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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 ||||||
문민정부 | ||||||
25대 황인성 | ← | 26대 이회창 | → | 27대 이영덕 |
제17대 대통령 후보 | |||||
기호 | 이름 | 기호 | 이름 | 기호 | 이름 |
1 | 정동영 | 9 | 전관 | ||
2 | 이명박 | 6 | 문국현 | 10 | 금민 |
3 | 권영길 | 7 | 정근모 | ||
4 | 이인제 | 8 | 허경영 | 12 | 이회창 |
목차
1 개요
대한민국 법조계의 전설이자 대한민국 현대 정치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대통령과는 가장 가깝고도 멀었던 사람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1]
이 사람 덕에 대한민국이 조금 더 나아진 국가가 되었다.[2]
1.1 소개
대한민국의 정치인, 법조인. 현재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호는 경사(徑史).안타깝게도(?) 대통령이라는 경사는 치루지 못했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올라프'그 올라프 말고이다.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신한국당 총재, 한나라당 총재, 자유선진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이모부 김홍용, 김문용, 김성용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 초년부터 법조인 시절
파일:이회창 졸업.jpg |
서울대학교 졸업사진 |
황해도 서흥군 출신으로[3] 검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 공군 군법무관으로 복무해 대위로 전역한 뒤 판사로 임용되었다.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군사정권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중립적이고 청렴한 자세를 갖췄으며 이로 인해 정부에서 기피인물로 찍혔으나 마땅히 해를 가할 명분이 없어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거쳐 1981년 만 46세로 역대 최연소 대법원 대법관에 임용되는 등 엘리트 집단인 법조계 내에서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으며, 대법관으로 주심을 맡은 16건의 전체합의 판결 중 10건에 소수의견을 내는 등 서슬퍼런 독재정권의 상황에서도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소신있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법원의 양심이 아직 완전히 말라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를 계기로 대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신망있는 법조인으로 알려졌고, 전두환 정부의 눈밖에 나면서 1986년 대법관 재임용에서는 탈락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3 중앙선거관리위원장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면서 곧바로 대법관에 복귀했는데, 이때 대법관 중 한명이 겸임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막 민주화된 상황이라 그때까지는 개표 관리에만 치중된 선관위의 역할을 선거운동 감시로까지 확대하였다. 이회창은 당선되면 그만이라는 당시의 선거풍토에 고발로 맞서며 1989년 강원 동해시(선거 무효로 홍희표 국회의원직 상실)와 서울 영등포구 을(선거 무효로 김명섭 국회의원직 상실) 재보궐선거 때 후보 전원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당시 그는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총재 서한을 문제삼는가 하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친필 경고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노대통령의 서한이 여권내에서 문제가 되자 1년 3개월만에 사표를 던지고 스스로 자리를 물러났다. 선관위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대법관으로 계속 활동하면서 많은 판결을 남겼다.[4][5]
4 감사원장
대법원장을 바라보던 이회창은 1993년 2월 문민정부를 선언한 김영삼의 요청으로 감사원장에 임명됐다. 이회창은 "청와대, 국군기무사령부 등 어느 기관이든 법규정에 따라 감사하겠다", "현정권에 관련된 정치적 비리라 하더라도 성역을 인정치 않고 엄정한 감사활동을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청와대비서실, 국방부, 국군기무사령부 등 권부의 핵심부서가 모두 감사원의 감사 도마 위에 올랐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도 예외일 수 없었다. 평화의 댐, 율곡사업 감사를 하면서 두 전직 대통령을 서면조사했고, 수많은 전현직 장성들과 고위관료들이 구속되었다.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처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국가안전기획부에 대한 감사까지 진행했는데 안기부에서는 이회창을 비롯한 감사원 간부들의 뒤를 캐거나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직원들에게 출입을 지시한다. 당시 강직함이 회자되어 이른바 대쪽이라는 그의 별명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감사원장 시절 인천국제공항 건설 사전 예방감사를 했던것이 유명하다.
