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총

위서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만총전예견초곽회

滿寵
(? ~ 242년)

1 개요

중국후한 말의 장수이자 의 무장. 는 백녕(伯寧). 시호는 경후(景侯). 만위, 만병의 아버지.

2 생애

18세 때 군(郡)의 독우가 되어 여러차례 탐관오리를 벌한다. 고평현의 현령 때 탐관오리를 잡아 벌준 뒤 그대로 관직을 버리고 귀향한다.

조조가 연주(兗州)를 평정하자 부름을 받고 종사가 된다.

196년에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고 대장군이 되자 만총을 하현의 현령으로 삼았으며, 그때 조홍의 빈객 일부가 하현에 있어 그들이 조조의 일족인 조홍의 위세를 믿고 법을 자주 어겼다. 그것을 본 만총이 이들을 모두 잡아가두자 조홍이 사면을 요청했으나 거부했다. 조홍은 조조에게 가서 호소했는데, 조조가 만총을 부르자 만총은 조조가 그들을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릴 것임을 알아채 이들을 재빨리 죽였고 조조는 마땅히 다른 자들이 만총을 본받아야한다고 칭찬한다.[1]

그 뒤 태위까지 지냈던 양표원술과 내통할 것을 의심한 조조가[2] 그를 압송해 만총에게 심문하게 했는데 순욱공융이 만총에게 양표를 고문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만총은 고문했고 때문에 순욱과 공융은 매우 화를 냈다. 하지만 만총이 조조에게 '양표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 심문을 해서 죄가 없음을 명백하게 밝히는 것이 나아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해명했고 조조도 이것에 동의했으므로 그날 안에 양표는 석방된다. 그러자 순욱과 공융은 만총에게 감사했다.

조조와 원소가 싸웠을 때 여남에서 계속 원소를 지지하는 무리들이 발호하자[3] 여남태수로 만총을 임명한다. 그 곳에서 무리들을 상대로 싸움을 해 모두 평정한다.

조조는 그 이후 여남 태수로 이통으로 임명하고 만총을 소환한 듯 하나 [4] 이통이 죽은 뒤 만총은 여남 태수에 복귀한다.

그 후 완성의 후음이 반란을 일으키고 관우가 북상하자 이를 요격하기 위해 출병한 조인을 지원한다. 조인, 우금은 한수에서 대치했고 만총은 번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수의 범람으로 대패하자 조인은 번성에서 고립된 채 포위당했으나 형세가 매우 위급했다. 장마로 성벽이 물에 잠기자, 조인은 성에서 탈출하는 것을 고려했다. 이에 만총은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진언했고, 조인은 그의 조언을 따라 농성을 계속했다. 결국 지원군 서황이 도착해서 함께 관우의 번성포위망을 풀었다.

그 뒤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양무장군이 되고 신야에 주둔하게 된다. 그 뒤 조비가 남하해 와 싸울 때 종군해 부대를 지휘한다. 이곳에서 적의 복병이 와서 화공을 쓸 것을 예측한 뒤 대비했는데 과연 그날 밤에 복병이 오자 이것을 격퇴한다.

222년부터 꾸준히 승진하고 식읍이 증가했으며, 228년에 예주자사가 되었다가 229년에는 손권이 사냥한다는 소식을 듣고 북상해 의 영토를 침략할 것을 예상하고 대비를 해 손권이 그냥 물러가기도 했다.

229년 가을에 조휴주방의 거짓투항에 속아 남하하자 만총은 적의 유인이라 파악하고 조정에 서찰을 보내 조휴를 말린다. 하지만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조휴는 이미 고립된 뒤 격파당했고 만총은 조휴를 구원해 탈출시킨다. 이 일로 인해 조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만총은 조휴의 직무를 대행한다. 그해 만총이 여남을 지날 때는 백성들이 만총을 사모해 수많은 이들이 만총의 뒤를 따라 황제가 친위대 천명으로 그의 호위를 두게 했다고 한다.

230년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을 때 만총은 예주, 연주의 병력을 소집했고 손권은 군대를 물렸다. 만총은 이것이 계략이라고 판단했고 과연 손권은 10여 일 후 다시 돌아와 공격했으나 만총이 대비를 단단히 해놓았으므로 이길 수 없었다.

