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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공성전/삽화.jpg
영어 : Siege Assault[1]
한자 : 攻城戰
목차
1 개요
"성벽 뒤에서는 누구나 용감해진다."
- 웨일스 속담
그리고 이 항목을 찬찬히 읽다 보면 이 말에 저절로 공감이 될 것이다
성을 공격하는 전투를 지칭하는 용어다. 근대에 들어와서 요새가 등장하자, 요새를 공격하는 전투도 역시 공성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성은 원래 공략당하지 않고 적의 공격을 보다 수월하게 막기 위해 축조한 건물들의 총집합체니, 기본적으로 공성전을 제대로 해보려면 공격하는 측이 수비하는 측의 3배의 병력이 필요했으며, 그렇게 3배의 병력을 동원하더라도 병력의 막대한 손실을 각오해야 할만큼 공성전은 힘든 싸움이다. 손자병법에서도 성을 공격하려면 최소한 3개월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많은 부담을 안는 전투가 바로 공성전이다.
이것도 그나마 비교적 기어오르기 쉽고 더불어 성벽을 높게 쌓기 힘든 토성(土城)을 기준으로 삼은 요구였다.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석성(石城)일 경우는 토성을 공략하는 싸움보다 더 어렵다. 후술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도 콘스탄티노플의 7천명에 불과한 수비대는 최소 10만명의 오스만군에 대항해 오랫동안 성을 지켜내었다. 게다가 이것도 평지에 쌓은 평지성의 경우며, 산에 축성한 산성(山城)의 경우에는 난이도가 추가로 크게 올라간다.
방어측은 이미 준비된 튼튼한 방어시설을 이용해서 전투를 수행하기 때문에 손해를 덜 입지만, 공격측은 견고한 성벽과 탑 그리고 해자 등의 방어 시설을 극복하면서 공격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써야 했다. 야전과는 달리 전장자체가 고정되어있었기 때문에 기동력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없었고, 성이나 요새가 이미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투방식이나 공격로도 방어측이 충분히 예상한 몇 곳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야전에서 뛰어난 용병을 자랑하던 장군도 공성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식한 방법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애초에 일반적인 전장에서 쓸 수 있는 대부분의 전술을 쓸 수 없도록 지어놓은 것이 요새나 성이기 때문에, 공성전을 치르려면 전술적인 재능이 아니라 꾸준한 보급으로 아군의 피해를 관리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며, 적군의 현황을 파악하고 적의 지원군과 보급을 차단하는 등의 행정적인 능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수비측이 유리한 편이지만 수성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할 경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과 같은 결과로 싸움의 대세가 귀결된다. 공격측 역시 견고한 성이나 요새 앞에서 며칠 혹은 몇 달씩 머무르면 식량부족이나 전염병 또는 사기저하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결국에 따지고 보면 양측 모두에게 피곤한 전투다.
또한 위에서 말한 '일반적으로' 수비 측이 유리하다는 것은 몸을 보호할 튼튼한 건물 및 구조물과 충분한 물자 등이 확보되어 있는등 적의 공격을 대비할 수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하기에 이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 하면 오히려 수비측이 불리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농성 측이 많은 식량을 보존하고 있다 허더라도 농성 시 병사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거의 모든 백성이 성으로 몰려서 식량이 엄청나게 빨리 소모되고 전염병이나 질서 통제 등의 위협도 매우 크다. 그리고 공격 측은 공격을 할 지 안 할지, 물러갈 지를 먼저 결정할 수 있으니 수성측의 증원이 오거나 수비 측이 성의 이점을 포기하고 성문을 열어 추격하지 않는 이상 전장을 선택하는건 공격측이다.
덧붙여서 큰 전장 판면에서 보면 통상적으로 공격자는 어디를 공격하던 자신의 전력을 수비 측으로 집중할 수 있지만 수비자는 공격자가 언제, 어디서 공격해올 지 확실히 알 수 없기에 수많은 성으로 자신의 병력을 분산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준비가 잘 되있다면 수비자가 적은 병력으로도 더 많은 공격측의 병력을 상대할 수 있기에 이런 수비 측의 약점을 상쇄할 수 있다.
2 역사
신석기 시대가 끝나가고 농경이 시작되며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한 곳에 정착하여 모여 살게되자(city-state의 출현).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그 자신들을 유목민들로 부터 효과적으로 지킬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목책 혹은 성벽이 등장한 이래로 본격적인 인류의 문명의 시작부터 공성전이 존재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기원전 8세기 경의 아시리아 부조에는 공성탑과 파성추 그리고 사다리 또는 땅굴 등 이후 약 2,000년간 등장하는 거의 모든 공성 병기와 공성 전술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수성측은 화살등을 쏘고 성벽위와 보루위에서 뜨거운 기름 혹은 물, 모래등을 붓거나 혹은 돌이나 나무를 떨어뜨려 성을 방어했고 성을 공격하는 자들은 각종 공성장비로 성벽과 성문을 파괴하거나 갈고리를 단 밧줄이나 사다리로 기어오르기도 하고 공성을 하기 위해 이동식 요새를 만들어 접근하기도 하고 아예 성앞에 토성을 쌓아서 공성을 하기도 했다.
공성전에 화포가 등장함으로서 공성전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바뀌었다. 화약무기는 기존 공성병기들에 비해 강하고 정확도가 높았기 때문에 당시의 성벽을 과거에 비해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기 때문에 요새와 성벽의 양식이 완전히 달라질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천년동안 함락되지 않았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대포에 의해 함락된것을 패러다임의 전환기로 본다. 자세한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으로.
대포라는 신무기의 등장에 등장에 수성측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게 아니다. 이후 베네치아나 로도스 기사단 등 이슬람의 위협에 놓여있던 곳에서는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신식 성벽을 쌓아올렸다. 기존의 직각에 가깝고 두께는 별로 두껍지 않고 높게만 쌓아올린 스타일의 성벽에서 포탄의 충격을 견딜 수 있도록 낮고 두껍게 짓는 방식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17세기 말~18세기 초 프랑스의 보방 후작이 건설한 요새가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낮고 두꺼운 방식의 신공법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는데, 그것이 수원화성이다. 여기에 더해서 요새포를 채용하고, 방어의 중핵을 요새포가 설치된 포대가 담당하도록 함으로서 공성의 난이도를 더욱 끌어올렸다.
그러나 여기에 공성측도 기존의 크기만 큰 대포에서 크기가 기존의 대포보다 조금 더 작지만 정확도가 향상된 진정한 공성포를 개발했다. 다만 서방 한정이다. 오스만 투르크부터 동쪽은 예외. 거대한 공성포에 집착했던 이들은 대포기술경쟁에서 완전히 뒤처지고 만다. 자세한 건 <대포, 범선, 제국> 참고. 땅굴을 파고 들어가 성벽 밑에서 폭약을 터트리는 전술도 개발되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비교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언급된 책을 쓴 카를로 치폴라라는 사람은 경제사학자이기에,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또 영문판 위키백과의 내용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은 다양한 크기의 대포를 활용했으며, 가장 널리 사용된 대포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때 썼던 것과 같이 무식하게 큰 대포가 아니라 0.15킬로그램에서 0.25킬로그램의 포탄을 쏘아보내는 중형포였다.
어찌되었거나 이런 흐름도 100~200년을 가지 못 하였다. 점점 화포가 발전하게 되면서 이윽고 기존의 목표에 명중하여 충격력만 주던 대포에서 목표에 명중하면 폭발하는 타입의 포탄(고폭탄)이 개발되고, 다양한 화약과 포탄의 개발(대표적인 예가 네오 암스트롱 싸이클론 제트 암스트롱포)로 점점 성벽의 방어력이 대포의 공격력을 버틸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성벽도 이에 대응하여 강화를 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문제는 수많은 요새를 이렇게 만들었다가는 비용이 겉잡을 수 없이 올라간다는 것.
