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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p5muqm.jpg
당시 선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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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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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대선 만2년 전의 2000년 연말 한겨레21 커버스토리 기사 # 출처

대한민국 선거 사상 최초로 역전승이 나온 선거[1][2]

노풍(盧風), 대세론을 뒤집다.[3]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2002년 12월 19일에 실시 되어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선거과정이 드라마틱한 역전승으로 자주 회자된다.

2 배경

공식적인 대통령 선거 일정이 시작되었을 당시, 대통령 선거 후보군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한 한나라당의 대표 이회창과,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에서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된 노무현이었다. 한편 정몽준월드컵 열기와 더불어 지지율 상승으로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3 과정

3.1 새천년민주당경선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를 썼던 대역전의 경선 과정을 담은 영상이다. (4분 26초부터)

새천년민주당은 지금까지 당원들만이 참여했던 대통령선거 후보경선을 최초로 "국민 참여 경선" 형식으로 바꾸었다. 당원 : 일반국민의 비율을 50:50으로 하여 2002년 3~4월 동안 각 광역자치단체를 순회하여 선거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인제[4], 정동영, 김중권[5], 김근태[6], 한화갑[7], 노무현, 유종근[8] 후보가 입후보했으며, 이른바 각본없는 16부작 정치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간의 주목을 끈다.

경선 시작 전에는 이인제가 대세였다. 무엇보다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거물급 정치인인데다가,[9]경기도지사 시절의 행정가 이미지가 여전히 강했기 때문.이후 피닉스로 활동

그 아래로 새천년민주당 창당 이래 정권의 신주류였던 김중권, 전통적인 당 주류 인사 한화갑과 MBC 앵커 시절 인지도가 강한 소장파 정동영이 3중을 이루는 1강 3중 형세였다. 그러나 경선이 시작되자 노무현이 "영남 후보론"과 "이인제 정체성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노무현의 지지도 역시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김근태가 폭탄 하나를 떨어트렸는데, 자신이 정권 실세인 권노갑 의원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권노갑의 지원을 받던 이인제의 조직이 위축되어 버린 것. 비록, 김근태는 그 역풍을 맞았지만 이것이 젊은 야권 지지층 사이에 정치개혁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면서 反권노갑, 反이인제 정서가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 첫 경선지역인 제주도에서는 한화갑 175표로 1위, 근소한 차이로 이인제가 172표로 2위를 거뒀으며, 노무현, 정동영이 3/4위권을 이뤘다. 사실 제주도는 한국 대선에서 일종의 아이오와 코커스 격인 지역으로 여겨졌지만, 이 경우는 예외라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제주도가 전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한화갑 의원 지역구와 가깝기도 하고...
  • 두 번째 지역인 울산광역시에서는 노무현, 김중권 두 영남권 후보가 1, 2위를 기록했고, 이인제가 3위로 따라붙었다. 이 경선이 끝난 직후 김근태, 유종근 후보가 사퇴한다.
  • 세 번째 지역이었던 광주광역시가 최대의 분수령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에서 어떤 후보가 나오더라도 이회창을 이길 수 없는 것으로 나왔으나, 광주 경선 직전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vs 이회창 양자 구도에서 노무현의 지지율이 앞서는 결과가 나온 것. 이로 인해 노무현 바람, 이른바 노풍(盧風)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대세론의 주인공 이인제도 아닌, 호남권의 한화갑, 정동영도 아닌 영남권 후보 노무현이 광주에서 1위를 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와 함께 총 득표수에서도 노무현이 1위로 앞서나가게 된다.


광주광역시 민주당 경선 발표 동영상이다. 노무현의 승리가 선언되자 2분 27초 쯤에 "한 마디로 파란입니다!"라고 코멘트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덧붙여 노무현의 지지세력과 기성 민주당의 문화적안 괴리감도 보인다.

