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멜다 마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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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남편이 반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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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으음~유단시타네~

이멜다 마르코스(Imelda Romuáldez Marcos, 1929년 7월 2일 ~ )

지금도 최악의 독재자로 불리는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부인으로써 한때 장관직과 마닐라 시장직을 역임하면서 필리핀의 재정을 거덜내는데 일조했고 그러면서도 현직 하원의원이면서 기업가이다.

필리핀 국민들은 "마르코스는 용서할 수 있어도 이멜다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수. 사실상 마르코스를 최악의 대통령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1 초기 생애

그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11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리 성공적인 삶을 산 인물은 아니었으며 돈 문제로 인해 가정불화도 빈번했기에 그리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자라면서 굉장한 미인이 되었고 말솜씨도 매우 좋은 편이라서 인기가 굉장히 많았다. 마닐라에 유학할 당시 늘 곁에 남자들이 졸졸 따라다녔을 정도였으며, 특히 25살 때에는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예뻤다고 한다. 그래서 미스 마닐라에 도전해서 1등은 못했지만(...) 뮤즈 오브 마닐라로 선발되어서 그것을 바탕으로 상류 사회에 진입하게 되며 상류 사회에서도 상당한 유명인사가 되었다.

2 마르코스와의 만남

둘은 파티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멜다에게 마르코스는 한눈에 반해버렸다. 문제는 마르코스는 이멜다에 비해서 외모나 키가 그닥 잘난 것도 없었고[1] 무엇보다도 마르코스는 이멜다보다 12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이멜다는 마르코스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마르코스는 이멜다와 결혼하기 위해서 기이한 행동을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매일 매일 이멜다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내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멜다는 아래 서술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사치욕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11일 동안 무려 11개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았는데도 마르코스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마르코스는 프로포즈를 한 끝에 이멜다와 간신히 결혼했는데,[2] 당시 마르코스는 이렇게 프로포즈를 했다고 한다. "이멜다, 언젠가 대통령의 부인이 될 생각은 없어요?"

3 필리핀 대선 당시의 활약

이후 마르코스가 대통령을 목표로 하자, 이멜다도 이를 위해서 열심히 뛰어 다녔다. 이 때 당시의 행적은 이후의 막장행각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정도로 완전무결한 내조의 여신이자 현숙한 귀부인이었다. 우선 선거 유세현장에서 연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남편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그리고 저명인사들의 부인들의 모임을 조직해서 선거 자금을 마련했고, 성대한 연회를 열어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서 마르코스의 지지율을 높여나갔다.

게다가 미스 마닐라였던 사람이 마르코스의 당선을 위해서 필리핀 전국을 누비고 다니기까지 했다. 지방을 방문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지방으로 가거나, 고무보트까지 타면서 지방으로 내려갔고, 거기서도 흙을 다 묻혀가면서 모내기를 하거나 농사를 도왔다. 이런 일들을 수천 개의 섬들을 왔다갔다하면서 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결국 1965년에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마르코스는 이멜다에게 "내가 얻은 표의 3분의 1은 당신의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엄령 선포 전까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그럭저럭 퍼스트레이디 직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듯 했다. 그러나 남편의 2기 재임기부터 점차 끼가 나타나더니 계엄령 선포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포텐이 터지게 되었다. 아멜다는 계엄령 선포기간 동안 보건복지부 장관직과 마닐라 시장직을 지냈으며 그 기간 동안 남편과 함께 필리핀의 국가재정을 횡령하거나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쓸모없는 사치성 사업을 벌여서 필리핀을 말아쳐먹었다.

4 충격과 공포, 인류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의 사치

4.1 이멜다의 방에서 발견된 물품

흔히 이멜다 마르코스가 사치스러운 사실은 알지만 얼마나 사치스러운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풍문으로 나도는 이야기나 그것들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게 정말로 사실이다. 아니, 알려진 이야기가 훨씬 더 진실보다 더 축소된 이야기다. 사과상자 뺨을 후려칠 기세