지상전에서는 야전 축성술이 우수한 가격 대 성능비를 보이며 요새를 조금씩 대체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극초반 벨기에 전선의 몇몇 요새 전투를 제외하면 공성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빅 베르타 같은 구경 42cm가 넘는 거포들이 불을 뿜어대니 아무리 단단한 성벽이라도 버틸 수가 없다! 오히려 보병들이 삽으로 파서 만든 참호가 오히려 포격에 더 잘 견뎌 내더라는 것이다. 성벽은 무너뜨릴 수 있어도, 땅 그 자체를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까.[2]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넘어가며 대세가 된 기동전과 화력전은 에방 에말 요새, 마지노 선, 세바스토폴, 대서양 방벽, 지크프리트 선 등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지은 요새들을 기껏해야 약간의 시간벌기 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게 해 버렸다. 그렇게 해서 기존의 요새는 완전히 역사 속의 유물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특이하고 예외적인 사례로, 1945년 2월 경 서부전선에서는 중세시대에 세워진 고성인 블라이엔비크 성에서 단 15명의 독일군 공수부대가 영국군 1개 연대를 이틀이나 저지했던 적이 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성 그 자체는 단순공격에 있어서는 여전히 악마적인 방어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성을 건설한 중세인들은 상상도 못해봤을 병기인 공군이 폭격을 개시하자 이들은 바로 항복했다.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요새나 방어선의 주류가 이른바 지하요새로 지칭되는 거미줄같은 땅굴 네트워크로 변화하고, 중요 시설물은 깊은 땅 속에 방어구조물까지 넣어서 건설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들 방어시설에 대해서는 기존의 화기들의 위력이 격감하기 때문에 지진폭탄으로 시작된 거대하고 관통력이 높은 벙커버스터 같은 폭탄을 쑤셔박거나, 아예 핵무기의 사용을 검토하게 될 수준이 되었다.
참고로 벙커버스터는 지하요새, 공성용도 '따위의' 땅굴과는 차원이 다른, 지하요새급 땅굴 등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만든 현대전 최고의 병기 중 하나이다. 단순 지하 파괴, 관통력은 지표에 명중하는 핵무기 이상의 능력을 가진다. 애초에 만들어진 이유 중 하나가 공고히 구축된 지하 핵시설 타격 용도였으니까.
또 소규모 지하방어시설에 대해서는 정밀무기로 타격하는 것 외에도 보병을 침투시켜서 총격전을 벌이는 소탕작전이나, 불도저를 이용해서 입구를 파괴하는 파괴작전을 진행할 때가 많다. 따라서 기존의 공성전이라고 불리는 전투는 거의 사라졌지만, 방어시설에 웅거한 적을 공격하는 임무 자체는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이에 대응한 무기도 계속 사용되고 발전중이다.
3 공성전술
야전에서 승리하더라도 적군이 지키는 성을 함락시켜야 해당 지역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 만일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그 때까지 이룩한 성과는 다 버리고 철수해야 하므로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공성전술은 널리 연구되었으며, 다양한 종류와 수량을 자랑한다.
3.1 그냥 기다린다
공성 병기나 전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부터 있었던 가장 전통적인 방식이다. 공격해봐야 수성측이 유리한 싸움이라 피해만 커지니, 포위한 상태로 견제 전투만 걸면서 자기 스스로 무너지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포위 상태가 오래되면서 구원이 없으면 식량이 떨어지고, 스트레스와 공포, 피로를 견디다 못한 수성측이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 반대로 공성하는 쪽은 다른 아군에게서 보급을 계속 받을 수 있다면 계속 버틸 수 있다. 무너뜨려야 할 성이 고립되어 있다면 대단히 유용한 전법이다.
보통 수비 측은 몰려드는 지역 주민들까지 모두 책임져야 하기에 적어도 수천~수만 명의 피난민의 식량이 소모되며 전염병 등의 위험이 매우 높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서의 아테네가 그 예인데 아테네는 수많은 거주민을 피난시키면서 자연스레 한 곳에 사람들이 몰려 살게 되었고 페스트가 더 심하게 번지는 데 큰 일조를 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별 다른 경제 활동 없이 병사와 거주민들을 모두 먹여 살려야 했기에 아테네의 해군이 건재하지 않았다면 재정 부족으로 손쉽게 몰락했을 것이다. 이는 아테네의 해군의 패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와 직결되는 시점과도 연관이 있다.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수십년 이상의 공성전을 해오면서도 수비측이 건재했던 것은 거의 대부분 강력한 해군이 건재할 경우였다. 아테네와 동로마 제국이 그 좋은 예. 이 외에도 기나긴 장기전이 아니라도 공격 측의 전략이 주효하여 속전속결로 빨리 끝난 공성 측의 패배를 예로 들자면 삼전도의 굴욕을 들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언제나 공성하는 측의 편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전쟁에서 군의 보급은 현지 징발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기동하면서 보급하는, 혹은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기동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이는 군이 필요로 하는 보급품이 굳이 본국에서 조달해야 할만큼 복잡다양하지 않았고, 보급선을 유지할만한 지식과 기술이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우마차의 수송효율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국가총력전이 가능해진 것은 철도의 등장 이후이다. 그러므로 보급대를 과감히 줄이거나 제거하면 기동력의 강화도 기대할 수 있었다. 더 멀리에 있는 더 풍요로운 보급지를 향해 더 신속히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포위를 위해서는 군이 한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다. 털어먹은 동네 또 털어먹는 것은 한계가 금방 닥치는 데다가, 현지민의 격렬한 저항을 가져오기 때문에 곧 우린 안될꺼야 아마식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수비측이 자기 먹고 살자고, 더하여 공격자를 엿먹으라고 보급상 열세에 빠뜨리기 위해 성 주변의 보급품을 먼저 싹 쓸어가지고 틀어박히면 공격측은 성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낭패를 보게 된다. 이러한 점을 노린 방어측의 전술이 청야전술이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위에서 적의 성곽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공격자 측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고대. 중세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사 내내 일관되게 쓰이는 묘책 중 하나는, 방어군이 몰래 출성하거나 방어군측 지원군이 매복해서 공격군의 보급대를 털어 버리는 것이며, 그러면 적은 알아서 작살난다. 공중보급이 있는 현대전에서도 이 법칙은 적용되며, 공중보급능력이 미국처럼 충분하지 않거나, 방어측이 제공권을 잡거나 대공망만 잘 닦아 놓아도 공격군은 데꿀멍 신세가 된다. 공격군이 공격헬기같이 보급로를 습격하는 지상군에 대해서 쓸만한 병기를 보유하고 있어도 일시적인 대책만 될 뿐, 보급로를 확보하는 최종적인 해결책이라고 보긴 어렵다.[3] 종합하자면 현지 보급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고정적이고 길게 늘어진 보급선을 통해 방어자의 3~10배에 달하는 공격군 측의 보급을 유지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한 짓이다.
그 외에도 한정된 시간 내에 함락시키지 않으면 수비 측을 구원하기 위한 적이 몰려올 수도 있다. 농성 측의 구원병력은 꼭 많아야만 무서운 게 아니다. 성을 상대하는데만 해도 무지막지한 개고생을 성벽을 향해 올인해야 하는데, 그 외곽에서 적은 수나마 적 병력이 얼쩡얼쩡 거리면 정상적인 공성전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아군의 병력이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많지 않은 이상. 공격하는 측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빨리 성을 점령하고 처박혀서 구원군을 닭 쫓던 개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 된다. 다만 이 원칙의 특이한 예외로, 카이사르의 알레시아 전투가 있다. 포위진지를 역포위에 견디도록 우주방어를 제대로 시전하며, 갈리아 족의 대규모 지원군을 보급난에 빠뜨린 후 털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건 카이사르라는 전술적 천재 + 로마군의 질적, 경험적 우세 + 사전에 견고한 방어선 구축이라는 삼위일체가 이룩한 위업이니 이를 일반화시키면 곤란하다.
더 재수 없는 경우로 전염병이 돌아서 공성은 커녕 공격군이 자멸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사람이 많이 모여서 한 곳에 뭉쳐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전염병이 돌거나 해서 전투도 치르지 못 하고 손실을 크게 입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먼거리를 원정 온 탓에 식수 등 풍토가 맞지 않거나 하면 그 위험성은 어마어마하게 높아진다. 만약에 항목에 있는 아시리아의 예루살렘 공성전이 전염병 때문에 공격군이 자멸한 대표적인 예다.