5 국무총리
1993년 12월 김영삼의 문민정부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면서 이회창은 헌법으로 위임된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는 새로운 총리상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국무총리 시절에도 어김없이 청렴한 모습을 보여주고 대통령의 방탄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국무총리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소신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국민의 인기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김영삼의 최측근이자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최형우[6]를 면전에서 호통친 건 당시 유명했던 일화.
그러나 김영삼은 이런 국무총리상을 허락하지 않아 두 사람은 수시로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고,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총리가 제외되자 통일부 장관 등 회의 구성원들이 총리 직할이라는 법적 근거로 총리의 승인을 받지 않은 회의는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김영삼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 결국 이회창이 자진 사퇴하는 형식으로 사실상 경질되었다. 사퇴하면서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 라는 말을 남기며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총리직을 사퇴한 이후에는 신한국당에 입당하여[7] 15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새로 떠오르는 정치인으로서 대통령까지 순탄대로일 줄 알았으나...
6 연이은 대선 도전과 낙선
역대 이회창 대선후보 포스터 15대 - 16대 - 17대 |
결과부터 말하자면 대선에 3번을 도전하여 3번을 모두 낙선했다. 정계의 콩라인[8]
6.1 제15대 대선 (1997)
국무총리 사퇴 후 잠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을 맡아 선거를 지휘했고, 자신도 전국구 1번으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1997년 3월 노동법 날치기에 대한 책임을 진 이홍구 대표가 사퇴하고 신한국당 대표로 지명되었는데,[9] 이미 유력 대권 주자로 거론되던 상태라 곧이어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 뛰어들었다. 다른 경선 후보들은 당 대표가 경선에 참가하면 불공정한 경선이 되므로 당 대표직에서 사퇴하라고 촉구했으나 이회창은 거부했으며, 이 때의 불공정 논란은 이인제가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대선에 독자 출마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10] 경선 구도는 민정계와 민주계의 대리전 양상으로 흘렀는데, 김윤환을 중심으로 이회창 대세론을 일으키며 단단히 뭉쳤던 민정계와는 달리 민주계는 이인제, 이한동, 이수성, 김덕룡 등의 주자들이 뭉치지 못하면서[11] 경선은 이회창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아들 두명이 모두 체중미달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는 병풍 논란이 터지면서 지지율이 폭락했다. 이를 본 신한국당 내에서는 후보를 바꿔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경선 2위였던 이인제에게 지지가 몰리면서 결국 이인제가 경선 결과를 불복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출마하게 되었다. 이인제는 당시 경제위기로 이회창에게 공격받던 김영삼 대통령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김영삼의 정치기반인 부울경을 중심으로 이회창의 보수표를 잠식해갔다. 이로 인해 이회창은 한때 3위까지 떨어지기도 했지만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공세를 통해 이인제의 지지층을 어느정도 가져오면서[12] 2위를 회복하고, 1위를 탈환하려 했으나 대선 직전에 터진 IMF 사태로 보수정권의 이미지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이에 이회창은 김영삼을 탈당시키고 김영삼 이미지인 신한국당을 통합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는 등 이미지를 개선하려 했으나 결국 불과 1.6%인 39만표의 차이로 2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무려 500만표를 잠식한 이인제와 병풍, DJP연합, IMF 사태 등 이 중 하나만 없었어도 여유롭게 당선됐을거란 점에서 이회창과 보수층에게는 더없이 아쉬운 결과. 자세한 과정은 제15대 대통령 선거 항목 참조
6.2 제16대 대선 (2002)
낙선 이후 한나라당의 총재가 되어 처음으로 야당이 되어버린 한나라당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였다. 이후 1999년에는 송파구 갑 지역구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서 압도적인 득표율(61%)로 당선된다.