  • 네 번째, 다섯 번째 지역이었던 대전광역시충청남도에서는 충남권 기반의 이인제가 노무현에 비해 4~5배의 득표율의 큰 표차이로 1위를 거두고, 총 득표수에서도 다시 1위로 앞서나간다. 한편 광주에서 떡실신당한(...) 한화갑은 대전 경선 직후 사퇴. 참고로, 이 사람은 리틀 DJ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로, 김대중의 비서 출신으로 옆에서만 무려 40년을 같이 지내왔던 인물이다. 김대중과 더불어서 호남의 가장 큰 맹주였던 인물인데, 아무래도 전라도, 그 중에서도 전남의 심장, 광주에서의 패배가 전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던 한화갑 후보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터라...
  • 여섯 번째 지역 강원도는 대전/충남에서 다시 힘을 받은 이인제 대세론과 위기를 맞은 노풍이 맞붙는 두 번째 분수령이 되었다. 여기서는 630 : 623, 단 7표 차이로 노무현이 1위를 차지했다. 강원 경선 직후 같은 영남권 후보인 김중권이 사퇴를 선언하면서 노풍은 더욱 탄력을 받는다.
  • 이후의 경선은 영남지역을 기반으로 노풍이 계속 탄력받는 구도가 유지되었다. 경상남도,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에서 노무현은 이인제를 더블스코어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고 인천광역시와 정동영의 지지기반인 전라북도에서도 노무현은 근소한 차이로 1위를 거두었다. 12번째 지역 충청북도에서 이인제가 더블스코어 1위를 거두면서 역전의 실마리를 잡았으나, 13번째 지역 전라남도에서 노무현이 트리플스코어 1위를 차지하면서 뒤집어버리자(...) 결국, 전남 경선 직후 이인제는 결국 사퇴하게 된다.
  • 남은 두 후보 노무현, 정동영은 마지막 지역인 부산광역시, 경기도, 서울특별시를 모두 완주했다. 정동영이 경기에서 1위를 하는 깜짝 선전을 보여줬으나, 부산/서울 경선에서 노무현이 크게 앞섰으며, 이전 경선에서 이미 벌어진 표차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실 이 때의 정동영 1위는 이미 후보 결정된 김에 완주해 주는 후보한테 한번 1등 시켜주자는 분위기 덕분이기도 했다.

결국 2002년 4월 27일 서울 경선 직후 노무현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여담으로, 15대 대선 이후 공동여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는 3월 29일 내각제 실현을 위해 다시 한 번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으나 #기사 이후 "내각제 추진 후보 돕겠다"로 변경하면서 # 기사 결과적으로 일종의 립서비스로 확인되었다. # "난 아직 죽지 않았다."

3.2 한나라당의 경선

한나라당에서도 새천년민주당과 같은 국민 참여 경선제도를 도입했고, 이회창, 최병렬[10], 이상희[11], 이부영[12] 후보가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경선은 비교적 싱겁게 이회창 후보의 압승으로 끝난다. 울산에서 최병렬에게 근소하게 진 것, 전남-광주-전북에서 이부영에게 더블스코어로 이긴 것을 제외하면 모든 지역에서 최소 트리플 스코어로 1위를 차지했다. 이미 대선에 한번 도전해봤던 경험, 당 대표를 맡은 이후 당 개혁을 주도했던 경력, 그리고 "대쪽 판사, 대쪽 총리"의 이미지와 인지도가 워낙 굳건했기 때문에 이미 대선 후보로 사실상 내정되었던 분위기였고 다른 후보들이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13]

1998년 재보궐 선거로 정계에 등장한 박근혜 의원은 2월 28일 탈당하여 4월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고 독자행보 혹은 이인제-정몽준-김종필 등과의 연대를 모색했으나 #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14] #2002년 어록

3.3 선거 구도

각 당에서 후보가 결정된 이후 선거 초기에 노무현 후보가 앞서는 듯했으나 얼마안가 YS시계사건, 김홍업 사건으로 지지율이 상당부분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선거일이 포르투갈전 하루 앞인 6월 13일에 치러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투표율이 낮게 나오면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압승하여 노무현 후보에게 타격을 주었다.[15]

한편, 정몽준[16]후보가 월드컵 유치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선주자로 떠올르면서 대선구도는 이회창 후보가 가장 앞서나가는 형태가 되었고 노무현 후보는 3위로 가장 뒤쳐졌다. 그리고 8.8 재보선에서도 새천년민주당이 패배하면서 이회창이 승기를 굳히는가 싶었더만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이 불거졌다. 게다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노사모[17] 등의 영향력이 새롭게 떠올르면서 다시 지지율이 오르기 시작했다.