또한 해안을 끼고있는 성일 경우,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수비 측에서는 몇년이고 버틸 수 있다. 동로마 제국이 취약했던 시절에도 콘스탄티노플에 닥돌했던 이슬람 왕조들이 결국 이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을 뚫지 못했다. 대포 이전에 콘스탄티노플 공성에 성공했던 유일한 군대인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를 주축으로 제해권까지 완벽하게 장악한 상태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전면 공격을 7개월이나 버텨낸 티루스나, 십자군 전쟁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십자군이 밀려난 후에도 해안에 붙어서 연명하던 십자군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더 극단적인 예는 1차 십자군 전쟁 때 있었다. 십자군과동로마 연합군이 니케아를 공격할 때에 니케아는 성 한켠에 낀 호수로 끊임 없이 수상 보급을 받았다. 이에 열받은 십자군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게 요청하여 군함을 육로로 수송, 호수에 띄운 뒤 그 수상 보급을 막았다. 갑자기 호수에 등장한 동로마 전함에 니케아는 데꿀멍하고 황제에게 항복했다. 십자군의 집념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다. 배는 소가 끄는 수레로 수송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공략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 자업자득 행보관과 사단장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군대에 불가능이란 없다
마지막으로 위에 언급한 모든 요소를 공격군이 이겨내더라도 공성전이 길게 이어질 수 있다. 당장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이 안티오크를 공략할 때에 알레포의 리드완이 지원군을 끌고 도착했지만 십자군은 타란토 공작 보에몽이 진두지휘한 기사들로 지원군을 개발살 냈다. 물론 성에서도 대응하는 병력을 내보냈지만 십자군 보병대가 그 공격도 막아냈다. 그럼에도 안티오크는 함락당하지 않고 한동안 버텼다. 결국 안티오크는 내부의 배신자에 의해 어이없이 함락당했다.
3.2 땅굴을 판다
성 밑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서, 굴을 무너뜨려서 성벽도 무너뜨리는 고도의 전법이다. 성 아래쪽에 나무 기둥을 세운 땅굴을 파서 불을 지르고 기둥이 불로 무너지면 지반도 무너지는 식이었다고 한다. 수성측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땅굴을 팔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땅굴파기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외에도 땅굴을 통해 성 내부로 침입해서 성문을 여는 등의 방법도 있다. 공성전을 묘사한 물건 중엔 땅굴을 통해 침입해오는 적을 막기 위해 땅굴 출구에 뜨거운 기름이나 쇳물을 부었다는 묘사가 있다. 한국사에서도 여몽전쟁 중 귀주성을 공격하던 몽골군이 땅굴전술을 시도하다가 역관광 당한 적이 있고, 홍경래의 난 때에는 정부군이 정주성에 땅굴을 파 접근, 폭약을 터뜨려 진입에 성공한 바가 있다.
중국에서는 땅속에 항아리를 묻고 땅을 파는 소리를 감지한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재현해본 결과 실제로 땅을 파는걸 감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의 기반에 크게 영향을 받는데다가 암반지형이면 거의 100% 불가능하다는 약점이 있는데다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비용과 시간이 매우 많이 소요되는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산성들이 죄다 화강암질의 산에 축성된 바람에 이 방식의 공격이 거의 먹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땅굴을 판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공격측의 비용에 비해 수비측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이를 막을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성벽 둘레의 해자를 조금만 더 깊게 파 버려도 공격측의 비용은 어마어마하게 올라간다.
그리고 공격측의 땅굴을 적극적으로 막으려면 수비측에서도 대응용 땅굴을 파서 적이 성벽 토대에 피해를 주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 때문에 공격측과 수비측이 서로 땅굴을 파다 맞닥뜨려 땅굴 속에서 난데없는 혈전을 벌인 경우도 많았다. 예컨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같이. 우리나라는 기록에 보면 이럴 땐 들어가지않고 끓는 납을 붓는다고 한다.
땅굴 전술은 현대전까지도 이어졌는데, 영국군은 제1차 세계대전 중 60고지 전투에서 독일군의 참호선 아래까지 땅굴을 파고 폭약을 묻어서 날려버리기도 했다. 전술적으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전체 전황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는 게 안습.
3.3 기어 오른다
사다리, 공성탑을 만들어서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이다. 에스컬레이터라고도 한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공성전하면 으레 이 장면이 많이 등장하지만 공격측의 피해가 막심하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는 최후의 수단이다. 왠만한 지휘관들은 포위봉쇄 시간끌기로 성을 점령하려 했고, 직접공격은 가능한 피하려 했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전투는 대부분 공격군이 오래 포위하고 있을 형편이 안되는 경우에 벌어졌다. 하지만 공성병기를 준비하고 그를 위한 길과 기반을 다진다던가 땅굴을 판다던가 하는 등 시간이 걸리고 준비가 필요한 관계로 헛점을 보일 수 있는 과정이 생략되고 사다리 및 탑이 성보다 낮거나 하는 안습만 없으면 어디에서도 쓸 수 있으며 빠르다. 특히 사다리 전술은 비교적 준비가 쉽고 빠르게 기습할 수 있으므로 성벽 파괴작전과 병행해 괜찮은 실적을 올린 경우도 있다.
사다리와 공성탑을 운용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성벽의 높이를 최대한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이다. 상상해 보면 금방 짐작 가능하지만, 사다리의 높이가 성벽보다 지나치게 높으면 사다리에서 뛰어 내리거나 사다리를 돌아 내리기 위해 어버버하다가 끔살... 사다리의 높이가 성벽보다 낮으면 역시 성벽에 매달리려고 하다가 끔살... 그래서 성벽의 높이를 정확하게 측정해서 이에 맞춰서 사다리와 공성탑을 제조하고 운용하지 않으면 공격측 병력이 성벽에 무사히 올라갈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때문에 근세 이전 중요 군사기밀 중 하나가 성벽의 정확한 높이였다.
성의 높이에 필적하는 토산을 만드는 전술도 있다. 압도적인 전력 하에서는, 성벽앞에 토산을 쌓아서 그냥 오르막길을 만들어 버리는 무식한 방법도 존재한다. 높이가 낮은 성벽의 경우 그냥 흙부대와 인력을 대량동원해서 순식간에 길을 만들어서 뚝딱. 그다음엔 오르막길로 돌격! 물론 상대도 방어를 하기 위해서 죽어라 노력하므로 공격측의 희생자가 많겠지만, 인력앞에 장사 없는 법이며 위의 사다리를 이용하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병력투입이 가능하다. 로마군이 마사다 요새를 함락할때처럼 생각보다 높이가 높은 성벽도 이런 식으로 뚫어버린 역사가 존재한다. 그 위에서 성에서 쏘는 것과 대등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나 공격측이 압도적인 전력이 아닌 이상 충분한 높이로 쌓는 게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묘청의 난을 제압할 때 김부식이 윤언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평양성 앞에 토산을 쌓아올린 전례가 있지만 함락에 결정적인 영향은 주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력으로 사용했던 공성전술로는 짚단을 가져와 쌓는 방법도 있었는데 가장 빠른 공성속도를 보였지만 초반에는 이것에 많이 당했으나 나중에는 횃불 하나에 무력화당했다. 그러나 비가 오는날 에는 짚단에 불이 안 붙어서 막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공격하는 병사들에게는 무지막지하게 위험한 일이고, 그래서 여러 매체에서 묘사되는 공성전을 보면 성벽 위에 맨 먼저 올라가는 병사에게 파격적인 벼슬과 상금을 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설령 해당인이 전사하더라도 그 혜택을 유가족에게 고스란히 전해 준다는 안전장치까지 걸었으며 실제로 약속을 지켰다. 지휘관들이 인심이 좋아서가 아니라,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인 미친 짓을 해야 하는 병사들에게 이 정도라도 있어야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3.4 성벽, 특히 성문을 파괴한다
위 아래로 여러 다양한 방법들이 설명되었지만, 제대로 된 성곽이라면 궁극적으로는 정공법이라면 성문을 파괴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 된다. 애초에 성이 아무리 좋아도 성문이 없으면 성의 기능을 못한다. 그렇기에 성문은 애초에 교통 목적으로 '열리기 위해' 만들어진 부분이다. 즉 일반적 성벽에 비해 내구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지사다.
현문[4]이나 미닫이식 형태로 만들어진 성문은 공격군의 풍부한 인력을 이용해 밀어버리거나 들어올리면 그만이고, 일반적 문 형태의 성문은 닥돌하는 식으로 공략하면 그만이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방어측에서 손해가 날 수밖에 없는데 성벽에 공격이 이루어질 경우, 기동대를 이용한 능동방어, 옆 성벽에서의 지원방어가 가능하지만 성문 자체는 방어군이 방어하기에도 상당히 협소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성측이라고 해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문 주변에는 문루, 치, 성탑등을 배치해서 성문으로 몰려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집중공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놓는 것이 일반적이며, 성문을 공성병기의 직격에서 보호하기 위해 성문 앞에 관성을 쌓거나 옹성을 만들며, 최악의 경우인 성문이 파괴된 경우에도 성문 후방에 방어벽을 설치해서 일격에 돌격으로 돌파되는 경우를 막는다.