이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보수의 장자방이라고 불리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선거대책위원회 상임부본부장으로 발탁하였다. 이회창은 윤여준의 진언에 따라서 김윤환, 이기택, 황낙주, 조순, 신상우 등 거물급 정치인들을 낙천시킨다. 특히 김윤환과 이기택은 한나라당의 양대 계파의 수장이어서 그 파장이 매우 컸다. 당시 윤여준이 공천 구상을 이회창 총재에게 꺼내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당신 미쳤구만.. 제정신이냐’고 했다고 한다. 이회창의 주변에서도 반대가 많았지만, 윤여준이 ‘한 시대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한 달 가까이 설득한 끝에 승인되었다고 한다. 출처 이 일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9룡[13]이 난립하던 상황에서 민정계, TK의 맹주로 이회창을 지원해서 대통령 후보로 밀었던 킹메이커 김윤환과는 영영 결별하게 된다. 이회창 역시도 허주(김윤환의 호)와의 결별이 정치를 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선거 당시 불었던 낙선운동으로 총선 패배로 점쳐졌지만 133석을 얻으며 원내 제1당을 차지한다. 총선 승리로 이회창의 당권은 더욱 단단해졌고,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내 경선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한나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후보로 선출되어 두번째 대선도전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회창이 정치권에 머무는동안 참신한 대쪽 판사의 이미지는 호화빌라 논란, 아들의 원정출산 논란, 박근혜 의원의 당권-대권 분리 요구 등을 겪으면서 엘리트주의, 제왕적 총재라는 기득권의 대표로 변질되어 갔고, 새천년민주당 설훈 의원이 이회창에 대한 최규선 20만달러 수수설, 기양건설 10억원 수수설 등의 허위사실을 유포하면서[14] 이회창의 이미지는 구태정치인으로 완전히 몰락하였다. 특히 병역비리 수사관을 사칭한 전직 부사관 김대업이 이회창 두 아들의 병역비리 과정을 녹취했다고 주장하는 조작된 테이프를 근거로 지난 대선 때도 논란이 된 병풍를 폭로하면서 이전 대선에서 드러난 두 아들들의 병역 면제가 다시 논란이 되었다. 물론 김대업이 대선 전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구속되고 이런 의혹제기가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이회창은 지지율 1위를 계속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병풍이 15대 대선에 비해서 강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아무리 권력욕이 비춰지고 여러가지 마가 끼었다 해도 이회창은 양심을 지키던 판사라는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회창을 싫어하는 진보 쪽에서도 정치인이 되기 전 이회창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1997년 이회창이 여당 후보이던 시절에는 병역 비리 의혹 보도가 공중파 방송에서 19건에 그쳤지만, 야당 후보였던 2002년에는 101건으로 보도가 늘어났고, 리포트 제목이 ‘병역 은폐 개입’ 등과 같이 김대업씨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의혹이 사실인 것처럼 보도한 내용이 12%가량 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김대업의 발언을 육성으로 내보낸 것이 37건이나 되었을 정도로 대대적인 보도가 이루어졌다. 중앙일보 하지만 조중동이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서 노무현측이 언론환경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는것은 조중동 측도 이회창에 유리한 보도를 일삼았다는 반박도 있다. 하지만 공중파 방송3사가 가진 영향력과 종이신문인 조중동과는 차이가 있으며, 신문사가 특정 대선후보를 지지하거나 호의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구미 언론에서도 왕왕있는 일이기 때문에, 공중파 방송과 종이신문을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려운 측면도 존재한다.
