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숙종

당의 역대 황제
6대 현종 명황제 이융기7대 숙종 무황제 이형8대 대종 예황제 이예
묘호숙종(肅宗)
시호문명무덕대성대선효황제(文明武德大聖大宣孝皇帝)
연호지덕(至德, 756년 7월 ~ 758년 2월)
건원(乾元, 758년 2월 ~ 760년 4월)
상원(上元, 760년 4월 ~ 762년 9월)
보응(寶應, 762년 4월 ~ 763년 6월)
이(李)
형(亨)
생몰기간711년 ~ 762년 5월 19일
재위기간756년 8월 12일 ~ 762년 5월 19일
당 제국 사도
전임 이성의이형
732년~738년
후임 이륭업
  • 생몰년 : 711년 당예종 경운(景雲) 2년 ~ 762년 음력 5월 18일 상원(上元) 3년[1] (51세)
  • 재위기간 : 756년 7월 12일[2] 지덕(至德) 1재載 ~ 762년 5월 18일 상원(上元) 3년 (6년 10개월)
    • 즉위식 : 756년 (음력) 7월 12일, 영무

1 개요

중국 당나라의 제7대 황제. 이름은 이형(李亨). 당현종 이융기의 아들로, 어머니는 원헌황후 양씨이다. 묘호는 숙종이며, 시호는 문명무덕대성대선효황제(文明武德大聖大宣孝皇帝)로 줄여서 무황제(武皇帝). 초명은 이여(李與).

2 생애

2.1 분조의 편성과 즉위

그가 즉위하게 된 배경은 756년 6월, 안록산의 난으로 현종이 (쓰촨)으로 피신하면서 관중에 태자를 남겨놓고 분조를 세운 것이 시작이다. 이 태자, 충왕 이형이 삭방번진으로 패잔병을 모아 북상하면서 금군의 추대로 피난지 영무에서 7월 12일 황제로 즉위한다.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8월 12일에야 이 소식을 들은 현종은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양위태상황이 선뜻 오르면서 논란을 불식시켰다.

하지만 이후에도 숙종의 고난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즉위시킨 신하들을 방위를 위해 이곳저곳에 배치하고 나자 문무 관원이 30명이 안될 정도로 분조의 규모는 조촐했으며 풀밭에서 조정을 세워야 할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본격 풍찬노숙 서바이벌 사람 손이 워낙에 없다 보니 심지어 아내인 장황후(장량제)는 영무에서 자식을 낳고 4일 만에 일어나서 병사들의 옷을 꿰멨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3]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 숙종은 박릉을 포위하고 있던 곽자의, 이광필. 그리고 안서번진, 하서번진 등에 명해 병사들을 이끌고 영무에 올 것을 명했으며[4], 오랜 친구인 명신 이필과 왕충사를 불러들여 그나마 조정의 위엄을 조금씩 세워가게 된다. 제오기를 기용, 소금전매법을 실시해 재정을 보충하기도 한다.

이로서 안록산의 거병의 의의는 퇴색되었고, 곧 안록산이 칭제하면서 민심은 당 조정으로 기울게 된다. 또한 안록산이 낙양에만 머물며 장안을 비워둔 것도 관중의 민심이 안록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는 결정타였다.

2.2 반격과 양경 회복

그럼에도 숙종이 즉위한 756년 하반기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으며, 하북이 넘어감은 물론 숙종이 직접 뽑은 장안수복군 대장 방관의 삽질과 동생인 영왕 이린강남독립 움직임으로 상황은 불리했다.

그러나 곽자의, 이광필의 활약과 이필의 책략과 복고회은을 통한 회흘(위구르 제국)의 지원으로 상황은 점점 숙종에게 유리해졌다.[5] 757년 안록산이 안경서에게 살해된 뒤 이광필은 태원을 지켜내고 채희덕을 박살냈으며, 장안 근교의 봉상(鳳翔)으로 행재소(임시수도)를 옮긴 숙종은 그 해 10월 양경을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숙종은 봉상을 떠나 10월 27일 장안에 입성했고, 757년 12월, 근 1년 반만에 숙종과 태상황 현종은 장안에 입성한다. 하지만 돌아온 현종은 숙종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숙종의 권력이 삐걱거렸고, 사사명의 투항이 반란의 종결을 의미하는 줄 착각한 것이 사사명의 난으로 이어지는 큰 원인이 되었다.

2.3 난이 계속되는 와중에 죽다.

