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오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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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히가시오 오사무(東尾修)
생년월일1950년 5월 18일
출신지와카야마
학력와카야마 현립 미노시마 고등학교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68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니시테츠 - 타이헤이요 클럽 - 크라운라이터 - 세이부 라이온즈 (1969~1988)
지도자 경력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1995~2001)
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감독
모리 마사아키
(1986 - 1994)
히가시오 오사무
(1995 - 2001)
이하라 하루키
(2002 - 2003)

1 개요

"세이부" 라이온즈의 원조 프랜차이즈 스타이자[1] 후쿠오카 - 사이타마로 이어지는 라이온즈 구단 역사의 산 증인

NPB세이부 라이온즈 소속 선수, 감독, 해설자. 명구회의 이사를 맡고 있기도 하다. 애칭은 성인 히가시오를 일본식 중국어 음독으로 표기한 톤비(トンビ).[2]

선수, 감독 생활을 오로지 니시테츠 - 타이헤이요 클럽 - 크라운라이터 - 세이부 라이온즈 1팀에서만 지내면서 활약한 에이스로 선수로써 통산 251승과 리그 우승 6번과 일본시리즈 우승 4번, 감독으로써 리그 우승 2번을 기록한 세이부 라이온즈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야구인이다.

2 데뷔 이전

당시 교토의 야구 명문고였던 헤이안 고교[3]에 합격해 진학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당시 와카야마 현립 미노시마 고교의 감독이었던 비토 타다시가 직접 미노시마 고교로 입학할 것을 부탁하여, 결국 미노시마 고교에 입학. 팀의 에이스, 4번 타자로써 활약하면서 1968년 팀을 춘계 코시엔에 진출시켜[4] 준결승까지 나아갔으나 그해 춘계 우승팀 오오미야 공고에게 역전패당해 우승엔 실패했다.

그리고 그 해 드래프트에서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1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했다. 그러나 사전 접촉도 없이 급작스레 지명된 것이라서 처음엔 부모랑 히가시오 자신이 반발하여 호세이대학 진학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 히가시오는 입단하기로 결심하고 부모님을 설득해 니시테츠에 입단하게 된다.

히가시오는 후에 "1위 지명이었기 때문에야말로 입단했다. 니시테츠는 1위 지명에 의해서 나의 위상을 지켜 주었다. 1위 지명이 아니면 니시테쓰에 입단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5]

3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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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테츠 시절의 히가시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니시테츠 라이온즈에 입단했지만, 초기엔 다른 선수들과의 실력차가 컸기 때문에 좌절감을 느껴, 구단 수뇌부에 야수로 전향할 뜻을 건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첫 시즌이었던 1969년, 일본프로야구를 뒤흔든 승부조작 사건인 검은 안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여파로 니시테츠 라이온즈선수 겸 감독이었던 나카니시 후토시가 은퇴와 동시에 사퇴하고, 에이스 투수였던 이케나가 마사아키와 주력 선수인 개쌍놈나가야스 마사유키[6], 요다 요리노부, 마스다 아키오 등이 영구제명 되거나 출장정지를 받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순식간에 팀 전력이 개발살났다. 이처럼 팀이 거덜나버리자 유망주 히가시오가 1군의 주력 투수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히가시오는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투수코치 카와무라 히데후미에게 연습 때 350~400구 등을 던지는 맹훈련과 동시에 슈트를 전수받아, 암흑기였던 라이온즈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된다. 이때부터 히가시오는 맹활약을 하면서 팀의 후쿠오카 연고 시절인 1969~78년의 10년간 통산 128승 17세이브, 1028탈삼진, 1975년 다승왕, 최다탈삼진 등의 호성적을 올리며 개판 5분전이던 라이온즈를 지탱하던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다.[7] 그러나 역시나 이 시기는 암흑기였기 때문에 무려 144패나 기록했고(...) 거기다 다패왕을 4번이나 기록하기도 했다(...) 심지어 3점 미만의 방어율을 기록한 적은 딱 2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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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헤이요 클럽 시절의 히가시오.

크라운라이터 시절의 히가시오.

하지만 이와 별개로 검은 안개 사건으로 암흑기에 빠지면서 경영악화 등의 악재까지 겹친 니시테츠 라이온즈는 결국, 1972년 시즌 종료 후 모기업이던 서일본 철도가 경영 포기를 선언하면서 "타이헤이요 클럽[8] - 크라운라이터[9] 라이온즈" 로 명명권을 팔면서 팀명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역시나 모기업이 없어 자금이 많이 부족했는지라 구단에선 선수들을 팔아서 간신히 연명해갔다. 그러나 팀의 에이스였던 히가시오는 중히 여겼기 때문에 1977년 시즌오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트레이드 요청을 해왔지만 구단 측에서 “히가시오의 방출은 구단의 죽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경영 당사자인 우리들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며 거절했다.

그렇지만 결국 라이온즈는 1978년 오프 시즌에 세이부 철도에 매각되어 1979년부터 세이부 라이온즈로 구단명을 바꾸면서 사이타마세이부 라이온즈 구장으로 연고이전하게 되었다.

세이부 시절의 히가시오.

