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파국의 역대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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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 | 도설지왕(道[1] 設智王) |
생몰년도 | 생몰년 미상, 혹은 월광태자와 동일 |
재위기간 | ? ~ 562년 |
1 소개
《삼국사기》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유이한왕.[3] 금관국왕들처럼 이름이 왕명이다. 도설(道設)이 이름. 지(智)는 신라, 가야어 계통에서 "님"과 같은 미칭어로 사용 되었기 때문에 이름이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高靈縣)본래 대가야국(大加倻國)【김해부(金海府) 산천(山川) 하(下)에 자세하다】[4].은 시조 이진아시(伊珍阿豉) 왕【한편으로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 한다.】부터 도설지왕에 이르기 까지 범(凡) 16세(世) 520년(중략. 이진아시 탄생설화가 기록되어있다.)을 지냈다. 신라 진흥왕이 이를 멸 하였다.
단양 적성비와 창녕비에도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月中王敎事大衆等喙部伊史夫智伊干□□□□豆彌智彼진干支喙部西部叱智大阿干
□□□夫智大阿干支內禮夫智大阿干支高頭林
□□□□等喙部比次夫智阿干支沙喙部武力智
□□□(鄒)文村幢主沙喙部導說智及干支勿思伐
□□□喙部助黑夫智及干支節敎事赤城也이次
□□년 □□ 월에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탁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두미지(豆彌智) 피진간지(彼진干支), 탁부(喙部) 출신의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口부지(口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내례부지(內禮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고두림성(高頭林城)에 있는 군주(軍主)들인 탁부(喙部) 출신의 비차부지(比次夫智) 아간지(阿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 추문촌(鄒文村) 당주(幢主)인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도설지(導設智) 급간지(及干支), 물사벌(勿思伐 : 城 幢主)인 탁부(喙部) 출신의 조흑부지(助黑夫智) 급간지(及干支)에게 교(敎)하시었다. - 《단양신라적성비》 1면
辛巳年二月一日立 寡人幼年承基政委輔弼智 行悉事末□□立□赦□□□□□四方□改囚□後地土□陝也
古□□□不□□□□□□□□□□□□□□□人普□山□心□
除林□□□□□□□□□□□□□□□□此□□□□
而已土地彊時山林□□□□□□□□□也大等□軍主幢主道
使□外村主審□故□□□□□□□□□海州白田畓□□□
山□河川□敎以□□□□□□□□□□□□□□□□□□人
□之雖不□□□□□□□□□□心□□河□□□□于之
其餘少小事知古□□□□□□□者□□以上大等□古奈末典
法□人□上□□□□□□□□□□□□此以□□看其身受
□于時□□大□□□□□□智葛文王□□□□者漢只□□
屈□智大一伐干□喙□□智一伐干□□折夫智一尺干□□□
□智一尺干喙□□夫智□干沙喙□力智□干喙小里夫智□□
干沙喙都設智沙尺干沙喙伐夫智一吉干沙喙忽智一□□□
□□次公沙尺干喙□亡智沙尺喙述智沙尺干喙□□□□
沙尺干喙比□□□智沙尺本末□智及尺干喙□□智□□□
沙喙刀下智及尺干沙喙□□智及尺干喙鳳安智□□□□□
等喙居七夫智一尺干□一夫智一尺干沙喙甘力智□□干□
大等喙末□智□尺干沙喙七□智及尺干四方軍主比子伐
軍主沙喙登□□智沙尺干漢城軍主喙竹夫智沙尺干碑利
城軍主喙福登智沙尺干甘文軍主沙喙心夫智及尺干
上州行使大等沙喙宿欣智及尺干喙□叱智奈末下州行
使大等沙喙春夫智大奈末喙就舜智大舍于抽悉□□
西阿郡使大等喙北尸智大奈末沙喙須□夫智奈□
爲人喙德文奈末比子伐停助人喙□薩智大
奈末書人沙喙導智大舍村主□□智述干麻叱
智述干
신사년(辛巳年) 2월 1일에 세웠다. 과인(寡人)은 어려서 왕위에 올라 정사(政事)를 보필(輔弼)하는 신하에게 맡겼다. … 일의 끝에 … 사방(四方)으로 … 널리 … 이익(利益)을 취하고 수풀을 제거(除去)하여 … 토지(土地)와 강토(疆土)와 산림(山林)은 … 대등(大等)과 군주(軍主), 당주(幢主), 도사(道使)와 외촌주(外村主)는 살핀다. … 고로 … 해주(海州)의 전답(田畓)□□와 산림과 하천은 … 비록 … 그 나머지 사소한 일들은 … 상대등(上大等)과 고나말전(古奈末典), 법선□인(法選□人)과 상(上) … 이로써 … 몸이 벌을 받는다.