758년 정월, 숙종은 연호를 건원(乾元)으로 바꾸고, 2월에 천보 3년 이후 '년(年)'을 재(載)로 세던 것을 다시 년으로 회복시켰다. 이렇게 758년은 건원 원년이 되었다. 하지만 범양절도사로 봉해졌던 사사명을 팽하려고 시도했던게 들통나면서[6] 사사명은 범양에서 재봉기하면서 의 안경서를 구원해버렸고, 그걸 막으려던 60만 당군이 지휘관 부재로 13만 사사명군에게 박살이 나고 만다. 이에 숙종은 (모함 등의 이유도 있지만) 곽자의를 원수에서 물리고 삭방절도사/병마원수에 이광필을 임명했다.

한편 사사명은 759년 3월 사용가치가 끝난 안경서를 참살하고 스스로 의 3대 황제를 자칭하고 이미 죽은 안록산은 태상황으로 추봉했다. 하지만 또 761년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가 사사명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다.

이런 와중에도 당조정은 손을 놓고 있었는데, 이는 군권을 장악한 환관 이보국과 장황후 등에 의해 당 조정이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이보국은 760년 현종의 남아있는 강한 영향력을 두려워하던 숙종 주위의 분위기를 이용해 흥경궁의 현종을 감로전에 유폐시키고, 고력사 등을 귀양, 안진경을 좌천시켰다. 숙종이 현종의 유폐를 반대해도 이미 막을 수 없었고, 현종의 알현마저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이러는 와중에 당숙종은 병이 났고, 점점 깊어만 갔다. 이보국은 762년에는 둘째 황자인 건녕왕 이담을 모함으로 죽여버렸고, 뒤이어 당현종이 5월 3일, 감로전에서 승하한다. 이 상황에서 이보국과 손을 잡고 있던 장황후가 환관 단항준과 공모해 5월 16일에 이보국과 태자를 죽이고 셋째인 월왕 이계(越王 李係)를 황제로 삼으려고 하자 이번엔 황후와 월왕마저 유폐시킨다. 이 충격으로 숙종 역시 5월 18일 승하하고 5월 20일 태자인 이예가 즉위하니 그가 당대종이다.

한편 이보국은 대종의 즉위 과정에서 황후와 월왕, 연왕 이현을 참살해 위협을 제거하고, 당숙종은 물론 당대종도 즉위시키는데 성공함으로서 세도의 정점에 오르나, 손을 잡았던 정원진에 의해 한 달 만에 실각하고 몇 달 뒤 암살당한다. 하지만 이보국은 환관의 손으로 최초로 황제를 즉위시키는 기록을 세우면서 앞으로의 환관 세도를 예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평가 - 중당의 혼란을 야기한 혼군

늙은 당현종이 망쳐놓은 상황에서 분조를 조직하고 당 황실을 살려낸 공로는 있으나 용인에서 많은 실수가 있었다. 친구인 이필을 중용한 것은 분명 잘한 것이었으나, 섣부른 장안 공격의 책임자를 방관으로 한 것, 범양 공격을 막고 양경(낙양-장안)의 수복에 집착한 것[7], 반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 끝난 것처럼 뒷처리에 들어간 것 등 미스가 많았다 이필을 뽑아놓고 그의 조언을 상당부분 뒤집은 셈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앞서 말했듯 재위 후반에는 환관 이보국과 장황후에 휘둘렸고, 특히 적장자 광평왕 이숙(廣平王 李俶, 후의 당대종 이예李豫)을 원수로 삼을 때를 전후로 이전에 군공을 세운 것 때문에 후계자 다툼을 할지 모른다고 여긴 둘째 건녕왕(建寧王) 이담(李倓)을 이보국과 장황후의 참소만 듣고 기어이 죽여버렸다[8]. 또한 사사명이 다시 난을 일으키게 빌미를 제공하고 안양하에서 60만의 참패를 빚은 것도 총지휘관을 일부러 선임하지 않은 숙종의 탓이었다. (이때 관군용사 환관 어조은도 처벌을 받지 않아 대종 대까지 문제를 일으킨다.)

여기에 더해 절도사에 대한 대접이 소홀했으니 절도사들이 등을 돌리는건 당연한 일. 게다가 난을 진압하기 위해 국경을 지키는 군대들을 내란 해결에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회흘과 토번까지 끌여들였으니, 결국 중기 (이후 말기까지의) 당나라의 거의 모든 문제(절도사, 회흘/토번, 환관, 외척)들이 숙종의 손을 거치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야말로 용두사미 격의 혼군. 현종 말년이 하도 막장 이미지라 그렇지 도리어 사태를 키워놓은 것은 숙종의 탓이 크다. 물론 최악의 막장 상황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으며, 오래 재위하지 못한 탓도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4 한국과의 관계 - 왕건의 선조?