훗날 이멜다가 마르코스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을 때 이멜다가 살던 궁 지하에는 가로 21m, 세로 21m의 커다란 방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이멜다의 사치품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당시 말라카낭 궁을 방문한 영국의 사진기자 알렉스 보위는, 궁 지하에 있는 이멜다 마르코스의 옷장 속에 쌓여있는 세계 최고급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의상과 구두, 핸드백, 그리고 장신구들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986년 하와이로 망명 당시에 발견된 이멜다의 사치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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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급 브랜드의 구두 3,000켤레. 심지어 이나 으로 장식된 구두는 기본이고, 그 80년대에 배터리를 구두에 장착해서 당시에 움직일 때마다 빛이 나오는 구두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유아용 신발
  • 수백 벌에 달하는 최고급 의상
  • 길이가 2m가 넘는 대형 거울 옆에는 프랑스 루이비통 손가방이 가득 쌓여있었다.
  • 최고가의 파티용 장갑 68켤레
  • 각종 유명 브랜드의 팬티 3,500장
  • 최고급 이브닝 가운 2,000벌
  • 최고급 검은색 브래지어 500개 심지어 방탄이 가능한 브래지어까지 있었다.누가 총 쏠게 두려웠나 보다
  • 아직 뜯지도 않은 스타킹 박스 200개
  • 최고급을 자랑하는 수백 개의 보석상자. 그 중 한 보석에는 1만 9천 달러의 가격표가 붙은 보석도 발견되었다
  • 방 한쪽에는 최고급 신상 명품 가방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는 청구서들을 조사한 결과, 이멜다는 오전에 100만 달러, 오후에는 200만 달러어치의 골동품을 사들였다고 하는 충공깽스러운 사실도 드러났다.
  • 청구서에 의하면, 이멜다는 10만 7천 달러의 이브닝 가운의 구입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 발렌티노에게는 실크드레스 6벌을 한꺼번에 주문하기도 했다(...)
  • 이멜다의 옷장에는 세계 각국의 드레스와 갖가지 색상의 의상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있는 구찌 핸드백들이 선반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 이멜다의 침대 옆에는 선반 가득하게 비디오 테이프들이 있었는데, 마닐라 영화제에 초청되어서 이멜다와 만난적이 있던 미국의 배우 조지 해밀튼 주연의 <무적의 사나이 조>도 있었다고 한다.

1986년 3월 11일 동아일보 기사 중 일부

이게 고작 한 방에서 발견된 물품이다 즉, 저 물품들만 팔아 치웠어도 필리핀 경제가 매우 좋아졌을 것이다.

4.2 사치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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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이멜다 마르코스가 살았던 말라카낭 궁
  • 이멜다가 살았던 궁의 인테리어 말라카낭 궁의 인테리어는 최고급이다. 말라카낭 궁의 바닥은 이탈리아산 대리석이며, 천장은 수정 샹들리에로 장식되었고, 욕실에는 황금으로 된 세면대가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도금이 아니라 순수하게 100% 황금으로 된 세면대라는 점이다. 그리고 침실에는 황금으로 도금한 이멜다의 동상이 있었는데, 이멜다는 자신의 황금 동상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건물 안의 거의 모든 물건들은 최고급의 명품들로 가득차 있었다.
코코넛 궁전
  • 필리핀 여행에서 유명한 관광코스인 “코코넛 궁전”이 있는데 이것이 이멜다의 사치욕 때문에 만들어졌다. 1981년 코코넛 껍질을 파인애플이나 바나나 섬유로 건축 자재로 사용해서 만들어진 로마 교황을 위한 숙소를 위한 건축물 400억 정도가 들었다.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만들어진 건물이였지만 이를 본 로마 교황은 이 궁전이 너무 화려하게 지어졌다고 판단해서 코코넛 궁전에 체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말라까냥에서 마르코스와의 국빈 만찬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를 무시하지 말라고 마르코스에게 설교했다고 한다. 물론 마르코스는 가뿐하게 씹었다
  • 마르코스 부부가 해외를 방문할 때는 전용 비행기 2대를 사용했는데, 그 중 1대는 자신들과 측근들을 태우기 위한 비행기였고, 나머지 1대는 자신의 드레스와 여행용 가방 200~300여개를 싣기 위한 것이였다. 이외에도 무엇을 가지고 다녔는지는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물품들을 싣고 여행을 다녔다.
  • 이멜다가 덥다고 바기오에 가 있을때, 파티를 할 곳이 없다면서 파티장을 지어달라고 남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게 떼를 썼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곳이 현재까지 바기오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국제 회의장인 '컨벤션 센터' 다. 한술 더 떠서 그 건물이 다 지어지자 파티를 하는데, 설탕이 모자라자 군용 헬기로 설탕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헛소문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으로 약 1만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들을 무려 수십개가 넘게 만들었다고 한다.
  •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대한 연회와 수많은 파티 그리고 특히 세계굴지의 패션쇼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물론 갈 때마다 돈을 신나게 뿌려댔다(...)
  • 뉴욕을 쇼핑할 때에는 수행원 40명이 그의 쇼핑을 보조했는데 그 때 들고 다닌 옷가방의 수가 300개가 넘었다고 한다. 하루에 한 백화점에서 1만 달러가 넘는 쇼핑을 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3]
  • 뉴욕의 최고가 호텔에 묵으면서 매일 5천달러어치의 매일 매일 주문했다.
  • 파티 용도로 뉴욕에 별도의 아파트를 구입했고, 가구 인테리어 비용으로 약 150만 달러를 지출했다. 다시 말하지만 80년대에 150만달러다.
  • 당시의 미국에서도 이멜다의 사치가 신기했는지, 미국 신문에 여러번 이멜다의 사치가 보도되었다. 특히 어느 날에는 미국 신문 1면에 이멜다가 나왔는데 그 제목이 "달러 잡아먹는 불가사리 이멜다"였다고 한다. 근데 이멜다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좋아했으며 그 신문 1,500장을 복사해서 주변 지인과 필리핀 사람들에게 뿌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신문기자들이 “이거 영부인님 비난하는 기사인데요?” 했더니 그제서야 알아보고 황급히 복사를 취소시켰다고(...)
  • 뉴욕에서 500만 달러어치의 관광여행을 했다.[4]
  • 새로운 해변에 리조트를 조성한답시고 호주산 모래를 비행기로 실어 날랐다.[5]
  • 맨허튼에 있는 건물들을 사들이는데 1억 2천만 달러를 쓰기도 했다.[6]
  • 이멜다는 부동산 투자를 좋아했는데 일단 무조건 땅을 사놓고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그 부지를 재개발한 다음 땅값을 비싸게 팔거나, 해외에 수많은 부동산들에 투자했는데 은닉시킨 재산은 약 10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한국으로 따지면 10조원의 금액이며 그 중에서 대부분의 부동산은 미국의 부동산이였다.
  • 이멜다 마르코스는 자신의 51번째 생일에 자기 생일을 축하한답시고 동물원을 하루동안 무료로 개방했고, 상인들이 파는 생활필수품 사실상 모든 필리핀 물품들의 가격을 10%씩 인하해서 팔도록 명령했다. 물론 상인들은 그 할인 가격 다 고스란히 자기가 뒤집어 썼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멜다가 모든 버스 운전사들에게 무료로 운행을 하도록 명령하자, 열 받은 운전사들이 운전을 거부하여 수많은 필리핀인들의 출근길이 막혀버리는 대혼란 상황이 발생했다.[7]
  • 하와이에서 망명 중일 때 이멜다 마르코스는 영국의 데일리 메일 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3천여 켤레의 구두를 수집한 것은 필리핀산 제품의 판매촉진을 위해서지 자신이 사치광이나 쇼핑광이라서 그런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신발은 필리핀 최대 수출품 중 하나이며 내가 갖고 있던 신발은 모두 필리핀 제품이었다, 퍼스트레이디로서 필리핀 산 제품의 판매를 촉진시키는 것은 나의 의무”라고 주장했다.[8]
  •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해서 묻자 이멜다 가라사대 “탐욕은 자선이다, 모든 이들에게 나눠 주려면 일단 탐욕스럽게 모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눠준 적이나 있나요?