대선은 1강 2중 구도가 되었지만 여론조사에서 정몽준-노무현 양자 단일화 시에는 이회창을 꺾는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단일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민주당 주류의 김민석이 단일화를 성사시키고 당으로 돌아오겠다며 정몽준 캠프를 지원하러 갔고 당내 상당수의 세력은 후보단일화협의회를 결성하며 단일화를 압박하기에 이른다. 구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1강 2중으로 정몽준과 노무현이 팽팽한 것처럼 표현되었으나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대세 상승 중이었기 때문에 후단협 세력은 사실상 당내 후보를 비토하는 정몽준 지지세력이나 다름없었고 노무현의 당내 입지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또한 단일화 여론조사에서도 지속적으로 정몽준이 노무현에 근소우위를 보임에 따라 상황은 여러모로 정몽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당내의 차가운 외면이 대중들에게는 절차적으로 정당하게 선출된 공식 대선후보를 부당하게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노무현의 지지율도 반등하게 된다. 단일화 협상이 진통 끝에 포장마차에서 정몽준과 노무현이 소주 러브샷을 나누는 상징적인 제스쳐 이후에 3개 기관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단일화를 합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고 공식 후보등록일에 임박하여 후보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가 진행이 된다. 단일화 여론조사 중 일정 수준의 이회창 지지율이 나오지 않은 것은 한나라당 지지자의 역선택이라고 판단하여 배제하기로 한 사항까지 합의가 되었고,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이 정몽준을 앞서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노무현이 단일후보가 된다.

정몽준 측은 고심 끝에 결과를 승복하기로 하였으며 노무현의 서울 유세현장에 동행한다. 그러다 선거전날 명동 유세가 발단이 되어 정몽준은 노무현 지지철회 및 단일화 파기를 발표한다. 당시에는 정몽준 측이 지지철회 사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논란이 되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정몽준 측이 내각 구성에 일정한 지분을 요구했는데 노 캠프 측에서 확답이 없어 불만이 쌓이던 중 선거운동 마지막날 명동 유세에서 서갑원의 제안으로 추미애, 정동영 등이 유세차량 단상에 올랐고 노무현이 이들을 차기, 차차기 대권주자로 소개한데다가 정몽준을 향해 재벌개혁에 동참할 뜻이 있냐고 물으면서 정몽준 측의 심사가 완전히 뒤틀려버렸다는 것. 정몽준 측에서는 유세차량 내에서 양자만이 유세하기로 한 단일화 합의사항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민주당 측이 선거운동 마지막날이기에 안일하게 생각해서 일을 벌였고 정몽준은 유세 후 이어진 회식에서 측근김흥국들과 대화를 나누며 결심을 굳히고 쾌속으로 지지철회를 발표하게 된다.

비록, 선거 전날 정몽준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지만 결과적으로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오전에는 한나라당 지지층이 우세했으나 오후의 인터넷 및 핸드폰 문자 투표독려에 따라 젊은 층의 물량공세(...)로 전세를 뒤집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선거관련자에게 전설로 회자되기도 한다[18]. 노 대통령은 당시 출구조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축하를 받은 직후 "확정되면 깨워주게"하고는 한숨 푹 잤다는 패기를 보였다.(...)

사실 대선 하루 전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가 어떤 영향을 불러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민주당 지지자들의 결집과 무당파층의 표를 불러와서 노 후보가 승리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왜냐하면 지지 철회 소식을 들은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의 집앞으로 찾아가 문전박대와도 같은 상황을 당하는 장면이 대선 전날 방송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당시 이 장면에 울컥해하거나 안쓰러워서 무당파층도 노무현 찍으러 투표장에 갔단 사람들도 있었다.[19] 반면 원래 노 후보가 이 후보에게 5~6% 정도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노 후보 쪽에 악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판세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선거에서 지역구도는 대체로 완화된 대신 세대구도가 강화되었다. 또한 이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 권영길후보가 약 100만표(3.9%)를 득표하면서 3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는 조봉암 이후 진보 정당의 대선후보가 얻은 가장 높은 득표수였다. 당시 3자 구도로 이루어진 대선후보 TV토론에서 권영길 후보는 그 유명한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기면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대선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노동당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3.2%의 정당득표율로 총 10석을 획득하면서 오랜 원내진출의 숙원을 이루게 된다.

3.3.1 개표 과정


[20]

개표 과정이 하나의 드라마라고 불릴 정도로 뜨거웠다.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출구조사에서 약간(KBS-미디어리서치 노무현 49.1% 이회창 46.8%, MBC-코리아 리서치 노무현 48.4%, 이회창 46.9% SBS-TN소프레스 노무현 48.2% 이회창 46.7%) 앞선 걸로 나왔다.

