독직을 맡았고 이때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퍼시픽리그 우승 8회(1986년 ~ 1988년, 1990년 ~ 1994년[7])와 일본시리즈 우승 6회(1986년 ~ 1988년, 1990년 ~ 1992년)의 대업을 달성했다. 이 당시의 세이부는 네모토 리쿠오 단장의 총 지휘 하에 우수 선수를 많이 영입했다. 쿠도 키미야스-와타나베 히사노부-궈타이위엔(곽태원,일본명 가쿠 타이겐), 황금기 말기에 합류한 신진 에이스 이시이 타케히로 등이 포진한 강력한 선발진에, 카토리 요시타카와 시오자키 테츠야 등이 버틴 구원진이 돋보였다. 야수에도 내야의 사령탑이었던 유격수 이시게 히로미치를 리더로, 안정된 수비가 돋보였던 2루수 츠지 하츠히코, 이시게가 부상으로 인해 3루수로 전향하며 유격수를 맡은 타나베 노리오, 고교 졸업 후 첫 시즌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 기요하라 가즈히로, 호타준족의 대명사 아키야마 코지, 거포 스위치 히터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모리의 후계자이자 명포수 이토 쓰토무 등이 맹활약하던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그러나 1994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6차전을 앞두고 요미우리 구단의 모기업인 요미우리 신문에서 ‘세이부·모리 감독 사임’ 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내 상처를 입기도 했다. 게다가 이 소식은 도쿄돔 전광판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리고 결국 이 해 일본시리즈는 요미우리에게 패배하고 말았다.OB고 뭐고 그저 상대팀 감독 죽이기. 이제 자기들 성골 아니다 이거지.
감독에서 물러난 뒤 여러 군데에서 야구 해설 위원으로 지냈으며 요미우리 구단 프런트에서 나가시마의 후임 감독으로 고려되었지만 세이부에서 코치-감독을 역임한 것이 문제가 되어 거인 감독직은 꿈으로 끝났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문서 중 감독순혈주의 항목 참조.[8] 2001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감독으로 취임 했으나 2002년 시즌 종료를 앞두고 성적 부진으로 사임했다.
현재는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으며, 2005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5년 KIA 타이거즈의 하와이 스프링캠프에 방문한 적이 있다. #
2016년 제자 기요하라가 마약 복용 혐의로 피소됐을 때 현역 시절 선수 지도를 잘못 했다는 이유로 라이벌 노무라 카츠야에게 비판받았다. #
4 기타
수상경력으로 선수 시절에는 베스트나인 8번(1961-1968)을 차지했고, 올스타전은 11회 출장했다. 1967년 일본시리즈 MVP 였다.감독 시절에는 1986년과 1990년에 일본프로야구 최고 권위의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자산 관리를 철저히 한 덕분에 현역 시절에는 “구두쇠 모리”와 “기후의 저금통”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부친이 진 고액의 부채를 갚기 위해 대학 진학 대신 프로 입단을 선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그의 짠돌이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현역 시절, 고라쿠엔 구장에서 시합이 끝나면 자택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넣어라」라고 말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말의 뜻은 「밥솥의 스위치를 넣어라」라는 의미로, 모리가 집에 도착할 무렵 밥이 지어져 전기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철저한 절약의 결실로 지금도 고급 저택에 거주할 정도로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원래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지만 세이부 감독 2년차 부터 안경을 착용하면서 감독으로서의 풍모가 보였다고 한다.- ↑ 출생지는 오사카이다.
- ↑ <불패의 감독학>이라는 책에서는 모리 때문에 날린 요미우리가 날린 계약금과 연봉으로 10억엔은 넘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 ↑ 이 때의 에피소드로 노무라의 집에 다녀올 때마다 노무라의 옷을 꼭 한 두 벌씩 들고 왔다고 한다. 이 둘은 1992, 1993년 세이부와 야쿠르트의 감독으로서 일본시리즈에서 대결한다. 전적은 1승1패로 동률.(세이부는 '92년, 야쿠르트는 '93년 우승)
- ↑ V9시절 모든 일본시리즈를 출장한 선수는 오 사다하루와 모리 마사아키 둘 뿐이다
- ↑ 이 해 요나미네 카나메가 감독으로 있던 주니치 드래곤즈 에게 센트럴 리그 우승을 허용하며 교진군은 일본 시리즈 진출 자체에 실패했다.
- ↑ 세이부에서 선수생활 말년을 보낸 에나츠 유타카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밤 원정 숙소에서 점호를 마친 뒤 모리가 자신의 방을 찾아와서는 한숨을 쉬며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것은 아닐세. 다 감독 방침이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그가 안고있던 맘고생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세이부 감독에 취임한 뒤 선수단에 외박이라던가 육식 등 히로오카 시절 금지되었던 행동을 허용하고, 경기력이 저하되지 않는 선에서 선수들의 개인적 취미 활동도 허락하는 등 자신의 소신대로 선수단을 통솔했다. 결국 모리는 일본 시리즈 3연패와 퍼시픽 리그 5연패라는 넘사벽급 성적을 거두며 자신을 비판하는 여론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대신 어떤 천방지축을 신인 때부터 풀어놓고 키운 탓에 결국 자기관리 부족으로 인생을 망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 ↑ 1989년은 긴테츠 버팔로즈가 우승.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에 리버스 스윕(...) - ↑ 타 팀의 코칭 스태프를 역임한 뒤 요미우리 감독에 취임한 케이스는 1975년~1976년 시즌 다이요 훼일즈 투수코치를 역임한 후지타 모토시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