이때 □□대□(□□大□)는 □□□□□지(□□□□□智) 갈문왕(葛文王)이고, □□□□자(□□□□者)는 한지□□(漢只□□)의 굴진지(屈□智) 대일벌간(大一伐干)이고, □탁(□喙)의 □□지 (□□智) 일벌간(一伐干)이고, □□절부지(□□折夫智) 일척간(一尺干)이고, □□□□지(□□□□智) 일척간(一尺干)이고, 탁(喙)의 □□부지(□□夫智) 잡간(□干)이고, 사탁(沙喙)의 무력지(武力智) 잡간(□干)이고, 탁(喙)의 소리부지(小里夫智) □□간(□□干)이고, 사탁(沙喙)의 도설지(都設智)사척간(沙尺干)이고, 사탁(沙喙)의 벌부지(伐夫智) 일길간(一吉干)이고, 사탁(沙喙)의 홀리지(忽利智) 일□□(一□□), □진리□차공(□珍利□次公) 사척간(沙尺干)이고, 탁(喙)의 이망지(□亡智) 사척(沙尺)이고, 탁(喙)의 소술지(所述智) 사척간(沙尺干)이고, 탁(喙)의 □□□□ 사척간(沙尺干)이고, 탁(喙)의 비협□□지(比□□□智) 사척간(沙尺干)이고, 본피(本彼)의 말□지(末□智) 급척간(及尺干)이고, 탁(喙)의 □□지(□□智) □□□이고, 사탁(沙喙)의 도하지(刀下智) 급척간(及尺干)이고, 사탁(沙喙)의 □□지(□□智) 급척간(及尺干)이고, 탁(喙)의 봉안지(鳳安智) □□□이다. □□등(□□等)은 탁(喙)의 거칠부지(居七夫智) 일척간(一尺干), □□부지(□□夫智) 일척간(一尺干), 사탁(沙喙)의 감력지(甘力智) □□간(□□干)이다. □대등(□大等)은 탁(喙)의 말득지(末得智) □척간(□尺干), 사탁(沙喙)의 칠총지(七聰智) 급척간(及尺干)이다. 사방군주(四方軍主)로서 비자벌군주(比子伐軍主)는 사탁(沙喙)의 등□□지(登□□智) 사척간(沙尺干)이고, 한성군주(漢城軍主)는 탁(喙)의 죽부지(竹夫智) 사척간(沙尺干)이고,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는 탁(喙)의 복등지(福登智) 사척간(沙尺干)이고, 감문군주(甘文軍主)는 사탁(沙喙)의 심맥부지(心麥夫智)급척간(及尺干)이다. 상주(上州)행사대등(行使大等)은 사탁(沙喙)의 숙흔지(宿欣智) 급척간(及尺干), 탁(喙)의 차질지(次叱智) 나말(奈末)이다. 하주(下州) 행사대등(行使大等)은 사탁(沙喙)의 춘부지(春夫智) 대나말(大奈末), 탁(喙)의 취순지(就舜智) 대사(大舍)이다. 우추실□□서아군(于抽悉□□西阿郡) 사대등(使大等)은 탁(喙)의 북시지(北尸智) 대나말(大奈末), 사탁(沙喙)의 수정부지(須□夫智) 나□(奈□)이다. □위인(□爲人)은 탁(喙)의 덕문형(德文兄) 나말(奈末)이다. 비자벌정(比子伐停) 조인(助人)은 탁(喙)의 멱살지(覓薩智) 대나말(大奈末)이다. 서인(書人)은 사탁(沙喙)의 도지(導智) 대사(大舍)이다. 촌주(村主)는 망총지(□聰智) 술간(述干), 마질지(麻叱智) 술간(述干)이다. - 《척경비》앞면.[5]
그시기에 신라에서 벼슬을 받았지만 561년에 반란을 일으켜 진흥왕이 진압을 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월광태자와 동일인물이라고 바라봤을댄, 어머니의 나라인 신라로 망명하였고 신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급간지의 관등을 가진 추문촌당주(鄒文村幢主)로 《단양신라적성비》에 등장하며, 이후 《척경비》에는 승진을해 사척간 대등이 되어서 김무력과 함께 진흥왕의 순시에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2 멸망
구야국이 멸망하고 안라국마저 사비회의의 결렬과 독산성 전투에서 고구려군의 패배 이후 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황에서 반파국은 마지막 남은 가야연맹의 보루였다. 백제의 국경이 넓어져서 신라쪽으로 확장이 되자 이에 562년 9월, 신라 진흥왕의 지시로 이사부가 대군을 이끌고 반파국을 치게 된다. 이때 상황은 《삼국사기》 본기 진흥왕 32년 기록과《삼국사기》 열전 사다함편에 등장한다.