하지만, 부산광역시 동래구를 시작으로 개표가 시작되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여유있게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개표 30%가 될 때까지 한나라당측은 환호, 민주당 측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예측과 달리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50%를 넘는 우세를 계속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 즉 수도권 지역의 개표가 시작[21]된 개표 32% 쯤에 상황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표 32~36% 구간에서 투표함 하나를 깔 때마다 1위가 뒤바뀌는 숨막히는 개표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수도권 지역의 개표가 더 빨라진 개표 40%부터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차는 10만표 안팎으로 크지 않았는데, 수도권을 뺀 나머지 지역의 개표가 마무리가 되기 시작한 개표 70%부터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여유있게 따돌리고 앞서나가면서 당선되었다.[22] 실제로,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표차가 57만표 정도인데 수도권에서만 벌어진 표차가 72만표였다.

4 결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기호후보명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선유무
1이회창한나라당11,443,29746.6%2낙선
2노무현새천년민주당12,014,277[23]48.9%1당선
3이한동하나로국민연합74,0270.3%4낙선
4권영길민주노동당957,1483.93%3낙선
5김영규사회당22,0630.1%6낙선
6김길수국태민안호국당51,1040.2%5낙선
7장세동무소속---기권
선거인수34,991,529투표수24,784,963
무효표수223,047투표율70.8%
500px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48.9%를 기록하면서 당선되었다.

5 한나라당의 대선 불복과 재검표

선거 직후 한 온라인 게시판에 국정원에서 17년간 근무한 중견간부라고 자신을 밝힌 이가 개표 조작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빙자한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다. 이는 사칭으로, 특수학교 교사로 밝혀졌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노무현의 표로 분리된 표 사이로 이회창의 표가 들어갔다는 것이나, 전자개표기의 오작동, 개표부정의 가능성 등의 내용이었다.

그 후 이회창 후보의 팬클럽인 창사랑과 당원 200여명은 캠프 해단식을 점거하는 등의 항의시위 및 항의전화를 지속하였고, 한나라당이 이에 동조하여 결국 서청원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12월 24일 의원ㆍ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를 통해 '전자 개표 조작설'의 검증 작업을 하기로 결정, 선거무효소송을 내었다. 이에 2003년 1월 27일 전국 244개 개표소 가운데 40%인 80여 곳에서 대법원 관리 아래 헌정 사상 초유의 대규모 재검표(1,104만 9,311표)가 이루어졌다. 이 재검표에는 5억원의 비용과 8,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재검표 결과, 이회창 후보의 표는 88표 늘었고, 노무현 후보의 표는 816표가 줄었다.

결과적으로 격차인 28만6천표에 훨씬 미달하는 0.00008%의 차이로 선거 당락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재검표 결과가 이렇게 나오면서 한나라당은 소를 취하했지만 톡톡히 망신을 사며 대국민 사과를 해야했고, 서청원 대표도 사퇴했다.

흥미로운 것은 10년 뒤인 18대 대선에서는 이렇게 선거불복으로 피해를 본 새천년민주당의 후신인 민주통합당의 일부 지지세력들이 선거 직후 부정선거 의혹을 내세우며 수개표를 주장했다는 것. 다만 문재인 후보나 당 자체(후신인 민주당(2013년) 포함)는 승복했다. 한편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은 2013년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에 대해 야당측에서 언급만하면 바로 득달같이 대선불복이냐며 NLL 대화록 논란을 꺼내버렸다. 여러모로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의 산실이 되었다.

6 병풍 논란

지난 대선과 마찬가지로 이회창 후보의 두아들이 체중 미달을 받은것이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 김대업이라는 전직 부사관이 튀어나와 체중이 조작된 허위 진단서를 받아 병역 면제됐을수 있다고 주장하여 사건이 확대되었다. 수사결과, 검찰 측은 대선 두 달전 진단서 조작의혹이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체중고의감량을 통한 면제 의혹은 여전히 남아 이회창 후보에게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이회창 지지자들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김대업 때문에 이회창이 대선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한나라당은 정식으로 재판을 청구하였고, 2005년 5월 대법원은 김대업과 오마이뉴스 대표 오연호 등이 지급해야 할 배상액을 확정함으로써 이 사건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2002가합40574 참조,

자세한 내용은 병풍에서 볼 수 있다.

