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1970년대의 담배에 대해서는 청자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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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국보 제68호 [1]

화려한 듯하지만, 그러나 화려한 그 속에는 여전히 따뜻하고 고요한 맛...

청자는 고려인의 '파란 꽃'이다. - 우현 고유섭《고려청자》

1 개요

高麗靑磁. 청록색 계열의 빛을 띠는 고려시대의 도자기.

고려 초기인 10세기경에 고려의 많은 문화가 그렇듯이 중국 송나라 청자의 영향을 받아 제작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2세기 무렵에는 독자적인 특징을 가진 형태로 발전한다. 매우 정교하고 화려함을 보여주는 고려 시대 미술품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세계 도자기 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품이다. 당연히 당대에도 국제적으로 최고급품 취급을 받았고 송나라에서 쓰인 수중금(袖中錦)이라는 책에서는 "고려의 비색 청자는 천하제일"이라고 평하였다.[2]

특히 고려청자는 은은한 푸른 빛깔-비색(翡色)과 상감(象嵌) 기법으로 유명하다. 보통 비색과 조형을 강조한 순청자 시기, 상감마마를 갈아서 만드는 상감 기법을 중시한 상감청자 시기, 그리고 몽골 제국의 침입 이후 쇠퇴기로 나눈다. 고려 초는 순청자가 유행했고, 인종대 이후 기법이 발달하면서 상감청자도 나타나 무신정권 시기 절정에 이르렀으며, 몽고 치하에서 점차 쇠퇴하고 분청사기가 민간에 널리 유행하게 된다. 상감청자의 기법은 칠기나 동기 등의 기술과도 상통하는 고급 기술로 고려 공예의 뛰어난 기술을 잘 보여준다. 상감청자의 장식이 갈수록 화려해진 것에 대해서는 단정한 문신들에 비해서 무신정권기의 무신들은 청자를 보는 눈이 깊지는 못해서 겉으로 금방 보기에 화려한 무늬가 많은 상감청자를 선호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쪽이 수준이 높고 낮고의 문제는 아니고 시대상과 기술력의 발전을 반영했다는 의미이다.

2 신비로운 비색(翡色)


대표적인 고려시대 청자 향로 2점
고급 청자의 푸른 빛은 따로 푸른 색소를 넣은 것이 아니다. 비색 청자는 유약층 안에 수많은 기포가 들어차 있는데, 유리질 속에서 빛이 산란되어 푸르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 방식으로 청자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고려 둘 뿐. 다른 나라에서는 녹색 물감으로 시도하는 등 복제 시도도 활발했다. 비색청자에 쓰이는 유약은 나뭇재에 보석의 일종인 마노석과 장석, 석회를 섞어 만든 것인데 가마에서 굽는 도중 안쪽에 수많은 미세한 기포가 생기고 두텁게 부풀어올라 아름다운 푸른 유리빛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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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027호 청자구룡형삼족향로
현대 과학으로도 답이 없다는 도시괴담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청자가 쇠퇴기에 들어서면서 비색을 온전히 내지 못하게 되고, 결국 현대에까지 유약을 재현하지 못하면서 나온 말이다. 덕분에 잊을 만하면 드디어 비색을 재현했네 어쩌네 설레발치는 소동이 몇번 있었다. 부단한 연구 끝에, 색 자체를 내기 위해선 철분함량을 3%정도로 맞추면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상감청자의 경우 역으로 자기 표면의 상감기법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유약층이 점점 얇아진다. 훗날 나온 상감청자의 경우는 지나치게 얇은 유약층 + 재료가 달라 팽창률이 들쑥날쑥한 상감무늬 + 오랜 세월로 인해 거미줄같은 균열이 보일 정도. 종래에는 청자의 품질이 낮아지면서 이를 커버하기 위해 상감 기법을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계속된 발굴 조사로 순청자의 전성시대부터 이미 상감 기법이 시도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면서 부정되었다.

