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서진의 인물

진서 「왕상등전(王祥等傳)」
왕상정충하증석포

王祥
(185 ~ 269)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서진의 인물. 자는 휴징(休徴). 낭야 임기 사람.

1.1 효자

중국사에서 효심으로 이름난 24효의 일원[1]으로 유명하다.

일찌기 친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왕융(王融)이 후취로 주(朱)씨를 맞았는데, 계모 주씨는 평소 왕융에게 왕상을 참소하고 그럴 때마다 이복동생인 왕람이 왕상과 함께 일했다. 또한 왕상의 처를 심하게 부리면 왕람의 처도 달려가서 함께 일해 주씨는 이를 걱정했으며, 추워서 물이 언 날에 계모가 잉어를 먹고 싶어하자 이를 잡으러 갔다고 나온다.

수시로 외양간 청소 등의 궂은 일을 하루가 멀다하고 시켰지만 아무런 불평없이 시킨 일을 전부 맡아 했으며, 부모가 병들면 옷 갈아입는 시간조차 아까워할 정도로 열심히 간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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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주씨가 생선이 먹고 싶다 해서 언 호수에 가 몸으로 얼음을 녹여 물고기를 잡으려 하자 호수에서 잉어가 두마리 뛰어나와 그것을 바쳤고, 이로부터 얼음에 누워 잉어를 구할 정도로 지극한 효성을 뜻하는 '와빙구리(臥氷求鯉)' 의 고사가 나왔다. 계모가 또 참새고기를 먹고 싶다 할 때 휘장 안으로 참새 수십마리가 날아드니 마을 사람들이 효성으로 하늘을 감복시킨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집에 오야나무가 있어 주씨가 그 열매를 지키라 명하자 비바람이 몰아치면 나무를 끌어안고 울며 지켰다고 한다.

또한 계모가 그를 죽이려고 했다가 마침 왕상이 소변을 보러 가서 이불만 베고 갔는데, 왕상이 계모가 자신을 못 죽인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계모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음을 청하자 계모가 감동해 잘못을 깨닫고 자기 자식처럼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지극한 정성으로 후세에 효자의 모범을 남겼다.

잉어에 대한 이야기는 진양추, 참새와 오얏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효자전에서 나오며, 세설신어에서 오얏나무와 계모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이야기가 나온다.

1.2 정사

군벌들의 발호로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어머니 및 동생과 더불어 여강으로 피신해 30여년 동안 숨어 살면서 바깥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지 못할만큼 쇠약해졌다고 한다.

서주자사 여건이 왕상의 명성을 듣고 별가로 초빙해 비로소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니 이미 나이 60이 넘은 때였으며, 온현령, 대사농 등을 거쳐 조모가 제위에 오를때 관여한 공적으로 광록훈과 관내후에 올랐다. 태학에서 조모의 사부를 맡아 조모가 피살당했을 때 크게 통곡한 몇 안되는 인물이었으며, 삼공의 직위인 사공, 태위에 오르고 시중을 겸직하면서 휴릉후에 봉해졌다.

사마염사마소의 작위를 이어 진왕에 오르자 순의, 하증과 더불어 사마염을 알현하게 되었는데, 순의는 '왕은 매우 높은 직위이니 반드시 절하여 예를 표해야 한다' 고 했으나 왕상은 '비록 진왕의 직위는 높지만 조정에서 맡은 관직은 상국이니 삼공과는 고작 한단계 차이가 날 뿐이오. 그처럼 도를 지나친 예를 갖춘다면 나라의 명망을 깎아내리고 진왕의 덕을 손상하는 결과이니 어찌 그리 하겠소이까?' 했다. 사마염을 알현할 때 순의는 땅에 엎드려 절했으나 왕상은 고개숙여 읍하는 것으로 예를 표했는데, 이에 사마염은 왕상더러 '오늘에서야 공이 나를 무겁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라 했다.[2]

서진 개국 후에는 공의 지위에 올라 태보의 자리에서 사마염의 자문을 잠시 맡다가 267년 가을 7월에 노령을 이유로 은퇴할 것을 청해 수릉공의 작위는 유지한 채로 삼공보다 높은 지위와 녹봉을 누리면서 여생을 보냈으며, 269년에 4월 2일에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에는 고관들 없이 친족들과 전에 함께 일했던 관리들만이 모였으며, 죽림칠현의 일원이자 같은 일족인 왕융(王戎)[3]은 그를 맑고 깨끗하다고 평했고 시호는 원공(元公).