7 특이사항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은 1948년 제1대 대통령 선거부터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까지를 모두 포함해서 최초이자 유일한 현역병[24][25]출신 대통령이었다.
  •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에서 연속하여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사례가 되었다.
  • 인터넷이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준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노사모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20~30대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넓혀나갔고, 인터넷 커뮤니티와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통한 투표독려는 IT기기에 익숙한 젊은 층, 즉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이대의 유권자들이 결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국 노무현이 당선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 3당 합당이후 보수화된 부울경에서 노무현은 민주당 간판으로 30% 내외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선전을 했다. 직전 대선 때와 비교하면 울산 15% → 35%, 부산 15% → 30%, 경남 11% → 27%로 2배 이상 증가하였는데 전국적인 표차를 감안하면 부울경에서의 선전이 당락에 꽤 영향을 미친 셈.[26][27] 그리고 또 다른 민주당 약세 지역인 강원도에서는 무려 40%의 득표율로 선전하면서 지역감정 타파에 어느 정도 공헌한 것으로 평가된다.[28] 참고로 이 때부터 17대 대선을 제외하곤 부울경과 대구경북의 득표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29] 총선에서나,대선에서나,지방선거에서나
  • 또한 최전방 지역인 옹진군(인천), 강화군,강원도 북부 (철원군, 양구군)에서 각각 38%, 40%, 48%, 47%를 득표해 민주당계 후보가 받은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했다.[30]
  • 이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참여한 후보들은 이후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경험한다. 이인제 전 장관은 피닉제 알다시피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 다양한 정당을 거쳐서 신한국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으로 돌아갔고(2012년 10월), 한화갑 전 의원 또한 탈당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면서 민주당과의 연을 끊었다. 정동영 전 장관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다시 17대 대선에서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재구성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가 되었으나 참패한 뒤 재보궐 출마를 위해[31] 민주당을 탈당했고, 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을 거쳐 2015년 1월 탈당하여 2015년 재보궐 선거에 출마, 낙선하고, 이듬해 국민의당에 입당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했으나 당내 압박 끝에 임기중 열린우리당을 탈당(2007년)하여 사망시까지 당적 없이 생활하였으며, 김중권유종근 전 의원은 무소속으로 총선 출마를 거듭한다.[32] 김근태 전 장관도 다른 민주당계 정치인들이 그랬듯 을 반복하다 민주통합당이 창당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2011년 12월)
  1.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에는 이회창이 대통령 될것이라고 거의 100퍼센트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럼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 7개월 재임이라는 단기 경력 외엔 주요 경력이 부재했다. 사실 대법관-중앙선관위원장-감사원장-국무총리-야당 총재를 두루거친 이회창 후보에 비하면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거론되었던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는 줄곳 이인제 당시 최고위원이었다.
  2. 다만 기준점을 정식 후보 등록 시점으로 잡는다면 이 또한 역전은 아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이뤄진 시점부터 노무현은 줄곧 여론조사 1위였기 때문. 97년 대선 이후 후보 등록 시점 여론조사 1위가 선거에서도 이긴다는 건 대한민국 대선에서 거의 법칙처럼 적용되어 왔다.
  3. 물론 당시 가장 큰 대세론은 이회창 대세론이지만, 새천년민주당 내의 이인제 대세론까지를 포함하며, 부분적으로는 단일화 과정에서의 정몽준 대세론 역시 포함한다.
  4.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뒤 국민신당을 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로서 강력한 인지도로 '이인제 대세론'을 이끌었다. 훗날 "피닉제"로 개그요소로 전락한 시기와는 위상이 전혀 달랐다.
  5.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출신으로 김영삼 집권 이후 정계 은퇴했다가 김대중의 회유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과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맡았다. 당시 노무현과 함께 영남권 후보로 분류되었다.
  6. 노무현과 함께 거의 동등하게 여겨지던 개혁후보였으나 홀로 (다른 후보 대부분이 받은) 정치자금 수수를 양심선언하며 사퇴해버렸다. 안습. 김근태 항목의 흑역사 참조.
  7. 호남 출신으로, 당시 김대중의 가신 그룹(동교동계)으로 분류되었다. 김근태, 노무현과 연대 가능성이 있었으나 실제적으로 이뤄지진 않았다.
