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진의 인물
王乂
생몰년도 미상
서진의 인물. 자는 숙원(叔元). 왕웅의 아들이자 왕연, 왕징(王澄)[1]의 아버지. 왕미(王微)[2]의 조부이면서 왕융의 숙부.
낭야 임기 사람으로 263년 5월에 조환이 칙령을 내려 촉한의 정벌이 시작되면서 등애와 제갈서에게 각기 3만여 명을 이끌게 했다가 제갈서는 종회의 모함으로 제갈서의 병력은 종회가 거느리게 되면서 264년에 종회와 등애가 촉한을 공격해 멸망시켰는데, 이후에 종회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는 서쪽의 장안으로 옮겨가면서 왕예를 부르자 상국사마로 삼았다.
나중에는 대상서로 옮겨졌다가 지방에서 유주제군사를 다스리고 평북장군까지 되었다.
세설신어에서는 조납의 명성을 듣고 비녀 두 명을 보내면서 그를 중랑으로 등용하자 이를 비웃는 자가 있었는데, 그 명성에 걸맞게 조납이 그 사람에게 얘기한 것이 나온다.
2 후한 말의 인물
王叡
(? ~ 189)
형주자사로 손견과 함께 영릉과 계양의 도적을 함께 공격했는데, 왕예는 문관이라 무관인 손견의 언행이 가벼워 손견을 무례하게 대우했다. 왕예는 거병해서 동탁을 공격하고자 했는데, 무릉태수 조인과 다퉈 그를 죽이라고 떠들어 댔으며, 조인이 거짓으로 문서를 만들어 손견에게 왕예의 죄를 설명하자 손견이 그 격문을 받들었다.
결국 손견의 공격을 받으면서 군대가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성루에 올라 바라보더니 사람을 보내 무엇을 하려는지 물었는데, 손견의 선봉군이 병사들이 오랫동안 힘써 전쟁을 치러 상으로 얻은 것이 의복으로 삼기에도 부족해 사군에게 군수품을 빌린다고 했다. 그러자 인색하게 굴겠냐면서 창고를 열고 직접 들어오게 해서 남아있는 것이 없음을 알렸는데, 병사들이 진군해 성루를 아래를 지났다.
왕예는 그 속에 있는 손견을 보고 물었고 손견이 격문을 받은 사실을 얘기했는데, 무슨 죄를 지었냐고 물었지만 무지죄를 들면서 왕예는 상황이 궁박해지자 쇠를 깎아 마시고 죽었다.
이렇게 형주자사 자리가 공석이 되자 후한 황실 조정에서는 황족출신으로 하진의 휘하에서 북군중후(北軍中候)를 하던 유표(경승)를 형주자사로 파견했다.그리고 손견은 후임에게 복수를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