수원화성이 대표적인 사례로 남문인 팔달문의 경우는 아예 옹성으로 성문을 완전히 감싸고 옹성 자체에도 문을 달아 '기껏 성문을 뚫었더니 진짜 성문은 따로 있더라'는 식의, 공성 측에서는 심각하게 좌절감을 느낄 만한 악랄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옹성 자체가 이미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결전병기스러운 시설이기도 하다. 성문 앞의 공간을 협소하게 만들어 공성구의 진입을 어렵게 하는데다, 성문을 파괴하기 위해 옹성 안쪽으로 진입한 적들을 성벽위의 수성군이 포위하는 식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옹성 안쪽의 성문 바로 앞은 완벽한 킬링 존이 된다. 따라서 성문파괴의 난이도는 매우 높으며, 이 때문에 성문 뿐 아니라 성벽을 동시에 공격해서 방어군의 집중을 막고 돌파구를 늘리는 방법을 공격측이 선택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성벽도 성문에 비해서 공성난이도가 낮을 뿐이지, 실제로는 만만치 않게 난이도가 높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성벽 위에 무시무시한 적군들이 올라 오면 방어측이 금방 망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방어측이 어지간히 무능하거나 무력하지 않는 이상, 공격군 측은 금방 성벽에서 밀려나게 된다. 성벽에 적군이 올라오면 수비군 측의 예비대가 즉각 개떼처럼 몰려온다. 이들 예비대는 후방에서 푹 쉬며 준비하다가 상황 걸리면 즉각 달려 오는 애들이라 체력과 장비가 공격측에 비할 바 없이 빵빵하므로 숫자에 비해 위력이 크다.
그에 반해 공격군 측은 사다리나 공성탑 따위의 좁은 통로로는 이를 능가할 만큼 충분한 추가병력/장비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투입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격자의 병력이 우세한 상황이더라도 제한된 통로를 통해 성벽 위로 병력을 올려보내야 하는 이상 그 우세를 활용할 수 없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다리가 성벽에 걸쳐지더라도 사다리가 걸린 자리에 병사 두세 명이 서서 돌을 던지거나 끓는물을 뒤집어 씌우거나 올라오는 적 병사를 밀어버리거나 그냥 수레고 뭐고 없는 맨사다리이면 여럿이 힘껏 밀어 사다리를 도로 밀어 떨어뜨릴 수도 있으며 차례차례 올라오는 병사들이 수백 명이라도 죄다 떨어져 죽게 된다.
성벽에 구멍을 뚫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공성무기를 동원한다 해도 두터운 성벽에 낼 수 있는 구멍은 별로 크지도 않고, 숫자도 몇개 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그 얼마 안되는 구멍을 힘겹게 낸다 해도, 그쪽으로 수비군 측의 예비대와 각종 보수인력과 자재[5]가 몰려 들어 금방 메꿔 버리는 바람에 공격에 실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잘 묘사되듯, 성벽을 뚫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벽을 공격하는 것은 투입 대비 효과가 많이 떨어진다. 한국 전쟁사에서도 동북 9성 중 길주성 전투에서 여진군이 길주성 성벽에 구멍을 뚫었으나 날이 저물어 공격을 멈추고 하룻밤 자는 사이에 고려군 지휘관 허재가 뚫린 부분에 다시 벽을 쌓아버려 여진군이 추가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했다는 사례가 있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 유일한 답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문을 여는 것이 된다. 성벽을 기어 오르고, 구멍을 내고, 땅굴을 파고, 첩자를 들여 보내는 등등의 모든 공성전술은 궁극적으로는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성문을 제압하여 열어 젖혀 본대 병력을 한꺼번에 밀어 넣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수비 측도 당연히 성문 근처에 병력과 장비를 집중시키기 마련이다.
참고로, 성문이 열리는 상황 중에서 의외로 자주 발생하는 것이 수비자측의 유격부대가 공격 부대를 기습하고 돌아갈 때 유격부대의 귀환을 위해 연 성문이 닫히기 전에 공격부대가 진입해 버리는 것이다. 이러면 왜 굳이 유격대를 내보내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성의 규모가 큰 경우 공성전이라고 해도 성 전체가 빽빽히 포위되는 것은 아니고, 공격자측과 수비자측이 누가 더 오래 버티나를 두고 싸우는 것이다 보니... 소규모 부대를 내보내서 공격자를 교란하고 공성지속 능력을 손실시키는 것은 꼭 필요했다. 흙산 삽질 공사중인 적 병력들을 공격해서 공사를 지속하지 못하게 한다던가, 설치중이거나 조립 중인 공성병기를 파괴 하는등의 유격능력이 있어야 성벽위에서 손가락 쪽쪽빨다가 날아오는 투석기에 얻어맞지 않는다.
실제 역사에서는 메메드 2세 시대의 오스만 제국에 맞서 게릴라 전법으로 25년간 저항했던 알바니아의 스컨데르베우가 이런 데에 능했다. 공방전이 벌어진다 하면 총사령관인 자신이 성을 지키는 게 아니라, 믿을만한 부관에게 병사 일부를 주어 성을 지키게 하고 자기 자신은 오스만군 진영 근처에 따로 진영을 만든 뒤 치고 빠지기를 오스만군 입장에서 지겹도록 반복했다.
이를 위해 각종 공성기구가 등장했으며, 점점 위력이 강해지다가 결국 공성 전차 대포가 등장하여 성을 뭉개버리기에 이른다. 다만 나폴레옹 전쟁까지도 보급과 대포의 위력, 축성기술의 발달 문제로 단시간 안에 성벽에 낼 수 있는 구멍 수가 많지 않아 대포가 그렇게까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앞서 설명했듯, 대포의 발명으로 적 요새는 두껍고 낮게 지어졌으며, 덤으로 성벽 앞에 흙을 성벽높이보다 살짝 낮게 쌓았다. 그래서 적 대포가 낮게 쏘면 그 흙에 맞아서 튕겨져 나갔고, 높게 쏘면 요새를 넘어서 그대로 날아가 버리기 일쑤. 근데 이때가 위에서 설명했듯이 성벽을 타고 올라가기 좋은 상황 아닌가... 그 시대는 머스킷이 있으니까 기어올라가다가 총맞기 딱 좋은 상황이기도 하다 제압사격당하기도 딱 좋지
물론 잘 알다시피 19세기 말 이후로는 대포나 폭격기가 워낙에 발전했기 때문에 제대로 화력을 퍼부으면 성벽은 물론 성 안의 사람들조차 무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포의 사정거리가 1km가 채 안되던 시절에야 공격하기 까다로운 위치에 요새포를 박아놓고 공격자의 공성포를 제압했겠지만, 대포의 사정거리가 5km, 10km까지 올라가고 곡사로도 정확하게 적을 명중시킬 수 있게 되자 요새의 성벽은 더이상 요새포를 보호해주지 못하게 되었다. 요새포나 야포나 서로 포탄 한두방 맞으면 부서지는 건 마찬가지였고, 예나 지금이나 숫자는 공성포나 야포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요새포가 공성포와 야포에 압도당해버렸다. 요새포도 나름대로 포탑을 도입하거나 철근콘크리트로 두꺼운 방호벽을 쌓는 등 방어수단을 강구했지만, 그렇게 되자 요새포를 설치하는 비용 자체가 상당히 증가했으며 그마저도 2차대전 말기까지 가면 지진폭탄 등에 의해 박살이 났다. 요새 자체의 전략적인 가치나 가성비도 쭉쭉 떨어져 차라리 요새 지을 돈으로 병력을 증강시키고 전차와 항공기를 만드는 게 이득이 되는 상황까지 이르렀으며, 이후 핵무기가 등장하자 지상요새는 훌륭한 고정표적으로 전락,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성벽을 파괴한 황당한 방법이 기록된 바 있는데, 성벽을 깨부술 적당한 공성병기가 없어서 돼지 수백 마리를 성벽에 묶어 놓고 불을 지른 사례가 있다. 돼지의 기름이 워낙 잘 타서 성벽이 불길에 타서 부서졌다고. 물론 돌로 성벽을 지었다면 돌이 불에 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냥 돌만 쌓아서 높게 쌓기는 힘드니 돌벽 내부에 목재로 골격을 설치해야 하는데, 이게 타 버리면 결국 성벽이 무너진다. 또는, 돌을 붙이는 데 쓴 회반죽 역시 돌보다는 화재에 약하다. 요즘의 철근 콘크리트 기법이 있었다면 또 다른 문제였겠지만... 고기 굽는 냄새로 인한 수성측의 사기저하는 덤.