3 쇠퇴 이유

고려 후기로 가면서 고려의 상황이 막장으로 치닫고 도자기의 주요 산지이자 고령토가 풍부한 남해안이 왜구들에게 거덜나면서 도자기 기술 자체가 서서히 쇠퇴했고, 결국 기술적으로 퇴보한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에게 자리를 내줬다. 그래도 17세기 말엽까지는 청자가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가서는 청자 제조의 기술은 거의 실전되고, 대한제국 시대에 가서는 고려 청자의 존재가 거의 잊혀지게 되었다. 이를 찾은 것은 바로 일제인데, 고려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파다가 고려 청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이미 구한말 때부터 고려 무덤에 대한 도굴이 기승을 부렸다고. 이토 히로부미가 청자 수집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로 희한하게도 덕수궁 박물관에도 가져다놓았다고 한다. 고종이 청자를 보고 어디서 나온 거냐고 묻자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도자기라고 대답했고, 고종은 "우리나라에는 이런 거 없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항목의 맨 위에 언급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도 강화도의 왕릉, 혹은 귀족 무덤에서 일본인 도굴꾼이 파낸 물건이라고 한다.

흔히 귀족의 그릇이 청자고 서민의 그릇이 백자라는 오해가 있는데, 사실은 다르다. 백자가 청자보다 인기 있게 된 이유는 교과서에 나오듯 단아한 아름다움, 우아함, 청백의 순수함 등 고고한 취향에 맞는다는 이유가 크다. 청자 → 백자로의 이행은 중국에서는 원나라 시기를 전후로 이루어졌고, 서양중동, 중앙아시아에서도 문화적으로 백색을 더 선호했다. 몽골이나 중앙아시아의 경우는 백색을 태양의 색으로 여겨 신성시하는 풍습이 있었고 이는 백자로 전환된 이유에 대한 온갖 추측 중 하나이다. 지금도 레스토랑에서 청자가 사용되는지 백자가 사용되는지, 본차이나 등 유럽의 명품 도자기들이 청자인지 백자인지 보면 답이 나온다. 조선도 초기까지 백자를 만드려고 애쓴 기록들이 있다.

청자에서 백자로 바뀐 것은 단아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고고한 취향에 맞는다기보다는, 수천년 중국 도자 역사에서 당대 취향이 백자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위와 같은 이유나, 원나라 특유의 유목민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수많은 설 중 하나 일 뿐이다. 때문에, 중국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한반도 특성상 청자가 거의 사라지고 거의 백자로 전환되는 명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조선에도 백자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고려시대에 이미 중국에서는 백자도 제작되고 있었다. 절대 청자 다음에 바로 백자의 시대가 갑자기 도래한 것이 아니다. 단지 고려시대에는 백자제작을 위한 고령토라 불리는 자토(瓷土)가 풍부하지 못해, 이전에는 재료수급 문제로 제작이 어려웠으며 한반도의 유행도 청자였을 뿐이라는 것.

게다가 기술적으로 보면 청자보다 백자를 만들기가 더 어렵다. 청자는 유약의 혼합으로 전체적으로 청색을 냄으로써 무늬를 넣을 수 있지만, 백자는 바탕이 하얗기 때문에 희귀 원료가 많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백자에 파란 무늬를 넣는 코발트 안료다. 백자에 많이 사용되는 코발트는 이란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고문헌에는 회청(回靑, 혹은 회회청回回靑)이라 한다. 조선 시대에는 무역으로 확보할 수밖에 없었던 귀한 안료였다. 이를 대체하고자 조선 세조 때부터 국산 청화안료인 토청(土靑)을 개발하고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토청은 회청처럼 선명한 푸른빛이 나오는 게 아니라 검푸른 색이 나온다.참조.백자를 만들 수 있는 온도인 섭씨 1,400도에서도 온전히 버틸 수 있는 안료가 코발트뿐이기 때문이다. 생물 안료는 수백도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광물안료들도 고온을 버티지 못해 변색되거나 흐릿해지기 십상이다. 도자기 사상 최고 경매가를 기록한 조선백자는 조선 초기의 청화백자로, 그 문양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대신 조선 후기에는 대체 염료로 인해 청화백자 수가 늘어난다. 토청도 비록 색이 좋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대체재로 활용되었고, 18 ~ 19세기 들어 서양산인 값싼 양청(洋靑)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값이 확 떨어진다. 양청은 단청에도 쓰일 정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만드는 것이 더 어렵고 복잡할수록 가격이 높아지고, 가격이 높아지는 것은 사치품으로서는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현대에도 명품 백이나 명품 시계 등은 이 핑계 저 핑계 대서 가격을 일부러 높여 받는 것을 생각하자. 현실적으로 당시 서민들은 목기나 도기를 주로 사용했다 한다.