위와 같은 정부와 새천년민주당, 그리고 김대업 측의 폭로전이나 정치공작도 있었지만, 이회창 자신도 2000년의 총선 승리 후 지나치게 오만한 행보를 보인 점도 있다. 총선 패배와 각종 게이트 정국으로 레임덕에 빠진 김대중 대통령을 대신해 임기 7년의 대통령이라는 말이 돌정도로 거의 대통령 당선자처럼 행동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주재한 지차체 단체장 회의에 자당 출신 지차체 단체장들을 불참시키거나, 혹은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고령의 대통령 앞에서 보인 지나친 강경자세 때문에 이회창=오만 혹은 정치보복의 이미지가 굳어졌고, 지지자만큼이나 안티들을 양성했다. 여기에 부인 한인옥 여사도 "하늘이 무너져도 집권해야 한다"는 말을 주변에 하고 다니면서 오만한 이미지를 증폭시켰다. 게다가 대선 당시 우군이 될 수 있었던 김종필의 자민련에게 "꼬우면 너희가 숙이고 들어와라"식으로 대해 김종필은 이회창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대선에서 중립을 지켰다. 이회창 입장으로서는 정계 입문시기부터 3김정치 반대의 기치를 강력하게 내걸었기 때문에 김종필과 연대하는 것은 곧 자기 부정일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다. 결국 이는 수도이전 공약을 내건 노무현 후보에게 충청표가 쏠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어쨌든 특권층 이미지와 대통령이 다 된듯한 오만한 행보는 이회창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노무현이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고, 정몽준과의 단일화 성공이라는 악재에다가 미군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인한 반미감정 고조로 이회창은 다시 2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16대 대선은 이회창으로서는 두고두고 천추의 한이 되었고, 절대로 패배할 수 없는 게임을 패배했다는 평이 많았다. 2002년 5월이래 지지율에서 노무현에게 져 본적이 없는데, 그럼에도 패배했으니..
게다가, 낙선하고 난 뒤에도 차떼기 사건으로 다시 한번 도덕성에 큰 타격을 받았으며 차떼기 사건 덕분에 한나라당은 당사를 매각하는 등 온갖 고생을 다 겪게된다.(...) 자세한 과정은 제16대 대통령 선거 항목 참조.
2번의 대선을 모두 2위로 마감한 이후 충격을 많이 받았는지 한나라당과 거리를 두면서 어떠한 선거에도 출마를 하지 않았으며, 정치판은 꼴도 보기 싫었던지 정계관련 언급조차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서 이회창은 사실상 정계 은퇴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대선 때까지 이회창이 한나라당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으며 2005년 이후로 참여정부의 인기가 폭락했기 때문에, 이회창이 정말로 정권을 잡고 싶었다면 3수를 염두에 두고 정계은퇴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나왔다. 물론, 본인은 삶에서 전혀 실패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정계에 발을 담그는 것이 지긋지긋했겠지만..
6.3 제17대 대선 (2007)
하지만 정치생명이 완전히 죽어버린건 아니었는지, 다음 대선 시즌에 이르자 언론에서는 김대중의 정계 은퇴 번복 후 당선된 것을 전례로 들어 제17대 대통령 선거 복병으로 꾸준히 언급되어왔다.[15] 두드러진 활동이 없었음에도 언론 매체의 이런 꾸준한 관심은 그가 과거 2번 연속 원내1당의 대선 후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대선이 임박해오는 와중에도 큰 움직임이 없다가 대선 약 1개월 전을 기점으로 출마를 선언하였다. 한나라당에서는 이미 이명박이 경선을 통해 대선후보로 확정된 시점이어서 당을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자신의 출신지였던 충청도를 중심으로 본진을 다지고[16] 대전, 충남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중심당 심대평 후보가 지지를 선언함으로서 대선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대쪽이미지를 부각시키며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일부 세력을 흡수시키는 포스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뒤늦은 출마의 한계인지 지지율 거품은 빠지기 시작하여 3위로 밀려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이를 뒤집을 열쇠는 다름아닌 박근혜였다.[17] 정치판은 전략동맹이라고 인연과 악연을 거친 박근혜였지만, 일단 아쉬운 것은 이회창이었기에 박근혜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었으나, 결국 박근혜의 선택은 이명박이었다.