3.5 첩자를 활용한다
적 내부안에 첩자를 심어놓았다가 적당한 시기에 성문을 딴다든지, 비밀통로를 열어준다든지 하는 방법이다. 의외로 효과가 커서 이런 방식으로 함락된 요새나 성이 많다. 1204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도 반은 이런 식이었다.
이러려면 평소에 미리 준비를 해놓던지, 아니면 성을 포위한 군대가 너무 강해보여서 수비측의 인원중 일부가 자신만 살려고 내통을 하게 만드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실제로 위에 쓴 콘스탄티노플의 경우도 수비 측 사기와 군기가 매우 구렸다. 그리고 당연히 적도 바보가 아니므로 내부단속을 해서 내통자가 먼저 당하는 경우도 있고, 이걸 이용해서 함정을 파서 침입하는 부대를 일도양단하는 경우도 있으니 사용에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단순히 첩자를 성문따기에만 쓰는 것은 아니다. 성 내부에 화재를 일으키고 적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서 위에 언급한 정공법식 공성방법을 병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외에도 첩자를 이용해서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농성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우물에 독을 타고 저장된 식량을 파손하는 등(또는 다른곳으로 빼돌리는 등)의 피해를 입혀서 장기간 농성전을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강과 산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던 이나바산성(稻葉山城)도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낙성을 여러번 당했는데 대부분 수비측의 내분이나 모반에 의한 것들이었다.
3.6 물로 쓸어버린다
근처에 적절한 강이나 호수 등이 있을 경우 제방이나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여 쓸어버리게 하는 전략. 주변의 강이나 하천 혹은 운하를 자연 해자로 활용하는 성이 수공의 목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설령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다 해도 성내에 물이 고이게 되어 수비하는 입장에선 굉장히 곤란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카마쓰 성을 공략했을 때나 칭기즈 칸의 호라즘 왕국 수도 우르겐치 공략, 조조의 하비성 공략 등에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제한된 요소, 즉 성이 다소 저지대에 위치하여 물이 흐를 여지가 있는 경우에만 사용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수비측도 바보는 아니여서 정말 교통의 요지급이나 대도시급이 아닌 한 애초에 그렇게 불리한 위치에다가 축성하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애초에 특별한 전략요새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성곽은 사람들이 몰려 사는 도시에 지어지는데, 비가 조금만 내리면 금방 물에 잠길 그런 강변 저지대가 도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식의 공격은 그야말로 가질 수 없다면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다'라는 식의 공격으로 공격측이 성을 함락시키더라도 수비측의 군량이나 군수품들이 물에 젖어 상해버려 사용 불가능이 되는경우 많고 성안의 중요한 시설들도 상당한 복구 이전에는 사용이 불가능 할정도로 개발살이 나버리곤 한다. 수공은 단순히 성을 약탈하는게 목적이라면 약탈물조자 안남을 정도로 박살나는 과격한 방법이고 단순히 성을 약탈 하는게 아니라 거점으로 확보해서 침공의 교두보를 마련해야되는 침공자의 입장에선 뒷수습이 골치 아파지는 공격방식이다. 앞서 말한 몽골군의 우르겐치 공략, 조조군의 하비성 공략, 도요토미의 다카마쓰 공략같은 케이스도 "약탈물? 뒷수습? 아 그딴것 필요 없고 일단 이 새퀴를 조져야겠다."라는 판단 하에 가해진 공격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공을 당할 수 있는 성이나 요새가 있더라도 보통 공격군이 진영을 설치한 지대보다는 고지대일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수공을 엉성하게 시행하면 오히려 공격군이 자신의 수공에 당할 수도 있다. 일본 전국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로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오시성을 공격했을때 겪은 일이 바로 이것으로, 수공을 하기 적합하지 않은 지형에서 수십km에 달하는 제방을 쌓아 수공을 감행하려다 되려 물이 역류해 이시다군의 진영을 덮쳤고, 물이 빠진 뒤에도 전장이 진흙밭이 되어 공성이 더 힘들어지는 어이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국의 조양자 같은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예. 춘추시대 말엽 진(晉) 나라의 제후였던 조양자는 한씨, 위씨와 동맹을 맺은 지백의 대규모 공격을 자신의 영지인 진양성에서 3년을 우주방어 했고[6], 장기전에 지치고 지씨 가문의 깡패짓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한씨와 위씨를 구슬려 비밀협약을 맺어 수공을 지백의 진영으로 돌려 역관광 태웠다. 잡힌 지백은 두말할것 없이 끔살이 났고 지씨 가문은 멸족 당한다. 그리고 진(晉)은 한(韓), 위(魏), 조(趙)의 3국으로 갈라지며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3.7 전염병을 퍼뜨린다
아주 고난이도의 전략으로 어찌보면 기다리는 전략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투석기 같은 공성병기로 병원균에 오염된 동물의 사체나 시신을 성내로 투하해서 적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전염병을 유발시켜서 방어력을 떨어트리는 전술이다. 또 성내에 상인으로 위장한 첩자등을 미리 보내서 병원균에 오염된 쥐를 풀어놓는다거나 하는 전략도 있다.
그러나, 전염병이라는 것이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데다가, 위생상태가 공성측이나 수성측이나 매우 안좋은 것이 현실이므로 섣불리 이 계책을 사용하면 적이 죽기도 전에 아군이 뿌린 전염병으로 아군이 먼저 전멸하는 역대박이 발생한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계략을 진행한 결과, 성이 전염병으로 인해 전투능력을 상실해서 함락되더라도, 이제는 공성측이 전염병이 창궐하는 성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을 잡지도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성의 점령을 위해 돌입한 공격군이 전염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전투에는 이겼지만 그 뒤는 망했어요가 되는 셈이다. 가령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군들은 미군을 피해 땅굴을 짓고 거기에 독벌레나 곤충, 뱀 등을 풀었는데 이것들이 미군만 공격하는 것들이 아니라서 베트남군들도 죽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더해서 수비측도 놀고는 있지 않으며, 성 내에 전염병이 돌면 같이 죽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공격측에게 전염병을 퍼뜨리려고 하는 자폭을 구사하기 때문에 전염병 전략은 궁극적인 전략이라기 보다는 보조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겠다.
3.8 기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돗토리 성을 공략할 시 정석적인 방법으로는 아군의 희생이 너무 크다고 생각해서, 공성전 3개월 전부터 치밀한 공작을 통해 상인들을 고용하여 돗토리 성에 쌓여 있는 쌀을 투기해서 사들였다. 돗토리 성의 사람들은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쌀이 팔리자 쌀을 더 팔았고, 그리고 돗토리 공성전이 시작되자 성 안에는 수성 병력들을 먹일 식량이 금방 떨어졌다. 히데요시는 그러면서 성을 포위하며 정작 공격은 하지 않은 채 수성 병력들이 지칠 때를 노렸다. 상술한 공성전술 중 '기다린다'에 포함되기는 하나 히데요시는 짧은 시간에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전략을 짠 것이니 기타에 서술한다.
그 결과 돗토리 성 안에는 먹을 게 없어서 말과 소를 잡아먹고, 영양 실조에다가 인육까지 먹는 처참한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수성측이 지쳐서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해보고 성은 함락되고 만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 히데요시가 성을 점령한 후에 성안에 다시 먹을것이 보급됐는데... 문제는 너무 굶은 성안 사람들이 급히 먹다가 상당수가 사망했다고. 오래 굶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건 죽을 수도 있을만큼 위험한 짓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9화에서 이 점이 잘 묘사된다.