한국사에서 가장 큰 떡밥은 그가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을 낳았다는 것. 그러기엔 9세기 말에 죽은 왕륭의 생몰년이 설명이 안되는데 고려의 사서를 바탕으로 기록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는 그를 태조 왕건의 고조부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애초에 말이 안되는 일이다. 앞에서 보듯 숙종은 안사의 난 이전엔 장안을 벗어난 적도 없고, 재위기간도 짧으며 그 짧은 재위기간 동안 난을 수습하러 중국은 커녕 관중을 벗어나질 못했는데 무슨 신라에 가서 왕건의 시조를 낳았을리가 없다. 문제는 당숙종을 빼고는 당황실에 수도를 떠나 돌아다닌 임금조차 그닥 없다는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은, 일개 지방 호족 출신으로 한 나라를 창건한 왕건의 집안이 사실은 다른 호족들과 같은 듣보잡이 아니라 당 황실의 후예라는 것을 내세워 왕권을 높이려는 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의 아버지 이름이 용건이고 그 아버지는 작제건이었다는 것. 즉 성도 제대로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고려 왕실의 성이 왕씨인 것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국제적으로는 까일 수밖에 없다. 충선왕원나라에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가 왕에게

'듣건대 대왕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 황제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는데, 그것은 어디서 근거한 말입니까? 사실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을 나간 일이 없고 안록산의 난이 있었던 때에는 영무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틈에 조선에 가서 자식을 둘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충선왕이 대답을 못하자 (본국편년강목의 저자) 민지閔漬가 대신 대답하기를 '그것은 우리 국사에 잘못 쓰인 것입니다. 사실은 숙종이 아니고 당선종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뻥입니다. 하지만 더 큰 뻥을 치겠습니다.

이쯤 되면 단순한 진위여부에서 나아가 국가의 위신까지 관계되고 말았으니 둘러댈 수밖에 없었긴 하다. 810년에 태어난 당선종을 택하면 적어도 생몰년은 대강 들어맞고 증손 격인 왕건도 877년 생이니 대충 연도가 들어맞는다. 또한 선종은 무종의 독살로 즉위했으니 최소한의 신빙성(?)은 생긴다. 원나라 한림학사 역시 민지의 대답을 듣고, '선종은 어렸을 때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면서 고생 좀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애쓴다 하며 납득한척했다.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李齊賢) 역시 《왕대종족기》를 저술하면서 이러한 사실(숙종, 선종설 모두)을 부정하였고, 조선 세종대왕정인지 등이 고쳐 쓴 고려사에는 작제건이 선종의 아들로 나온다.

전란으로 도망치면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분조를 운영했으나, 아버지의 위세에 눌려있었고, 말년에 궁중과 권신들에게 휘둘렸다는 점은 조선광해군과 흡사한 면이 있다. 물론 광해군은 아예 폐위됐으니 그나마 좀 나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1. 혹은 음력 5월 16일. 당현종이 죽은지 13일만이란 것을 따른 것이다.
  2. 당 현종에게 인정을 받은 것은 8월 12일.
  3. 장황후가 아닌 첩의 이야기라는 이야기도 있다.
  4. 하지만 이 때문에 박릉의 사사명이 포위에서 풀려나게 되고, 안진경의 의용병이 괴멸되면서 기어이는 하북이 안록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5. 숙종이 장안 수복시 약탈도 허용한다는 식으로 직접 청한 것이었다. (약탈은 광평왕, 즉 당대종이 막아냈다.) 숙종은 토번에게도 조공하여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는 시의적절했으나 주변국에게 당의 약체화를 광고하는 꼴이 되기도 했다.
  6. 이때 사사명은 이광필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숙종이 그걸 들어줄 리 없었다.
  7. 범양 공격과 양경 탈환은 일장일단이 있어 어느쪽을 택하지 않았다고 잘못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숙종의 입장으로서는 당장 양경을 회복하고 조정의 권위도 회복했으니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거기서 난이 끝났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양경을 회복할 수는 있겠으나 난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필의 간언이 맞아 떨어진 것.
  8. 그런데 정작 이담은 이숙과 사이가 상당히 좋았다. 거기다 분조가 영무까지 도망갈때 습격받은 숙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을 들고 상처까지 입어가면서도 숙종을 지킨 효자였다. 이런 효자를 후계자다툼 할지 모른다며 대뜸 죽여버린건 정말이지... 이건 당현종보다 더하다. 최소한 당현종은 쿠데타 의혹이 터진 다음에야 자식들을 사사했다. 정작 태자는 도리어 우애있던 친동생의 죽음에 두려워했으며, 이필은 후에 당숙종 본인에게도 이때 일을 가지고 비판하고, 손자인 당덕종과 이야기하면서 두고두고 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