이후로도 별다른 반전을 이루어내지 못한 채 이명박과 정동영에 밀려 3위로 대선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회창이라는 네임밸류가 죽지는 않았는지 무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상위권으로 낙선[18]했다. 15.1%를 득표하면서 0.1% 차이로 간신히 선거비용 전액을 보전받게 되었다.
보다 자세한 과정은 제17대 대통령 선거 항목 참조.
이 세 번의 대통령 선거로 얻은 총득표 수는 무려 24,938,978표나 되며 이는 김대중의 29,876,834표에 이은 총득표 수 2위 기록이다. 여기도 2위 하지만 김대중은 4수끝에 당선이라도 되었지만, 이회창은...
7 마지막 도전
파일:G7Ix4sq.jpg |
2008년 당시 선거 포스터 |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때 이회창을 지지한 국민중심당 심대평대표와 2008년 충청도 지역을 기반으로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여 정치생활을 이어갔다. 18대 총선에 충청남도 홍성군-예산군에 나와 당선되었다. 자유선진당은 충청도, 특히 충청남도와 대전광역시에서 민심을 사로 잡으며 14개 지역구 후보를 당선시키고[19] 비례대표 포함 총 18석의 의석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교섭단체에 2석 부족한 의석수가 내내 발목을 잡았고 창조한국당과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기도 했으나 2009년 8월 30일 심대평 대표와 이회창 총재와의 갈등으로 심대평의 탈당과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의 의원직 상실로 교섭단체는 취소되고 세력도 약화되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결국 2010년 지방선거에서 대전광역시장 하나와 기초자치단체 13석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면서 이회창 총재는 선거 패배의 책임으로 사퇴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번복 후 복귀했지만,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 패하자 총재에서 사임했다. 이후 2012년 총선에는 불출마 입장을 내비쳤다.
이후 2012년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이 참패를 하자 그해 5월 20일 탈당했고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으로 복당하였다. 이회창이 만든 자유선진당은 19대총선 등 여러 선거에서 참패를 했고 선진통일당으로 당명도 바꾸면서 회생의 기회를 노렸으나 결국 새누리당과 합당을 선언했다.
8 그 후
- 팔순을 넘긴 고령때문인지 정계는 완전히 은퇴했고 본인은 복귀할 일은 없을거라고 못박았다. 다만 새누리당 평당원으로선 남아있는 듯. 최근에 알려진 근황은 2014년 팔순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화환을 받은 것. 하지만 본인은 가족과 식사하는 선에서 조촐하게 진행했다고 한다. 이후 자서전을 내놓을 계획임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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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당시 사진 [20] [21] |
- 2015년 11월 2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조문하면서 음수사원(飮水思源)[23]이라는 말을 남겼다. 팔순의 나이에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전한 정정함을 과시했다.
9 총풍사건
1997년 15대 대선 직전에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 관련자가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북한 측에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한(...) 여당측에 의한 간첩사건이다. 북풍 관련해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사건 중 하나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0 발언 논란
"97년 10월께 있었던 술자리에서 '어느 대학 출신이냐'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질문에 해당 기자가 '고대 출신'이라고 말하자 이 총재가 '그 대학 나오고도 기자가 될 수 있냐'고 말해 불쾌했다고 후배기자가 털어놓은 적이 있다" - 중앙일간지 정치부 기자
(기자에게)"잘 쓰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 자네 창자를 뽑을 거야"
- 이회창 비판자들에게는 엘리트주의에 극도로 찌든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회창 까기에 혈안이 된미디어오늘의 기사에 따르면 고려대 나온 기자보고 고려대 나오고도 기자할 수 있느냐라는 말까지 했다고 전해진다.기자는 못해도 대통령은 할 수 있다만약 사실이라면 고작 고졸인 노무현에게 패배한 것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고려대 출신한테 진 것도 충격이고그러나 이회창이 영입한 비서울대 출신 인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당장 연세대 최경환 경제부총리나 고려대 오세훈 전 서울시장만 봐도.. 그리고 이회창의 분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최측근인 이홍주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명지대를 나왔으며, 오랜 세월 이회창을 보좌한 이채관 총재 정무특별보좌관은 경남대를 나왔다.
