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빈 봉씨

조선의 역대 왕세자빈
문종
휘빈
문종
순빈
문종
빈궁 권씨

(1414-1436)

조선 세종대왕흑역사 중 하나이자 2번째 맏며느리. 봉여의 딸로, 세자 향(후일 문종)의 2번째 정실(세자빈)이다.

1 생애

1.1 세자빈이 되다

휘빈 김씨가 투기와 해괴한 방술로 인해 세자빈의 체통을 잃었다는 이유로 퇴출된 후, 세종 11년 10월 15일에 순빈으로 봉해져[1] 2번째로 들어온 세자빈이었다. 휘빈의 전철을 생각해서 양순한 규수[2]를 골라 세자빈으로 간택했고, 시어머니 소헌왕후는 직접 상궁을 지정해 순빈 봉씨에게 <열녀전>을 가르치게 하여 세자빈으로서의 심성을 기르는데 주력했다. 또한, 세자 역시 휘빈 김씨의 일로 죄책감이 있던지라,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세자빈을 들여다보는 등 나름대로 애를 쓴다고 쓰긴 했는데…

처음에는 별 탈이 없었지만, 슬슬 세자가 세자빈을 다시 멀리하기 시작하고 순빈 봉씨의 본색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순빈 봉씨는 음주가무를 즐겼는데, 이는 세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순빈 봉씨는 그런 남편을 생각하지 않고 마구 앵기면서 세자의 정나미를 떨어지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경혜공주단종의 친모였던 승휘 권씨[3]가 세자를 배려하면서 편안하게 만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순빈 봉씨는 애당초 세자를 어떻게 사로잡을지에 대한 것은 잘 몰랐던 모양이다.

세자가 점점 세자빈을 등한시하게 되면서, 순빈 봉씨의 패악질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세자빈의 체통도 잊고서 에 쩔어서 살았는가 하면, <열녀전>을 가르치던 상궁을 두들겨 패고 희롱하는 등의 추태도 일어났다. 게다가 변태적인 성향이 있었는지, 화장실로 몰래 들어가서 일 보는 궁녀들을 훔쳐보았는가 하면 스카톨로지? 스스로 화장실에서 몰래 궁 밖을 엿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순빈 봉씨가 세자의 아이를 갖지 못하자, 당연히 별을 못 보는데 딸 수가 있나? 우려하던 시부모 세종대왕소헌왕후는 고심 끝에 세자에게 후궁 3명을 더 들여주기로 결정한다. 세자는 그녀들 중에서 특히 현덕왕후로 추존되는 승휘 권씨와 승휘 홍씨를 총애하였다고 하며, 권씨는 회임까지 하게 된다. 어쨌든, 실록을 보면 세종대왕이 '승휘 권씨가 있지만 그래도 정실에게서 낳은 아들이 더 귀하지 않냐'며 세자를 달래서 세자가 봉씨를 좀 우대했다고 나와 있다.

당연히 왕실의 입장에선 원손이 태어날 수도 있는 경사였으나, 순빈 봉씨 입장에선 세자가 멀리해서 죽겠는 마당에 후궁회임했으니 위기감이 안 들 수가 없었을터. 그래서 순빈 봉씨는 어거지로 세자를 데려와서 동침을 한 뒤, 자신도 회임했다고 구라를 치기 시작했다. 세자빈이 회임했다고 하니, 당연히 세종대왕은 엄명을 내려서 세자빈을 각별히 대우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순빈 봉씨는 챙길 건 다 챙기다가, 1달 뒤 세종대왕소헌왕후가 양로연 개최로 자신에 대한 관심이 잠시 동안 멀어진 틈을 타서 유산이 되었다고 보고를 해서 가짜 임신 쇼를 끝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쇼가 아니라 상상임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처음엔 임신인 줄 알았는데 상상임신임을 알게 되자, 그걸 사실대로 밝히기가 뭐해서 시간을 끌다가 유산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순빈은 아기의 시체가 이불 속에 있다고 밝힌다. 하지만 세종이 늙은 여종을 시켜 이불을 뒤진 결과, 이불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하며 거짓말이라고 확인사살한다.

1.2 폐서인, 그리고 최후

사실 이미 휘빈 김씨를 쫓아낸 상태였기에, 세종은 며느리 봉씨가 상당히 깽판을 심하게 부렸는데도 쫓아내지는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었다. 세자가 봉씨에게 관심이 없어서 봉씨가 망가졌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고, 쫓아내면 결국 세자의 인성에 대해서도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세종으로서도 결국 퇴출을 시킬 수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지니, 바로 동성애를 하다 걸렸던 것이다.