231년에 손권의 부하 손포가 항복을 청해 양주자사로 있던 왕릉이 그를 맞이하려 들었으며, 왕릉과 만총은 이 때 사이가 나빴다. 왕릉의 지지자들은 만총이 게으르고 늙고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고 따라서 조예는 그를 불러 과연 그런지 확인하려 했는데, 만총은 수도로 떠나기 전 왕릉에게 편지를 써 손포의 항복은 거짓이니 대비를 하라고 당부했고 왕릉이 듣지 않자 만총은 자신의 부하로 있던 장리에게 왕릉이 군을 요청하면 주면 안된다고 해 왕릉이 군을 얻지 못하자 한명의 독장과 부하 700명만 보내 손포를 맞이하러 갔고 과연 손권군이 복병으로 공격했으므로 반이 죽고 퇴각했다.

조정에서 만총을 만나본 조예는 만총이 여전히 총명한 것을 보고 돌려보내려 하자 만총은 늙었음을 들어 조정에 남아있기를 청했다. 조예는 염파 등을 예로 들며 왜 이들과는 반대로 늙었음을 들어 남아있길 원하는가 하면서 다시 돌려보낸다.

육손이 여강을 공격하자 구원해야 한다고 했는데 [5] 만총은 이것이 자신의 본군을 꾀어내려는 계략이라고 생각해 본군을 이끌고 남하하면서 양구에서 견제했고 손권군은 물러났다.

233년에 기존의 합비성이 자주 포위되고 그럴 때마다 대군으로 구원했기 때문에 기존의 성을 파괴하고 30리 떨어진 요새에 새로운 성을 지어야 한다고 간언했으며, 장제가 이것은 적의 기세를 높여줄 뿐이라고 했으나 조예는 만총의 진언이 더 낫다고 생각해 구 합비성을 파괴하고 새로운 성을 짓게 한다.

그 뒤 위군이 합비의 신성으로 옮기자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상륙했다. 이때 손권은 위가 성을 옮긴 것을 오군의 위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병력을 도열하고 과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를 예측한 만총이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손권이 이럴때 기습했으므로 오군은 대패하고 손권은 배위로 달아난다.

234년에 손권이 다시 합비의 신성을 공격했을 때는 조예에게 상황이 위급하다며 원군을 청하는 한편 수십 명의 용사를 모집해 손권 진지를 야습하고 성곽 공격 무기를 불태워 적을 퇴각시킨다. 235년에 손권군이 그 근방에서 둔전을 하자 만총이 대군을 출동해 기습해 많은 이들을 죽이고 군량을 불사른다.

238년에 노령으로 소환되어 태위로 승진하고, 242년에 사망하는데 재산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남은 재산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조예가 그에게 금을 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총의 녹읍은 엄청나게 많아 조창이 왕으로 봉해졌을 때 받은 녹읍이 1만 호였었는데 만총은 왕이 아니면서도 9천 6백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것은 등애, 장로, 종회, 조창에 이은 다섯번째로 많은 식읍이었다. 등애와 종회가 촉을 멸망시킨 엄청난 공이 있고 장로는 한 때 한 지방의 군주였고 조창은 조비의 동생이자 왕이였다는 걸 고려해보면 만총은 사실상 위를 섬긴 모든 무관/문관들 중 최고 수준의 식읍을 받은 것이다.

간접적이지만 제갈량을 물먹인 적도 있다.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계획은 촉오 연합군이 동시에 위를 협공하는 것이였는데 만총이 조예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사전에 오의 군대를 상대로 소수병력으로 교란시키고 손권이 조예의 친정을 듣자마자 병력을 후퇴시켜 제갈량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6] 삼국지연의에서는 결국 크게 낙심한 제갈량이 혼절까지 한다.

후사는 만위가 이어받았으나, 만위의 아들이자, 손자인 만장무사마소가 심기에 거슬렀다고 이유로 만장무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만위를 서민으로 강등했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원통한다고 한다. 그만큼이나 만총의 명성이 얼마나 높은지 알수가 있는 대목이다.

별개지만 아들, 손자과 함께 키가 8척(188cm)이나 되었다고 한다.

3 평가

상당한 원칙주의자로 법을 거스르면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법대로 집행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식읍을 상당히 많이 거느렸음에도 불구하고 재산의 수가 전혀 없을 정도로 청렴했다. 이러한 원칙주의적인 성격 탓인지 그의 출세는 상당히 더딘편이었으며 조조의 창업 공신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늦게 임관된 장수들이 만총보다 더 높은 직위를 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불만을 품지않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고 그 결과 노년에 들어 지위가 높아져 군사도독, 태위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또한 군대를 지휘하는데에도 뛰어난 식견을 가져 적의 책략을 간파하는데 뛰어났고 적을 공격할 타이밍의 포착하는데도 뛰어났다. 그 결과 만총이 10년간 합비 수비를 책임질 때는 방어가 철통같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원칙고수/신중형 인물로 비록 약간은 더디지만 완벽한 일처리가 특징인 인물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원소와 조조의 결전 당시 신속함을 바탕으로 고작 500의 병력을 모아 20개의 성벽을 공략하고, 반란군의 지도자들이 모이게 만들어 일거소탕함으로서 원소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던 여남군을 단번에 평정한 바가 있으므로 급박한 상황에서의 빠른 대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여러모로 만능형 인물.