11 여담
- 2002년 대선 당시
선거철의 정치인이면 누구나 그러듯이시장을 찾아가 친서민 유세를 벌였는데, 한 상인에게 흙묻은 생오이를 건네받고는 그대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다(...) 인터넷에선 '이회창 흙오이 사건' 이라고 유명해졌으며 "분명히 봤다"라는 증언만 있을뿐 진귀한 장면을 담은 사진 등 증거가 없어서 '인터넷 3대 미스테리' 로 화자되기도 한다.결국 합성짤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이후 흙오이는 선거철만 되면 심심치않게 시장에 등장하는 정치인에 빗대는 용어나 정황은 아는데 찾을 수 없는 자료를 지칭하는 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노무현에겐 '노사모'가 있었더라면 이회창에겐 '창사랑'이라는 팬클럽이 있었다. 노무현이 인터넷 미디어로 지지층을 결집하자 이회창 지지자도 비슷한 전략으로 맞대응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지자 연령대가 다소 높은 탓이었는지 노사모 만큼의 활동량은 보이지 못했고 미풍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어느정도 존속은 되었는지 17대 대선에서 정계복귀에는 제법 역할을 했다.
- 지금도 그렇지만 어떠한 사이트를 들어갈 때 광고배너창 하단에는 "창 닫기"라는 버튼이 있다. 그런데 당시 대선 정국때 보수 언론사들의 사이트의 광고배너창 하단에는 이 버튼의 문구가 "창 한번만 띄워주기"로 바뀌었다. 물론 대선이 끝나고 "창 닫기"라는 문구로 돌아왔다(...)
- 박정희 군사정부하에서 사법살인 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재판때 배석판사 중 한명이었다는게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알려지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자신의 본의가 아니라 강제로 하게된 재판이고, 배석판사로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조용수 항목 참조.
- 2007년 대선 후보 당시 조선일보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참고로 2002년에는 이효리.
- 김종필 : 대한민국의 정치인인데 이회창과 정치적 행보가 너무나 흡사하다. 이회창이 김영삼에게 천거되었듯 김종필도 박정희에게 천거되었고, 대통령과 가깝고도 먼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둘다 충청권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국무총리 경력으로 유명하다.
- 이주일 - 이회창과 목소리가 상당히 비슷하다.
11.1 이인제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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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관계는 3개의 짤방으로 요약 가능하다. 15대 대선 당시 이인제는 최연소 노동부 장관에 이어 민선 초대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면서 떠오르는 정치인으로서 주가를 올리던 시절이었다, 이는 이회창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적어도 대선 이전까지는 같은 당원으로서 교류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선술한 15대 대선의 과정 속에서 둘은 경쟁하게 되었고 네거티브를 퍼붓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위에도 서술했듯 결과는 둘 다 낙선하여 결국 상처만 남긴 싸움이 되어버렸다.
이후 이인제는 '피닉제'라는 별명이 생길정도로 철새테크를 탔고, 5년이 지난 16대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 되어 네임밸류를 밀어붙이며 경선 초창기엔 독보적인 지지율을 보이며 한나라당 경선을 통과한 이회창과 리턴매치가 성사될 '뻔'했다. 그러나 이인제는 노무현의 영남을 중심으로 강세를 몰아친 노풍을 이기지 못하여 경선에서 떨어지며 무산되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결과를 승복했다 낙선한 이인제는 민주당에 삐졌는지 탈당하여 자민련으로 갈아타 과거 행적에 대해 거듭 사과한 뒤 이회창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이회창은 낙선했지만...