고려청자가 조선백자에 비해서 대체로 무늬와 형상이 정교하고 화려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은 왕도정치를 표방하고 사치를 멀리하는 검약 정신을 강조하였기에 고려의 귀족 문화와 같은 화려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청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문화 영역에서 조선은 고려보다 검소함을 지향한 부분이 많다.

4 이야깃거리

경주의 도자기 장인 김해익씨가 고려청자를 재현했다고 하여 화제가 된 적도 있는데, 이때 가마 내부 온도가 2,000도(!)를 넘어섰다고 한다. 변성암을 만드나? 아니 플라즈마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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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까지 와서도 재현하지 못했기에 일본에는 관련된 사기극도 존재했다. 일명 후지무라 신이치의 고려청자 버전. 자칭 고려전승도예연구가 다니 슌제이(谷俊成)라는 인간이 90년대에 고려 청자를 복원했다고 일본 언론에 발표, 이후 여러차례 도예전을 열며 고려청자전문가로 이름을 날렸고 결국 일본발 언론기사가 한국에 노출되면서 사기극이 발각됐다. 이 사기방법이 매우 걸작이다. 이 인간은 원래 도자기 무역회사를 차린 뒤 70년대부터 이천 지역 도자기를 구입해 일본 도자기 애호가들에게 판매하던 도자기 상인이었는데, 90년대에 한국의 도예가에게 자기 낙관을 찍은 고려청자를 주문해 수입한 뒤 자기가 만들었다고 뻥을 친 것. 결국 기사를 본 한국 도예가들의 항의에 모든 것이 발각됐다. 결국 한국에까지 와서 사죄하고 망했어요. 기사.

우리가 흔히 쓰는 도자기란 도기+자기를 말하며, 이중 '자기'가 1,300~1,500도 온도에서 굽는 것이다. 고려시대-800년 전에 가마 온도를 1,300도까지 올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현재 사용하는 용광로도 1,500~2,000도인데 이 온도는 코크스와 석회를 과학적인 비율로 때려박고 산소를 미칠 듯이 공급해서 나오는 최적온도이다. 탄소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철이 녹는 온도가 1,500도이고 선철은 1,000도 정도면 녹는다. 목탄을 때서 고려청자를 굽는 가마에서는 철조차도 녹아내리니, 현재의 용광로에 육박하는 온도를 자랑하는 셈이다. 중국에서 일찍부터 주철 생산이 가능했던 것과 도자기 가마 기술은 서로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2012년 10월 16일부터 12월 1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천하제일 비색청자' 전시회가 열렸다. 관련기사 1989년에 개최한 '고려청자명품'전 이후 23년 만의 특별전으로, 국보 18점, 보물 11점, 일본 중요문화재 2점 등 내로라하는 명품 청자들을 2달간 대중에 선보였다. 전시품 중에서도 간송미술관에서 대여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청자모자원형연적(국보 제270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66호)는 3주만 전시되고 교체되었다. 전시에 가지 못하여 아쉬운 사람이라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도록을 판매한다. 가격은 2013년 현재 3만 5천원이다.

