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J. 브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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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Jennings Bryan.

1860.3.19 ~ 1925년 7월 26일

미국의 41대 국무장관...이자 대통령 선거에서 3번이나 낙선한 안습남.
미국의 이회창

1 전반적 생애

일리노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장로교도가 되어 14살의 나이로 세례를 받기도 했다. 후일 브라이언은 세례를 받은 날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일리노이 대학을 마치고 변호사가 된 그는 잭슨 민주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890년 하원의원이 된 것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뛰어난 연설 실력을 바탕으로 상원에 진출한 그는 기업가와 부유층의 횡포에 맞서 서민,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러한 것들이 인정받아 1896년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다. 이 때 당시 전당대회에서 금본위제를 반대하며 했던 연설이 지금까지도 명연설로 남아있다.[1] 하지만 당시 언론들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당시 언론들이 트러스트들에게 장악되어 있던 걸 생각해보면 놀랄 일도 아니지만.

어찌됐건 높은 관세와 금본위제를 주장하는 공화당윌리엄 매킨리에 맞서 저관세와 은화 자유 제조를 주장했지만 브라이언의 공약들은 대부분 부유층에 불리했기에 그들은 매킨리에게 엄청난 선거지원금을 퍼부었고 결국 매킨리가 승리하게 됨으로서 예나 지금이나 쇼미더머니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습

2016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도전했다가 힐러리 클린턴에게 밀려서 떨어진 버니 샌더스와 비슷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1.1 1896년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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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대선, 득표 710만(51%) 대 649만(47%)로 매킨리의 승리. 선거인단은 271:176.

미국 인민당(포퓰리스트 당) 등과의 제휴에 따른 브라이언의 중부 권역의 압승(46명)은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되려 웨스트 버지니아켄터키(18명)를 잃었으며, 선거에서 더 이기려면 이거 이상으로 30명이 더 필요했다. 결국 뉴욕주를 이겨야했단 이야기. 캘리포니아(2천표, 0.64%)와 켄터키(277표(!), 0.06%)에서 초박빙이었으며, 인디애나(15명)와 오레건(4명)에서도 2%대의 박빙 승부를 벌였다. 하지만 북부의 뉴욕 등에서는 압도적인 공화당 몰표가 나왔으니, 오하이오의 5%차가 최소 격차였고 북부 대부분이 두 자리수 이상의 % 차이가 났다.[2]

또한 민주당 내에서 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t, 이른바 금본위 민주당)이 브라이언에 반대하고 나서 0.96%의 득표를 했으며, 금주당도 0.9%의 득표를 벌었다. 캘리포니아와 켄터키에서의 패배는 이런 이탈에 기인한 것이다.

왜 이렇게 설명이 자세하냐면... 이 첫 선거가 브라이언의 세 번의 선거 중 최고 스코어였다.

1.2 20세기의 삶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이 터지게 되자 시민군을 조직하고 참전하려 했다. 그러나 장티푸스로 인해 쿠바에 가지 못했다.

그리고 1900년, 다시 한번 매킨리와 맞서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려는 공화당과 매킨리를 비난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대세가 제국주의였던 지라 또 다시 지고 말았다. 안습. 북부의 지지세 일부를 좁히고 켄터키(12명)를 회복하였으나 인민당 과의 제휴가 멀어지는 등 서부에서 되려 큰 격차로 지면서 33명을 잃었다. (사실 40% 중반대의 득표는 테디 루즈벨트 때 당한 참패 등에 비하면 준수한 득표긴 하다만.)

그렇지만 절치부심 끝에 1908년 마침내 3번째로 대통령에 도전했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인기를 등에 업은 윌리엄 태프트에게 미주리까지 내주며 간단히 떡실신 당했다. 안습.

이렇게 계속 안습하게 사나 싶었지만 1912년 우드로 윌슨을 지원했고 그가 공화당의 분열 덕에 당선되자 그에 의해 국무장관에 임명됨으로서 신세 좀 피나... 싶었지만 국무장관은 명목상의 자리였고 윌슨이 거의 모든 외교 정책을 스스로 결정해 버린다. 결국 1915년 국무장관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듬해에는 윌슨의 재선을 위한 선거 유세를 했다. 그리고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자신도 가겠다고 했지만 윌슨은 거절한다.

그 후에는 여성 참정권 획득 등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다 1925년 세상을 떠났다.

2 여담

한편으로 그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였다. 그래서인지 진화론을 믿지 않았으며, 말년인 1925년에 그 유명한 스코프스 재판에 원고측 변호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재판 내용면에서는 떡실신당했지만 어쨌든 1심에서 승소하였으며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

또한 별명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The Great Commoner(위대한 평민), Boy Orator of the Platte(플래트[3]의 꼬마 연설자) 등이 있다.

비록 대통령은 되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미국 내 여러 군데에서 쓰이고 있다. (ex. 브라이언 대학)

  1. 그대들은 노동자의 머리에 가시관을 얹을 수 없으며 인류를 금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없다 (You shall not press down upon the brow of labor this crown of thorns; you shall not crucify mankind upon a cross of gold)!라는 내용.
  2. 북부 버몬트는 무려 80%, 매사추세츠, 메인, 로드 아일랜드에서는 각각 69% 공화당 몰표가 나왔고, 남부 미시시피에서는 91%(!) 민주당 몰표. 서부인 콜로라도, 네바다, 몬태나에서도 각각 85%, 81%, 79% 민주당 몰표가 나왔다. 한편 사우스 다코타에서는 183표(0.22%) 차로 민주당이 간발의 승리를 거두었다. 인구가 적은 와이오밍에서도 789표(3.7%) 차로 승리. 몰표랑 박빙승은 많은데 결국 졌다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도 오하이오에서 5% 이상은 격차를 좁혀야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다. 역시 오하이오
  3. 그가 살던 네브래스카에 흐르던 강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