그리고, 성을 함락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공격군도 적의 습격을 막기 위해 영채나 진지를 일반적인 야전용보다 탄탄하게 건설하는 경우가 많고, 알레시아 전투의 로마군 진지처럼 거의 성(城)의 방어도를 가질 수준으로 강화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의 양양성 공략때처럼 성 주변의 요지마다 장성, 요새를 쌓아서 목표가 된 성을 이중삼중으로 강력한 포위망을 형성해서 감싸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공격군이 공성전을 하기 위해 성벽을 축조한다는 뭔가 모순적인 상황이 의외로 많이 일어나며, 국가의 역량이 충실하다면 공성전의 목표가 된 성은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공성전 준비를 위해 성벽을 쌓다보니 목표가 된 성 근처에 다른 성을 만든 상태까지 도달한 경우가 있다. 가령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이 쌓았던 아나돌루 히사르와 루멜리 히사르, 스컨데르베우 휘하 알바니아 저항군의 본거지인 크루여를 공략하기 위해 쌓은 엘바산 요새 등이 이에 해당. 이렇게 되면 공성전에서 실패했지만 적어도 적을 방해할 거점은 마련한 셈이라서 전술적 패배지만 전략적 무승부나 전략적인 승리를 할 수 있는 경우가 존재한다. 물론 공성을 하는 측의 국가 역량이 충실해야 이렇게 전개가 되는 것이며, 만일 공성측 국가의 역량이 충실하지 못하면 오히려 수성측의 군대가 공성전에서 패배한 군대를 공격하면서 이런 진지들을 접수해버리는 바람에 다음 공성전의 난이도가 더 올라가버리는 역대박이 나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벌어진 울산성 전투에서 성내에있는 일본군을 제대로 말려죽이기위해 울산성주변의 태화강 수로를 전부 차단하고 우물을 끊어 성내 일본군을 정말로 말려죽일 뻔 했다. 가토기요마사도 이때 그냥 죽을뻔했다. 이 울산성전투의 트라우마가 제대로 작용되어 훗날 축조한성이 바로 일본의 3대 성이라 불리워지는 구마모토 성이다. 엄청난수의 우물과 다다미바닥에 고구마 줄기까지 심어놓은 가토기요마사의 울산성전투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만든 성이다.
4 공성병기
- 공성 망치
- 파일:Attachment/공성전/파성퇴.jpg
- 파성추, 파성퇴, 전투용 망치, 충차 등으로 불린다. 영어로는 Ram, Battering ram이라고 한다. Ram 은 숫양을 뜻하는 명사로도 쓰이는데, 숫양이 의외로 난폭해서 꼬우면 들이받는 성미가 있어서 거기서 따왔다고 한다. 공성망치의 들이받는 머리 부분에는 숫양의 머리모양 장식이 들어가는 일도 많았다. 주로 성문을 부술때 쓴다. 단순히 통나무를 자르고 손잡이 달아서 병사들이 들고 돌격하는것부터, 손잡이와 바퀴를 달아 밀고 가는것, 더 발달하면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벽과 지붕을 가진 수레에 얹기도 한다. 매체에서 묘사한 것을 보면 지붕에 가죽이나 금속판 등이 붙어 있는데 이건 화공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미리 물을 뿌려두거나 물을 지참해서 틈틈히 뿌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문을 부수기 위해 한 자리에서 머물러야만 하므로 기름+불 조합에는 속절없이 털린다.
- 현대에는 도어 브리칭용 배터링 램이 그 후예로 남아있다.
- 공성탑
- 파일:Attachment/공성전/공성탑.gif
- 동양에선 정란이라고 호칭했다. 바퀴를 단 이동식 탑. 사용법은 그냥 각 층마다 병사들을 채우고 성벽 앞으로 밀고간 다음, 맨 위층의 문을 겸하는 들다리를 내려 성벽에 걸고 병력을 밀어넣는 것이다. 물론 후속 병력이 계속 타고 올라간다. 주 재질은 철과 나무. 간단해 보이지만 성벽 높이에 맞춰서 제작해야 하고, 성벽에 걸고 건널 들다리도 해자를 건널 길이로 맞춰야 한다. 그리고 아래쪽의 바퀴와 뼈대가 탑 자체와 병사 수십 수백명의 무게를 견뎌줘야 하니 만들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또한 탑 자채의 주 재질이 나무이니 화공에 약해 가죽을 씌우고 물을 지참했다. 1차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그리스의 불로 실시된 화공을 막기 위해 물 대신 와인 찌꺼기를 실어놓은 경우도 있었다. 이 때 투석기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가죽과 탑 사이에 이격을 두어 날아온 돌덩이의 충격력을 흡수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탑 위에 난간을 설치하고 활, 쇠뇌같은 장거리 무기를 가진 병사들을 배치하기도 한다. 사다리에 비해 확실한 이점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동안 병사들이 공성탑의 벽에 의해 보호된다는 점과, 기껏 걸쳐봤자 한두명씩 올라오는 사다리와는 달리 성벽에 걸쳐진 들다리를 건너는 방식이라 한번에 여러 명이 성벽으로 달려들 수 있다는 점이다. 만들기 까다롭지만 수비대가 제대로 배치된 성벽을 공략하려면 공성탑도 반드시 필요했다. 게다가 성벽이 높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안 좋은 사다리에 비해 어느정도 보호를 받으며 다수의 병력을 한번에 쏟아낼 수 있는 공성탑은 사실상 필수. 바리에이션으로 1층에 공성망치를 결합한 물건도 등장했다고 한다.
- 사다리
- 파일:Attachment/공성전/사다리.gif
- 길다란 접이식 들다리를 수레등에 얹고 적 성벽에 접근한뒤 펼쳐 걸어 오르막길을 만드는것도 있고, 그냥 성벽에 거는 긴 사다리도 있다. 전자의 경우 공성망치가 달려있는 경우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 공격자의 병력손실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나는데, 일단 접근하는 동안 화살등 투사공격에 그대로 노출된다. 그리고 올라가는동안 양손을 써야하니 무기나 방패를 제대로 들수 없어서 적에게 무방비로, 그것도 머리가 노출된다. 올라가는데 성공해도 혼자, 혹은 한두 명의 소수가 성벽위에 가득 들어찬 적병들과 싸우며 다음 사람이 올라오도록 엄호해야한다. 게다가 방어자가 사다리를 밀어내면 올라오던 병력들은 그대로 황천길. 하지만 사다리에 사람이 많이 올라가면 무게때문에 밀어내기도 엄청 힘들다.
물론 그만큼 한번 뒤집히면 올라오던 사람들도 몰살당한다이에 대응하는 장비로 끝이 Y 자 형태로 생긴 긴 막대기가 있었다. 갈라진 부분을 사다리에 걸고 밀어내는 것. 물론 이런 위험 때문이 사다리는 성벽에서 밀어내지 못하도록 성벽 단 아래에 살짝 짧게 설치한 뒤 자력으로 성벽위로 기어올라가는 요령도 있었다. 게다가 성벽이 높으면 그만큼 사다리도 길어져야 하며, 거는데도 힘들고 올라갈때도 노출시간이 길어져서 높은 성벽을 상대로는 매우 비효율적이다. 이런 경우는 공성탑이 낫다.
- 전호피차
- 파일:Attachment/공성전/전호피차.jpg
- 적 성벽에 접근해 땅굴을 파는 동안 아군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지붕달린 차량.
- 수류탄 - 손에 들 수 있는 폭발물을 들고 성문 앞까지 돌격한 후, 성문에 붙이고 불을 당긴 다음 후퇴하는 방식으로 공격하는 구식 수류탄을 말한다. 투척식 수류탄은 수성용으로 주로 사용했다.
5 수성병기
- 활 - 높은 성벽 위에서 쏘는 활은 사정거리가 늘어나므로 효율이 극적으로 올라간다. 쇠뇌류도 마찬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 내노(內弩) - 묵자 52장 비성문에 나오는 쇠뇌로, 좁은 장소에서 사용하는 작은 수성용 쇠뇌다.
- 전사기(轉射機) - 내노와 같은 장에 나오는 수성도구로, 화살을 잇달아 쏘는 기계라고 짤막하게만 나온다.
