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석

元天錫

1 개요

고려조선초의 학자. 1330년(충숙왕 17년) 출생.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2 일생

고려 말에 정용별장(精勇別將)을 지낸 열(悅)의 손자,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어린 시절 부터 학문에 밝았으며 군대 가기 싫어서진사가 되었으나 고려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목은 이색과 교류하며 유학의 발전에 힘썼다.

조선 태종 이방원(芳遠:太宗)을 어린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이방원이 즉위하자 원천석을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속으로 피해버렸다고 전해진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야 백의(白衣)를 입고 서울로 와 태종을 만났다고 한다.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주고 돌아갔으며, 아들 형(泂)을 기천(基川: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후세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하였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곁에 있다.

원주시 행구동에 묘소가 있으며 호저면 산현리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3 학문 업적

3.1 시문

원천석의 시문들을 모은 문집으로 《운곡시사 耘谷詩史》가 있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하노라.

고려의 멸망을 탄식하는 회고수가 유명하다. 최영을 기리는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 前冢宰六道都統使崔瑩〉라는 시와 우왕창왕신돈의 자식이라 속여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만든 것을 한탄하는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 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라는 시가 있다. 후자는 만일 왕씨의 혈통이 문제가 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는지 힐문하며 하늘의 감계가 밝게 비출 것이라고 말했다.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 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그 문집에 실려 있는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나라 2현(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리어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 前冢宰六道都統使崔瑩〉이라는 시와 우왕과 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한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 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라는 시를 읊어, 만일 왕씨(王氏)의 혈통으로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던가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3.2 야사

야사(野史) 6권을 썼다고 전해지지만, 전승되지 않고 있다. 《동락패송》에 따르면 원천석은 야사 6권을 저술한 다음 궤 속에 넣어서 남에게 보이지 않고 가묘(家廟)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유언했으나, 증손자의 대에 이르러 사당에서 시사(時祀)를 지낸 다음 고려말에서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괜찮겠거니 하고 파서 내용을 확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천석의 야사는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여 조선왕조의 국사와 완전히 배치되는 멸족(滅族)의 화를 불러올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일족이 역적이 되어 몰살당할 것을 두려워한 후손들은 야사를 불태워버렸으며 안타깝게도 원천석의 야사는 전해오지 않게 되었다.

고우영 화백은 오백년에서 이 이야기를 소개하며 500년 뒤에 조선왕조가 멸망한 뒤에야 발굴해야 했다고 탄식했다.

많은 역덕후들 또한 이 이야기에 안타까워하는데,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기록이 워낙 승자의 역사로서 왜곡되었다는 의혹이 많기 때문이다. 고려의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조선의 태조, 정종, 태종 시기의 기록은 현재도 학자들의 의심을 많이 받고는 있지만, 명백하게 이를 반박할만한 대안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6권에 달하는 상세한 기록이 있다면 여말선초의 역사관이 대격변을 일으키기에 부족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