다만 삼국지 연의에서는 무관 쪽 행보는 그저 제갈량이 북벌할 때 그의 계획을 간접적으로 엿먹이는 역할로만 나올 뿐 존재감이 미미하다. 활약상만 봐도 대오 전선에서 사실상 원맨 캐리 수준으로 오의 공격을 막아냈는데도 비중이 별로 되지 않는 편. 때문에 연의의 피해자 목록에 기재되어 있다. 대신 문관 쪽 행보가 많이 늘어난다. 서황과 친구라는 설정으로 그를 설득하여 귀순시키고, 조조와 유비에게 공손찬의 죽음을 전하는가(...)이건 셔틀같다 하면, 관우를 타도하기 위해 위와 오가 연계할 때도 사신으로서 활약한다.

4 미디어 믹스

  1. 조조 입장에서는 가산을 털어서 자기의 기반을 마련해준, 게다가 친족인 조홍을 찾아오는 빈객을 직접 처벌하기엔 다소 애매했을 것이다.역시 사람은 인맥이지 만총은 조조의 가벼운 곳을 시원하게 잘 긁어준 셈. 조조 입장에서는 손 안대고 코 푼 격이다.
  2. 양표의 아내가 원술의 여동생이었다. 당시 양표의 나이는 56세로 조조보다 10살 정도 위였다. 하지만 양표는 조조보다 더 오래 살았고 나이 80세가 넘어 죽는다. 그는 양수가 처형된 뒤 조조와 대면한 뒤 마음이 아픈 심정을 애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3. 여남은 원씨의 본가가 있던 곳인데다 원소가 묘지기 하면서 6년간 머물며 인재를 모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원소에 대한 지지가 강했다.
  4. 만총이 기반을 잡은 뒤엔 싸움에 능한 무장인 이통을 여남 태수를 두는 것이 더 나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5. 여강은 손책이 유훈을 공격해 점령한 이후 의 영토였었는데 이때는 가 점령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유복전에 보면 208년까지는 손책의 부하인 이술이 여강태수로 나오는데 손권전에 보면 213년에 조조가 여강의 군민을 북으로 이주시켰다고 나온다. 214년에는 여강태수 주광손권에게 죽고 여몽이 임명되나 221년에는 조조의 부하인 유복의 아들이 여강태수로 임명된다. 아마도 조조와 손권이 세번에 걸친 유수구 전투를 할 때마다 여강의 주인이 계속 바뀌었고 마지막 유수구 전투였던 217년에는 조조가 이겼다는 기록이 무제기에 나오므로 이때의 승리로 인해 여강이 위에 속했던 것 아닌가 추측된다.하지만 다시 오에 넘어간것으로 보이는데,제갈각이 여강으로 가서 주둔했다는 기록이있다.
  6. 합비 점령 없이는 어차피 북벌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합비를 돌파하지 못하는 손권이 제갈량과 함께 무엇인가를 해볼 상황이 안 됐다. 사실 제갈량이 계획하기 이전에 손권이 합비에 쳐들어 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제갈량과 호응해 합비를 쳐들어 간 것은 이번에도 일어난 일. 그리고 여전히 박살났다. 손권의 군사적 재능이 없기도 했고 합비를 공격하면 항상 배후의 연주, 예주, 청주의 부대가 동원되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손권은 이런 상황에서도 기만책까지 써가면서 응전했지만 이때마다 결정적으로 패하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보니 손권 역시 합비를 공격하고 나서 간만보고 돌아가는 일도 꽤 많았다. 당장 234년의 경우 조예가 정예 중앙병력을 서쪽으로 보내고 남은 후방병력을 가지고 친정한다는 소릴 듣자마자 그냥 군대를 빼버렸으니...손권보다 더 나은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제갈각의 경우 20만 군대를 동원하긴 했으나 그 자신의 불찰로 인해 철저히 털리고 몰락하던게 당시 손오의 군사적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