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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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추존 국왕
국조 손보육의조 작제건세조 왕륭대종 왕욱안종 왕욱문원대왕 왕정정간왕 왕기조선국양헌왕 왕도
송악의 성주
신규 책봉왕륭태봉에 합병
묘호세조(世祖)
시호원렬민혜위무대왕(元烈敏惠威武大王)
능묘창릉(昌陵)
왕(王)
륭(隆)
문명(文明)
배우자위숙왕후(威肅王后)
아버지작제건(作帝建)
어머니원창왕후(元昌王后)
생몰년도? ~ 897년 5월

1 개요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 묘호는 세조. 시호는 민혜(敏惠).

초명은 용건. 자는 문명(文明). 작제건의 아들. 부인은 위숙왕후 한씨(韓氏)로 꿈에서 만나 결혼했기 때문에 몽부인이라고 불린다.

송악(개성) 일대를 다스리던 성주(城主) 출신이다. 호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지방 세력가들을 현재 학계에서 호족이라고 하기 때문에, 송악 일대의 호족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다만 고려사 등의 사료에서 왕륭 자신을 비롯, 이 시기의 지방세력가들을 가리켜 호족이라 한 예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왕륭은 토지 경제에 기반하기 보다는 예성강 포구를 통한 해상무역으로 세력을 키웠다. 송악 성주로서 평주의 박지윤과 함께 패서지역을 대표하던 유력세력이었으나 철원을 점령하고 황해도까지 세력을 뻗어온 궁예에게 896년 귀부했다. 이후 강원도 김화인 금성(金城) 태수로 있다가 1년만인 897년 사망했다.

궁예에게 "삼한, 숙신을 평정하고 싶으시면 송악을 수도로 하고 왕건을 기용해 그를 맡게 하소서."라고 진언했다. 자신의 기반인 송악을 내주고 궁예 정권의 수도로 활용하라고 한 점은 귀부한 다른 성주들이 제지기반을 인정받아 자신의 터전을 보존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언뜻 보면 궁예를 인정하고 따르는 것 같지만 아들 왕건을 송악성주로 궁성 공역 책임자로 기용하라고 권한 점을 볼 때 자신의 가문이 새 정권 내에서 유력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니면 보다 더 높은 뜻을 가지고 있었든가.

한편 초명인 용건(龍建)과 후명인 륭 그리고 그의 부친 작제건, 아들 왕건 등의 이름들이 그 가진 뜻이 너무 국가 창업이란 뜻을 너무 강하게 갖고 있다. 이름도 그렇지만 호경으로부터 내려오는 왕씨 집안에 얽힌 설화들은 그냥 당대의 그럴듯한 설화들과 당숙종까지 끌어들인 잡탕으로 현대인 관점에서 보기엔 윤색한 티가 너무 난다. 원래 이름은 왕륭이 아니었는데 고려 창업 이후 개명된 것이라 보는 설도 있다. 삼국시대 왕족들만 쓰던 성씨가 민간으로 퍼지기 시작한게 후삼국시대부터다.[1] 이때는 그냥 이름 앞글자 따와서 성으로 삼거나 그렇게 쓰다가 나중에 다른 성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즉, 왕건도 원래 왕씨가 아니었다고 본다. 신라 입장에서 보면 왕건은 수도에서 가장 먼 깡촌의 성주(城主) 출신이다. 원래 이름이 왕건이었다가 앞글자를 성씨로 썼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이 다를 수는 없으므로 왕륭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올렸다는 것이다. 사실 작제건-용건-왕건의 건자 돌림도 유가 관점에선 못 쓴다.[2]

2 창작물

드라마 태조 왕건에선 신구가 열연했다. 포지션은 봉신연의로 따지면 주문왕. 조상 누대에 걸친 왕씨 천하의 대망을, 도선의 예언으로 점지된 왕건에게 건다.

여러모로 주변 패서지역 호족들과는 달리 앞을 길게 내다볼줄 아는 인물이며, 작중에서도 패서 호족들 가운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모습으로 나온다. 위에 서술된 왕씨 천하의 대망을 위해서, 왕건에게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 교육을 철저하게 시켜 왕재로 길러낸다. 그로 인해 왕건은 어릴적부터 당나라, 발해, 일본 등 온갖 지역을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았고, 어린 왕건과 궁예의 대화를 볼 때, 왕륭은 특히나 왕건에게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궁예가 철원을 함락하고 호족들이 앞다투어 궁예에게 항복할 때 일부러 항복을 늦추는 모습을 보인다. 송악을 바쳐 궁예의 환심을 사고서 후일을 기약한다는 것.

허나 그 때문에 강비를 향한 왕건의 첫사랑을 깨뜨리는 냉혹한 일면도 있다. 강비, 그러니까 작중 이름인 연화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장사치에 불과한 강장자의 딸이며, 왕건에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 여겼다. 작중 설정상 왕씨 가문과 신천의 강장자 집안은 교류가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왕륭은 강장자가 장사치나 하면 족할 소인배라는 걸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강장자의 훗날 행적을 보자면 왕륭의 판단이 옳기는 했다. 물론 아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음의 큰 상처를 입었고, 이십대 후반에 접어들도록 연애나 결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업무에만 전념하여 하마터면 게이솔로로 살 뻔했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상기의 행적을 참고했는지) 궁예 정권에게 의도적으로 송악을 바친다. 금성태수로 좌천되어도 묵묵히 따르면서 아들 대의 천하를 확신한다. 신구 선생이 일갈하는 장면을 꽤 볼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왕건과 관련되어선 더욱 그렇다. 아직 왕이 되기 이전의 견훤궁예를 만났으며, 은근히 견훤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자신과 함께할 것을 넌지시 청하기도 했다. 견훤이 이를 완곡하게 거절하자 내심 아쉬워 하기도 했다. 다만 이후 견훤이 세력을 다지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자신이 실수할 뻔 했다며 아찔해 하기도 했다.
  1. 우리가 알고 있는 본관+성씨 개념의 완전한 성씨는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2. 다만 이때까진 유교는 불교에 비해 그 세가 크진 못했다. 그런 통일신라 말~후삼국시대에 굳이 유가 관점에서 이름을 지을 필요는 없을것이다. 후세인 현재에서도 유가 관점으로 볼 이유 또한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