다시 5년이 흘러 17대 대선 시즌이 되자 새천년민주당[24]으로 돌아간 이인제는 출마를 선언하며 정식후보가 되어 기호 4번을 부여받았다. 초반에는 출신지인 충청도를 기반으로 10%를 상회하는 무시할 수 없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회창이 출마하면서 판세는 완전히 달라졌다. 상대적으로 네임밸류가 컸던 포스를 몰아붙이며 충청도의 지지기반을 전부 흡수해 버린 것이다. 이로서 이인제의 지지율은 소수점대로 폭삭 무녀졌으며, 이회창은 무소속 후보로서 중도층을 어필하며 15%의 득표율로 마감한 반면 이인제는 손써보지 못한채 0.7%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전에 당한 것을 갚은거라 카더라
우여곡절 끝에 탈당하여 무소속 국회의원 자리를 지낸 이인제는 19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이 이끄는[25] 자유선진당에 입당했다.[26] 이로서 껄끄러웠던 관계였던 둘의 사이는 개선되었고 14년만에 동지로 회복되었다. 어쨌든 이인제로선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생활을 이어갔고 이름을 바꾼 선진통일당 대표로도 활동했다.
이회창은 박근혜 대선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으로 돌아갔고, 이인제도 이끄는 당을 새누리당과 합당시키면서 둘은 새누리당에서 한솥밥을 먹는 신분을 이어갔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인제는 정계활동을 이어나가는 반면에 이회창은 은퇴하며 평당원으로만 지낸다는 것. 악연과 인연을 거듭하는 것을 보면 정말 질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인제도 최고의원직을 맡으며 신박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다가 20대 총선에서 더민주 김종민 후보에게 패해서 사실상 정계은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여진다.
1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번) | 신한국당 | - | 당선 | 1997년 11월 의원직 사퇴 (대선출마) |
1997 | 제15대 대통령 선거 | 한나라당 | 9,935,718 (38.7%) | 낙선 (2위) | |
1999 | 1999년 6월 재보궐선거 (15대 국회 서울 송파 갑)[27] | 한나라당 | 42,901 (61.5%) | 당선 (1위)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번) | 한나라당 | - | 당선 | 2002년 11월 의원직 사퇴 (대선출마) |
2002 | 제16대 대통령 선거 | 한나라당 | 11,443,297 (46.6%) | 낙선 (2위) | |
2007 | 제17대 대통령 선거 | 무소속 | 3,559,963 (15.1%) | 낙선 (3위) | 국민중심당과 선거연대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홍성군/예산군) | 자유선진당 | 49,908 (61.0%) | 당선 (1위) |
공직 선거 3승 3패인데 국회의원 3승, 대통령 3패로 대선 빼고 다 이겼다. 근데 대통령은 1승만 거두면 그걸로 임무 완료 아닌가? 이거 이인제도 그런데
13 관련 항목
- 관련 사건 목록은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다.
- ↑ 대법관, 국무총리, 감사원장, 국회의원 3선 등 대한민국 최고 요직을 두루 거쳤다
- ↑ 감사원 항목 참조
- ↑ 북한 땅에서 태어나서 실향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사실 서흥은 아버지의 임지였을 뿐,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충청남도가 실질적인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하단에 서술할 정치행보를 보면 알겠지만 지역적 기반도 충청도였고 김종필의 후임주자로 충청도를 대표하는 정치인 역할도 했다.
- ↑ 그중, 거래 허가를 관청에서 받기 전까지는 계약이 무효지만 일단 허가를 받으면 계약일로 소급해 효력이 발생한다는 유동적 무효 의 개념을 확립한 판결문은 시대를 대표하는 판결로 선정되어 서울특별시 600주년 타임캡슐에 들어갔다.
- ↑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의 개념을 명시한 판결 또한 이 사람이 내렸다. 참고로 그 유명한 킬러조 사건이다.
- ↑ 울산 출신의 6선 의원으로 김영삼의 최측근 인사였다. '좌동영 - 우형우'라고 불릴 정도면...