진정한 의미의 낙수효과. 하지만 낙수효과가 자국이 아닌 외국에서 나타났다는게 문제.

5 이후 행각

어쨌든 이렇게 필리핀을 말아먹었으니 1986년 민주화 혁명 이후로 필리핀에서 하와이로 사실상 쫓겨나다 시피했고 당연히 위에 해쳐먹은것만으로도 돌아올 자격이 없었지만 1991년 필리핀 대법원의 사면을 받았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필리핀에 귀국하게 된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234만표의 득표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고 1993년에 부패혐의로 기소되었다가 1998년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뭐? 위에 나와있는 것만 봐도 수십억 달러는 거뜬하게 횡령해보였는데 이게 뭔소리야?

그리고 1995년 총선에서 자기의 외아들과 함께 총선에 출마하였고 아들은 상원의원 자신은 하원의원에 당선됨으로서 성공적으로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아멜다 컬랙션이라는 브랜드를 차렸는데 기업가로도 대성공하여 영부인 시절 못지않게 돈을 왕창 끌어모았고(...) 거기에다가 자기의 딸을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로 당선시킨 덕택에 현재까지도 잘먹고 잘살고 있다 그래도 다행히 2010년에 베니그노 아키노 3세[9] 대통령이 되면서 부정축재한 재산에 대한 환수작업이 진행되고 있기에 조금씩 재산이 줄어들고 있다.

2016년 총선에서도 일로코스 노르테 2구에 출마해서 99.0%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딸도 노르테 주지자에 여전히 당선 답이 없다 그의 아들도 부통령에 출마해서 선거직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해서 무난하게 부통령에 당선될듯 했지만 개표 중후반들어 여당인 자유당 루니 로브레도 후보에게 역전당하는 바람에 낙선되었다고 그럼에도 표차가 20여만표 차이로 적게 나온데다가 최종개표결과가 나오기 전이라 한바탕 후폭풍이 불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멜다의 이런 행적은 팻보이 슬림토킹 헤즈데이비드 번 합작으로 Here Lies Love라는 록 뮤지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 외모는 봐도 알 정도니 이하 생략. 이멜다의 키가 172cm이었는데 마르코스는 170cm이었다.
  2. 도서 <이멜다 마르코스>
  3. 당시가 80년대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에는 엄청난 금액이다.
  4. 2013년 2월 3일 the Asian지 뉴스 중 일부
  5. 2013년 2월 3일 the Asian지 뉴스 중 일부
  6. 2013년 2월 3일 the Asian지 뉴스 중 일부
  7. 1980년 7월 3일 경향신문 중 일부
  8. 1986년 4월 14일 동아일보 보도 중
  9.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과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 어찌 보면 악연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