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빈

1 개요

제위를 계승할 왕자정부인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에서는 빈궁(嬪宮), 동궁빈(東宮嬪), 춘궁빈(春宮嬪)이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동궁과 춘궁은 모두 세자를 뜻하는 말. 경칭은 세자와 같은 '저하(邸下)'이다. 간택이 확정되면 책봉의 가례를 거행하며, 임금의 교지가 전달된다. 겸양어는 소빈(小嬪).

지칭어로는 조선 말기 기준 "마노라" 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마마는 왕, 중전, 세자, 대비에게만 허용되는 호칭이기 때문에 세자빈에게는 절대 붙일 수 없다.
왕태자비, 황태자비 모두 같은 지위이다. 차이가 있다면 왕태자비는 자주국, 황태자비는 황제국, 왕세자빈은 제후국의 세자/태자의 정궁이라는 것. 태자비의 경우 비궁(妃宮)이라 한다. 경칭은 전하(殿下)이며, 겸양어는 소비(小妃).

세자빈이 낳은 딸은 군주(君主)라 한다.

의외로 조선시대에는 딸이 세자빈이 되는 것을 꺼렸다고 하는데, 실제로 세자가 왕이 되는 경우가 드문데다 자칫하면 가문이 망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외척이 되면 그순간 사헌부의 집중 사찰 대상이 되어 툭하면 탄핵을 먹을 수 있고 세자빈이 왕실의 분란에 휩싸일 경우 세자빈을 직접 족칠 수 없는 만큼 대신 끌려가 처벌을 당하는 동네북이 되기 쉬웠다. 더군다나 이미 내정자가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인데, 혹시나 최종 간택까지 올라가면 딸이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했기에 간택단자를 내는 것 자체를 꺼렸다.

세자빈을 간택할 때에는 삼간택을 거치는데, 대부분 내정자가 정해져 있었다. 마지막까지 올라온 후보자들은 떨어지더라도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만 했다. 왕실의 며느리가 될 뻔 하였으므로 다른 혼처는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과 왕세자의 아내가 될 뻔 했으니 재가는 불가하다는 이유. 간혹 이들을 후궁으로 들인 경우도 있었다. 영친왕의 약혼녀였던 민갑완이 파혼 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헌데 삼간택 정절설은 속설에 불과하며, 사실과는 다르다고 한다. 당시 삼간택 후보자들을 족보 등으로 추적해 보니 어지간하면 다들 시집갔다고 한다. 사실 삼간택에 올라갈 정도면 명문가 여식일 텐데 그런 전통이 있었다면 반발이 심했을 것인데 아무런 반발 없이 그런 전통이 존재하거나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전통 없었다면 삼간택 들었었다는게 오히려 미스코리아처럼 자랑거리였을지도 민갑완의 경우는 이후에도 혼담이 들어와 결혼기회가 충분히 있었고,영친왕 약혼녀가 독신인 것이 부담스러워 일제 측에서도 결혼을 종용했다. 때문에 일제에 대한 항거의 의미로 독신을 지켰다는 말도 있다. 즉, 민갑완이 독신으로 산 것은 전통 때문이라기보단 스스로의 의지. 물론 민갑완은 '약혼'이었으므로, 조선시대 기준으로 보면 삼간택에 든 게 아니라 최종간택이 되었다가 강제 폐빈을 당한거나 다름 없다. 삼간택 정절설이 사실이 아니라도 최종간택 되었다가 폐빈 된거면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당연히 재혼을 못한다. 자신의 의지로 전통을 지키기 위해 독신으로 살았다 해도, 삼간택에 든 것으로 간주하여 독신을 지켰다기보단 최종 간택된 진짜 세자빈으로서 독신을 지켰을 듯.

영어로는 Crown Princess라고 한다. 사실 서양권에서는 왕자의 아내를 부르는 명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Prince의 여성형인 Princess를 그대로 붙이기 때문에, 우리말로 번역할 때 '공주'와 혼동하는 때가 있다. 프린세스 메이커를 포함하여 여러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프린세스들이 이렇게 '공주'가 아닌 '왕자의 아내'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서양권 왕족을 지칭할 때 왕세자빈과 왕세자비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妃)는 왕(제후)과 황태자의 아내를 말하고 빈(嬪)은 왕세자의 아내를 말한다. 왕세자비라고 하면 왕비랑 동급이 되어버린다. Princess랑 Queen으로 단어가 아예 다른데 그걸 왕세자비로 오역해서 부르는 건 잘못된 것이다. 엄밀히 번역하면 왕태자비로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특이한 점은 세자빈이 조선시대에만 보이는 명칭이란 것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친왕의 지위를 잇는 세자의 아내 명칭은 세자비였다. 친왕을 잇는 사람은 세자이고 그외 친왕의 다른 아들은 군왕이었으며 세자가 군왕보다 높았다. 군왕의 아내가 비(妃)를 쓰니 군왕비보다 높은 세자의 부인 역시 비(妃)를 쓰지 않으면 이상하다. 한편 조선같은 제후국을 자처한 정씨왕국에서 세자비라는 명칭을 썼다.

왕실 부인의 지위는 후(后)-비(妃)-빈(嬪) 순인데, 자주국이었던 고려 중기까지는 임금의 정부인를 '왕후(王后)'라 부르고 후궁과 왕태자에게는 'O비(妃)', '태자비'로 불렀다. 그러나 원간섭기 이후 왕실 칭호가 격하되는 동시에 이전 방식과 혼재되서 나타난다. 임금의 정부인이었던 몽골의 공주는 본래 왕후로 불리었어야 하나 고려가 부마국임을 강조해 원나라에서 공주로 부르고 시호를 올렸다.[1] 그리고 다른 후궁들은 예전처럼 'ㅇ비(妃)'라 불렀다. 고려때 까지는 중국의 친왕제를 따라 세자의 정부인에게도 '비(妃)'를 사용해 '세자비'라 부른 것이다.

조선에 오면서 임금의 정부인이자 내명부의 최고 수장인 왕비에게만 '비'를 사용케 하고, 세자비는 후궁과 같이 '빈'을 사용케해 '세자빈'이란 용어를 만든것이다. 다만, 세자빈은 후궁인 정1품의 '빈'과 달리 품계를 초월한 무품의 지위였다.

2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왕세자빈들

  • 여기서는 황태자비도 왕세자빈에 포함한다.
  • 왕세자와 마찬가지로 현역 세자빈이거나 왕비가 되지 못 한(추존 제외) 왕세자빈만을 적는다.

2.1 실존 인물

2.2 가공 인물

  1. 제국대장공주에게 태후의 시호를 올렸으나 원나라에서 다시 ㅇ국대장공주로 시호를 올린다.
  2. 2번 항목. 효명세자의 비이다. 후일 남편이 추존되어 왕후로 격상되었다.
  3. 덕종(의경세자)의 비이다. 남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자 사가에 나가 살다가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고 의경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자 왕후로 격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