- 끓는 물/기름/녹은 금속 - 성벽을 기어올라오는 적에게 "이거 좀 드세요~"라고 던져주는 한 잔의 친절(?). 이 공격을 당한 적은 심각한 화상을 입고 몇 미터 아래로 떨어져서 재기불능이 된다. 그냥 물이나 기름을 붓기 때문에 구식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활처럼 좁은 공격범위를 가지는 투사무기에 비해 넓은 범위로 쏟아져서 많은 적을 한번에 격퇴하는 상당히 효과적인 방어수단이다. 게다가 활은 쏠때마다 화살값으로 돈이 들어가지만, 이 방법은 물이나 기름만 있으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쏟아 붓는게 가능한 것도 큰 장점.[7] 사막 같은 곳에서는 안그래도 귀한 물 대신 사방에 널린 모래를 달궈서 쓰기도 했다고. 그 외에 몽골 침략시,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군이 성에 접근해 굴을 파려 하자 고려군이 용광로에 녹인 쇳물을 퍼부어 굴째로 무너뜨려 버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성벽 밑에 땅굴을 팔 때는 그냥 파는 게 아니라, 충분한 수의 아군이 신속하게 성 안으로 침투하도록 굴을 넓게 파야 하기 때문에 굴이 무너지지 않도록 내부에 나무 지지대를 설치해야 한다. 굴 내부에 쇳물이나 물이 쏟아지면 지지대가 파괴되서 굴이 무너지는 일은 당연한 일.
무너지지 않아도 익사는 확정이다
- 뢰(檑) - 고대 중국에서 처음 개발된 동아시아의 수성도구로, 사다리를 걸치고 성 위를 기어오르는 적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일종의 대형 롤러다. 목뢰, 니뢰, 전뢰, 야차뢰, 차각뢰가 있으며, 특성은 다음과 같다.
- 목뢰 - 통나무. 통나무에 철침 여러 개를 박아 살상력을 높이기도 한다.
- 니뢰 - 진흙을 빚어 만든 원기둥 모양의 뢰.
- 전뢰 - 진흙을 빚어 만든 뒤 구워서 강화시킨 뢰. 니뢰와 달리 겉이 울퉁불퉁하다.
- 야차뢰 - 목뢰와 비슷하지만 바퀴와 줄을 달고 도르래와 연결해 놓아, 적을 향해 떨어뜨린 뒤 줄을 감아올려 재사용할 수 있다. 사극 대조영초반부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낭아박과 같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차각뢰 - 야차뢰와 비슷하지만 큰 바퀴 모양이다.
- 낭아박 - 위의 야차뢰와 비슷하지만, 야차뢰의 타격부가 통나무 모양인 데 반해 낭아박의 타격부는 철침이 잔뜩 달린 판자다. 사극 대조영에 등장했다.
- 청음기 - 고대 중국 제자백가 중 하나인 묵가에서 발명한 수성장치. 대략 지하수가 나올 정도로 땅을 깊이 파고 안에 항아리를 고정시킨 뒤 사람이 들어가 소리를 듣는 것으로, 땅굴을 파오는 것에 대비하는 장치다. Mythbusters에서 실제로 시험을 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유효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목질려, 마름쇠(철질려), 녹각목 - 목질려는 마름이라는 식물의 열매로서,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 말려 보관하다 수성시 뿌려두면 효과적이다. 마름쇠는 목질려를 본떠 만든 것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도 날이 위로 서게 만든 철침이고, 녹각목은 끝을 날카롭게 깎은 나뭇가지를 말한다. 성벽 주변에 설치해 적의 돌격을 저지하는 역할을 한다. 사슴의 뿔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녹각목이다.
- 썩은 분뇨 - 이름 그대로 썩은 똥오줌을 수성시 적에게 뿌린다.
웩분뇨야 넘쳐나니 구하기도 쉽고, 당하는 쪽은 여러모로 전투의욕을 상실하기 때문에 상당히 효율이 좋은 방법. 2차적으로 감염을 일으킬 수도 있다. 문제가 있다면, 사용하기 위해 모아두는 과정이 고역일 것이다. 대나무와 막대에 천을 감아 만든 대나무 피스톤(분포(糞砲)라고 한다)으로 적에게 뿜어대기도 한다.
- 돌 - 성벽을 올라오는 적에게 돌을 던지거나 바위를 떨어뜨린다. 위치만 잘 조정하면 돌을 맞은 사람이 떨어지면서 뒤쪽의 사람들까지 덮쳐서 일격으로 여러명을 떨어뜨릴 수 있다.
인간 볼링특별히 신경쓸 필요 없이 대충 겨누어서 던지기만 해도 사람 잡기는 어렵지 않기에 돌만 충분하면 좋은 방법.
- 업그레이드판으로 돌에다가 밧줄 등을 묶은 것이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떨어뜨린 돌을 다시 끌어올려서 재활용하기 위함이다. 원래 돌 같은 것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의외로 성 내부에는 별로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장기간의 공성전시 돌이 부족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만일 적이 돌에 묶인 밧줄을 붙잡거나 하면 밧줄을 손쉽게 끊어버리면 끝이니 안정성도 높다.
- 불 - 대포 이전의 공성병기들은 대부분 주 재질이 목재이기에, 화공에 매우 취약했다. 공성측은 이에 대한 대비로 공성망치나 공성탑등의 병기 외부에 가죽을 씌우고, 물을 지참하고 틈틈히 뿌렸다. 또 공격에 나서는 병사들에게도 물을 뿌려 적셔두기도 했다.[8] 중국은 맹화유궤, 동로마는 그리스의 불과 같은 화염 방사기류를 사용해 적에게 불세레를 퍼붓기도 했다. 1453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의 경우 진짜로 그리스의 불 세례를 맞고 오스만 측 공성탑이 홀라당 타버린 적도 있었다.
- 불을 매단 동물 -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화우(火牛), 화금(火禽)이란 게 등장하는데, 소나 날짐승에 몸에 가연성 물질(화약 등)과 불씨를 매달아 날려보내 자폭시키거나 불을 질러 공성군의 진영이나 공성무기에 피해를 주는 것이다. 공성전에서 공성측이 적 성에 불을 지르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의 화우. ## | 서양에서도 사용하였다. ## |
- 전투 마차 - 고대 중국에서 인력식 전투마차들은 앞에 방패판과 창날 등을 달고 대기병전에 사용되던 것이지만, 공성전에서는 적의 화살로부터 아군을 보호하는 용도로 공성탑과 같이 사용되었고, 수성측에서는 성벽이나 성문이 무너지거나, 적이 시가지로 진입했을 때 적의 돌격을 막는 임시 바리케이트로도 사용되었다.
- 자차 - 한자로는 藉車. 적차라고도 한다. 묵자에 나오는 수성도구로, 수레 위에 여장을 장착하고 안전하게 몸을 내밀어 아래의 적에게 화살을 쏘고 돌과 통나무 등을 떨어뜨려 공격이 가능한 이동식 수성 플랫폼이다.
- 요새포 - 공성전 말기에 등장한 수성용 3대병기의 첫번째로 주로 장거리를 담당한다. 공성포와 포화를 주고 받으면서 최대한 원거리에서 공성군을 박살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공성포와 기존 방식의 요새가 쇠퇴하면서 같이 쇠퇴하였으며, 21세기의 시점에서는 공군이나 야포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 기관총 - 공성전 말기에 등장한 수성용 3대병기의 두번째로 주로 중거리에서 근거리를 담당한다. 공성전의 전성기가 지난 후에 등장해서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관총이 등장한 후 요새나 성에서 대량채택하지 않은 적이 없다.
- 일단 아무리 못해도 소총의 유효사정거리 이상의 성능을 가지며, 지속적인 연사가 가능하므로 방어시설물을 방패삼아서 배치된 기관총 몇 정만 있으면 공격군이 성벽이나 흉벽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좁은 총안구를 통해서만 저격이 가능하므로[9] 제대로 대응하려면 공군을 부르거나 강력한 대포로 정밀조준해서 사격해야 무력화된다. 당장 러일전쟁의 203고지에서 일본군에게 몇 만명의 사상자를 입힌 무기는 러시아군이 요새에 거치해놓은 기관총이었다. 유일한 약점은 은엄폐를 제대로 한 끝에 성벽 아래에 딱 붙은 적군 병력을 소탕하기에는 사각(死角)의 문제로 인해 부적당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수류탄이 해결해준다.
- 전쟁을 다룬 매체에서도 상당히 흔하게 등장하는 클리셰 중 하나가 바로 잘 구축된 기관총 진지다. 접근하려는 아군들을 몰살시키는 기관총 진지를, 주인공이나 그 동료가 수류탄이나 폭발물을 총안구로 투척해서 돌파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전쟁을 다룬 게임에서도 기관총 진지를 상대하는 연출은 최소 한번은 나오는 편.