한반도의 청자 제작시기는 가장 이른 때가 신라시대로 보지만, 중국은 이미 청자제작을 주나라시대 혹은 춘추전국시대로 보기도 한다. 이때는 아직 녹빛의 색을 아직 가지진 못했다. 애당초 한국과 중국의 기술 축적수준이 매우 차이난다. 이후 북송 시기에는 이미 백자가 거의 완벽하게 제작되었으며, 유약을 조정하는 능력은 능수능란한 경지에 올라있었다.

물론 고려청자만의 특유의 색이나 상감기법을 이용안 문양표현 같은 동시대 중국에는 없던 한국 특유의 면이 있는 점과, 송나라때 세계에서 중국의 도자기 기술을 구현하던 나라는 한국 뿐이었다는 점은, 지나치게 고려의 도자기 기술을 폄하할 필요는 없음을 보여준다. 당시 한국의 도자기 기술이 중국을 따라잡던 수준을 넘어서 중국시장에서 자체적인 특산품이라 인정받고 내다파는수준까지 올라왔음은 사실이다. 송,원,명대 초기까지의 한국의 청자와 백자 도자기는 세계 도자기사에서 중요한 포인트로 자리잡고 있다.

고려 청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송나라 청자는 송 유교의 복고주의에도 영향을 받아서 각광받았는데, 송에서 귀하게 여긴 녹옥과 청자, 그리고 청동기는 모두 녹청색을 띠고 있다. 그런데 사실 청동의 녹청색은 원래 산화한 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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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구 사당리 발굴 고려 청자기와. 출처기사를 보면 발견과정이 상당히 극적이다.

청자로 된 기와는 고려시대에만 쓰였으며, 조선대에서는 이미 잊혀진 기술이었다. 조선시대 청기와는 염초(화약만들 때 필요한 그거 맞다.) 유약을 발라 구웠기에 고려 청자기와처럼 밝은 녹청색을 띠는 게 아니라 터키석의 밝은 푸른색이나 짙은 청록색을 띤다. 화약 재료인데다 귀한 염초를 쓰기 때문에 고려 청자기와와 달리 비용이 많이 들었다. 광해군 때 궁궐 재건시 대신들에게서 비판을 많이 받은 이유가 바로 광해군이 당시 어려운 국방 상황에 염초가 많이 드는 청자기와를 덮는 것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청자 토수.출처
비슷한 조선식 청기와가 회암사지박물관선암사성보박물관에도 보관되어 있다. 이쪽은 짙은 청록색이다.

발굴된 유물을 토대로 청자 기와를 올린 정자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거울못에 세워져 있다.

파일:Attachment/고려청자/P2.jpg
거울못의 고려 청자기와 정자의 모습.

개별적으로 파는 곳도 있는 듯 하다. 링크

현대의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청자들은 그 과정이 좀 드라마틱한 편이다. 본래 고려청자의 상당수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있는 개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38선 일대에선 계속 국지전이 벌어졌고 개성 시내에서 총성이 들리는 게 예사일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불안해진 최순우 등 담당자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개성박물관에 있는 고려청자를 비롯한 주요 전시품들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송했고 개성박물관은 사실상 무기한 휴관시켰다. 이 때 북한군이 개성 시내에 포격을 가했으나 다행히 빗나가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개성박물관의 고려청자들은 남한에 남게 된 것.

  1. 간송미술관 소장. 고려청자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간송미술관의 창립자인 전형필이 이 청자를 구입한 금액은 2만원으로 당시 서울 시내의 기와집 20채 가격이었다고 한다. 한 일본인 수집가가 그 2배의 가격을 제시하며 팔 것을 권유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이 청자보다 더 훌륭한 자기를 가져오시면 바꿔 드리겠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2. 하지만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점은, 칭찬하는 부분은 수중금이라는 책 하나에만 저렇게 쓰여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기타 사서에는 '중국 대륙 어느 지역 청자와 비슷하다.' 정도로 언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