순빈 봉씨가 동성애자의 정체성에 눈을 뜬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설이 지지를 얻는다. 첫 번째는 자신의 시종이던 소쌍이라는 궁녀가 승휘 권씨의 시종이던 단지라는 궁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걸 알게 된 순빈 봉씨가, 소쌍에게 엄명해서 동침하는 희대의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2번째는 반대로 소쌍이 순빈 봉씨를 유혹한 것으로, 봉씨가 안마를 부탁했는데 안마를 빙자한 타고난 손기술로 봉씨를 생애 최초의 오르가즘에 달하게 한 게 원인이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첫 번째가 실려 있다. 세종 본인이 그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것이 공식적인 조사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봉씨가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게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편이었다는걸 고려하면, 그녀의 동성애는 문종에게 소박맞은 것으로 인한 욕구불만이 쌓이자 지위를 이용해 약자인 궁녀들을 통해 해소하려 한 것이 원인이었지 정체성으로서의 동성애를 체화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4]

결국 이 동성애 행각이 순빈 봉씨를 완전히 파멸로 몰고가게 된다. 소쌍과 그렇고 그런 사이이던 단지는 소쌍을 순빈 봉씨에게 빼앗기자 격분해서 난리를 피우다가 중궁전 상궁의 귀에 들어갔고, 보고를 받은 중궁전 상궁이 추궁을 하자 모든 사실을 실토하게 된 것이다. 상궁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시어머니 소헌왕후는 큰 충격을 받았고, 소쌍과 단지를 국문해서 모든 사실을 밝혀냈다. 이를 안 시아버지 세종대왕도 충공깽이긴 마찬가지(…). 심지어, 세자가 공부하는 곳 뒤편에서 둘이 자기 윗전을 두고 싸워서 세자가 알게 된 거란 소름 돋는 이야기도 있다(…).

실록에서는 세자가 청소하고 있던 소쌍에게 "정말 빈하고 자느냐?"라 물었고, 깜짝 놀란 소쌍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순순하게 전부 다 불어버려서 결국 들키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순빈 봉씨는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증거가 너무 명백해[5] 들켰다고 한다.

결국 세종대왕은 순빈 봉씨를 폐서인하고 그대로 궁 밖으로 내친 뒤, 이미 을 낳았던 승휘 권씨를 새로운 세자빈으로 책봉한다. 원래 왕족의 아내가 남편 외의 남자와 간통하다가 걸리면 최소한 사약 크리 이지만, 이 경우는 이런 경우가 생길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했기에 관련 처벌규정이 없었기에[6] 그냥 내친 것으로 보인다.

야사에서는 친정으로 돌아간 봉씨를 그녀의 아버지 봉여가 죽인다. 봉여가 목을 졸라 살해했다든지 자결을 권하게 했다는 등 전해지는 양상이 다양하다. 하여튼 그녀는 이렇게 짧은 삶을 끝냈고, 딸을 보낸 봉여도 자결하고, 세종대왕은 두 사람의 장례를 치뤄주게 했다는 게 야사의 결말.

하지만 실록에 의하면 아버지 봉여는 그녀가 폐출되기 3개월 전 병사했으며, 순빈 봉씨 역시 같은 해에 죽었는데, 정황상 자연사는 아닌 듯 싶다. 순빈 봉씨가 궐에서 소리내어 울었다는 기록이나, 내시들에게까지 유별나게 친절했다는 기록으로 보았을 때, 그녀에겐 조울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이 점 역시 자살설에 설득력을 보태는데, 조울증은 오히려 우울증보다도 자살의 위험성이 더 높다고 한다.)

2 집착과 질투

위에서도 나오다시피, 조선 시대 여인치고는 상당히 사랑과 성에 대한 집념, 질투가 강한데[7] 실록에서 순빈 봉씨의 행적을 몇 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세자의 유모가 죽어서 그 뒤로 늙은 궁궐 여종 하나가 들어오는데, 순빈 봉씨가 밤마다 그 여종을 불러 세자를 데리고 오라고 졸라댄다.
  • 세자와의 사이에서 후사가 나오질 않아 후궁 3명을 들이자,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해 오랫동안 원망과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승휘 권씨가 임신하게 되자, 봉씨가 더욱 분개하고 원망하여 항상 궁인에게 "권 승휘아들을 두게 되면 우리들은 쫓겨나야 할 거야!!"라고 하였고, 때로는 소리내어 울었는데 그 소리가 궁중까지 들렸다고 한다. 이에 세종대왕이 손수 나서 봉씨를 타일렀지만, 봉씨는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다고 한다.
  • 봉씨가 시종인 소쌍을 몹시 사랑하여, 잠시라도 곁을 떠나기만 하면 원망하고 성을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 소쌍이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매우 무섭다."고 말했다고 한다.
  • 소쌍이 승휘 권씨의 사비(私婢)인 단지(端之)와 서로 좋아하여 함께 자기도 하였는데, 봉씨가 제 사비인 석가이(石加伊)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라 다니게 하여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조선판 얀데레. 거기다 세자뿐만 아니라 시종인 소쌍에게도 집착한다. 봉씨에게 소쌍은 단순한 노리개가 아니었을지도.

