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 | 1897년 11월 25일~1944년 4월 21일 |
출신지 | 경상남도 창원군 |
호 | 소양(穌羊) |
별칭 | 아명 기복(基福) |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거부한 목사, 참 종교인
일사각오(一死覺悟) 주기철
1 유년기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태어났다.
유년기 때 교회에 다니게 된 주기철 목사는 누구보다도 교회를 섬기면서 사랑했다. 사탕 준다해서 온건 비밀
그러던 1912년,주기철 목사가 다니던 학교에서 춘원 이광수를 알게 되었으며[1]작가가 방문해서 오산학교 학생 모집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이 강연에 대해 큰 깨달음을 얻고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겠다고 다짐하였다.
1913년 오산학교에 입학한 주기철 목사는 좋은 성적으로 1916년 오산학교를 마쳤다.
전문대학에 입학했지만 지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고,그 후 아내인 안갑수와 결혼했다.
2 청년기
1920년,문창교회에서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후,주기철 목사는 신학교를 거쳐 1926년,초량교회의 담임 목사로 취임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감소하는 신자의 숫자를 높이고,경남 노회 노회장에 당선 될 만큼 인정을 받았다.
1933년 부인이 세상을 일찍 뜬 뒤,1935년 문창교회 주일학교 교사였던 오정모와 재혼 하였다.
그 후 여러 교회를 거치며 목회를 하였다.
3 장년기,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1930년대 후반 민족말살정책으로 가고있었던 일본 총독부는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였다.
1938년 총독부 경무국은 1938년 2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라는 것을 수립하였고,학교와 학생뿐만 아니라 교회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제의 압박이 가해지자 몇몇 기독교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그냥 국가의 의식이라면서 신사참배를 하였고,다른 사람들도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외 기독교 목사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하였고[2][3],주기철 목사도 그중 한명이였다.
그 해 신사참배를 거부 했다는 이유로,구속을 당했지만 곧 풀려난다.[4]
그러나 곧 다시 붙잡히고,풀려났다가 다시 붙잡히는 경우가 잦아졌다.
점점 구속되는 시간이 길어지고,감옥에 있는 동안 일제는 주기철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하라고,그러면 풀어주겠다고 회유한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이미 결심을 하였고,일제의 엄청난 고문이 이어졌다.
주기철 목사가 뜻을 굽히지 않자,일제는 주기철 목사의 부인을 불러서 설득하라고 말했지만,부인은 절대 믿음을 버리지 말라며, 하나님을 위해 끝까지 싸우라면서 당부하였다.일제들 낚임
역시 주기철 목사도 끝까지 신사참배에 반대하였다.
그 후, 7개월만에 석방된 주기철 목사는 다시 교회 강단에 서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신자들에게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연설하며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를 더욱더 굳건히 지켰고,이틀 뒤 일제는 다시 주 목사를 구속하였다.
온갖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주기철 목사는 4월 20일 아내와의 면회 후 다음 날 밤9시 병으로 숨을 거둔다.[5]
4 기타
죽으면 죽으리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온갖 고문 속에서도 복음으로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신앙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주기철 목사.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1968년 국립묘지에 묘지가 조성되었으며,[6] 1983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2015년 12월 25일 성탄절 특집으로 KBS1 방송에서 밤10시에 '일사각오 주기철'다큐를 방영했다.[7]
그 다큐 프로그램에서는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위치한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소개되었다.
- ↑ 이광수는 후에 변절하여 친일파가 됨,이때까지는 적어도 나라를 위해서 노력했다.
- ↑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알려진 손양원목사역시 그 중 한명이었다.
- ↑ 대광중학교와 대광고등학교를 세운 한경직목사 역시 이 축에 있었는데, 얼마안가 굴복하고 만다. 먼 훗날 한 목사는 이에 대해 반성하며 사죄해서 친일파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 ↑ 결사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단 풀어준 것이였다.
- ↑ 같이 수감되었었던 안이숙 여사의 말로는 일본 경찰이 주사를 놔서 주기철 목사를 살해했다고 한다.
- ↑ 실제유해가 안장된것은 아니고 성경을 포함한 유류품이 안장되어있다
- ↑ 스미요시 겐이 아버지 에이지 목사가 자신의 신앙을 잃지 않았던 이유인 주기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여맹이 주를 이룬 다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