- 수류탄 - 공성전 말기에 등장한 수성용 3대병기의 세번째로 주로 근거리를 담당한다. 여기서 말하는 수류탄은 현대식 수류탄을 말한다. 공성전의 전성기가 지난 후에 제대로 된 물건이 등장한지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성전은 물론이거니와 참호전, 야전에 널리 쓰인 물건이다.
- 예전부터 성벽 아래에 있는 적에게 화약을 사용한 폭발물을 던지는 것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당시의 폭발물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우며, 사용시 불을 당겨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폭하기도 하고, 위력도 그렇게 좋지 않은데다가 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부작용이 있어서 공성전의 주역으로 활약하기에는 2% 정도 부족했다.
- 하지만 지연신관식 수류탄이나 막대형 수류탄이 개발된 후에는 수성측의 입장에서는 가장 골치아픈 존재중 하나인 성벽 아래에 딱 붙어있는 적군 병력을 손쉽게 몰살하는 물건으로 잘 쓰이게 된다. 당장 수성측에서 수류탄을 사용할 때는 야전처럼 멀리 수류탄을 던질 필요도 없으며, 그냥 안전핀을 뽑은 다음에 손만 살짝 내밀어서 수류탄을 툭 떨어뜨리면 끝나는 편리하고 안전한 공격이 가능한데, 공성측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파편을 뿌리는 소형 폭발물이 성벽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격이니 1-2발로도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수류탄을 피해서 도망치면 활이나 총의 좋은 먹잇감. 따라서 요새포, 기관총과 함께 공성측 병력이 더 이상 인해전술로는 성벽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3대 물건으로 자리잡았다.
6 각종 공성전들
6.1 역사상 주요 공성전들
국내
해외
6.2 공성전을 잘 표현한 게임
MMORPG의 공성전도 참조해보자.
- 리니지 시리즈
- 레인보우 식스 시즈 : 아예 게임 자체가 목표를 두고 벌어지는 5:5 공성전이다.
- 마운트 앤 블레이드 시리즈 : 성문을 부수거나 열지도 못하고 투석기는 그냥 맵의 장식일 뿐이며 타고 올라가는 사다리도 1개 내지는 2개 밖에 없어서 야전에 비해 공성전은 상당히 허술하게 제작된 편이다. 그나마 with fire & sword 에서는 화약으로 성벽을 무너트릴 수 있으니 좀 낫지만 이 역시도 전투전에 미리 하는 것이므로 전투중에 성벽을 부수거나 사다리를 추가로 설치하는 등의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나마 멀티플레이 맵중 사다리 무너뜨리기, 성문 부수기, 투석기 심지어는 발리스타까지 구현된 맵이 있긴 하다.
-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
- 스트롱홀드
- 세틀러
- 토탈워 시리즈 : 성 디자인이 지역 혹은 지명과 상관없이 똑같은 클론인건 그렇다 치고 구버전에서는 성 주변의 지형도 무조건 평지라 같은테크 같은 병력이면 모든 성이 지역과 상관없이 난이도가 같았던 적도 있었고 어쨌든 아주 잘 표현했다고 보긴 힘들다. 멀티플레이에서도 야전보다 공성전이 더 인기가 없다. 그러나 멀플에서 인기 없는건 오히려 그만큼 공성전을 잘 구현해놨다는 점으로 실제 전쟁에서도 명장들은 야전을 선호했다. 애초에 공성전이 되면 토탈워 시리즈에서 써먹을 수 있는 숱한 전략들이 죄다 무용지물이 되는 것도 나름 현실재현이고. 물론 이런 부분은 재미를 추구해야하는 게임으로서는 문제가 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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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 of Ages[10] - 비시즈 : 이쪽은 아예 이게 목적이다.
근데 왜 비행기같은게 보이는걸까 - 탱크 키우기모드 중에서 있다
-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 거점을 얻기 위해선 공성전이 반드시 필요하다
6.3 미디어에 나온 공성전들
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공성전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영화나 게임 드라마에서 유명한 공성전은 죄다 CG다.
- 반지의 제왕 실사영화 시리즈의 헬름협곡 전투와 미나스 티리스 공성전
- 킹덤 오브 헤븐
- 이블데드시리즈 3편
- Warhammer 40,000의 홀리 테라 황궁 공성전과 브락스 공성전
- 더 위처 2: 왕들의 암살자의 라 발레뜨 공성전
- 오그리마 공성전
- 불멸의 이순신중 진주 대첩
- 정복자 1453 -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오스만군의 관점에서 그려낸 터키 영화. 3중성벽에 돌격하는 20만 터키군의 전쟁신이 일품.
- 세븐나이츠의 공성전
-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태풍을 부르는 장엄한 전설의 전투 - 아동용 애니메이션이였음에도 다양한 공성과 수성전술이 나오는등 고증면에서 아주 뛰어나다.
6.4 비유적인 의미의 공성전들
- 국회 공성전
- 마산아재
- 테테전
- EVE 온라인 : 요새 역할을 하는 구조물이 있고 이 구조물 안에 있으면 유저는 공격을 받지 않지만, 구조물 안에 있는 유저는 밖으로 공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갇혀버리는 모양새가 된다. 달 기지(POS)는 연료가 떨어지면 보호 기능이 사라져 안에 갇힌 유저는 끔살을 당한다. 스테이션 안은 비교적 안전하지만, 일단 소유권이 뒤바뀌면 다시 탈환하기 전까지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스테이션 안의 전략 자원을 조금이라도 건지려면 진을 치고 있는 적을 뚫고 필사의 탈출을 감행해아 한다.
- K리그 클래식의 전북 현대 vs 수원 삼성 : 두 팀의 홈구장이 각각 전주성, 수원성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데서 유래했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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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성(castle)을 팬다(...)
7 관련 항목
- ↑ 상대가 농성이 가능한 지역을 공격하는 경우 전투의 명칭에 Siege가 붙는다. 그리고 포위하고 상대가 나가 떨어질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접 공격을 시도하면 Siege Assault가 된다. Siege란 말은 비단 요새들 만이 아니라 도시를 공격할때도 쓸 수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베를린 전투도 엄연히 농성하는 상대를 몰아내기 위한 전투였으므로 Siege of Stalingrad, Siege of Berlin 이여야갰지만 현대에 와서는 고전적인 전투/전쟁 명명법이 유명무실해진지라 그냥 Battle이란 명칭이 주로 쓰인다. 더군다나 스탈린그라드나 베를린의 경우 단순히 농성하는 적과 싸우는 것만은 아니었으므로. 지금도 아예 빼도박도 못하는 요새 점령전은 Siege란 명칭이 붙지 Battle이란 명칭은 잘 안 붙는다.
- ↑ 예외는 있다
- ↑ 마르틴 반 크레펠트 저/우보형 역, 보급전의 역사(Supplying War), 플래닛 미디어, 2010.
- ↑ 단두대 칼날처럼 성문이 위아래로 열리는 문
- ↑ 목재, 벽돌, 흙부대 등등
- ↑ 진나라 귀족 가문간의 내전이 터지기 이전 조양자의 가신 동안우가 진양을 다스릴적에 성곽을 증축하고 관청을 만들때 구리 기둥을 세우고 목재는 쑥대,싸릿대나 가시나무등을 사용하는 식으로 암암리에 전쟁물자를 비축해 두었다고 한다. 공성전이 시작 되자 구리기둥은 당장 날붙이로, 목재들은 화살로 변신, 방어군의 무기가 되었음은 두말 할 것 없다.
- ↑ 화살은 화살촉, 화살대, 화살깃을 비롯한 다양한 재료들이 들어가며 대충 만들어봤자 원하는 곳으로 잘 날아가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돈을 주고 장인들에게 사야하므로 장기전으로 갈수록 화살값만 해도 만만찮게 들어간다.
- ↑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잘 묘사가 되어 있는데, 공성탑을 오르는 인원들에게 물을 마구 끼얹는 모습이 나온다.
- ↑ 그나마도 겨우 저격해서 죽여도 내부에 있던 다른 인원이 다시 방아쇠를 잡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다시 사수를 처리하는 동안 아군의 손실이 강요된다.
- ↑ 현실적인 공성전은 아니지만 적의 성을 부수고 자신의 성을 지키기위해 병력을 배치한다는 점에서 틀린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