3 창작물에서

훈민정음을 만들고 온갖 발명들로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세종대왕에게는 흑역사 중의 하나라서 그런지, 휘빈 김씨나 순빈 봉씨나 대중적으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비교적 사회 분위기가 개방되면서 순빈 봉씨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주목도를 끌다보니 인지도가 높아지는 중.

'조선시대'에 '세자빈'이 '양성애자'였다는 파란만장한 사건이었으므로 창작 소재로서 잘 활용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창작물은 휘빈 김씨나 최종 승리자라 할 수 있는 현덕왕후에 비해 매우 많은 편. 문제는 그녀를 무슨 다양성을 인정치 않는 남성우월주의 시대에 희생양쯤으로 묘사하는 경우인데[8] 실록을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엄연히 남의 애인이던 소쌍을 지위를 이용해 빼앗은 것이다. 애초 소쌍을 유혹하게 된 것 자체가 문종에게 소박맞은 것으로 인한 욕구불만이 원인이었지, 정체성으로서의 동성애를 체화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수틀리면 몸소 궁인을 패고 심지어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만들었다.

또한 "내 아들이 오죽하면 '순빈 걔가 왕비되면 여후보다 더할 거'라고 하겠음?" 라고 세종이 직접 말한 기록까지 있는 걸 보면 성적 취향을 떠나 인간성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던 것 같다.

사극 대왕 세종에서 등장하기도 했고,[9] 한국사 관련 재연방송프로그램에도 한 번씩은 등장하는 필수요소.

고우영의 후기작 고우영 수레바퀴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선 친정아버지 봉여가 봉씨에게 "이 애비는 알아서 하겠는데, 그래, 따님은 어찌하겠는가?" 라는 말을 하여 순순히 자결을 권유하고 자신도 목을 매는 것으로 그려냈다. 정사인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봉여는 딸보다 먼저 병사하였지만, 야사의 명예살인 설을 적당히 어레인지했다.

<마리화나>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각색되기도 했고, 2011년에는 미실의 작가로 유명한 소설가 김별아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채홍>을 썼다. 참고로 '채홍'은 무지개라는 뜻.[10] 2013년에 이 소설의 판권이 소나무 픽쳐스에 팔려서 영화로 제작할 예정이다.

구리시 역사홍보 만화책에 소쌍과 애정행각 장면이 나오는데 매우 공을 들였다. 게다가 초ㆍ중ㆍ고등학교에 배부한 책이다.(…)# 아무래도 그림 작가가 이 쪽 취향이신듯.
  1. 출처 : 세종실록 46권, 11년 10월 15일(무자) 2번째 기사
  2. 더해서 휘빈 김씨가 용색이 뛰어나지 못해 세자의 관심을 사지 못했다고 보고, 용모도 고려했다고 한다.
  3. 후일의 현덕왕후 권씨.
  4. 이런 유형을 현대 한국에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군대교도소. 남군이 남군을 대상으로 저지른 성범죄의 대다수는 가해자가 동성애자라서가 아니라 억압된 상황에서 약자에게 우월감을 점하고 성욕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이뤄진다. 여성 교도소에서의 동성강간은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된 바 있다.
  5. 추궁을 받자 부인하는 과정에서 레즈비언이 어떻게 성관계를 하는지 그 과정을 자기 입으로 세세하게 말했다고 한다. 당연히 그런 짓을 한 적도 없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는 반론에 데꿀멍...
  6. 세종도 처음에는 외간 남자를 끌어들이다가 걸리는 등의 사태가 아닌가 생각했을 텐데, 아마 황당했을 것이다.
  7. 물론 휘빈 김씨도 만만치 않았지만 급이 다르다!
  8. 아래 예시로 든 김별아 작가의 <채홍>도 이 케이스.
  9. 파일:/listimglink/6/2008090810190964473 4.jpg 여민주가 순빈 봉씨로 출연했다.
  10. 무지개 깃발은 동성애자들의 상징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