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천

역대 서울대학교 총장
8대9대10대
신태환유기천최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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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基天

1915년 7월 5일 ~ 1998년 6월 26일

1 개요

대한민국의 형법학자. 제9대 서울대 총장 역임. 호는 월송(月松).

2 생애

2.1 초년시절

1915년 7월 5일 평양에서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유계준은 진남포와 중국 산동-평양간의 무역을 했고 10여 척의 선박과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린 무역업자였다. 또한 조만식, 오윤선과 더불어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로서 평양의 저명인사였으며,[1] 주기철 목사와 함께 일본 식민주의의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에 대해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었다.

형제들은 대부분 의학을 전공했지만, 혼자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자가 되었다.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히메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1943년 동경제대를 졸업한 후에 센다이의 동북제국대학 조수로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2.2 서울법대 교수시절

1946년에 귀국하여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로 가르치다가, 서울대학교가 설립되자, 법과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형법을 가르쳤다. 김증한과 함께 신설된 서울법대의 기초를 쌓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법대 학장서리의 책임을 지고 서울을 탈출, 부산에서 법학교육을 계속하였다. 당시 부친을 비롯한 일가친척과 동료 제자들이 무수히 죽어나가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인지, 서울대 부산 가교사 교문에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이라는 라틴어 철제아치를 세웠다.

1952년에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교환교수로 갔다. 1953년에 귀국했다가 1954년에 다시 하버드 로스쿨로 가서 미모의 법학자 헬렌 실빙(Helen Silving)을 만나 결혼하였다.[2] 그때 나이가 39세였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에 머물면서 예일 대학교에서 '한국문화와 형사책임'(Korean Culture and Criminal Responsibility)이란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로 법학박사(SJD)학위를 받았다. 당시 함께 공부하던 정대위 박사(후일 건국대학교 총장)와 교분이 깊어 인류학을 비롯하여 인문사회과학과 융합하는 법학을 만들어보려 하였다.[3]

1960년 한국형법을 영어로 번역하여 책으로 출간하였다. 이어서 1968년에 독일어로도 번역 출간하였다.[4] 또한 '국제비교법사전'(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Comparative Law)에도 한국법에 관한 장문의 소개논문을 실어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1958년에 귀국한 후 1959년 서울대 교무처장을 역임했다. 1959년 하와이에서 10년마다 열리는 '동서철학자 대회'(East-West Philosophers Conference)에 초청받아 한국을 대표하여 발표하였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제9대 서울대 총장직에 취임했다. 이때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한·일관계의 정상화 필요성을 역설해 ‘어용 총장’이란 비판을 받았다.

반면 박정희에게서는 “왜 데모를 못잡느냐, 총장이 못하면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지 대학을 총장보다 어찌 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외치고 일어서서 나와버렸다. 결국 1년 3개월만에 서울대 총장직에서 짤리고물러나고 말았다.

1970년에는 강의실에서 박대통령이 대만식 총통제 비슷한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오오, 그대는 용자!! 그날 저녁 중앙정보부 요원이 그를 체포하러 사택으로 오기 직전에 제자 검사의 귀띔으로 뒷문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2개월 10일 동안 이곳저곳 숨어다녔다. 그러다가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라이샤워(E. Reischauer) 교수가 유교수를 미국으로 보내라고 김종필 총리에게 편지를 써준 덕분에 겨우 미국으로 망명하였다.[5]

2.3 미국 망명 시절

1971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 26년 간을 미국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플로리다주 푸에르토리코 국민대학에서 객원교수로서 부인과 함께 비교형법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캘리포니아샌디에이고로 옮겨, 샌디에이고 대학교 법학대학 교수를 지냈다. 샌디에이고에 있을 동안, 자택에 무궁화 33그루를 심고 아침저녁 조국의 통일을 위해 기도하였다.

1979년 박정희가 시해되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오자, 국민적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서울법대 강단에 다시 섰다. 그러나 5.18 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 세력의 집권이 확실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84년 정년 후에는 독서와 집필로 시간을 보냈다. 한국민족은 ‘사라진 이스라엘 10지파’의 하나라는 신념을 가졌고, 이것을 학문적으로 증명하는 데에 여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하였다.[6]

한국과 이스라엘의 유대를 연구하는 학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류-실빙재단(Ryu-Silving)을 설립하였다. 광나루에 R-H빌딩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유기천기념재단의 모체가 되었다.

만년에 저서 '세계혁명'(The World Revolution)을 출간하였고, 부인의 '회고록'(Helen Silving Memoirs)에 한 장을 빌려 자신의 삶을 적었다.

부인 실빙은 1993년, 유기천은 1998년에 타계하였다. 부부의 유해는 한국으로 옮겨져 포천시의 산정현교회[7] 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3 학문적 업적

그의 '형법학' 교과서 2권(총론, 각론)은 한국의 법학도들에게 형법의 바이블로 통했다. 특히 심리학을 형법학에서 중요시해야 한다는 태도와 방법론은 국내 형법이론의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 황산덕에 의해 독일 형법학자 한스 벨첼(Hans Welzel)의 '목적적 행위론'(finale Handlungslehre)이 국내에 수입되어 한국 형법학계를 풍미하자, 이를 비판하였다.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 잘 모르는 천박한 이론이라는 것.[8]

심리학만이 아니라 인류학, 언어학, 역사학 등 인문사회과학과 통하는 법학을 ‘과학적’ 방법이라고 강조하였다. 법학이 아무리 도그마틱한 이론이지만 이런 타학문과 대화할 수 있는 ‘과학’이 되어야한다는 것.

대학의 근본은 인문학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생각을 신문에 기고하였다.

4 트리비아

  • 박정희에게 "학원에 군병력을 투입하지 말라"는 소신발언 뒤 신변 안전을 위해 권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그래서 ‘쌍권총 총장’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를 확대하기 위해 낙산에 터널을 뚫자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유기천 안’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청와대에서 부결되었다. 그리고 결국 서울대는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이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한 글을 발표하였다.
  1. 유계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였다.
  2. 실빙은 '하버드-이스라엘 프로젝트', 즉 신생 이스라엘의 법적 기초를 연구하는 팀의 홍일점인 미모의 여성학자였다. 원래 폴란드 크라카우 출생의 정통유대인으로 비인 대학교에서 한스 켈젠(Hans Kelsen)의 제자 겸 조수로 총애를 받다가 하버드 로스쿨로 온 것이었다. 유기천보다 9세 연상이었지만 종교적,연령적 난관을 극복한 사랑으로 결혼하여 평생의 학문적 반려자로 지냈다.
  3. 실제로 두 사람은 귀국 후에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법과 문화'라는 과목을 공동 강의하였다.
  4. 지금도 해외에서 한국형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책들을 본다고 한다.
  5. 사실은 부인 실빙 교수가 라이샤워 교수에게 간청하여 라이샤워 교수가 김종필 총리에게 압력을 가한 것이다.
  6.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인과 유대인은 닮은 점이 29가지나 된다.
  7. 북한 평양의 산정현교회 신도들이 해방 이후 월남하여 세운 교회이다.
  8. 황산덕은 유기천보다 2세 연하이며, 공교롭게도 둘 다 평양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