  8. 전북 도지사 출신.
  9.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의 낙선에 가장 큰 원인. 경선불복으로 탈당해 독자 출마하면서 무려 500만표나 분산 시켰다. 어찌 보면 김대중, 노무현 당선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인물.
  10. 마지막 관선 서울특별시장이자 4선 국회의원으로, 이회창의 정계은퇴 이후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정국을 이끌었다. 물론 한나라당이 탄핵역풍을 맞아 망할 위기에 처하자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도 못 받고 쫓겨난다(...)
  11. 변리사 출신 4선 국회의원으로 노태우~김대중 정부에서 과학기술처(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장 등 과학계에 몸담았다. 대선 출마 선언때도 '과학경제 대통령'을 내걸었을 정도.
  12. 후일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는 그 이부영 맞다. 꼬마 민주당 출신으로 한나라당 창당 당시 개혁성향 그룹으로서 참가했다. 국가보안법을 반대했으며 부총재를 역임했으나 결국 2003년 다른 개혁성향 한나라당 의원들과 함께 탈당해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 이후로도 민주당계 정당에서 몸 담고 있으며,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소속 후보로 서울 강동구 지역에 나섰다 낙선.
  13. 이런 상황은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에서 18대 대선 후보 경선 때 다시 재현된다(..)
  14. 박근혜의원은 한국미래연합이 2002년 6월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15. 당시 그는 영남에서 광역단체장 한석 이상 확보하지 못하면 당에 재신임을 묻는다고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영남에서 새천년민주당은 한석도 얻지 못했지만 재신임을 받고 그대로 대선을 진행하였다.
  16. 정주영 회장의 아들로, 한일 월드컵을 중점으로 유치를 해 당시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가 엄청 높았다. 심지어 지지율 조사에서도 노무현 보다도 높게 나올 정도니..
  17.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서 낙선 한 뒤 재보궐로 당선 된 노무현 당시 의원이 2000년 16대 총선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14대 총선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처럼 낙선했는데, 이를 계기로 결성된 지지단체이다.
  18. 영국의 가디언 지는 이 점에 주목, 당선 소식의 제목을 "World's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 로그인했다.)"으로 뽑았다.
  19. 이때 진보 정당의 권영길 후보는 다소 손해를 봤다는 의견이 있다.
  20. 화면 영상과 달리 MBC는 당선 유력을 9시 35분경, 당선 확실을 10시에 발표했다.
  21. 수도권 지역은 전통적으로 수도권 이외 지역보다 개표가 늦게 시작되고 늦게 끝난다.
  22. 참고로 SBS는 당시 개표 62.4% 시점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확실 발표와 동시에 자체적으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선언했다.
  23. 18대 대선 전까지 한 후보가 얻은 최다 득표수.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문재인 후보가 동시에 이 기록을 깼다.
  24. 장교 출신이 아닌 일반병. 장교 출신 전임 대통령들은 모두 군사반란(정변)을 일으켰기에 제대로 된 군인 취급을 받기 어렵다. 특히 전두환, 노태우의 경우에는 군사반란 및 반란수괴 유죄판결을 받아 군적이 박탈되고 이등병 취급을 받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병장이 아닌 상병으로 제대 했는데, 그 이유는 베트남 전쟁 파병 다녀온 군인들이 전부다 병장을 달고 와서 병장 티오가 다 돼서 그런다고 한다.
  25. 이승만:대한민국해방된날1945년인데, 그때 이승만은 70대다;; 윤보선: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그때 40대 후반. 박정희:장교 출신 전두환, 노태우:육군사관학교출신 김영삼, 김대중:안갔다. 노무현:갔다!! 이명박:안갔다 박근혜:여성이라 안가도 문제될건 없다.
  26. 지금이야 부울경에서 민주당 등의 야당 지지세가 만만치 않지만 저 때만 해도 민주당 간판으로는 선거비용 보전선인 15% 얻는 것조차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다른 선거도 아니고 대통령 선거에서 경남 출신 노무현이 민주당 간판을 달고 나오면서 (비록 젊은 층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지지세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것.
  27. 여담으로 노무현은 부산 유세 때 "사자는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린 후 살아돌아온 강한 새끼들만 키워준다.부산에서 여러 번 떨어뜨린 노무현이 이제 대통령 후보로 살아돌아왔으니 부산에서 키워달라."는 명언으로 부산 민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28. 강원도는 15대 대선을 제외하면 민주당 계열에 30% 이상의 지지율을 보여주었다. 민주당 계열이 40%의 득표율을 선전한 대선은 동-서간 지역 감정이 시작된 6대 대선 이후 최초이다.
  29. 왜냐하면 이 대선을 기점으로 민주당의 호남 색채가 옅어졌고,게다가 부산경남에 이주한 호남 출신 서민,노동자 + 친노 + 청년층의 증가로 인해,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세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30. 게다가 철원군, 양구군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이겼다.
  31. 이때 정세균과 큰 갈등을 겪었다.
  32. 다만 김중권의 경우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