히가시오는 팀이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름을 바꾸고 사이타마로 이전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고, 팀의 황금기가 찾아오면서 리그 우승 6번과 일본시리즈 우승 3번을 경험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고, 1982년 일본시리즈중간계투로 활약하면서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영예룰 누렸다. 이외에도 1983년, 1987년엔 퍼시픽리그 MVP를 수상하기도 했으며 1983년엔 최고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하는 등 본인의 선수생활 때의 황금기를 누렸다. 또 1983년~1987년 5년 연속으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고 1983년, 1985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 후 계속해서 활약하던 히가시오는 1988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251승 247패 23세이브, 1684탈삼진, 방어율 3.50

3.1 플레이 스타일

히가시오는 날카로운 슬라이더와 우타자 몸쪽을 파고드는 슈트를 축으로 타자의 몸쪽을 파고드는 거친 피칭 스타일로 유명했는데, 몸에 맞는 공을 던지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배짱 좋은 성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싸움 투구법’(ケンカ投法) 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 때문에 1986년에 몸에 맞는 공 때문에 분노한 긴테츠 버팔로즈의 외국인 용병 리처드 데이비스로부터 경기 도중 폭행당해 부상당한 적도 있었고 이 때문에 세이부 이외의 퍼시픽 리그 5개 구단에서 히가시오의 몸쪽 공격이나 몸에 맞는 공이 많은 것에 대한 비판이 집중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히가시오는 “몸쪽을 찔러 가는 것은 투수의 권리이다. 굳이 사과를 해야 할 것인가” 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투구 스타일 때문에 몸에 맞는 공의 갯수가 많아 통산 165개의 NPB 최대 기록을 갖고 있다(...) 히가시오는 이에 대해 “내가 프로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자신있는 구종을 생각하면 저런 투구 패턴이 아니면 안되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기의 도루왕 후쿠모토 유타카에게는 많은 도루를 허용했다. 후쿠모토에 약점을 간파당하면 보완했지만, 다시 후쿠모토에게 간파당했다. 후쿠모토가말하길 "(히가시오가) 홈에 빨리 던지고 싶은 마음이 왼쪽 어깨에 나왔다"고 했다.

4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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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시절의 히가시오.

은퇴 후 해설가 등으로 일하던 히가시오는 1994년 시즌오프, 모리 마사아키의 후임으로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에 취임한다.

이 해 드래프트에서 니시구치 후미야, 다카기 히로유키, 오제키 다쓰야 등을 영입했고 세이부 황금기의 주축을 담당했던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를 복귀시키는 등 전력을 보강했지만 첫 시즌인 1995년, 그 해 리그 우승팀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상대 전적에서 5승 21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는 등의 일로 인해 그 해 팀 성적은 3위로 마감했다.[10]

이듬해 1996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활약한 가와다 유스케를 영입에 성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주니치 드래곤즈로부터 시미즈 마사지마에하라 히로유키를 트레이드로 획득, 드래프트에서도 다카기 다이세이, 오토모 스스무 등을 영입시키면서 전력을 보강하는 등 2년 만의 리그 우승을 목표로 했지만 그 해 시즌도 엄청난 부진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내주고 간신히 3위를 기록하는 선에서 마감했다. 거기다 이 해 성적도 62승 64패 4무 승률 .492 로 마지막 4할 승률이었던 1980년 이래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1981년 이래 계속되어 왔던 5할 성적도 끝나버리고 말았다.[11]

1997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FA 이적한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후임으로 도밍고 마르티네스를 영입했고, 드래프트에서는 와다 가즈히로, 다마노 히로마사 등을 획득한 것 외에도 중심타자 스즈키 겐, 새로이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한 마쓰이 카즈오 등 젊은 선수들의 맹활약으로 3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선 야쿠르트 스왈로즈한테 패배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활약한 니시자키 유키히로트레이드로 영입,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활약한 나카지마 사토시[12] FA로 영입하는 등 전력을 보강했다. 그 해에는 팀내 중심 선수들의 활약으로 리그 2연패를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하필이면 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2승 4패로 패배해[13] 38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선물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1999년, 헤이세이의 괴물이라 불린 마쓰자카 다이스케[14]의 활약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치열한 리그 우승을 놓고 경쟁했지만 결국 2위를 기록하여 호크스에게 후쿠오카 연고이전 이래 첫 리그 우승(과 26년 만의 리그 우승)을 선물하고 말았다. 다음 해인 2000년에도 또다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리그 우승을 놓고 경쟁을 펼쳤지만 결국 또다시 2위로 끝났고 2001년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우승 경쟁에서 밀려 3위를 기록. 결국 2001년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1. 굳이 세이부를 강조한 이유는 라이온즈 구단의 전 역사를 통틀어서는 나카니시 후토시라든가 이나오 가즈히사등 쟁쟁한 선배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있기 때문이다. 히가시오는 이러한 선배들의 명맥을 이어서 팀의 암흑기를 견디고 연고지 이전 후의 과도기를 극복하여 후에 황금시대를 구축할 후배들에게 그 바톤을 넘겨주는 큰 역할을 했다.
  2. 별명이 일본식 중국어 음독이 된 이유는 본인이 마작을 좋아해서 그렇다(...). 일본식 마작의 용어는 주로 일본식 중국어 음독으로 이루어져 있다.
  3. 수많은 프로야구 선수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4. 야구부 사상 첫 코시엔 진출이었다.
  5. 근데 자신의 저서인 싸움 투구법에서는 “2위에도 들어가 있었고, 3위라도 들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6. 검은 안개 사건의 주동자.
  7. 이 당시 팀 동료로 백인천이 있었다.
  8. 1973~1976
  9. 1977~1978
  10. 이 해 성적은 67승 57패 6무 승률 .540
  11. 심지어 1980, 1981년은 전부 B클래스였다!
  12. 무려 포수 출신으로 28년 연속 1군 등록 이라는, 노무라 카츠야를 뛰어넘는 대기록을 가진 선수로 유명하다. 2015년 은퇴.
  13. 거기다가 팀의 패배를 병살타로 결정지었다(...)
  14. 입단 교섭 당시, 히가시오의 200승 달성 기념구를 선물로 주면서 설득했던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