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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경기도 교육감 | ||||
14~15대 | → | 16대 | → | 17대 |
김상곤 | → | 이재정 | → | 현임 |
李在禎
1944년 3월 1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종교인, 정치인이다. 현재 제16대 경기도 교육감.
2 생애
2.1 초년 시절
1944년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성공회 신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천으로 귀향하여 중학교 진학을 못한 학생들을 위한 무상 중등교육과정 (관인)신명학원을 설립하여 3년 간 운영하였다. 그 후 1965년 고려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김진만 교수의 강력한 권고로 성공회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대한성공회 성 미가엘 신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72년 대한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 유신반대 투쟁에 참가하면서 교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교회와 사회위원회 및 인권위원회 임원 그리고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의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주화와 사회정의 그리고 인권회복을 위한 활동에 헌신하였다.
1982년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강화교회 목회를 마치고 캐나다로 유학하였다. 캐나다 매니토바 대학교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토론토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2 교육자 시절
1988년 귀국 후, 천신신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한편으로 1989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열린 남북교회 및 세계교회대표들이 참석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협의회 참석을 시작으로 워싱턴, 토론토, 도쿄 등지에서 열린 기독교계의 남북회담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성공회대학교가 설립된 후, 성공회대 학장을 거쳐 성공회대학교 초대 및 2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신영복, 조희연 등과 함께 성공회대학교를 한국의 대표적 진보대학교로 키워냈다.
2.3 정치인 시절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정계 입문하여 2000년 새천년민주당이 창당되었을 때 초대 정책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제16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교육위원회 간사로서 교육 개혁과 정치 개혁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의 유세연수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2003년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는 총무위원장으로 역할을 하였다. 이때 한화 김승연 회장에게서 10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노무현 진영에 전달한 것이 2004년에 밝혀져 구속되었다.[1] 어쨌든 개인 축재를 위하여 받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법원에서는 벌금형으로 선처하였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한화측과 영수증 발급을 논의하지 않은 점으로 미뤄 불법 자금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으로 보이지만 적극적으로 먼저 요구하지 않았고, 내용 확인도 안하고 바로 당에 전달한 사실과 피고인이 사제 신분이고 정치를 그만 둔 뒤 봉사 활동에 전념하고 있어 원심 판결전 구금일수 50일로 벌금형을 대신하도록 한다"고 밝혔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사면을 받았다.
2004년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수석부의장을 역임하였고, 2006년 제33대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2]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중단되었던 남북장관급 회담을 재개하는 한편, 남북철도를 개통하고 열차 시험운행은 물론, 남북열차정기운행을 이룩하는데 주무 장관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2007년 10월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및 10.4 남북 공동 선언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남북정상회담 준비 기획단장으로 정상회담의 준비과정부터 정상회담 진행과 배석 및 정상회담의 후속조치에 이르기 까지 전반적인 실무를 책임지고 총괄하였다. 장관 재임 기간 동안 남북관계는 모든 기록을 경신하여 정동영 지못미 금강산 관광, 개성관광, 개성공업지구의 활성화와 남북경협의 확대 등 모든 분야에서 큰 진전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2009년 노무현 사망 후에 결성된 국민참여당의 초대 당 대표를 역임했다.[3] 그러나 통합진보당으로 대통합이 된 이후에는 통합진보당 고문으로만 남아있다가 부정경선 사태 이후 탈당했다.
2010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참여당 소속으로 충청북도 도지사 후보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시종 후보와 단일화하여 사퇴하였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교육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후보 중에 조전혁도 있었다.
정치활동과는 별도로 노인들을 위한 자서전 집필 및 장례식장에서의 조문보를 작성하는 협동조합 은빛기획의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2.4 교육감 시절
교육감에 취임하자마자 상당히 많은 개혁작업을 하고 있다.
첫 번째로 9시 등교를 공식화했다. 9시 등교에 대해서 찬반논란이 있었지만 일선 학교에서는 꽤나 괜찮은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
두 번째로 교원임용에 있어서 차별화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수업나눔과 집단토의는 경기도 교육청에서만 실시하는 방식으로 그동안 단편적인 면접과 수업실연만 있었던 임용 2차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세 번째로 2017년부터 야간자율학습을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야간자율학습이 야간강제학습, 야간타율학습이라는 우스개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파행적으로 운행되었던데다 이미 경기도에서는 야간자율학습 참가율이 10~20%에 머물 정도로 사실상 폐지된 상태인지라 이를 공식화하고 대신 예비대학 교육과정을 신설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