二十三年 秋七月 百濟侵掠邊戶 王出師拒之 殺獲一千餘人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 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論功 斯多含爲最 王賞以良田及所虜二 百口 斯多含三讓 王强之 乃受 其生口放爲良人 田分與戰士 國人美之23년(562)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이사부에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거기에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으므로, 왕이 좋은 토지와 포로 2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이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왕이 굳이 주므로 이에 받아 포로는 풀어 양인(良人)이 되게 하고 토지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 《삼국사기》 본기 진흥왕 32년
眞興王命伊湌異斯夫 襲加羅一作加耶國 時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志 遂命爲貴幢裨將 其徒從之者亦衆 及抵其國界 請於元帥 領麾下兵 先入旃檀梁 旃檀梁 城門名 加羅語謂門爲梁云 其國人 不意兵猝至 驚動不能禦 大兵乘之 遂滅其國 洎師還 王策功賜加羅人口三百진흥왕이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국(加羅國)을 습격하게 하였다. 당시 사다함은 나이가 15∼6세였는데,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아직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나 여러번 진심으로 청하고 뜻이 확고하였으므로 드디어 명하여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삼았는데, 그 낭도(郞徒) 중에서 따르는 자 또한 많았다. 그 나라 경계에 이르자 원수(元帥)에게 청하여 그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전단량(旃檀梁)【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加羅) 말로 문(門)을 양(梁)이라 했다고 한다.】으로 들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뜻밖에 군사가 쳐들어옴을 보고 놀래어 막지 못하였으므로, 대군이 승세를 타서 드디어 그 나라를 멸하였다. 군사가 돌아오자, 왕은 공을 책정하여 가라(加羅) 사람 300명을 사다함에게 주었다. - 《삼국사기》 사다함 열전
위의 내용은 위서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전략)개국(開國) 11년(561)…양화공주(兩花公主)가 죽었다. 왕위를 이은 임금 도설지가 야녀(野女)인○○, 월광(月光)과 더불어 영토를 다투어 야인(野人)을 많이 거느리고 왔다. 제(帝)가 태종공(苔宗公)에게 명하여 진압하도록 하였다. 사다함이 선봉이 될 것을 청하였으나, 제(帝)는 사다함이 어리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다함은 사사로이 낭도를 거느리고 몰래 갔다. 금진이 설성에게 "당신은 무품(無品)인데 여러 차례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이때에 나의 아이를 지켜 주지 않으면 나의 남편이 아니다"하니, 설성이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하였다. 이에 (설성은) 사다함의 휘하에 나아갔다. 야인을 대파하니 제(帝)가 기뻐하며 사다함을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삼았다. 그 때 (사다함의) 나이가 16살이었다. 정병 5천을 거느리고 전단문으로 달려들어가 백기를 세웠다. 가야○○ 그 성을 ○○하고 도설지와 야녀를 사로잡았다. ○○군이 계속하여 이르러 가야군을 대파하였다. 공으로 전(田)을 내려 주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포로로한 생구(生口)는 모두 풀어 주어 양인(良人)으로 만들었다.(후략) -《화랑세기》 4세 사다함조.
간단하게 표현하면 "진흥왕이 이사부랑 사다함 보내서 가야군 다때려잡고 왕잡고 반파국 멸망 시킴ㅋ"라는 것. 그 외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3 기타
이뇌왕의 아들인 월광태자(月光太子)와 동일 인물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도설지왕의 도설지(道設智)라는 이름이 달지 즉, 달(月)이라고 발음 되기 때문.[6] 월광태자가 10세손으로 기록되어 있고, 도설지왕은 16대 왕이라고 기록 되어 있지만 10을 16으로 잘못 기록하였거나, 10대는 직계이며 16대라는 수를 왕계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월광태자와 동일인이라고 가정한다면 반파국의 왕은 총 10명이며 도설지왕은 10대왕이 되어야 한다.[7]
4 관련 항목
- ↑ 참고로 《삼국유사》 권1 기이 진한편에 나온 바로 "신라인들 방언에 신라인들의 방언에 탁(涿)을 읽을 때 도(道)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고 쓰고, 량(粱)을 도(道)라고 읽는다."라고 기록 되어있다. 따라서 신라와 비슷한 언어를 가지고 있던 가야에서도 "도설지"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 ↑ 대가야
- ↑ 다른 한명은 창업주인 이진아시왕.
- ↑ 【】항목은 원문에 기재된 각주다.
- ↑ 창녕진흥왕순수비의 정식명칭
- ↑ 어미에 붙는 지(智)는 마한어에서 "~님"이라는 존칭사다.
- ↑ 그런데 연대 상에 문제점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16대 520년으로 되어 있는데, 도설지왕과 월광태자가 동일인물이라면 10대 520년이 되는데, 대가야왕의 평균 재위기간이 금관가야와 같이 비정상적으로 늘어지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