- ↑ 총리직 사퇴 후인 1995년 10월 10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는 '강연에서 말씀하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치 일선에 나설 생각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받고서 그럴 생각은 없다고 대답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96년 1월 22일 신한국당 입당 선언을 하였다.
- ↑ 실제로는 이회창이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마지막 대권도전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왔는데 그 전에 한나라당을 탈당했기 때문이다. 2016년 현재까지도 아직은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되는게 절반 이상이 정당빨인데 무소속 출마는 국회의원이라면 몰라도 대통령은 어림없다. 게다가 마지막 선거에서는 국민들의 성향이 반노무현이라서 한나라당에서는 개나소나 나와도 당선이었고 실제로도 노무현, 박근혜, 이회창에 비하면 정치경력상 애송이였던 이명박이 당선되었다. 이회창은 탈당하지 말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나라당에 계속 남아있었더라면 충분히 당선될 가능성이 있었다.
- ↑ 원래는 최형우가 내정되어 있었으나,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이회창이 지명되었다.
- ↑ 결국 경선 일정 기간 동안만 이만섭이 임시 대표를 맡기는 했다. 경선 후에는 다시 대표직 복귀.
- ↑ 경선 며칠 전에 4인 연대가 성사되어 결선 투표에서 이인제 밀어 주기가 이뤄지긴 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운 뒤였다.
- ↑ 그래서 이인제는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된다!"라는 것을 밀어붙였다.
- ↑ 이홍구, 이회창, 박찬종, 이수성,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김윤환, 이한동을 일컫는다.
- ↑ 이후 2005년 모두 허위사실로 밝혀지면서 실형을 선고받고 피선거권이 10년간 제한되었으나,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 434명 특별사면 복권 명단 포함 되어 복권 후 현재는 더불어민주당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을 의원으로 활동중이다. 설훈 의원 항목 참조
- ↑ 출마를 결정 하지 않은 시점에서도 여론조사에선 정동영보다도 지지율이 높게 나왔다.
- ↑ 말이 이회창의 본진이었지, 결과적으론 충청지방 전반적인 1위는 이명박의 차지였다. 지역을 세분화하면 이회창이 1위를 차지한 곳도 존재했으나, 어디까지나 군단위에 불과했다.
- ↑ 이명박에 밀려 경선에서 한끗차이로 탈락한 거물로서 앙갚음(?)이라는 충분한 구실도 있었고, TK출신이라는 점을들어 이회창의 빈약한 지역기반을 메울 수 있는 인물이었다.
- ↑ 이때 무소속 후보 중 가장 높은 득표율 기록을 갱신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하튼 한동안 깨지지 않을 기록
- ↑ 충남에서 8석, 대전에서 5석, 충북 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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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정동영의 동안 선배격어째 장수할 삘이.... - ↑ 이회창의 부친 이홍규 변호사는 1905년생으로 2002년에 98세로 사망하였고, 모친 김사순 여사는 1911년생으로 2005년에 95세로 사망하였다. 따라서 아들인 이회창 역시 장수할 가능성이 높다.
- ↑ 유수호 전 의원도 법조인 출신으로 이회창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에 이름날리던 판사였다. 필연적으로 만남을 몇번 가졌을 듯. 유승민도 이회창이 한나라당 대표시절 발굴해낸 인물이기도 했다. 조문을 오며 유승민에게 "박근혜에겐 이런 인재가 필요하다"라는 덕담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 ↑ 물을 마실 때 수원(水源)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목이 말라 물을 마시면 갈증을 해소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근본인 우물을 누가 팠는지 그 분에 대한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 ↑ 당시에는 열린우리당과 갈라진 뒤로 주요인사가 전부 빠져나가 지리멸렬해진 상태였다.
- ↑ 입당한 2011년 당시에는 이회창은 이미 총재직에서 물러난 상태. 어느정도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지만...
- ↑ 참고로 이인제는 자유선진당과 합당한 국민중심당에 잠시 몸담갔던 시절이 있었다.
- ↑ 전임자 홍준표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