1.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의 명성을 높여준 효행의 일화는 전혀 나오지 않고 딱 두번 단역으로 등장한다. 둘 다 관직이 태위인 채 등장한다.

첫번째는 등애종회가 촉한을 정벌하러 떠날때 전송하러 나왔다가 참군 유식(劉寔)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는 걸 보고서 그 손을 잡고 '저들 둘이 공을 이룰수 있겠는가?' 라고 묻자 유식이 '공을 이룰 수는 있겠으나 무사히 돌아올지는 모를 일입니다' 라 대답하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사마소가 세자 책봉시 사마염과 사마유를 저울질할 때 맏이를 세우는 게 법도라고 상주하는 장면.

1.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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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10,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효행 보정으로 80대 중반쯤인 매력을 제외하면 크게 돋보이는 점은 없는 문관계. 그래도 수명이 길기 때문에 발전의 여지는 있고, 무엇보다 후반부의 인재부족을 생각하면 나름 쓸만은 하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31/28/68/82. 배반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25/19/65/76/84로 등용셔틀. 특기가 하나 있는데 하필 무력의존인 보수다. 유독 코에이가 본작에서 존재감이 없는 장수들 특기로 엿먹이는 짓을 많이 했는데 그에 따른 피해자라 할 수 있겠다.

삼국지12에서는 오리지날에는 없다가 PK에 추가. 전법은 진정.

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王象
(? ~ ?)

병주군 출신으로 어러서 부모를 잃고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어 17, 8세 때 주인이 그에게 양을 치게 했는데, 몰래 책을 읽다가 채찍으로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양준이 그 재능과 인품을 알아보고 돈으로 샀기 때문에 노예에서 해방되었으며, 양준이 집과 함께 장가까지 마련해줬다.

산기상시를 지내면서 양준이 남양태수를 지낼 때 그의 능력을 칭찬하고 은혜와 덕망이 넘친다면서 수도로 불러들이도록 추천했으며, 222년에 조비의 수레가 완에 도착할 때 저잣거리의 열기가 가득하지 않다고 생각해 양준을 잡아들이자 사마의, 순위 등과 함께 양준을 구해주도록 청하면서 머리를 조아렸지만 조비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3 후한 말의 인물

王商
(? ~ ?)

후한 말의 유장의 부하. 자는 문표(文表). 광한군 사람

재주, 학식으로 주와 리에서 소문이 났으며, 유장이 치중종사로 임명했지만 물러났다. 낙양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주를 다스리는 자들은 일곱 나라의 제후들로 유장은 나약하고 의심이 많아 대신을 믿지 않자 왕상은 이를 간하는 글을 바쳐 유장이 깨달아 이에 응했으며, 유장이 마초와 가까이 하려고 하자 왕상은 마초는 날래지만 어질지 못하다는 점을 들어 가까이 하면 근심을 남길 뿐이라 해서 유장이 마초와 교류하지 않았다.

송충이 왕상의 이름을 알고 글을 전하면서 허정을 추천했으며, 왕상은 촉군태수에 임명되고 왕상은 금견을 효렴으로 추증했다. 엄군평, 이홍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글을 지어 새겨서 선현을 기렸으며, 학문을 닦으면서 농업을 장려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했고 군을 맡은 지 10년이 되었고 관직을 역임하다가 사망해 허정이 대신했다.
  1. 같은 삼국시대 24효의 일원으로는 오나라의 육적맹종이 있다.
  2. 삼국지연의에서는 소개되지 않은 일화지만 조모 시해사건 당시 순의의 행적과 견줘보면 좋은 대비가 된다. 자세한 것은 진태 항목 참조.
  3. 세설신어에서 왕융이 왕상에 대해 태보는 정시 연간(240년 ~ 249년) 중에 능언가(정시 연간에는 청담의 황금기였다.)에 들지 않았지만 그와 담론하면 이치가 청묘하고 심원함에 들어맞아 그의 덕행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의 언변이 가리워지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