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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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22대 지증왕 김지대로23대 법흥왕 김원종24대 진흥왕 김삼맥종
시호법흥왕(法興王) /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1] /
무즉지태왕(무卽智太王)[2] /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3]
연호건원(建元)
김(金) / 모(募)
원종(原宗) /진(秦)[4] / 즉(卽)[5]
생몰년도음력487년 ~540년 7월(54세)
재위년도음력514년 ~ 540년 7월 (26년)

1 개요

신라의 제23대 임금. 연호는 건원(建元).

지증왕과 연제부인(延帝夫人)의 아들이다. 비(妃)는 보도부인(保刀夫人)[6]이다.

514년 왕위에 오르자 시법(諡法)을 제정하였고, 520년 율령(律令)으로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 아버지 지증왕을 이어 드디어 신라의 국가체제를 완성하였다. 한편 516년, 양산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법흥에서 법이란 헌법이 아니라 불법(佛法) 즉 불교를 가리키며,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한 왕이다.

2 매금왕?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광개토왕릉비』,『중원 고구려비』에 등장하는 군주의 칭호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신라의 매금(寐錦) 족장 이 직접 와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중원고구려비』에는 무려 6번이나 매금이라는 단어가 나와 "신라의 왕명이다", "아니다 고구려가 신라의 왕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다"등의 의견으로 갈리었으나 1988년 1월에 발견된 『봉평신라비』에 "갑진년 정월 15일, 탁부 모즉지 매금왕(啄部 牟卽智 寐錦王)"이라는 비문이 등장하며 법흥왕 때까지 신라 스스로 사용한 칭호임이 밝혀졌다. 이 매금이 마립간의 동일 명칭이라면 선왕인 지증왕대에 칭호를 중국식 명칭인 '왕'으로 이미 통일했지만, 혹시 몰라 도로명주소에 구 번지수 주소도 같이 적는 것처럼, 법흥왕 대까지는 매금(마립간)+왕 이라고 합쳐 쓴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나두 왕 할거야 족장왕(...)

3 내정

3.1 중앙집권국가로 만들다

520년 1월, 율령을 반포하고 신라역사상 처음으로 관리의 옷을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지정했다(공복제정). 그리고 531년 4월에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했는데 이 또한 신라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관직명이다. 귀족의 대표를 상대등에 임명했다는 것이 되는데 이는 귀족을 관료체계에 포함시켰다는 의미가 된다. 즉 신라의 왕은 사실 법흥왕 이전까지 신라 6부중 하나인 탁부(啄部)의 지도자에 불과했지만[7], 이후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하며 이후 기록에서는 오로지 왕(王)으로 표현되게 된다. 그리고 군사력을 담당하는 전문부서인 병부를 설치하였다.

3.2 불교 공인

나라의 체제를 정비하며 528년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공인하였는데 이것은 양나라의 승려 원표(元表)가 불교를 신라 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만 불교 자체는 이미 눌지 마립간 때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흰 피의 기적으로 유명한 이차돈이 이 때의 사람이다. 이후 529년 살생을 금지시켰다.

신라는 귀족들이 제사장을 겸하고 있었던 까닭에 토속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다.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에 불교가 최초 전래된 시기도 아리송하고, 공인 과정에서 피를 줄줄 흘렸던 것도 이러한 사연이 있다. 외래 종교를 들여와 토속 종교를 억누르는 것으로 제사장을 겸하고 있던 귀족 계층의 권위를 찍어 누를 수 있기 때문. 같은 과정을 거친 국가로 일본이 있다. 이쪽은 모노노베씨와 소가씨의 항쟁으로 시즌2를 찍는다.

법흥왕은 신라의 일곱 성지를 과거불이 주재하던 장소라고 선전하며 밀어버리고 절을 짓는 국책사업을 벌였는데, 이 중에 유명한 것이 분황사, 사천왕사 그리고 불국사[8]. 당연히 귀족들의 반대도 심했고, 짓던 절을 때려부쉈다가 다시 짓는 등의 진통을 겪었으나, 법흥왕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신라는 이후 100년도 안 되어 놀랄만한 불교국가로 변신했으며, 이 시기에 활동한 고승만 해도 원효, 의상, 대안, 명랑 등 수두룩빽빽하다..

3.3 금관국(금관가야) 편입

이후에 금관국[9]을 합병한다. 532년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에 정식으로 합병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구형왕의 막내아들인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다.

3.4 연호 제정

536년 연호를 건원(建元)[10]이라 정하였다.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法空)이라 하고 양위했으며, 그 해(540년) 7월 붕어하여 시호를 법흥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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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릉은 법흥왕의 업적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신라왕릉크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대비되게 매우 작은 편인데, 신라왕릉 형태의 초기형→후기형 변천사를 따져보면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

4 이후

그 뒤를 이어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자 자신의 외손자[11]인 삼맥종이 왕위에 올라 진흥왕이 되었다.

고대 국가로서의 신라가 체계화되는 시발점을 만든 왕으로 신라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이다. 사실 진흥왕 대의 폭발적인 영토확장은 엄연히 법흥왕이 다 토대를 닦아놨기 때문에 가능했다. 국력을 신장시키고 다음 왕대에 전성기를 누리게 한 점이 여러모로 고구려소수림왕과 비슷하다.

5 삼국사기 기록

一年 법흥왕이 즉위하다
三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 용이 양산의 우물 안에 나타나다
四年夏四月 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하다
五年春二月 주산성을 쌓다
七年春一月 율령을 반포하고, 공복과 위계를 정하다
八年 양에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치다
九年春三月 가야의 국왕이 혼인을 청하다
十一年秋九月 남쪽 변방 지역을 둘러보다
十二年春二月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 군주로 삼다
十五年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다
十六年 살생을 금지하다
十八年春三月 제방을 수리하다
十八年夏四月 이찬 철부를 상대등으로 삼다
十九年 금관국이 항복하다
二十一年 상대등인 철부가 죽다
二十三年 처음으로 연호를 칭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다
二十七年秋七月 왕이 죽다

지증왕과 마찬가지로 기록은 소략한 편이나 율령반포나 불교공인과 같은 중요한 업적들이 다 적혀있다.

  1. 봉평신라비
  2. 천전리서석
  3. 천전리서석
  4. 삼국사기》각주에 의하면 《책부원귀(冊府元龜)》라는 책에 성이 "모", 이름이 "진" 으로 나와있다고 한다., 또한 《양서》 신라전에도 "신라왕 모진(募秦)이 양나라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5. 모즉
  6. 保道라는 표기도 있다. 그런데 기록마다 김씨, 박씨 등으로 성이 엇갈린다. 한 건이라면 모르겠으나, 왕비의 성은 이 기록 외에도 수없이 바뀐다.
  7. 사실 탁부, 또는 훼부로 언급되는 금석문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 영일 냉수리비, 울진 봉평비가 모두 지증왕에서 법흥왕 시기로 추정되어서 내물왕계만 탁부 출신일 수도 있다
  8. 김대성이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법흥왕 15년인 528년에 법흥왕의 모친이자 지증왕의 부인인 영제부인이 "내 절 갖고 싶다!"라고 해서 지은 절이 불국사다.
  9. 금관가야를 뜻한다. xx가야란 말은 고려 태조때 부터 사용된 말. 자세한 내용은 가야 항목 참조.
  10. 신라에서 기록상으로 최초의 연호이다.
  11. 진흥왕의 모친이 법흥왕과 보도부인의 딸인 지소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